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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사님이 전해 온 간증문 입니다.
함께 은혜 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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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하나님’
아주 평범한 나에게도 하나님이 찾아 오셨고, 은혜를 베푸셨다.
하나님은 어머니 태중에서 내가 만들어지기 전에 나를 알고 있었고, 나를 인도해 오셨음을 알 수 있었다.
불교를 믿는 집안에 태어났다.
어머니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려 자녀를 낳으셨다.
4남2녀 중에는 부처님의 생일과 같은 날짜에 태어난 이도 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영원히 끝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없는 가운데 졸업을 했다.
졸업식 때는 3~4명에게 주는 상도 받았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 성경을 처음 접했다.
선교사님이 나눠주신 파란색의 조그마한 신약성경이었다.
누나가 학교에서 받아 온 성경이었다.
“좋은 것”이라는 누나의 말에 솔깃해 성경을 읽었다.
신약 첫 장을 폈다. 마태복음이었다. 마태복음을 읽다 중단하고 읽다 중단하길 반복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이름이 너무 많아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했고, 중학교 내내 한 번도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없었다.
당시 고교 특별전형이 있었다.
시험에 응시했지만 떨어졌다.
낙심이 되었다. 집 밖에서 하늘을 향해 하나님께 원망을 했다.
한참 하나님을 원망하다 문득 이런 마음이 들었다.
“나는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데 왜 하나님께 원망하지?”
이 마음이 들자 무척 겸연쩍었다.
덕분에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불교학생회에 가입을 했다.
어머니가 불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나도 불교를 믿어야 한다는 단순한 마음에서였다.
열심히 믿었다. 불교와 관련된 연극도 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절에 가면 1천배씩 절을 했다. 무릎의 피부가 벗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 곳에는 “부처님이 도와주시면 고맙고, 안 도와 주시면 할 수 없지 않느냐. 내 힘으로 살아야한다.”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고2 때 고3병을 앓았다.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당시 기이한 꿈을 꾸었다.
내용은 이랬다.
아주 먼 곳에서 백발의 어르신 한 분이 한 번에 한 산봉우리씩을 건너뛰며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너무나 두려웠다. 그래서 도망을 쳤다. 그러다 땅바닥에 엎드렸다. 그 어르신은 나를 안아 일으켜 세웠다. 그 품이 너무나 포근하고 따뜻했다.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두려움이 말끔히 사라졌다.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그 분께 이런 질문을 드렸다.
“저도 그렇게 달릴 수 있는지요?”
그 분은 활짝 웃으셨다. 아무 말 없이 달려가셨다.
꿈에서 깨어났다. 참 신기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그 때의 꿈이 생생히 떠오르고 있다.(이후 이건오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님께 성경공부 시간에 꿈 내용을 말씀 드렸더니 꿈에서 본 그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셨다.)
어느 날 바로 아래 동생이 나에게 전도를 했다.
이 동생은 4남2녀 중 두 번째로 예수님을 믿었던 형제였다.
그 동생은 기독교 재단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열심히 불교를 믿던 나는 “예수님을 믿으라.”는 그 말이 싫었다. 세뇌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런 말을 들려줬다.
“나는 불교계의 정상이 될 테니, 너는 기독교계의 정상이 되라. 그래서 정상에서 만나자”고.
그리고 “나에게 더 이상 전도하지 말라”고 했다.
기독교를 믿는 동생이 참 잘 풀린다는 마음이 들곤 했다.
대학에 진학했다.
미션스쿨이었다.
채플시간이 있었다.
처음에는 찬송가를 따라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 “노래인데 어떠냐.”란 마음에 찬송가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성령의 ‘ㅅ’자도 몰랐지만, 가사가 참 좋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중 휴학을 하고 군 입대를 했다.
서부전선 GOP에서 근무하던 어느 날 이었다.
당시 상병 때 일반하사 교육을 받고 분대장이 된 뒤 내무반장을 할 때였다.
일요일이었다.
그날 법회를 인도하던 중이었다.
법회를 인도하던 중 갑자기 눈이 보이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었다. 영원히 앞을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장님이 되는 것 아니냐’는 마음에 두려움이 찾아왔다.
나의 눈을 보던 소대원들은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나중에 성경에서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 다메섹 도상에서 눈이 멀어진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잠시 뒤 태양이 떠오르듯 천천히 눈이 밝아왔다.
며칠 뒤 예수님을 믿는 한 병장이 찾아와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반장님이 법회를 인도하다 눈이 보이지 않으실 때 (예수님을 믿는) 저희들이 반장님을 위해 통성으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그때 이런 대답을 했다.
“자기가 믿는 종교는 다 중요하다. 상호 존중해야 한다.”고.
지금 생각한다면 “그 때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당시 기독교 대원들이 예배드리는 것을 허락했다.
모든 종교는 다 중요하다는 마음에서였다.
복학을 했다.
채플시간에 여전히 찬송가를 불렀고, 성경공부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모든 일이 잘 풀렸다.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연이어 총대도 했고, 성적장학금도 내내 받았다.
총학생회장선거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선거자금이 필요해 어머니께 지원을 요청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동네에 큰 절이 들어왔다. 그 절 스님이 용하다고 하더라. 함께 그곳에 가서 물어보고 네가 당선된다고 하면 지원을 하겠다”고 하셨다.
주말에 어머니와 함께 그 절을 찾았다.
주지스님은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내 제자가 되라”고 하셨다.
나는 불교를 열심히 믿었지만 중은 되기 싫었다. 그 절에서 나온 길로 바로 우리 동네의 교회를 찾았다. 교회 가기 전에 “어머니 저, 이제부터 교회 가겠습니다.”라고 했고, 어머니는 “그래라”고 하셨다.
모든 일이 순풍에 돛을 단 듯 잘 풀려나갔다.
졸업을 앞두고 삼성그룹에 원서를 넣고 시험을 봤다.
참 잘 봤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결과는 떨어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나보다 성적이 훨씬 아래 아이들이 합격했기 때문이었다. 차석으로 입학했지만, 졸업할 땐 1등(마지막 시험)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삼성그룹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학업과 직장 생활로 타지를 옮겨 다니며 10년을 보냈다.
특별히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인지 교회생활을 게을리 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 갈 때도 있었고, 한 달에 한번, 일 년에 한번 교회 갈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 곳엔 여전히 예수님이 자리 잡고 있었다.
누가 물어도 “교인”이라고 대답했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나의 방에서 아내(현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당시 이따금씩 가위눌림에 고통을 겪던 시기였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가위눌림이 시작됐다.
몹시 괴로웠다.
제대로 기도를 할 줄 몰라 ‘주기도문’을 반복해서 기도했다.
가위눌림은 점점 더해졌다.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죽기를 각오했다. “죽더라도 오늘은 끝장을 봐야겠다.”는 마음에 주기도문으로 더욱 더 크게 기도를 했다.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그 때 아파트 천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캄캄한 하늘에서 한 줄기의 빛이 나를 둘러 비췄다. 가위눌림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빛이 너무나 좋았다.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너무나 아늑했다. 너무나 평온했다. 전혀 눈도 부시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처음 본 빛이었다.
그때 아내가 염려됐다.
아내에게도 비춰달라고 했고, 또 한 줄기의 빛이 아내의 주위를 비추었다.
캄캄한 어둠 속의 두 개의 조명등과 같았다.
이튿날 믿지 않던 아버지께 이 내용을 말씀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무엇인지는 몰라도 좋은 것”이라고 격려해 주셨다.
결혼을 한 뒤 어느 날 집 가까운 곳에 교회가 생겼다.
그 교회를 찾았다. 그 교회 목사님은 “개척 뒤 첫 번째 교인”이라며 크게 반기셨다.
이 목사님께서 기도와 말씀으로 저를 먹이셨다.
언론사 사회부 기자로 바쁜 시간을 보내던 때였지만,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해 부흥회 등 각종 집회에 따라 다녔고, 그 덕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흥회 때에 인생의 터닝 포인터가 될 은혜를 받았다.
과천교회 ‘고구마 전도 왕’ 초청 집회 때였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집회장을 찾았다.
평소보다 많은 헌금을 했다.
헌금은 하나님이 앞서 예비해 주셨다.
교회 사모님의 손에 이끌려 맨 앞좌석에 앉았다.
참 많은 은혜를 받았고, 참 많이 웃었다.
이 분은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대위로 예편해 조그마한 회사를 운영하다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니 큰 중소기업 2개를 운영하게 되더라고 했다.
말씀대로 사니 귀신이 떠나가고 하나님의 축복이 이어지더라고 간증했다.
간증이 생생했다. 기적은 이분에게 일상처럼 보였다. 하나님이 이 분과 함께 함을 느낄 수 있었다.
말씀을 들으니 “나는 뭐야”라는 마음에 자존심이 팍 상했다.
나도 이제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말씀대로 살기로 다짐했다.
말씀대로 사니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느끼며 생생히 체험할 수 있었다.
세상에서 예수님 다음으로 사랑했던 어머니가 아플 때 살려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날 밤 꿈을 통해 “15년을 연장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이틀 뒤 주일날 처음으로 교사직분을 받아 소년부 아이들을 섬겼다. 그날 받은 공과책을 그날 가르칠 페이지를 펴니 히스기야 왕이 15년 생명을 연장 받았다는 내용을 볼 수 있었다. 나의 입가에선 “아, 성경에도 생명을 연장 받은 사람이 있네”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나님이 어머니의 생명을 15년을 연장해 주신다는 말씀이 ‘쑥’ 믿어졌다. 어머니께 말씀을 드렸다. 아주 좋아하셨다. 말씀대로 15년 뒤 어머니는 소천하셨다.
말씀이 꿀처럼 달았다. 정말 그랬다.
교회에서 확신반과 성장반에서 성경공부를 했다.
성경을, 하나님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고, 즐거웠다.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수요예배, 금요기도회, 각종 집회도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을 했다.
수요예배와 금요기도회 뒤에는 불을 끈 상태에서 마음껏 기도한 뒤 돌아가도록 했다.
예배와 기도회를 마친 뒤에도 오랫동안 남아 기도한 뒤 귀가했다.
회개 기도도 많이 했고, 어머니에 대한 기도도 많이 했다. 전도 대상자 등에 대해서도 기도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며 기도를 많이 했다.
눈물과 콧물이 흘러나왔다.
귀가할 때 아래를 보면 콧물과 눈물이 범벅되어 있었다.
기도하는 것이 참 좋았다.
기도할 때 나의 영이 반짝반짝 빛이 나면서 아주 즐거워하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였다.
사회부장을 맡아 포항시청을 출입할 때였다.
국민일보 기자가 ‘목회자홀리클럽 창립예배’에 참석하자고 권유했다.
포항제일교회(지금 포항소망교회)에서 열린 ‘포항목회자홀리클럽 창립예배’에 참석을 했다.
이어 경북기독신문 사장을 돕기 위해 한동대 김영길 총장님을 만났다.
김 총장님을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한동대는 광야와 같은 대학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동대를 ‘광야대학’으로 불렸던 것 같았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대학이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대학이었다. 기적이 일상화 된 대학이었다.
자치면 톱으로 보도를 했다.
당시 분위기로 봐선 파격적이었다.
핍박이 시작됐다.
얼마 뒤 문화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덕분에 시간이 났다.
이건오 한동대 선린병원장(장로)님을 만났다.
그곳에서 홀리클럽 역사와 기관장홀리클럽 창립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한 분, 한 분 찾아다니며 회원으로 가입시킨 이 장로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해 출석교회 담임목사님의 권유로 양산감림산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을 했다. 전광훈 목사(청교도연성수련원장)님이 인도하는 집회였다. 전 목사님은 국내 기독교계의 한 산맥을 이끌고 있었다.
집회 기간 내내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집회장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 이루었다. 집회는 매일 새벽 1~2시까지 이어졌다.
5일 일정의 집회 중 4일째 되는 날이었다.
2층에서 기도와 찬양을 반복하던 중이었다.
기도하던 중인 것 같다. 갑자기 캄캄한 광야 같은 곳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태어나서 처음 본 환상이었다.
너무나 신기했다.
“하나님, 뜻이 있다면 한 번 더 보여 달라”고 기도했다.
더욱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을 볼 수 있었다.
그 빛이 너무나 좋았다.
나중에 요한일서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빛이시라”란 말씀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시 감격을 잊지 못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포항에 도착해서도 곧장 귀가하지 않고 출석하던 교회의 강대상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한참 동안 기도하며 찬양을 했다.
전 목사님은 이어 포항지역 대도교회 부흥회와 기쁨의교회(당시 북부교회)에서 열린 포항성시화운동본부 8·15집회, 기도원집회를 잇따라 인도했다.
상세히 취재해 보도할 수 있었다.
포항성시화운동본부 8·15집회로부터 15일 만인 2003년 9월 1일 언론인홀리클럽이 출범했다. 하나님이 출범시키셨다. 회원을 가입시키는 것도 창립대회를 준비하는 것도 기적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은 회원들을 예비해 두고 계셨다. 하나님이 행하심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언론인홀리클럽 출범은 세계 처음이었다.
김광웅 목사님(포항성시화운동본부 회장)은 이날 설교에서 "언론인홀리클럽 출범을 보니 예수님이 바쁘신 모양"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재림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언론인홀리클럽이 출범한 날 밤에 기이한 꿈을 꾸었다.
우리 무리와 함께 광야를 걷고 있었다.
사탄으로 보이는 자가 따라오며 우리 선두그룹의 공중에서 방해를 했다.
나중에 성경을 읽던 중 ‘사탄은 공중권세를 잡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엡 2:2).
사탄의 방해는 집요했다.
우리 무리는 어느 듯 한 산으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6개월 뒤 우연히 CTS기독교TV를 보다 그날 꿈에서 본 그 산이 모세가 10계명을 받은 시내산임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여기서 두 장면을 볼 수 있었다.
후미에서 동굴이 무너진다는 보고가 있었다.
나만 살기로 하고 도망쳤을 때 이방인 등 4명이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 다른 한 장면은 내가 죽기를 각오하고 사탄과 싸웠을 때 모두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사탄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 무기는 모두 죽일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싸움은 힘에 겨웠다.
끝내 사탄으로 보이는 자가 자폭했다.
모두 살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언론인홀리클럽 출범 한 달 보름 만에 광고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언론인홀리클럽을 만들지 말라”는 최고경영자의 두 차례에 걸친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언론인홀리클럽을 출범시켜야 한다”는 강렬한 마음을 거부할 수 없어 그 분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광고부 업무는 힘이 들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광고 1부장보다 더 많은 광고를 수주 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바닥에서 회원들을 섬길 수 있었다. 언론인홀리클럽 성경공부는 매주 화요일 오전 6시30분 한동대 선린병원 또감사비전홀에서 열렸다. 성경공부 하루 전날 밤에는 아무도 없는 교회에 나가 1시간 이상씩 ‘내일 있을 언론인홀리클럽 성경공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다. 시간이 주어졌고, 기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론사 복음화와 언론을 통한 복음전파를 위해 언론인홀리클럽이 만들어 졌는데 광고부장이 되어 언론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 생각이 마음을 더 힘들게 했다.
수요예배 뒤 기도회 시간이었는지, 금요기도회 시간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때 사생결단으로 기도했다. “회복시켜 달라”고, “너무 힘이 든다”고.
다음날 출근을 했다.
인사철도 아닌데 사내 게시판에 인사가 나 있었고 복귀 명령이 나 있었다. 광고부장이 된지 한 달 보름 만이었다.
참 신기했다.
한 달 정도 뒤인 2004년 1~2월 언론인홀리클럽 성경공부 시간이었다.
세계성시화대회를 포항에서 열었으면 좋겠다는 논의가 됐다.
회원들은 이 대회가 포항서 열리면 집중 보도하기로 다짐했다.
이 대회는 그해 5월말과 6월초에 걸쳐 포항실내체육관에서 열렸다.
스트레이트, 박스, 칼럼, 사설 등 홍보기사가 쏟아졌다.
회원들은 자발적으로 각 교회에 홍보물을 나눠주고 현수막을 걸었다.
모두 자기 시간을 내고, 자기 돈을 들어 그렇게 했다.
대회는 대성황을 이뤘다. 이 대회는 그간 지지부진한 국내외 성시화운동을 촉발시켰다. 이 기간 세계성시화운동본부도 결성이 됐다.
몇 달 뒤 일터 그룹간부들의 회식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1순위로 섬길 것’을 다짐했다.
세상의 모든 줄을 놓아버렸다.
회식이 끝나자마자 출석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다.
술을 1~2잔을 마셔 술 냄새가 날 것 같아서 뒷좌석에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할 때였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을 1순위로 섬기겠다”고.
그런데 하나님을 1순위라 생각했는데, 세상의 모든 줄은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강력한 한 줄을 잡고 있음을 알게 해 주셨다.
그 시간 그 줄마저 놓아 버렸다.
하나님이 물으셨다.
“이름도 빛도 없이 (나를) 섬길 수 있겠느냐”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하나님은 또 물으셨다.
“‘평생’ 그렇게 섬길 수 있겠느냐”고.
목구멍에서 설움이 올라왔다.
“기자의 생명은 이름인데, 이름이 있어야 고급제보를 받을 수 있고 특종을 할 수 있는데”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거부 할 수 없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도 인도함을 받아야 하지만, 내가 죽어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인도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과의 대화는 마음과 마음의 대화였다.
또렷이 들렸다. 마치 영화 속 ET가 아이와 손가락을 맞대고 말없이 대화를 하는 것과 같았다.
그날 밤이었다.
꿈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을 봤다.
가슴 벅찼다.
어찌 그 꿈을 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그 감격을 잊을 수 있겠는가?
그날부터 찬송가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즐겨 부르고 있다.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방언도 받았다.
방언을 받을 때는 이랬다.
한성택 목사님(예환꿈교회) 초청 부흥회 이후였다.
금요기도회 때였다.
그날따라 방언을 많이 사모했다.
그 이전에는 방언을 사모하지 않았다. 방언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나의 혀를 입안(목구멍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주 강력하게 끌어 당겼다. 입안이 얼얼했다. 불과 몇 초였겠지만 좀 오랜 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러더니 ‘랄랄랄랄’라는 방언이 터져 나왔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기도를 해도 계속해서 방언이 나왔다.
귀가했다.
침대 위에 앉아 기도를 했다. 역시 방언이 나왔다.
다음날 일어나 기도를 했다. 역시 방언이 나왔다. 아직(그때)까지 입안이 얼얼했다.
방언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기도만 하면 방언이 나온다. 대표기도를 할 때는 우리말로 기도를 하고 있다.
방언하시는 분들의 간증을 들어도 그렇지만, 방언의 진보도 듣고 느끼고 있다.
차를 운전할 때도 방언기도를 했다. 오히려 정신이 더 맑아졌고, 운전도 잘 되었다.
성경을 보면 방언은 이방인의 말, 또는 천사의 말로 불린다.
방언은 이렇게 임한 것 같다.
출석교회 목사님이 설교 중에 “피아노 연주하는 아이가 피아노가 너무 오래돼 손가락이 아프다고 한다. 키보드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 ‘내가 사 드려야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떻게 사드려야 하나’라는 고민이 생겼다.
지금 수중에는 키보드를 사드릴 현금은 없고, 그렇다고 카드로 사 드리면 이름이 알려질 것 같고.
승용차를 운전해 회사까지 오는 내내 이 고민에 빠졌다.
회사에 도착했다.
그날 까맣게 잊고 지냈던 수당이 현금으로 나왔다.
몇 달 전에 광고부장으로 근무할 당시 광고수주에 대한 수당이 이날 나왔던 것이었다.
이 돈을 가지고 시내 악기점을 찾았다.
키보드를 구입했다. 키보드 값을 지불하고 필요한 0을 지불키로 하니 돈이 딱 맞았다. 신기했다.
이름도, 생김새도 이야기 하지 말고 모 교회에 배달해 달라고 간곡히 말씀을 드렸다.
그 뒤 수요예배 때였다.
퇴근을 해서 수요예배에 참석을 했다.
교회 분위기가 크게 달라져 있었다. 기쁨이 넘쳐났다. 교인들은 누가 키보드를 보냈지 몰랐고, 보낸 이를 위해 기도했다.
내가 방언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이분들의 기도임을 믿고 있다.
감사드린다.
이 방언이 지금까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신체적으로 바로 느낄 수 있는 것이 방언이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떨쳐 낼 수 있었다.
그 많은 고난과 그 많은 핍박을 견딜 수 있게 했다.
즐겁게 교회생활을 할 때였다.
담임목사님이 ‘교회 남선교회 회장’에 출마하라며 경찰청장님의 간증집을 주셨다.
그 간증집을 읽고 큰 은혜를 받았다. 이 분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 하나님이 이분을 도우심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이 분은 부임 첫날에도 교회를 찾아 기도한 뒤 출근하셨다.
이 간증집을 읽고 남선교회 회장으로 출마해 볼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트 뒤에 마련된 체육시설에서 큰 훌라후프를 돌렸다.
여성들도 돌리는 크게 무리가 가는 운동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그 훌라후프를 돌린 뒤부터 허리에 이상이 왔다.
밤이 싫을 정도로 허리가 아팠다.
이상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던 중 금요기도회 때 ‘남선교회 회장 출마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교회조직에 대해 잘 몰랐고, 남선교회 회장 자격도 없다는 것을 내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남선교회 회장 출마를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했고, 회개했다.
그날 밤이었다.
한참 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허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시원했다. 너무나 시원했다. 허리의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너무나 평안했다. 건강할 때 보다 훨씬 더 편안했다. 꿈속이었다.
잠에서 일어났다. 거실을 걸어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치료해 주셨다. 감사했다.
이보다 앞서 기이한 꿈을 꿨다.
내가 한 대형교회에 등록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등록하는 나를 한 권사님이 막으시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교회의 부흥도 볼 수 있었다.
꿈에서 깬 뒤 혼잣말로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내가 왜 아픔이 많은 교회에 등록을 하나”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지금 내가 출석하고 있는 이 교회가 너무나 좋은데…”
그런데 2005년 6월.
내가 꿈속에서 본 그 교회에 등록을 했다.
하나님은 출석하던 교회를 떠나 아픔이 많은 그 교회에 등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셨기 때문이었다.
그 교회에 새로운 목사님이 부임하셨고, 그 교회를 도와야 한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일터와도 가깝고. 그래서 언제든지 취재를 해서 도울 수도 있고.
이 교회 담임목사님이 4월 부임했다. 이 내용과 이 교회 소식을 꾸준히 보도하며, 이 교회 교인들에게 힘이 돼 드렸다.
그러던 5월 이 교회에 등록을 해야겠다는 마음에 등록카드를 작성 중이었다.
그때 꿈에서 본 그 권사님이 등록을 막으셨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날 등록을 하지 못했고, 한 달 뒤 아이와 아내와 함께 등록할 수 있었다.
등록 뒤 예배시간에 교인들에게 인사를 했다. 교인들은 박수로 따뜻이 맞아주셨다. 감사했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셨다.
나는 교회에서 매번 새신자들이 아이와 아내와 함께 등록 인사를 하면 교인들이 박수로 맞아주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한 장로님이 교회에서 이런 간증을 하셨기 때문이었다.
“친구가 죽고 나서 이제 교회에 나왔다”고.
그러면서 자신에게 전도한 그 친구를 그리워하며 고마워하며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불신자 아내를 위해 참 많이 기도를 했다.
내가 교회에 간다고 성경 두 권이나 찢어버릴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먼 아내였다.
그런 아내와 함께 그 교회에 등록을 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이 교회 소식을 집중 보도했다.
꿈에서 본 부흥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이 교회에서 각종 훈련과 성경공부를 할 수 있었다.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와 훈련은 거의 다 받았다. 참 감사했다.
당시 너무나 말씀을 사모해 TV를 보면 기독교방송 밖에 보지 않았던 시기였다.
하나님은 또 은혜를 베풀어 16년간 언론인홀리클럽에서 성경공부에 참여토록 하셨다.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길이 막히면 또 다른 길을 열어 주시는 분이었다.
언론인홀리클럽이 출범된 뒤 포항성시화운동본부에서 성시화신문을 발간했다.
성시화신문은 월 1회 타블로이드판 24페이지로 1만부씩 제작했다.
교회와 학교, 아파트 단지에 배포했다.
근무시간 외 나머지 시간을 이용했다. 휴가도 내고, 그렇게 신문제작에 열심을 냈다.
이런 모습은 본 포항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님은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 죽는다”고 하셨다.
개의치 않았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대로 순종했다.
이 시기 주 5일제 근무제가 우리 일터를 비롯한 언론사에 막 도입됐다.
그래서 금요일과 토요일 이틀간 성시화신문을 배달할 수 있었다.
하루 16~17시간 신문을 돌렸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크리스천이 아닌 일반 취재기자였다면 신문배달을 하지 않을 것이다.
기자들은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 주말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산골교회를 보도한 신문을 실고 죽장면 상옥을 향했다.
여기 저기 신문을 돌리다 보니 그렇게 됐다.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산 아래는 통행금지를 알리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신문을 보며 기뻐할 교인들의 생각에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높디높은 산을 올랐다. 눈에 자동차 바퀴가 미끄러져 내리기도 했다. “복음을 실고 가는데 하나님이 지켜 주시겠지”라는 믿음이 있었다.
해당 교회에 도착했다.
눈 속 달빛에 빛나는 교회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돌아 올 때는 다른 길을 발견했다. 그 길로 내려 올 수 있었다.
모델이 되는 새벽기도, 전도잔치, 성경공부, 해외선교, 수련회, 부흥회 등을 집중 보도했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지역 교계에서 붐을 일으켰다.
목사님들이 “포항에서 목회하기가 좋다”고 하셨다.
특정 교회가 자주 나온다는 시기와 질투 때문인지 성시화신문 발간이 중단됐다.
예를 들어서 규모가 크고 프로그램이 많은 포항시청 소식과 규모가 작고 프로그램이 적은 시골 면사무소 소식을 같은 량, 같은 비중으로 보도할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성시화신문의 발간이 중단되자마자 하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국민일보 인터넷판을 열어 주셨다.
교계소식은 전국에서, 해외에서 볼 수 있게 됐다. 지역 교계 소식은 전국으로, 전 세계로 오히려 확산됐다. 감사했다.
국민일보 인터넷판이 막힐 때는 경북일보 등을 비롯해 지역 신문방송들을 열어주셨다. 교계소식이 봇물 터지듯 전해졌다. 다시 국민일보가 열리고 국내 기독교 언론사까지 가세해 지역 소식을 보도했다.
나중에는 굿뉴스울산도 가세했다. 이 언론의 가세로 언론인홀리클럽이 크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이 언론이 닫칠 때는 기다렸다는 듯이 코리아저널이 열렸다. 참 신기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출석하던 대형 교회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할 땐 집 가까운 중형교회에 출석토록 마음을 주셨다.
부흥이 있는 곳에 핍박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고 믿고 있다.
이 중형교회는 한 언론의 잘못된 보도로 이단시비에 휘말려 어려움을 겪는 교회였다.
이 교회 목사님은 성령충만한 목회자, 기도의 사람이었다.
이 교회 설교 등 교회소식이 여러 언론을 통해 수년간 매주, 자주 집중보도 됐다. 이 교회가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교회로 교계여론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 같은 보도는 한국 언론 사상 처음 있는 일로 여겨졌다.
역시 부흥하는 곳엔 핍박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나님은 또 다른 대형교회, 즉 대구경북의 최대교회에 출석토록 하셨다.
순종했다.
이 교회는 악한 사람의 사주로 인한 일부 교인들로 인해 어려움에 처한 교회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교회가 힘을 얻고 회복됨을 볼 수 있어 감사했다.
나는 이 교회의 성도님들이 이전에 보지 못한 부흥을 목도할 줄 믿고 있다. 그렇게 될 줄 믿으며, 감사하며 이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은 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셨다.
몇 년 전이었다.
일터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곤 했다.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나면 머리가 아프기도 했고, 몸이 가렵기도 했고, 허리가 아프기도 했다. 그래서 요즘엔 혼자 식사를 하고 있다.
직원들과 함께 식사를 한 뒤 허리가 아파 고생을 하던 때였다.
과거 꿈속에서 하나님이 허리를 고쳐 주신 기억이 떠올라
언제가 하나님이 고쳐주실 줄 믿고 있었다.
밤이 싫었다. 밤에는 허리가 더 아팠기 때문이었다.
퇴근 후 씻고 침대에 누웠다.
아직 잠들기 전이었다.
그런데 목 아래부위에서 후끈 후끈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 현상은 기도할 때, 은혜로운 말씀을 들을 때, 찬양을 할 때,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할 때 등 나타나고 있었다. 질병과는 차원이 다르다. 전광훈 목사님 등 성령충만한 목사님들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간증하셨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마음이 든다.
이 후끈거리는 현상이 등을 타고 허리까지 내려왔다.
처음으로 허리까지 내려왔다. (언제나 목 아래 부분만 후끈후끈했다.)
그때 “아, 하나님이 하시네”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후끈거리는 현상이 허리를 만지셨다. 수 초간 지속됐다.
허리의 고침을 받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걸었다.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거실로 나왔다. 역시 걸어도 뛰어도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다음날 일어나 그렇게 해도 역시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번도 허리가 아픈 적이 없었다.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우주와 우주 가운데 있는 동산도 봤다.
기이한 꿈을 통해서였다.
예수님은 어린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엄이 있었다.
에덴동산 같았다.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 좋았다.
그런 뒤 우주를 유영했다.
우주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진과 영상을 통해 본 그런 우주보다 아주 훨씬 아름답고 광활했다.
가슴 벅찼다. 너무도 선명하고 생동감이 넘쳐났다.
예수님이 우주 블랙홀로 생각되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들어가면 죽을 것 같았다.
순간 멈칫했지만, ‘죽으면 죽고’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블랙홀로 들어갔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따라오니까 사용한다”고 하셨다.
따라오지 않았다면 버렸다는 말로 들렸다.
(예수 따라 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는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아직도 그 꿈이 생생하게 다가오고 있다.
이런 꿈이, 환상이, 말씀이 그 많고 많은 모진 고난과 혹독한 핍박을 견디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도 있었다.
평소처럼 안방에서 잠을 잤다.
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잠자리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보니 누군가 내가 누운 자리 둘레에 검은 액체로 내 몸 주위로 길쭉한 원을 그려 놓았다. 뭘까 이상하기도 하고 궁금했다.
방문을 열었다. 화장실 앞에 놓인 테이블은 온데간데없고 큰 양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한참을 바라봤다. 양은 그대로 있었다.
이상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시 양을 보니 양은 온데간데없고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환상을 봤던 것이다.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알게 하시겠지”라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그 검은 액체를 깨끗이 닦아내고 잠자리에 들었다.
며칠 뒤 우연히 기독교TV를 보다 한 시골마을 권사님이 이런 간증을 하셨다.
권사님은 교회가 어려워 목사님의 사례비를 드리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도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거실에서 환상을 봤다고 한다. 거실에 큰 양 한 마리가 앉아 있더라고 하셨다. 몇 번이나 양이 앉아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PD에게 이야기를 했다. 그 권사님은 양이 예수님으로 생각됐다고 했다.
이 권사님의 간증을 들으며 “예수님이 나를 보호하셨구나, 지키셨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누군가 알 수 없는 주술 의식(해코지하기 위해 알 수 없는 검은 액체로 내 몸 주위에 원을 그려둠)을 했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수님이 지켜 보호하셨다는 마음에 감사했다.
나중에 한 분으로부터 내가 일어날 때 다른 방으로 피신해 있다가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내가 그동안 그 많은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과 ‘계명’ 때문이었다.
의로운 일을 하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 특히 크리스천들과 교회, 기독단체 등을 외면하지 않고 도왔다.
이로 인해 핍박을 받기도 했다.
하나님은 그동안 꿈을 통해, 환상을 통해 수많은 장면들을 보여주셨다.
문재인 대통령의 당선(당선 5년 전 두 차례) 등 그 장면들이 하루 후, 3일 후, 한 달 후, 6개월 후, 1년 후, 3년 후, 5년 후, 7년 후, 10년 후, 15년 후 등 그대로 됨을 볼 수 있었다.
풍성한 열매와 은혜를 경험했다.
반면 상상을 초월하는 방해와 핍박이 있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수 많은 일도 이어졌다.
그러나 주저앉을 수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때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일으켜 세우시고 예비해 두셨다.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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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사님은
이 길은 은혜의 길이고, 축복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라고 했다.
이 길은 십자가의 길이고, 형극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라고 했다.
간증은 보태지도 빼지도 않았다고 했다.
이 시간 생각나는 대로 적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난이 본격화 된 것은 언론인홀리클럽 출범 이후부터라고 했다.
본격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와 국내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사건사고들과 대형 사건사고들 발생 전후라고 했다.
그런 뒤 사탄은 별 볼일 없는 사람과 별 볼일 없는 단체는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지금 현실적인 눈으로 본다면 암울하고 참담할 것이라고 했다.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직전과 흡사하다는 마음이 들 것이라고 했다.
악한 사람이 배후에서 주요 기독단체나 기독기관들, 일부 목회자, 장로, 교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성경을 보더라도 기독역사를 보더라도
하나님이 사탄에 패했다는 말을 본 적이 있느냐, 들은 적이 있느냐고 했다.
하나님은 사탄에 패할 수 없다고 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했다.
소돔고모라가 멸망할 당시 롯의 사위들을 롯의 말을 농담으로 들었다고 했다.
당시 그 성에 살았던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롯과 두 딸 뿐이었다고 했다.
노아홍수시대도 그랬다고 했다.
사람들은 노아를 미쳤다고 했고 노아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그 시대 살아남은 사람은 노아 여덟 식구뿐이었다고 했다.
이스라엘 70년 포로생활 때에도 그랬다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고, 말씀대로 참혹하게 당했다고 했다.
당시 이스라엘(남유다)의 왕은 두 눈이 뽑힌 채로 적국에 끌려갔으며, 그곳에서 참혹한 최후를 맞았다고 했다. 이스라엘 거리는 피로 강을 이뤘다고 했다.
출애굽시대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200여만 명 중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다고 했다.
어쩜 구원 받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한다고 했다.
간증을 한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악한 사람이 있다면 더 이상 악한 일을 꾸며서도 행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지금이 회개할 때라고 했다.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철저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남은 삶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기쁨을 위해 살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오래 살아야 100년을 살겠지만,
그 후에는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이 땅의 100년은 찰라와 같다고 했다. 금방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 뒤 이 집사님은 이 같은 말씀을 덧붙였다.
하나님의 심판은 당신 백성들의 범죄에서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가자고 했다.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고 했다.
기도로 고비를 잘 넘기자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한반도 통일’이라는 선물을 주실 줄 믿고 있다고 했다.
통일한국은 마지막 시대 열방의 제사장 나라가 될 줄 믿고 있다고 했다.
통일한국은 열방을 이끄는 리더국가가 될 줄 믿고 있다고 했다.
하나님은 통일한국에 세계를 먹이 살릴 2가지의 신기술을 주실 줄 믿고 있다고 했다.
통일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에 한 국가가 될 것이며, 일본과 독일을 능가할 줄 믿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 한국기독사와 한국현대사의 한 복판을 통과하고 있다는 마음이 든다고 했다.
뒤돌아 보면 하나님의 은혜 뿐이라고 했다.
오직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길 원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