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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그 길지도 짧지도 않은 목줄
정성화
사람들마다 수필을 쓰게 되는 계기가 있겠지요. 저는 남편 때문에 수필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1등 항해사일 때 결혼을 했는데, 상선을 타고 다니던 그 사람은 두 달이나 석 달 만에 한국에 들려서는 이삼일 만에 다시 출항을 하곤 했습니다. 휴가라고 해봤자 일 년에 두 달 정도였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출항하는 날 저녁이면 언제나 노트를 한 권씩 샀고, 매일 저녁 저는 그 사람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편지를 쓰고 있으면 그와 내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이 바로 제가 일용할 양식이 되었지요. 편지를 쓰는 그 일은 이별의 유통 기한을 늘리고 그리움에 대한 항체를 기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수필의 가장 큰 역할이라면 아무래도 자기 구원에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부산 외항에 정박 중인 남편의 배에 올라가기 위해 통선장(通船場)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 날은 아침부터 늦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어요.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처마 밑에서 러시아선원으로 보이는 세 남자가 쭈그리고 앉은 채 컵라면을 먹고 있는 게 보였어요. 비에 젖은 몸을 덥혀보려는지 그들은 연신 뜨거운 국물을 들이켰습니다, 그저 자신의 그릇만을 들여다보면서. 그들은 비에 젖어 떨고 있었고 저는 삶의 뒷모습이란 게 이토록 애절하고 허기진 것이었나 싶어 몸이 떨렸습니다. 마치 인생의 수업 시간에 들어와 앉아있는 기분이었지요.
구겨진 종이 한 장도 원래 제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제 몸을 가누는데, 가족을 두고 떠나온 뱃사람들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싶었습니다. 그들의 외로움과 진정성을 헤아려보고, 그들 가족의 아픔과 간절한 기원을 받아 적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문학의 밑돌을 괴고 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싶었어요. 삶의 불량스러움과 냉소까지도 연민으로 감싸 안는 게 바로 문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학이란, 화사한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나서는 나들이가 아니었습니다. 노트에 편지 몇 권 써 본 경험이나, 떠나가는 배를 향해 손을 흔들어본 경험이 많다고 해서 쉽게 뛰어들 바다가 아니었어요. 저는 저의 허약한 언어에 자주 절망했으며, 문장을 썼다 지웠다 하면서 제 자신의 한계를 매번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여전히 넘어지고 고꾸라지고 미끄러지면서 이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 도중에 생긴 상처 위로 서서히 딱지가 앉는 과정, 그것이 바로 저의 수필입니다. 수필을 쓰면서 가장 좋았던 일은 좋은 수필과 만났을 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수필이란 이런 것입니다. 삶에 대한 통찰력이 남다르고. 사물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면서, 투명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가진 글, 풍부하면서도 절제된 감성, 평이하면서도 신선한 문체, 거기에 미의식까지 갖춘 글입니다.
제가 그동안 읽은 수필론 중에서 수필쓰기에 참고가 될 만한 것들을 몇 가지 요약해 보았습니다. 좋은 수필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문장이 간결합니다. 문장은 짧으나 뜻이 깊어서 함축미와 여운을 느끼게 합니다. 간결함 속에도 문장의 기복이 들어있어서 글에 힘을 더해줍니다. 보이는 것 너머의 본질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깎아내었던 자코메티의 조각에서 느끼는 이미지처럼 말입니다.
둘째, 문장이 평이합니다. 어려운 철학적인 진리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며, 부질없이 현학적인 말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셋째, 표현이 정밀합니다. 서사나 묘사에 있어서 혼미하거나 모호한 표현이 아니고 구체적인 실감을 줄 수 있도록, 치밀하면서도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넷째, 글이 솔직합니다. 거짓이 없으며, 가슴에서 우러난 말, 실제의 체험에서 온 느낌들을 단아하고도 품위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한 제안
(1) 글의 소재
좋은 소재를 잡는 것이 수필의 7할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대개 글감이 없다고 푸념 하는데, 글감이 없는 게 아니라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지 못했거나, 해석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재를 선택할 때 주의해야할 점은
첫째, 주제를 살리는데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어야 하고,
둘째, 구체적이어야 하며,
셋째, 신빙성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넷째, 참신하여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것이어야 하며,
다섯째, 너무 전문적인 내용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수필은 미적 감동을 주는데 그 목적이 있지 지식을 전달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2) 글의 서두
글의 첫 단락이 좋아야 독자가 읽습니다. 그 글을 써보려고 생각하게 된 동기에서 시작하는 게 대체로 자연스러우며, 좋은 서두는 깊은 정서의 함축이 들어 있습니다. 윤오영은 그의 저서 <수필문학입문>에서 “안개같이 시작해서 안개같이 사라지는 글이 가장 높은 글이며, 기발한 서두로 시작해서 거침없이 나가는 글은 재치 있는 글이다.”라고 했습니다.
(3)수필의 문단
문단은 작가의 생각이 하나의 매듭으로 묶여진 단위이므로 그 생각의 덩어리가 바뀌지 않는 한 문단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한 문단 안에는 하나의 소주제만 들어 있어야 합니다. 문단이 완결성을 가지려면 부연, 예시, 비유, 요약 등의 뒷받침 문장들을 적절히 사용해야 하며, 이 때 뒷받침 문장들이 소주제문의 뜻과 무관하거나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4) 글의 균형
글의 서두- 본문- 결미의 양적 비례를 말하는데, 손광성의 저서 <수필쓰기>에 의하면 < 한국의 명수필 1>을 분석해 보니까 대개 서두-본문-결미의 비율이 대개 1: 8:1 이 되더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재에 따라 달라질 수 도 있는 문제입니다. 인용문을 가져올 때는 가능하면 핵심만 뽑아서 짧게 가져와야 글의 흐름이 흐트러지지 않으며, 한 작품 속에 인용문을 하나 이상 넣으면 수필의 균형이 깨어지기 쉽습니다. 분명한 것은 결미에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여운이 있는 문장을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수필의 언어
수필의 언어는 절제와 차분함을 지녀야 합니다. 정제된 언어이며, 우아하게 잘 닦은 언어,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언어인 동시에, 때로는 핵심을 찌르고 다음 목표로 재빨리 이동하는 순발력 있는 언어가 되기도 해야 합니다. 짧은 문장과 긴 문장을 적절하게 섞어 쓰는 게 좋고, 감각적인 인상이나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구체적인 어휘를 쓰는 게 효과적입니다. 수필에서의 문장력이란 언어를 찾아내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언어를 서로 엮어내는 구성력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6) 수필에서의 비유
비유적 언어를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효과는 첫째, 원관념을 감각적으로 선명하게 하거나 강화시키며, 둘째,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서 지적 쾌감을 주며, 셋째, 새로운 이미지 언어를 창조한다는 것입니다.
독자들은 작가의 탁월한 통찰력이나 딱 맞아떨어지는 비유에서 지적 쾌감을 느낍니다. 대상을 보는 순간 어떤 보조관념이 연상된다 하더라도 좀 더 효과적인 비유가 없을까 치열하게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녹여서 쓴 흔적이 보이는 수필, 시간의 숙성을 잘 견뎌낸 수필이 독자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7) 수필의 주제
한 편의 수필을 읽고 나서, 작가가 이 글속에 무엇을 담으려 했는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표현력이 좋다 하더라도 이런 글은 좋은 수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주제는 단순하고 한정적이어야 이해하기가 쉽고 호소력을 지닐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경험을 단순히 재생하기보다는 경험을 분석, 재배열, 조합하여, 미래의 비젼을 제시함으로써, 작가의 체험을 독자의 삶으로 의미 있게 전환할 수 있도록 주제를 설정해야 합니다. 체험과 사유의 유기적인 결합이 조화로울 때 수필의 문학적 가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은 세 가지 각기 다른 이야기로 구성된 글이지만
주제는 제목 그대로 ‘가난한 날의 행복’이었습니다. 작품에 따라 주제가 암시적일 수도 있고 명시적일 수도 있긴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수필의 주제는 사과 속에 들어있는 사과 씨처럼 또렷이 들어있어야 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8)수필에서의 서정성(무드)
수필의 서정성은 문학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이라 할 수 있으며, 주제뿐만 아니라 문체에도 서정성이 깔려야 좋은 수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서정성에 삶의 진실을 규명하고 천착하는 철학성까지 들어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윤오영은 그의 저서 <수필문학입문>에서 수필에서의 무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감이 곶감이 되려면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말리는 중에도 여러 번의 손질이 필요하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하얀 분)이 앉는다. 만일 감이 상했다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곶감의 모양을 매만져 마침내 곶감이 된다. 이 때 곶감의 시설이 바로 ‘수필의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다. 노을과도 같이 아련한 무드에 싸이는 신비로운 정서, 그것에 수필의 묘미가 있다.”
수필에서의 서정성을 잘 살리려면 수필 그 전체가 하나의 시격(詩格)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정취를 지닐 때 미학적인 문장, 섬세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문장이 나올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9) 문학적 형상화
문학이란 글로 씌어진 그림입니다.
문학적 성취는 참신한 소재, 참신한 해석, 그리고 참신한 표현 즉 형상화에 의해 성패가 갈립니다. 참신한 해석에 개성적인 형상화가 어우러질 때 좋은 수필이 탄생됩니다. 형상화라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시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사물을 감각적으로 더 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예로서 피천득의 수필 ‘오월’을 들 수 있습니다.
“오월은 금방 찬물에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이란 개념을 찬물에 세수한 스물한 살 여인의 얼굴과 흰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에 비유함으로써 오월의 청신한 계절감을 구체화시켰습니다.
인물이면 인물이 살아서 움직이도록 표현하고, 풍경이면 풍경이 눈앞에 전개되는 것처럼 실감나게 표현하여 미적 감동을 불러일으킬 때, 그 글은 예술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수필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기법으로서 ‘상상’이 필요하게 됩니다.
수필에서의 상상, 그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김우종은 한국 수필의 문제점을 “상상력의 공급 부족으로 인한 미적 감동의 결핍”으로 보았습니다. 수필이 체험의 문학이라는 명제를 두고 너무 편협하게 해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필에서의 체험이란 내적 체험도 포함하며, 그 내적 체험이란 것은 상상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상상력의 근원이 대체로 유년의 기억에 있다고 하나, 수필이 지나치게 과거 지향적이 된다면, 수필은 시대감각과 방향 감각을 잃기 쉽습니다. 또 갑각류처럼 웅크린 채 관조에만 총 매진한다면 수필은 외눈박이가 되기 쉽습니다.
수필적 상상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글의 소재에 대해 오감(五感)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또 수필 외의 다른 장르의 문학작품까지도 두루 섭렵하는 광범위한 독서가 필요하며, 음악회나 각종 전시회, 연극을 관람하는 등 다양한 예술 체험으로서 오감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또 삶의 체험 현장을 둘러보고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는 여행 또한 작가의 상상력을 기르는데 단단히 한 몫 해줄 것입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문화 트렌드를 정확히 읽어내는 일입니다.
솥바닥을 기억하고 있기에 가장 구수한 맛을 갖게 된 누룽지처럼 수필의 좋은 맛도 그렇게 오리라 믿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합니다. 알고 보는 만큼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체험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넓혀간다면, 자연히 좋은 수필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수필에 있어서의 사회참여의식을 생각해봅니다.
작가는 그 시대의 가장 힘 없는 사람 편에 서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판적 내용을 소재로 하더라도 문학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려면, 우회적 비판이 효과적입니다. 칼로 내려칠 것을 칼등으로 내리치는 관용, 웃음이 있는 해학, 허위를 폭로하는 풍자, 정문일침의 기지와 역전의 드라마, 그것이 비판적 수필의 요건입니다. 진정한 참여문학은 당한 자의 아픔을 조용히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수필의 제재로는 물질문명의 피해에 대한 고발, 집단적 폭력성에 대한 저항, 인간의 허위와 위선에 대한 폭로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물질 지상주의 세태에 제동을 가하고 경직된 사회에 말랑말랑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선사하는 일, 공동체 의식이 위험 수위에 다다랐을 때 ‘잠수함의 토끼’처럼 경종을 울리는 일, 이것은 이 시대의 작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준비한 글 중에서 ‘전봇대는 아프다’와 ‘미얀마 선원’은 그런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누구에게 훈시를 하거나 위로를 보낼 처지는 못 되고, 힘든 사람을 보면 그저 같이 붙들고 울어주는 것이 저의 한계라는 걸 알면서도 저는 이런 시도를 계속해 보려고 합니다.
수필은 우리들의 영원한 로망입니다.
수필은 수사의 힘으로 읽히는 게 아니라 진정성의 힘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자기를 감추고는 써낼 수가 없고 자기 자신이 직접 독자의 영혼과 만나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수필을 쓸 수 있는가에 대해 박양근 교수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선 말재주보다는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면 된다.
덧붙여 글재주보다는 눈이 밝은 사람이면 좋다.
더불어 밝은 눈보다는 마음이 맑은 사람이면 더 낫다.
나아가 맑은 마음보다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면 한결 적합하다.
그러나 깊은 생각보다는 정이 많은 사람이 진정코 좋은 수필을 쓴다.”
수필이야말로 21세기에 가장 적합한 문학 장르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제 수필가들은 “군 복무하듯이” 수필에 복무해야 할 것입니다. 직업군인처럼 제대하는 그날까지, 자신의 임무에 충성해야 합니다.
소설가 최명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웬일인지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얼마나 어리석고도 잔졸(孱拙=孱妄))한 일이랴. 날렵한 끌이나 기능 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 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 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가는 것이다.”
소설 한편을 위해 17년을 바친 소설가 최명희에게 글을 쓰는 일은 고통이면서 행복이고 그의 삶 전부였습니다. 이렇듯 문학이란 외로운 자들의 몫입니다.
수필이란 결국 사람을 읽는 것이며 사람들의 소망과 현실, 희망과 절망을 읽어내는 일입니다. 작은 것도 소중하게 바라보고, 사소한 것에서도 인생을 통찰해 나감으로써, 인생의 참값을 다시 매겨 나가는 것이 우리 수필가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