사물이나 상황을 인식함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은 보통 수학적 판단과 역학적 판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수학적 판단이란? 인간의 지성으로 양과 질을 측정하려는 시도를 일컫는다. 예를 들면 종 소리가 세번 울렸다 라고 말할 때, 이는 양(수를 포함하여)적인 판단을 의미한다. 그러나 종소리가 세게 울렸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질적인 판단을 의미한다. 2. 역학적 판단이란? 사건이나 상황들의 관계로 설명되는 관계적 판단과 그 사물이나 상황이 나타내는 양상의 판단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이는 다시 몇 가지 종류로 세분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이러한 내용들을 다루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므로 간단한 예를 통해서 아웃라인만 살피고, 말하려는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날씨가 추워 얼음이 얼었다 라 한다면 이는 원인과 결과를 나타내는 인과성이다. 즉 추위와 얼음은 모종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한편, 날씨가 추우면 반드시 얼음이 언다 라고하면 이는 얼음이 어는 필연성의 양상이다. 이처럼 여러가지 범주로 상황과 사물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러한 판단을 성경 본문의 해석 방법에 적용해 보자. 먼저 그에 앞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이번에 삼성전자에서 5세대 스마트 폰을 출시했다는 사실을 두고 다음 세 가지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① 무신론자의 판단: 인간의 머리가 좋으니 앞으로 더 좋은 첨단 제품이 기대된다. ② 진실한 신앙인의 판단: 그러한 첨단 제품은 하느님이 인간의 지능으로 작용하시어 만든 것이니 하느님께서 만든 제품이다. ③ 이론만 신앙인의 판단: 그러한 첨단 제품은 창세기 11:7의 말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인간이 못할 짓이 없으니" 그런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①은 신을 배제하고 인간의 측면만을 고려하고, ②와 ③은 신을 인정하는 데 전혀 서로 다른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신의 존재 방식을 다르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신의 존재 방식을 초월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흔히 신화적인 방법으로 미래를 판단하고 성서 본문도 그런 식으로 헤석한다. 창세기 11:7의 말씀을 살펴 보자. 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그들이 한 백성이고 언어가 하나이므로 이런 일을 시작했구나. 이제는 그들이 하려고만 하면 무엇이든 못할 일이 없겠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그들이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③ 의 부류의 신앙인은 대부분 이와 같은 성경 본문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려고 한다. 즉 그들은 이것이 신화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므로 하느님이 인간의 일상사를 시시콜콜하게 간섭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과학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섭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구절 처럼 막을 것이라는 맹신적 믿음을 막연히 가지고 있다. 그러한 사고는 결국 하느님이 이 세상의 악을 종말 시키는 방법도 하느님의 강제적인 방법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머지 않아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②의 부류의 사람들은 인용된 성서 본문은 그 기록이 이루어질 당시의 사람들의 신화적 신앙관이므로 그 의미는 인정하되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즉 하느님이 방해해서 인간의 언어가 달라졌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인간의 언어가 여러가지로 분화된 것도 하느님의 섭리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모든 일은 근원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판단이다. 따라서 성서가 말하는 신화적 생각의 참된 의미를 고려하면, 그것은 인간의 삶의 도덕과 윤리를 강화시키는 것이며 이 사회가 자유와 평등이 이룩되는 길은 아마겟돈과 같은 강제적인 방법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이 그 선으로 악한 사람들의 악을 견디고 나아가 정복함으로써 악의 종말을 가져 오려고 해야 한다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것이 바른 역학적 판단이라 생각한다. 즉 판단의 범주로 분류하면, ③의 부류의 사람들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적 판단을 내리는 점에서는 일치하지만, 고대의 사람들이 쓴 기록이 수천년 후에 그 기록을 읽게 될 것을 예측하고 기록하였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이들은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인류가 어떤 기록을 하게 되면 수천년 후에 일어날 일을 예측해서 기록을 한다는 터무니 없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수천년 후의 사람들이 오늘날의 기록을 해석할 때는 그때의 지적 수준이 아니라, 오늘날의 수준으로 기록을 해석해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이 무엇을 발명하거나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것은 근원적으로 하느님이 하신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인간에게 해로울 때, 인간이 이성을 잘못 사용한 것이고, 유익할 때, 그 고마움은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 겸손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고자 하는 점은 인간이 이성을 바로 사용하여 유익하기만 하면 그것은 하느님이 이루신 것이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는 겸손한 태도가 필요한 것이며, 인간은 자기의 이성을 최대한 사용하여 모든 사람에게 선이 되고자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이 자연과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사족을 달자면 2023년 워치타워 연례 총회에서 처음 나온 제프리 윈터의 연설에 의하면 성령이 작용하는 방식을 사도행전 15장과 현대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 성원들에게 적용하였는데 그 내용은 성령의 작용이 환상이나 기적을 통하여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련 당사자들의 겸손한 마음과 진정한 유익을 고려해서 결정을 내리게 한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5장의 내용이 할례에 관한 것인데 성령이 직접 결정을 말로 전해 준 것이 아니고 사도들과 장로들의 자유로운 발표를 종합해서 결론을 유도하였다는 것이다. 즉 결코 초월적 방식으로 어떤 결론이 나온 것이 아니며 그것이 성령이 작용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마겟돈이라는 강제적이고 초월적인 방식을 주장하는 것은 그것이 성령의 작용방법을 상호 모순되게 주장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초월적 방식을 기대한다면 아무 것도 수행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식이 떨어져도 저절로 쌀독에 붙은 한톨의 쌀이 증가해서 독을 채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느님은 자연의 질서와 인간 사회에 내재적으로 활동하시며, 특히 인간의 이성으로 작용하신다. 우리의 이성을 잘 사용하는 것은 분명히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