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4) † 다섯 번째 교회, 사데 교회 * 사데 시대에 흰 옷을 입었던 성도들, 곧 이기는 자들(3,4-6)
마르틴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로마서 말씀에 의지해서 믿음을 강조했다(롬1:17). 사데 교회는 믿음이라는 위대한 진리를 발견한 교회이다. 그러나 흰 옷을 입지 못하는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흰옷을 입지 못하는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가 없게 되었고, 교회가 부도덕과 세속과 위선으로 병들게 된 것이다.
왜 사데 교회는 흰옷(그리스도의 의)을 입는데 실패했을까? 그들이 가르치던 복음이 믿음만을 강조하다가 믿음의 열매인 순종에 대한 가르침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영혼이 정결케 되는 체험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벧전1:22절은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죄인의 마음속에는 가난하고 애통하는 심령(영)이 생긴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고, 죄로부터 돌아서도록 이끄는 회개가 일어난다. 그런 회개를 하는 사람의 심령(영)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
곧 그분과 하나 되어 연합될 때, 그분이 생명의 공급으로 자연스럽게 세속적이고 죄스런 습관을 버리고 거룩한 열매가 맺히게 된다. 말과 행동에 변화가 생기고, 위선과 거짓을 버리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말씀이 새겨져,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가난하고 어려운 자를 진심으로 동정하고 도와주게 된다. 이 모든 경험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흰옷을 입은 성도의 체험이다. 요한17,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거룩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진리가 올바로 세워져야 흰옷을 입는 구원의 체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중세기 두아디라(로마가톨릭) 교회 시대가 끝나자마자 마르틴 루터를 부르셔서 중세기에 무너진 “흰옷, 곧 그리스도의 의”에 대한 가르침을 회복시키려고 하셨던 것이다.
사데 교회의 문제는 오늘날 현대 개신교회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현대 개신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기도하고 봉사하고 예배는 드리는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두아디라(가톨릭교회) 교회의 예배와 의식과 형식을 개혁하지 못하고 비슷하게 답습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순종이라는 열매가 없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교회도 의식과 형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수많은 교파 분열로 인하여 ‘성령의 움직임’을 제한해 버린 것이다. 삼상15:22절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날마다 하나님께 나와 제사드리고, 예배드리고, 예물을 바치지만,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사무엘 선지자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오늘날 개신교회의 문제를 보아야 한다.
계3:4절은 “그러나 사데(개신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a few)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예수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말한다. 도적이 와서 천한 물건은 가져가지 않고 언제나 좋은 물건만 가져간다. 주님도 이 땅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가신다.
가장 좋은 이것은 주님의 손안에 있는 것이지 주님의 손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집에 있어도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너를 도적같이 지나간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은, 주 예수님이 빨리 재림하실 것을 느끼며 그날이 이제 가까웠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주님의 “데려감(휴거)”을 당하기를 귀히 여기고 이 소망을 가져야만 한다. 야곱의 혈족은 처음에는 모두 칠십 인이었다(출1:5). 이 칠십 인이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을 이루었다. 그러나 주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몇 명”의 이름이다. 주님은 특별히 우리의 이름을 주의하신다. 주님은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 옷은 곧 우리의 의로운 행실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을 때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흰옷이시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그리스도 앞에, 곧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다(롬14:10).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입는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 19장에서 말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된다.
빛나고 깨끗한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다. 여기에서의 “옳음(義)”은 헬라어로 “다수”의 의미를 가지고도 있다.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으니 그들이 행위는 깨끗하다. 그들은 주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그들을 합당하다고 하신 것이다.
계3:5-6절은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에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름을 기록하느냐 기록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의 문제이다.
주님이 인정하신 사람에게는 분깃이 있고, 주님이 인정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분깃이 없다. 이름은 다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으나 주님이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따로 표시해 놓아 분깃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영원한 나라에서의 영생의 문제가 아니요, 주님과 함께 다스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기록되어 있으나 분깃이 없는 이것이야말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사 우리가 주님 앞에서 흰옷을 입게 하시기를 기도드린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흰옷을 입었지만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도 흰옷을 입게 될 것인가? 사데 교회가 수많은 교파로 나누어지고, 세속화의 길을 걷고 있을 때에도 흰 옷, 곧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더 밝은 빛으로 나가기 위해서 전진하던 몇 개의 교회들이 있었다.
모라비안교도(개혁자 후쓰의 후예들)와 퀘이커교도(영국 죠지 폭스 개혁자의 후예들와 청교도들)들과 특별히 성공회의 성직자였던 다비(John Nelson Darby)와 벨렛(J.G. Bellet)등의 형제회(The Brethren)가 그것이다. 또한 고아원을 설립한 믿음의 뮬러(George Muller), 모세오경을 주해한 매킨도시(C. H. Mackintosh), 무디(Moody), 스펄전(C. H. Spurgeon) 등등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순수한 개혁의 정신을 유지해갔다.
그들은 교회들이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순종의 중요성을 놓쳐버렸을 때, 믿음과 믿음의 열매인 행함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거룩한 생애를 강조하였다. 이들의 공헌과 이기는 자에 대해서는 필라델피아 교회편에서 보다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데 교회는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계3:1)고 말한다. 이름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었다는 것이 개신 교회의 특징이다. 그들의 각종 조직면, 자선사업면, 사회봉사면, 교육과 의료사업면, 선교의 면에서 참으로 번창하여 사람들의 부러움을 얻었지만, 그들의 주님 앞에서의 영적 상태는 바로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데 교회 안에는 생명과 사망이 섞여 있다. 귀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에게 주신 말씀에서 성령의 음성을 들어야만 한다. 당신의 믿음도 시험해 보라.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당신의 믿음이 흰 옷을 입기에 합당한 믿음인지 확인해 보라!
고후13:5절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 말씀하신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