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꽤 예전부터 기업인을 꿈 꿔 왔습니다.
그래서 존경하는 주요 인물들도 경영인이 많았고,
스타벅스의 창업자 하워드 슐츠가 처음에 쓴 책의 번역본인
스타벅스 커피 한잔에 담긴 성공신화
를 과거 감명깊게 읽었던 바 있습니다.
얼핏보면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은 존 케리 의원과 비슷하게도 보입니다.
그러나 하워드 슐츠 회장의 물형 역시 재벌들에게 흔히 보이는
물형인 기린상입니다.
맨 처음에 코뿔소 상이라 보고, 눈빛과 얼굴을 세밀하게 뜯어보니
기린상이네요.
하워드 슐츠 회장 역시도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세일즈 맨 생활로 사회생활의
첫 발을 딛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자신을 현재의 위치에 올려줄 커피를 만나게 되는데,
스타벅스는 본인이 창업한 회사가 아니라 맥도날드의 사례와 같은.
남이 창업한 회사를 자신이 사서 키운 회사입니다.
하워드 슐츠 회장은 빈민가에서 자라났으며, 학벌도 별로 좋지 못했고.
경영에 대하여는 배운 바가 없습니다.
정주영, 그리고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 하워드 슐츠 세명은 모두 자수성가한 기업인이고.
그다지 공부를 잘 한 인물들도 아니고 어려서는 매우 어렵게 성장했다는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자수성가한 기업인이란 말이 부족한 재벌의 반열에 오른 인물들이고요.
물형관상은 여기에 대하여 스스로의 노력과 재능, 주위의 여건과 운 때를 보는 관점에서 하나를 더 하여 줍니다.
이미 그 사람은 재벌의 품격을 가진 물형인 재벌상이였기에, 비록 여건이 따르지 않았을 때 는
가난하고 어려운 시기가 있었으나 결국 스스로의 품격을 찾아가게 되었다는.
시간을 역행하는 해석을 가능하게 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하워드 슐츠 회장의 코는 삐뚫어졌고, 눈썹은 눈과 붙어 낮게 자리하고 있으며 입도 약간 균형이 엇나가 있습니다.
귀에 아랫볼이 특별히 두툼하지도 않습니다. 하워드 슐츠 회장의 관상이 기린상이란 사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이외의 방법으로 하워드 슐츠 회장이 이룬 결과를 읽어 내기란 어려울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물형은 말하자면, 관상에서 그 급을 정하는 것으로. 재벌중에 못사는지 서민중에 잘사는지를 가리는 핵심적인
사안이라 얘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워드 슐츠 회장은 곳곳에 좋지 못한 면이 있는데,
그런 경우 고생끝에 물형의 품격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코가 삐뚫어 졌으면, 재산상의 손실이나
40대 전후로 어려운 일이 있어야 하는데. 하워드 슐츠 회장은 그 시기 스타벅스 창업 후의 어려움은 있었으나
스타벅스를 창업 후 승승장구 하였던 시기가 그 시기입니다. 물론 준두를 비롯한 코끝의 기세에서 끝내
성공할 것을 읽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당시 짧은 관점으로 당신은 이 시기의 운이 좋지 않으니 사업을
쉬시오라고 했다면. 미국 기업 역사상 획기적으로 짧은 시기에 최대의 성장을 이룬 스타벅스의 급격한
발전을 생각한다면 100% 틀린 이야기를 해 준 것이 됩니다.
그런데 관상에 대한 세부 기술에 대하여는, 이미 상리형진에서 조차, 여러 사항들을 기술 했으나 그 부위가
그렇다고 반드시 기술한 사항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명확히 적혀 있습니다.
따라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세부를 가지고 평가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결론을 내릴 가능성이 그만큼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관상을 보는 스타일에 따라서는 부분을 먼저 보고 전체를 볼 수도 있으며 그 방식은 그 방식대로
옳은 것이 있습니다.
허나, 기본적으로 물형이 뒷받침 되지 못한다면 관상 전부가 미끈하게 잘 생긴 닭상을 하워드 슐츠 회장같은
흠결있는 기린상보다 더 대성할 수 있다는 류의 잘못된 해석을 할 여지도 있습니다.
스타벅스가 있던 시기, 당시 라이벌 기업은 시애틀 베스트 커피가 있었고 인스턴트 커피가 주류인 미국 시장이긴 했으나
수많은 커피집들이 존재는 했습니다. 현재와 같은 커피 전문점 개념이 정립이 안되어 있을 뿐이였지요.
그것을 기회포착과 비젼, 탁월한 전략과 전술, 운영능력과 리더십등의 개인에 포커스를 둔 해석이나
결국 나중에는 스타벅스에 흡수합병된 시애틀 베스트 커피등의 경쟁자의 실수, 스타벅스의 상대적 우위등에
기업에 초점을 맞춘 해석등이 가능할 것이지만 관상의 관점에서는 하워드 슐츠라는 인물 자체가
그만한 지위에 오를 만한 인물이였고 커피가 그 수단이였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적인 해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어쩌면 그 이상의 해석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 면의 가능성을 확신하기에 기꺼이 관상에 시간을 투자하고
그것을 아깝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대로, 커피문화는 언젠가는 일어날 것이였습니다. 유럽에는 이미 흔한 문화였고,
우리가 접하는 것은 미국식의 맥도날드화 된, 좀 더 정확한 단어로는 프랜차이즈화된 스타벅스를 통하여
그 문화가 전달되었습니다. 프랜차이즈화는 미국기업식 문화라고도 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실제로 옛날에는 다방이 커피전문점 이전의 시대에 엄연히 많이 존재하고 있다가, 지금 전문점으로 대체 된 것이죠.
이러한 일어날 일이 명확하더라도 하워드 슐츠가 없었다면 이러한 문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과거 춘추전국시대에 진시황의 할아버지가 중국의 2/3을 재패하고는 중국의 통일이 가까워 왔는데
진시황이 태어난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천하가 통일될 것이라 한 이야기(출처는 초한지입니다.)나
후한이 잇다른 쇠퇴를 거듭하고 있던 시기에 조조를 보고서야 난세의 간웅이란 얘기가 나오게 된 것 등이.
이와 유사한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타고난 재능과 주변여건, 혹은 가난하고 어렵더라도 극복할 계기나 시대, 기타 수많은 사항이
뒷받침 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관상의 여건에선 가장 중요한 천명이란 것이 이 사람들에게 있었다는게 핵심입니다.
이 얘기는 노력을 하지 말라거나 희망을 포기하란 것이 아니라,
안분지족, 스스로를 돌아보아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을 알아야 재앙이 멀어지고 행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잘 살기 위해서는 노력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서민에겐 서민의 노력이, 재벌에겐 재벌의 노력이 있는 것이고 관상으로 친다면 닭상에겐 닭상의 노력이
기린에겐 기린의 노력이 있는 것이란 말로 2글자로 줄이면 그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는 풀을 뜯으며 살고 사자는 사냥을 하고 사는데, 인간의 세상에는 소로 나서 사자처럼 사냥하고 싶어하고,
사자로 나서 난폭함을 비난받으니 힘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자는 소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
소는 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간혹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관상은 이러한 자신을 보는 기본적인 거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수를 아는 방법에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 만으로 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인물들을 위해 수많은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관상이라 생각됩니다.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것 만으로, 개인적으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원래 관상을 볼 줄 몰랐는데 진탕 고생을 한번 하고 났더니 어느순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는데,
충분히 그만한 일을 겪고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영역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지금은 적어도 제 물형이 뭐라는거 정도는 파악하고 있는 정도는 되는데,
정작 그렇다는 것 만으로도 제 주위의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현명하여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주제를 바로 파악할 정도가 되었더라면 가장 좋았겠지만,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고 진흙탕속을 뒹굴면서도 스스로를 모르니 답답하여 관상을 보는
눈을 주고 스스로를 돌아보라 한 덕에 전보다는 한층 더 넓은 시선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전부터 사주는 볼 줄 알았고, 관상도 남들에게서 보긴 했으나
마음의 왜곡으로 인하여 바로 듣지 못하던 것을 이제는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얼추 해석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관상을 볼 줄 몰라도, 스스로를 볼 줄 알면 자신을 알고 분수를 알고 나아갈 때와 그칠 때를 알지만.
남을 보는거 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자신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나야,
사실은 그동안 남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착각해 왔다는 것을 알게되리라 생각합니다.
관상도 자신을 돌아보는 길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체적으로 객관화 시켜 보더라도, 그 물형을 타고나면 전반적인 능력이나 성품이 그 물형을 닮게 되고
운기도 그러하며. 그러면 그러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가운데 노력으로 그나마 더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 정도로 갈린다고 보이는데 여기서 벗어나게 되면 이른바 과욕이란 것이 되고 분수를 모르는 것이 됩니다.
받아들이기 쉬운 문제는 아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면 삶을 통해서 받아들여지게 될 문제이도 한 영역입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보면 그게 경험적이든 생각에 의한 것이든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역량과 주제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하워드 슐츠는 기린상입니다. 그는 그의 삶에서 최선을 다 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하워드 슐츠가 될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건 그의 삶입니다.
불만족은 결국 분수를 넘는 일을 만드는데, 그 대부분은 결국 비교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자연의 원리는 닭은 닭이고 오소리는 오소리일 뿐 닭이 오소리를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불행해 한다거나, 오소리와 싸워 이기는 닭이 물론 있을 수도 있습니다만.
섭리를 거슬러 이길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형관상은 이러한 자연의 섭리를 관찰한 끝에, 인간세상에도 이와같은 섭리가 있다는
통찰의 결과물이란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저는 그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첫댓글 명언입니다.. 깊이 새겨 듣겠습니다..ㅎㅎ
..남을 보는거 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자신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나야, 사실은 그동안 남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착각해 왔다는 것을 알게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주 멋지고 예리한 지적---생각의 범위를 키울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쩐지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비슷하게 생겼는데요. 장학금 수여식 사진 밑의 사진을 보고 든 느낌입니다.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 여기서 많은 것을 보고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현재 이분은 어떤가요? 올해 59살이던데 당분간은 전보다 주춤하는게 있어보일거 같군요. 그러나 이분은 60대 중반부터 뭔가 새로운 도전이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드는군요. 전반적으로 탄탄대로의 인생길을 걷고 있는 분이라 판단이 되는군요. 그러나 하관이 전체적이 상에 비해 튼실하지 못하므로 60대 70대는 조심해야할 부분이 많아 보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