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춤의 칼을 별일 아닌 해프닝으로 넘기고 싶었지만 난 그리 담대한 사람은 못된다. 전자 모기향에, 모기향까지 피워 방이 오소리굴처럼 연기가 가득했음에도 밤새 모기가 윙윙거렸다. 오만가지 생각이 오가는 고통스런 밤이었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 4시 침대에 걸터 앉아 새벽을 맞았다. 모기가 알을 깐듯한 욕조와 악취, 온 몸의 모기 자국, 칼피티야에 대한 오만정이 다 떨어져 한시라도 이 동네를 뜨고 싶었다.
새벽 6시, 막내가 일어나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도저히 이 동네를 참을수가 없어. 지금 바로 짐싸서 네곰보로 떠나자> 이틀을 자기로 하고 숙박비를 흥정했는데, 하룻만에 떠난다니 태클을 건다. <벽마다 밤새 날 물어뜯은 모기의 핏자국이 흥건한걸 확인하고 말해라>고 쏘아부쳤다. 지난 밤은 나쁜 꿈을 꾼거다.
큰길로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저쪽에서 어젯밤 그 청년들이 걸어온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으나 환한 대낮인데 별일 있을라고... 좋은 생선과 새우가 있어 혹 필요하면 우리들한테 팔려고 새우 한마리를 가져왔단다. 어젯밤 게를 사겠다고 했을 때 쑥스러워하던 청년들이 아니다. 하룻밤 사이에 저렇게 변했다. 별 생각없이 한 우리들의 행동, 돈이 인간을 베려놨다.
자꾸 말을 걸며 길을 가로막아 식은땀이 난다. 뚝뚝이 한대가 오길래 일단 세웠다. 세상에나, 아는 애다. 어제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우리들 주위를 맴돌며 코코넛도 따주고, 자기 동네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했던 청년이다. 오늘 열시에 우리들 픽업해 자기 동네의 아름다운 바다에 데려가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떠나기로 맘먹고 그 애와의 약속이 조금 걸렸는데, 고맙게도 이렇게 일찍 나타나줬다. 그것도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우릴 구해줬다
어젯밤 일 때문에 지나치게 방어적이 된 우리들, 얘도 믿을 수 없다. <넌 우리에게 니 시간과 뚝뚝을 제공하는데, 우린 너한테 뭘 줬으면 좋겠냐? 머니?> 노란다. 그냥 친구가 되고 싶을 뿐이란다.
자기는 호텔에서 일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호텔 주인의 딸인 타니야의 친구로 놀러와 우릴 우연히 만난거라고, 보통 스리랑카 사람들하고는 급이 다름을 강조했던 애다. 스물셋인가 스물다섯인가 먹은 청년 레오폴트(? 서양이름이었는데 정확하진 않다)의 뚝뚝을 타고 종점에 가서 환전도 하고 아침밥도 먹고 나니 열시도 안됐는데, 네곰보행 버스는 오후 1시에나 있단다.
레오폴트는 온 동네의 모든 집을 자기집처럼 담장을 넘어 우리들을 바다로 안내한다. 가족들과 자주 놀러왔던 노을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곳이란다. 우나와투나처럼 인도양의 푸른 수평선이 보이는 아름다운 바다는 아니었지만 호수와 모래 사장, 바다가 적절하게 어우러진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었다.
모래 바닥에 누워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을 바라본다. 뭣에 홀려 그 아름다운 아라비아해를 박차고 북쪽으로 와서 이 고생인가 모르겠다. 한가로운 나와 달리 막내는 레오폴트의 말을 들어주느라 머리털이 빠질 지경이었다.
<난 타니야의 친구고, 돈이 중요한게 아니라 외국인 친구가 필요해 너희들을 안내하는 것이다>란 말만 고장난 테이프처럼 무한반복하는 레오폴트에게 막내가 질려버렸다.
<언니, 이 아이 얘기 더 듣다가는 완전 머리가 뽀개질것 같아. 되지도 않는 영어로 뜻도 통하지 않는 말을 계속 하는데, 아무래도 한국이 목표인것 같아. 일반 외국인 노동자와는 급이 다른 라이센스를 가진 전문 엔지니어라고...>
레오폴트의 목적은 한국의 일자리 주선, 그것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는 일이 아닌 전문 엔지니어였다. 자기는 돈은 충분히 벌고 있어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외국에서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당장 한국행 항공권도 끊을 돈이 없는 놈이 돈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란 말을 무한 반복한다. 결국은 돈이다. 그 놈의 돈이 문제다.
그러면서 덧붙인다. 자기가 한국에 가면 우리집에서 머물면 안되겠느냐고... 이런 넋빠진 놈이 있나. 쓰레기차 피할랬더니 똥차를 만난 격이다. 막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안돼. 니가 니 힘으로 한국에 오면 널 안내하거나 정착에 도움을 줄 수는 있어도 우리집에 재워줄 수는 없어. 한국에서는 부모님들도 자식들 집에 와서 자고 가려면 미리 양해를 구해야해. 이곳 스리랑카하고는 문화 자체가 달라. 니가 베푼 친절은 고맙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야.>
일개 여행자인 우리들이 자신들을 구원할 신인줄 아는 모양이다. 모든 한국 사람은 스리랑카 전기 기술자 하나 쯤은 가볍게 취직 자리를 알선하고 방을 제공할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 모양이다. 막내가 덧붙였다. <온갖 자격증과 영어 실력으로 무장한 한국의 젊은이들도 직장을 얻기가 힘들다. 너는 백만원쯤 하는 비행기값도 없고 영어도 안된다>
더위가 엄습한다. 정녕 이 땅을 떠날 때가 된거다. 바닷가 저쪽에서 타니야의 남편이 아들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점심 식사에 우릴 초대하고 싶다고 왔다. 고맙지만 우린 곧 네곰보로 떠날 것이라고, 너희 친절은 잊지 않겠다고 말하고 짐을 가질러 타니야의 집으로 함께 갔다.
영어가 되는 타니야의 남편에게 레오폴트의 부탁을 들어줄 수 없는 이유를 말했더니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풀이 죽는다. 우리들하고 말만 트면 한국으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리는줄 굳게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활발하게 웃고 통통 튀며 우릴 안내하던 그의 풀 죽은 모습이 측은했지만 실현 불가능한 희망을 던져놓고 가는 것보다는 그가 현실을 알아야한다. 허황된 자신의 꿈과 자신의 정확한 능력, 그리고 위치도... 길게 보면 그게 덜 잔인한 방법이다.
어색하고 불편하게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들은 헤어졌다. 하루에 한 번 뿐인 네곰보행 버스는 길고 지루하게 바다와 들판을 지났다. 여행자들이 가지 않는 자푸나 대신 갔던 푸탈람과 칼피티야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여행 또한 일상처럼 아름다운 것, 좋은 풍경만 보고 돌아오는것은 아니란 현실. 그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만나 다른 삶을 바라보며 내 의식을 확장 하는것.
삶처럼 여행 또한 하나 하나 슬퍼할 것도 기뻐할 것도 아닌 마라톤이라는걸... 여행의 시작점, 세번째로 온 네곰보는 익숙하고 편안했다. 현지인보다 더 많은 거리의 외국인들, 완벽하게 보장된 익명성, 시원한 맥주와 과일 그리고 음식. 인도에서 수입된 값싼 면제품의 옷들...
첫댓글 칼피티야에서
좋은 경험, 액땜(?)을 잘 하신것 같네요..
여행지에서 만나는 다양한 상황들이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의 의식을
넓게 하고 세상을 보는 안목을 깊게 하는 것 같아요
실감나는 여행 이야기였습니다 ^^
많이 고생스러웠고, 볼것도 없었지만 다녀오길 잘했단 생각이 들어요. 개방된 남쪽에서는 볼수 없었던 사람들의 삶이 너무 처참하고 가슴 아팠어요. 그나마 밤이어서 다행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