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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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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tusjye/221518978781
아침식사를 하기 전, 잠깐 숙소를 나선다.
전 날 들르려다
이정표만 보고 지나쳤던 곳이 인근에 있다.
6시 반이 막 지난 시간이다.
동녘에서 출발한 해가
현포항을 기웃거리고 있다.
전 날 신비를
햇살에 말끔히 씻기운 대풍감이 환하다.
카메라렌즈에 오류가 생긴 것 처럼
노인봉과 송곳봉이 겹쳐진 모양새다.
해안가 가로등 철주에 이정표가
언덕으로 올라가라고 안내한다.
밭에 돌무지가 보인다.
언뜻봐서는 밭에서 나온 돌을 쌓아놓은것 같다.
아마도 봉분이 없어서일게다.
일대에 40여기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데
발굴조사로 그 중 10기가 고분으로 지정되었다.
'울릉도 현포리 고분군'중 한 곳 이다
석실 바닥은
돌을 쌓아 평평하게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맨땅이 드러나 있다.
조성 당시 상부를 원형으로 쌓았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풍상에 무너지고 인위적 훼손으로 현재 모습으로 남았다.
바다로 늘어뜨린 머리,
몇 번을 봐도 소녀가 누워있는 형상이다.
현포항과 마을 사이로 연기가 올라간다.
현포항 방파제에 올라 걸어본다.
태양을 등진 노인봉이
과연 현포항을 검게 만들었다.
어쩌면 현포라는 명칭유래가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바다가 잠잠해서일까?
공암, 코끼리바위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현포항과 마을 전경이다.
오른쪽 끝 대풍감도 배경이 된다.
울릉도는 여객선 입항시간에 맞춰 움직인다.
11시가 지나면서 여객선이 도착하니
숙소도 그 전에는 침구 등 깨끗히 정리해야 할테고
렌트카도 세차와 정비를 마쳐야 할테다.
입항 다음 날 차량을 렌트하면서
시간을 오후 1시에 맞춰두었다.
오후 5시 50분 여객선을 예매했으니
차량이 없어도 혼자였다면
관광지 몇 곳을 더 돌아도 시간에 맞춰 도착할 수 있다.
그만큼 노선버스도 잘 되어있다.
하지만 옆지기와 아들은 그렇지 못하니
렌트시간을 일부러 늦추었던 것이다.
여유있게 아침식사를 하고
여장을 꾸려 9시 못미쳐 속소를 나선다.
태하리 들어가는 입구에 유채꽃이 만발하다.
유채밭 뒤로 현대식 비각이 서있고
그 밑에 바위가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울릉도 태하리 광서명 각석문'이다.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음각한 것으로
1890년 4월 울릉도 개척 후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농사를 짓고 살게 되었으며
그 해에 쥐가 끓어 흉년이 들자
울릉도 사정을 안 영의정이 구휼미를 보내서 흉년을 넘기게 되었으며
울릉도 개척민들이 은덕을 잊지 않기 위하여
당시 도장인 서경수와 오위장을 지낸 손주영이 새긴 것이다.
<출처 : www.ulleung.go.kr/tour>
육안으로 글자를 알아보기는 쉽지않다.
유채밭 너머 산으로 좁아지는 곳,
바다가 보이는 마을이 태하리다.
태하해안산책로를 연결하는 경관 다리다.
하지만 우선은 대풍감을 조망할 수 있는
울릉도등대, 향목전망대로 오를 예정이다.
주차를 하고 산길로 접어들기 전,
쉽게 오를 수 있는 '태하 향목 모노레일'터미널을 찾아간다.
물론 모노레일로 오를 생각은 아니고,
사전에 운행정지 중 인 것도 알고 있었지만
다녀간 흔적은 담고 싶었다.
태하에서 향목령을 잇는 304미터 레일에
20인승 2대가 동시 운행하며
분당 50미터 속도로 상부까지 6분 정도 소요된다.
매표소 앞에 고양이 세 마리가
사람이 없는 이유가 의아한지 목을 빼고있다.
사람이 앞에 있는데도 도망가지 않는 것이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에게 길들여진 모양이다.
모노레일이 출발하는 곳, 웅장한 바위 앞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올라간다.
밑에서 보면 가파른 절벽이 막아선 듯,
하지만 길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만든 길은
다소 경사가 있지만 넓직하다.
일부 구간은 모노레일과 같이 오른다.
양옆으로 소나무가 울창하다.
갈림길이 나타난다.
'향목옛길', 아마도 전 날
수토사길을 제대로 찾아왔다면 이곳을 거쳤으리라 생각하니
무척이나 아쉽다.
울릉도(태하)등대 방향으로 간다.
향목령, 정상부 모노레일 반환점이다.
개척당시 산등성이에
아름드리 향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옛날 석달 열흘을 태운 산불에
다 타버려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그 당시 향나무 타는 냄새가 강원도까지 넘어가
울릉도에 큰 산불이 난 것을 알았다 한다.
울릉도등대 가는 길이 완만하게 이어진다.
예전에 등대에서 사용하던 물품 등을
운송하던 레일로 추정된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이 빽빽하다.
갈림길이 나타난다.
우측 이정표에 소개된 방향이 흥미롭다.
'인간극장 출연 김두경가옥'
김두경가옥을 찾아가는 길,
멀리 통신탑이 보인다.
김두경가옥이다,
마당 밭가 노인 한 분이 계신다.
위쪽으로 길이 보이는데
잠깐이라도 다녀오고 싶은데 시간이 여의치 않다.
다시 등대를 찾아가는 길이다.
석달 열흘 인근 산등성이가 탔다는데
얼마나 오래 전 일이었을까?
수종이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아름드리 나무가 빽빽하다.
전망대와 등대가는 갈림길이다.
어느쪽으로 가도 괜찮다.
'울릉도항로표지관리소'다.
'울릉도등대', '태하등대'라고도 부른다.
유인등대로
등대올라가는 사무실은 일반인 통행을 제한하고 있다.
'전망대 없음'이라는 적색문구가 흥미롭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
개인적인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때문이리라.
등대 앞 넓은 정원을 가꾸어 놓았다.
울릉도 특산품 오징어 조형물이 있다.
표고 111미터, , 광파표지 18마일, 음파표지,
전파표지 100해리 시설을 갖추고 있다.
등대바로 앞, '향목전망대'다.
공중에 띄운 전망대 바닥 일부에는
격자로 된 그레이팅을 설치하여 공포를 체험한다.
대풍감이 온전한 모습을 보인다.
한국의 비경이라는 대풍감해안도 보인다.
옛날에는 이곳에 구멍을 뚫어 배를 매어두었는데
돛단배라 항해를 위해서는 바람이 불어야했다.
그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라 하여
'대풍령'으로 이름을 지었다.
'대풍감'이라고도 한다.
감(坎), 한자의 뜻이 구덩이, 험하다 등 이다.
이곳에서 보는 북면 해안절경이
월간지 '산'에서 뽑은 우리나라 10대 비경 중 한 곳이다.
이곳과 관련된 전설을 소개하자면,
대풍령 밑에는 시퍼런 바다가 출렁이고 있다.
이 곳에는 옛날에는 배가 많이 드나들었다.
작은 구멍뿐만이 아니고 큰 굴도 있었는데,
이 굴이 옛날에는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굴을 통하여 큰 도둑들이
이 곳의 보물을 많이 훔쳐갔다.
보다 못한 어떤 도인이
도술을 써서 이 굴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해무가 완전히 걷히지는 않았지만
동쪽 현포항 방향 해안 전망도 나쁘지않다.
노인봉, 송곳봉,
바다에 떠있는 암봉, 코끼리바위도 조망된다.
최대한 팔을 뻗어
배경에서 난간을 제거했다.
바닥을 투명 강화유리로 설치한 곳도 있다.
북면해안과 동쪽 방향을 파노라마로 담았다.
다시 출발했던 곳으로 내려온다.
이번에는 해안산책로를 찾아가는 길이다.
초입 계단을 오르기 전
해안가 암석에 굴이 있고 그 오른쪽 하단부 색깔이 짙은 갈색이다.
막상 들어가려는데 펜스로 막아 놓았다.
전혀 위험해보이지 않고 펜스가 낮아
잠깐만 보고 올 셈으로 들어선다.
이곳이 '태하리 황토굴'이다.
'굴의 규모는 높이 6미터, 폭 32미터, 길이 44미터다.
화산재 퇴적물이 굳어서 형성된 응회암이며,
붉은색을 띄는 이유는 암석이 풍화 변질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산화철 때문이다.'
태하리는 황토가 많이 나 '황토구미'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곳 황토를 나라에 상납하였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삼척영장을 이 섬에 순찰보냈는데
그 순찰 여부를 알기 위해서
이 곳의 황토와 향나무를 바치게 했다고도 한다.'
삼척의 어느 사또가 관기를 데리고 선유놀이를 갔다가
급작스러운 돌풍을 만나 이 울릉도에 표착하게 되었다.
그 당시 이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다.
준비된 식량이 있을리 만무한 이 곳에서
모두가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다.
이리저리 먹을 것을 구하려 헤매었으나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허기에 지쳐 있었는데, 그 중 누군가가 황토를 발견하고
궁한 나머지 입에 조금 넣어 씹어 보았더니 그런대로 먹을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흙을 먹고 모두가 연명을 했는데,
먹어 본 그 맛이 모두가 다르더라고 해서
이 곳을 가리켜 황토구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출처 : www.ulleung.go.kr/tour>
해안산책로를 가기위해서는
건물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가야하지만
황토굴에서 해안쪽 절벽면에 철난간이 놓여있다.
호기심 반, 막연한 믿음 반,
난간을 올라간다.
정상적인 접근방법인 교량 하부다.
역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통행하기엔
위험천만으로 보인다.
결국 해안가에 닿는 부분,
내려오려는 사람의 접근을 엉성하게 쇠사슬로 막아놓았다.
해안을 따라 편안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데크가 설치되어있다.
기암 절벽면을 둘러간다.
해안가 절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산책로가 길게 이어지고있다.
데크산책로 오른쪽으로 산으로 오르는 길이 보인다.
언덕에 보이던 정자를 찾아갈 요량으로 접어든다.
소나무가 빽빽하다.
안쪽 사람과 작물들에게는
방품림역할을 충분히 할 것 같다.
정자가 먼 바다를 향해 외롭게 서있다.
아래를 보니 산책로가 이어진다.
걸어왔던 산책로도 길게 이어져
바위를 돌아간다.
처음엔 9시 까지 반납을 독촉하는 행태가 괘씸해
최대한 계약된 시간에 반환할까 싶었지만
가능한 빠른 시간내에 렌트카를 반환하기로 한다.
잰걸음으로 등대와 전망대에 올랐다가
해안산책로까지 돌아보니 시간 소요가 제법 되었다.
10시 반에 가까우니
느긋하게 하루를 준비한 사람들이 깨어 움직이는지
일행으로 보이는 무리들이 찾아왔다.
태하마을 언덕에 용도를 알수없는
원형으로 돌로 쌓은 건축물이 보인다.
다음 목적지는 태하리 '성하신당',
맞은 편에 '울릉 수토역사 박물관'이 보인다.
인근에 있던 신당을 찾지 못하고
멀리 보이는 건물을 목적지로 도착해보니 사찰이다.
솔밭아래 겹처마 지붕을 인 건물이 보인다.
막상 찾아와보니 도로변이다.
'성하신당'이다.
울릉도 사람들이 배를 새로 만들어 바다에 띄울 때
반드시 와서 안전과 풍어를 빈다는 곳이다.
성하신당에 관한 전설이다.
조선 태종 때 김인우는 울릉도 안무사를 명받아
울릉도 거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기 위하여 병선 2척을 이끌고
이 곳 태하동에 도착했다.
관내 전역에 대한 순찰을 마치고 출항을 위해 잠을 자던 중
해신이 현몽하여 일행 중 동남동녀 2명을 이 섬에 남겨두고 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출항을 명령했다.
그러자 갑자기 풍파가 일더니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이었다.
안무사는 문득 전날 꿈이 떠올라 일행 중 동남동녀 2명을 불러
'내가 거처하던 곳에 필묵을 잊고왔으니 너희가 찾아오너라' 고 명하였다.
동남동녀가 숙영지를 향해 뛰어 숲으로 사라지자
순식간에 풍파가 가라앉고 순풍으로 변하였다.
안무사 일행은 급히 배를 출항시켜 먼 바다로 나아갔다.
몇 년 뒤 다시 울릉도 안무사의 명을 받고 태하리에 도착하여 수색을 했는데,
그 때 유숙하였던 곳에는 동남동녀가 꼭 껴안은 형상으로 백골화되어 있었다.
안무사는 동남동녀의 고혼을 달래고, 애도하기 위해
그 곳에다 사당을 지어 제사지내고 돌아갔다.
매년 음력 3월 1일에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며
풍어, 풍년을 기원하고, 처음 배를 띄울 땐
반드시 여기에서 제사를 올려 해상작업의 안전과 사업의 번창을 기원한다.
<출처 : www.ulleung.go.kr/tour/>
신당에 모셔진 동남동녀,
즉 남자와 여자 아이다.
바깥에는 거북이 입으로 물을 내뿜고 있다.
울릉도 주민들이 신성시하는 성하신당을 마지막으로
도로변에 주차해둔 차를 타고
사동항 인근에서 렌트카를 반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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