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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31일 일요일 설악산 둘째날
자차이용 : 사니조은 고인돌 님과
산행코스 : 장수대 – 대승령 – 대한민국봉 – 안산 – 12 선녀탕 – 남교리
산행거리 : 약 10 km 산행시간 : 약 8 시간
https://www.ramblr.com/web/mymap/trip/371711/2131675
거리 10.4 km
소요 시간 8h 11m 26s
이동 시간 6h 42m 43s
휴식 시간 1h 28m 43s
평균 속도 1.6 km/h
최고점 1,429 m
총 획득고도 731 m
난이도 보통
지난 밤에 고인돌 형님에게는 문자를 보내 놓았었다. 너무 지쳐서 우리는 한계령으로 가지 않고 장수대로 올라가서 대승령에서 기다리겠다고. 한계령에서 시작하여 대승령까지 오는데는 시간이 꽤 걸릴 테니 우리는 그 시간에 어디가서 아침을 해결할 요량으로 원통으로 나왔다. 조용한 소도시 원통에는 이른 새벽에도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된장국 백반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다시 장수대로 돌아왔다.
장수대 앞에 있는 고가(古家) 뒤쪽으로 멀리 주걱봉이 보인다.
우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차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주차공간이 없어 넓게 차지한 차량 운전사에게 부탁하여 자리를 확보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서두를 필요없이 천천히 대승폭포를 향해 산길을 오른다.
날씨는 쾌청하지만 공기가 어제만 못하다. 미세먼지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안경에 뿌연 김이 서린 것처럼 건너편 가리봉 능선이 희미하게 보인다. 장수대 탐방안내소에서부터 대승령까지 곳곳에 과거 조선시대 설악산을 찾았던 문인들의 글을 소개해 놓았다.
대승령으로 오르는 길에 뒤돌아본 가리봉과 주걱봉
대승폭포 - 수량이 아주 적다.
구사맹 (具思孟 1531-1604) : 한계산 (寒溪山)
이유원(李裕元 1818-1888 ) : 한계폭 367 언
금원 김씨 (錦園 金氏 1817- 미상) : 14세 소녀가 남장을 하고 홑몸으로 설악을 오르다.
이명한 (李明漢 1595-1645) : 한계폭포 옥상인에게 주다
김창협 (金昌協 1651-1708) : 폭포
홍세태 (洪世泰 1653-1725) : 삼연이 설악산 산수의 명승을 말하면서 이미 설악산 깊은 곳에 집을 마련했다는 말을 듣고 짓다.
김창흡 (金昌翕 1653-1722) : 한계폭포
이인상 (李麟祥 1710-1760) : 한계관폭
김시보 (金時保 1658-1734) : 대승폭포
조인영 (趙寅永 1782-1850) : 한계폭포
안석경 (安錫儆 1718-1774) : 대승폭포
정범조 (丁範祖 1723-1801) : 대승폭포
김창협 (金昌協 1651-1708) : 대승암에서 잠자며 (宿大昇庵)
조인영 (趙寅永 1782-1850) : 대승령
이들은 설악을 오르면서 대승폭포와 그 주변의 경관을 중국의 여산 폭포 또는 개경의 박연폭포와 비교하여 아름다움을 노래하였다. 이들의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 당시 설악산이라 함은 지금의 공룡능선이나 대청봉 등을 의미하기보다 인제에서 한계령으로 오르다 장수대에서 대승령으로 이어지는 설악산의 아주 작은 한 부분을 의미한 것 같다. 당시에는 길도 평이하지 않아 이나마 대승령까지 오른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대부분 이 곳에 암자를 짓고 사는 중들의 안내를 받아 유람한 것으로 보인다. 구사맹의 글에서 하인을 대동하고 말을 타고 암자에 이른 후 다시 중들이 메고 가는 가마를 타고 설악에 오르는 광경은 당시 권세가들의 유람하는 모습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대승암터 - 대승령 바로 아래에 암자가 있었다.
대승령 - 설악산 서북능선의 끝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귀때기청을 지나 중청과 대청으로 왼쪽으로 가면 12선녀탕 계곡으로 내려간다. 예전에는 이 고개를 넘어 영시암으로 가는 길이 있었나보다.
이들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금원 김씨라는 소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주의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부터 몸이 병약하여 부모는 일찍이 금원에게 글을 가르쳤다. 시를 짓는 소질이 뛰어나 뭇 사람의 칭찬을 받았다. 열 네살 때 금원은 금강산을 유람하고자 하는 뜻을 부모에게 알리지만 부모는 허락하지 않는다. 여자의 몸으로 그런 긴 여행을 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금원은 이에 굴하지 않고 남장을 하고 길을 나선다. 금강산을 보고 아름다운 시를 짓고도 성에 차지 않아 금원은 설악산까지 오른다. 이미 평번한 여자로서의 삶을 과감히 떨쳐버린 금원은 김덕기의 첩으로 들어갔다. 의주 부윤으로 부임한 김덕기를 따라 서도지방(황해도와 평안도)을 두루 여행하였다. 그녀는 1850년 자신이 평안도, 황해도, 충청도 및 한양 일대를 돌면서 느낀 것을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라는 글로 남겨놓았다.
지금 우리가 걷는 길은 나무 계단으로 안전하게 잘 닦여있으니 누구나 쉽게 대승령까지 오를 수 있겠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며칠씩 걸리는 여행 경비며 인력을 동원할 수 있으면서 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만이 이 설악산을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삼연 김 창흡이 수렴동 계곡에 오세암을 짓고 기거하면서 비로소 중 외에도 이런 문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들은 대승령을 넘어 영시암을 오갔을 것으로 보인다.
언뜻 생각하면 지금 장수대 탐방안내소가 있는 자리나 저 아래 한계사터쯤에서 말에서 내려 하룻밤 머문 후 대승폭포에 이르렀을 것이다. 대승폭포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천길 낭떨어지에서 떨어져 흩어지는 물줄기가 햇빛에 반사되어 무지개를 그려내는 신비로움을 볼 수 있겠다. 그런 다음 다시 지금 나무계단이 설치된 암벽을 등나무나 칡덩굴을 붙들고 올라 대승령 아래 대승암(大乘庵)에서 또 하룻밤을 묵는다. 어쩌면 대부분 이쯤에서 발길을 돌려 다시 내려갔을 것이다. 차림이 단촐하고 길을 걷는데 익숙한 젊은이들은 (이런 사람들은 직접 노동에 투입되어 산행을 할 여유가 없었겠지만) 다시 대승령을 넘어 영시암까지 하루만에 이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김창흡은 그의 저서 농암집(農巖集)에서 한계산 유산기인 동정기(東征記)를 남겼는데 산 아래 한계사에서 여장을 풀고 스님들이 메고 가는 남여(가마)를 타고 대승폭포 아래 도착하여 폭포구경을 하였다. 이 때 스님들은 폭포 상단에서 물을 막아 모았다가 한꺼번에 물을 흘려보내는 연출까지 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다시 가마를 타고 대승암에 도착했는데 너무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심하게 폐허가 되어 있었다. 이에 물청소를 하여 대충 치우고 잠자리를 마련하였다. 대승암 위에 있는 상승암(上乘庵)에 가면 곡연(曲淵)의 봉정(鳳頂)을 볼 수 있다는 말에 더 올라가려다가 수풀이 우거져 포기하였다.
김창흡은 그 다음날 더 나아가 만경대에 오른다. 발 아래는 까마득한 낭떨어지이고 뒤쪽은 바위벽인데 한 사람이 앉을만한 자리였다고 한다. 그 꼭대기에 서면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이 손바닥을 보는 듯하다. 그 사이에 운무가 흐르는 모습을 보고 아무리 감탄하여도 그 흥이 줄어들지 않았다고 썼다.
김창흡은 백담사 계곡에 있는 영시암을 창건한 장본인이다. 집안의 비극으로 세삼에 염증을 느껴 다시는 세상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서약으로 ‘영원히 떠난 화살처럼’ 영시암(永矢庵)을 짓고 그 곳에 칩거하기 전에도 이처럼 한계산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승령(大勝嶺 1210 m)
대승령으로 오르는 길은 돌 계단이다. 급할 것도 없기에 쉬어쉬엄 담소를 나누며 오르느데 고인돌 형님에게서 전화가 온다. 10시쯤이면 대승령에 도착할 것 같다고 한다. 우리는 9시쯤이면 도착할 테니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고 조금 올라가니 대승령(大勝嶺 1210 m) 정상이다. 이 곳에서 무작정 한 시간을 기다릴 것 없이 천천히 안산 갈림길까지 가기로 했다. 길 가에 피어있는 야생화를 탐방하면서 걷는다.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한 시간 걸려 도착하여 기다리는데 고인돌 형님의 행선이 늦어지는 모양이다.
대한민국봉에서 바라보는 아찔한 암봉과 건너편 가리봉 및 주걱봉 능선길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 어디에 이런 절경이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 김창흡이 얘기한 만경대가 혹시 이 대한민국봉이 아니었을까? 작년 가을에는 짙은 안개로 인해 조망이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오늘은 조금 흐릿하게나마 주변 경관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참꽃마리
매발톱나무
말발도리
산장대
은방울꽃
금강애기나리
붉은병꽃
대한민국봉에서 안산쪽으로 내려가면서 바위에 피어 있는 산솜다리와 난장이붓꽃 등 야생화를 살펴본다. 계절별로 귀한 꽃들이 피고 지는 야생화의 보고다. 탐방객들의 발길로 인한 훼손을 막기 위해 일부 구간을 철조망으로 막아놓았다. 비록 비탐길이지만 탐방길은 그 철조망과 나무숲 사이로 이어진다. 나무숲에는 미역줄나무 덩굴이 이리저리 엉켜 있어 진행을 더디게 한다.
숲길로 들어선 탐방로 옆으로는 박새 군락이 넓게 펼쳐져 있다. 꽃대가 높이 올라와 조만간 꽃이 소담스럽게 필 것 같다. 올 해는 비가 가끔씩 내려 수분을 충분히 공급한 모양이다. 이처럼 씩씩해보이는 박새도 날이 너무 가물거나 또 너무 습하면 마치 탄저병에 걸린 고추밭처럼 누렇게 녹아버린다. 박새 군락 송에 큰앵초 꽃이 많이 피어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귀한 대접을 받던, 아니 어제 오전만 해도 혹시 이 꽃을 보지 못할까 노심초사했었는데 이렇게 가는 곳마다 피어 있으니 자세히 살펴볼 마음이 없어졌다. 꽃도 때와 장소를 잘 가려서 피어나야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되어있다. 군데군데 연령초꽃도 많이 보이지만 이들도 큰앵초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찬 밥 신세다. 그래도 얼핏 보아 예쁜 자태를 갖추고 있는 꽃 몇 송이 사진에 담아둔다.
깊고 푸른 설악 - 멀리 공룡능선 끝자락 마등봉과 황철봉 능선이 보인다.
노랑제비꽃
풀솜대
자주솜대
꿩의다리아재비
금강애기나리
귀룽나무 꽃
두루미풀
대한민국봉에서 바라본 풍경 - 김창흡이 만경대라고 한 곳이 이 대한민국봉이 아니었을까?
대한민국봉에서 바라본 서북능선 - 멀리 귀때기청봉과 중청봉이 보이고 그 왼쪽으로 뻗은 공룡능선이 보인다.
대한민국봉
대한민국봉에서 마주 보이는 가리봉과 주걱봉
대한민국봉에서 바라본 안산(鞍山)
백작약 한 송이가 꽃잎을 다 떨구고 서 있다. 한창 때는 꽃 탐방꾼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을 것 같다. 꽃은 활짝 피어있을 때나 꽃이지 이렇게 지고 나면 그저 한 포기 풀이되고 만다.
안산(鞍山 1,430.4 m)
12시가 되어서야 고인돌 형님을 만났다. 산악회 버스로 함께 온 일행이 있어 걸음이 더뎌졌다 한다. 점심을 미쳐 준비하지 못한 우리에게 에너지 바를 하나씩 나눠준다. 아직 허기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데다 갈 길이 먼 것을 감안하여 에너지 바를 배낭에 넣어두었다. 날이 덥지만 물 한 병으로 제법 오래 버티고 있다.
안산(鞍山 1,430.4 m)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댕댕이나무 꽃을 확인한다. 재작년 내가 처음으로 이 곳에서 댕댕이나무 열매를 따 먹었었다. 작년에 처음으로 본 백리향 꽃이 피어 있을까 궁금했는데 아직 때가 이르다. 큰 비가 내려 땅이 물러져서 그런건지 아니면 자연적인 풍화작용으로 생긴건지 안산의 정상부위 바위가 많이 깨져있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전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산으로 넘어가는 길은 야생화의 보고(寶庫)다. 큰앵초 군락이 넓게 펼쳐져 있다.
난쟁이붓꽃도 많이 보인다.
흔한 양지꽃도 설악에 피면 특별해 보인다.
범꼬리
산작약
연령초
덩굴개별꽃
별사초
안산 정상에서 내려가 계곡으로 이어지는 안부(鞍部)에 도착하여 바위틈을 살펴본다. 산솜다리 꽃이 바위 틈에 피어있다. 공룡능선 노인봉에 비해 찬바람이 늦게까지 부는지 아직 키가 작고 솜털이 두텁게 덮여있다. 같은 산솜다리라 하더라도 서식지에 따라 조금씩 모양이나 색깔이 다를 수 있다고 한다.
고인돌 형님이 바위 아래 풀섶을 뒤적이더니 나를 부른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았네. 어쩌면 올 해 꽃을 피우지 않을지도 몰라.” 우리나라 남쪽에서는 아주 드물게 설악산에서 발견된다는 장백제비꽃이다. 잎 모양은 가장자리가 톱니모양으로 갈라져 있고 둥글다. 크기는 엄지손톱만한데 아직 꽃이 피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백두산에는 군락으로 자라고 있는데 꽃 이름 장백제비꽃의 ‘장백’은 백두산을 중국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안산에서 바라본 서북능선
안산 발 아래 고양이바위(왼쪽)와 치마바위 (오른쪽)
고인돌 형님 - 저 가리봉 주걱봉 가보자구 ~
안산에서 설악삼거리로 이어지는 능선길은 설악태극종주 길이다.
안산 정상
바위 틈 작은 풀밭에 털진달래처럼 생긴 관목이 덥수룩하게 자라고 있다. 꽃망울이 맺혀있는데 끝이 선홍빛으로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듯하다. 잎은 털진달래 잎처럼 거칠고 짧은 솜털로 덮여 있다. 무슨 나무인지 모르겠다. 고인돌 형님은 설악산 서북능선에서 목격된다는 들쭉나무일 수도 있다고 한다. 들쭉나무는 북한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진달래과 산앵도나무속 식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아직 꽃이 피지 않아 나무 종류를 적시할 수 없어 아쉽지만 앞으로 이 곳을 찾아올 때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장백제비꽃 - 귀한 분이 오실 때만 꽃을 피우려나보다.
양지꽃
산솜다리
털댕강나무 꽃봉오리
우리는 희미한 숲 길을 찾아 덤불을 헤치며 남교리로 내려가는 정식 탐방로로 내려왔다. 여기부터는 눈에 익은 길이다. 사니조은 님은 우리와 헤어져 다시 대승령을 거쳐 장수대로 하산하려던 계획을 바꿔 우리와 같이 남교리로 내려가기로 했다. 그늘진 계곡에 발을 담그고 간단하게 몸울 식혔다. 물이 하두 차가와서 잠시만 발을 담가도 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진다.
계곡에는 나도황새냉이 꽃이 가득하다. 이 계곡을 여러 번 지나다녔지만 이 꽃이 피어있는 것은 처음보는 것 같다. 주로 꽃이 지고 난 여름이나 가을에 지나다녔나보다.
음나무
는쟁이냉이
큰괭이밥
나도황새냉이 - 계곡이 온통 나도황새냉이 꽃으로 덮여 있다.
황철나무 - 버드나무과 사시나무속 낙엽 교목이다.
산악회 버스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걸음이 바빠진다. 이미 느린 걸음에 익숙해진 몸이지만 고인돌 형님과 같이 다니면 여유가 없어진다. 시간 개념없이 마냥 느긋하게 걷는 산행습관이 긴장모드로 변한다.
12선녀탕과 이어지는 크고 작은 폭포와 소(沼) 담(潭)을 감상하며 긴 계곡을 내려간다. 늦은 시간에도 간간이 거꾸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만난다. 오후 4시 30분 마침내 12선녀 계곡 탐방안내소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무리한다.
두문폭포 위의 담(潭)
복숭아탕
산에서 만났던 부부 산꾼을 남교리에서 다시 만났다. 그들도 장수대에 차를 두고 왔기에 사니조은 님과 택시(25,000 원)를 타고 차를 회수하러 간 사이 고인돌 형님과 나는 식당 뜰에 앉아 파전에 막걸리 그리고 콜라로 산행의 피로를 풀어본다.
이렇게 이틀간 소공원에서 시작하여 남교리까지 이어지는 설악의 주요 능선을 걸었다. 한계령 삼거리에서 대승령까지는 누락했지만 조만가 이 구간도 찾아올 예정이다. 설악은 높고 힘든 산이지만 언제나 그런 수고에 비해 더욱 많은 것을 안겨주는 것 같다.
서울로 오는 고속도로는 많은 나들이 차량으로 정체된다. 약 세 시간 걸려 복정역에 도착하여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첫댓글 ㅎ좋은날에 안산을 가셨네요
전에 빗속에 갔던 안산은 한치앞 조망도 없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