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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인종
* 인종의 치적.
묘청의 반란을 진압한 후, 서경의 분사제도를 없애는 등 서경세력과 민에 대한 탄압이 행해지고, 개경의 문신세력을 견제하는 서경세력은 완전히 제거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문벌귀족은 더욱 득세해 왕권마저 능멸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게 되었으며, 이들이 지배하던 문벌귀족사회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은 더욱 심화되게 됩니다.
묘청의 난은 개경의 문벌귀족과 서경출신 신진관료의 대립이라는 지배층 내부의 정권싸움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당시 문벌귀족정치에 대한 불만, 그리고 금나라에 대한 사대에 반대하는 민중의 호응으로 거의 1년에 걸친 항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민중항쟁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이 반란은 12세기 농민봉기의 서막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 되었으나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인종은 묘청의 난이 진압 되고 나서야 평온한 시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또한 개경 최대 문벌귀족이었던 김부식에게 난을 진압토록 하였으니, 이제 인종으로서는 더 이상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명분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종은 그 동안의 불안한 치세에 비해 훨씬 안정된 정국을 바탕으로 주, 현에 학교를 세우고 서적소(書籍所)를 설치하여 임금이 스스로 학문을 연마하는 모범을 보였으며, 김부식에게 명하여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하도록 합니다.
즉위 후 너무나 많은 고난을 겪은 탓인지 한창 일할 나이인 38세를 일기로 인종은 세상을 뜨고 맙니다. 서예에 능하였고 교육시설을 확대하고, 서적소 설치와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등 그의 업적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재위기간 내내 고려 문벌귀족사회의 모순이 터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하나도 개혁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귀족들의 특권만 늘어나 고려사회의 붕괴를 방조하는 커다란 과오을 남기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의 아들로 고려 제18대 임금이 되는 의종이 바로 무신정변이라는 화을 당하여 끝내 이의민의 손에 허리를 꺾여죽게 되는 처참한 비극을 당하게 되는데, 그 빌미를 인종이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사가들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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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1
*우여곡절 끝에 오른 옥좌.
1446년 인종이 숨을 거두자 20세의 의종(毅宗)이 왕위를 이어 받게 됩니다. 인종과 어머니 공예태후 임씨의 맏아들로 태어난 그는, 초명은 철(徹), 이름은 현(晛), 자는 일승(日升)으로 1143년(인종12)
태자(太子)가 되었습니다.
부왕 인종은 의종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못내 걱정을 떨쳐내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리보아도 임금이 될 만한 재목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공예왕후 또한 평소 이러한 점을 느끼고 있었던지 맏아들 현 대신에 둘째아들 대령군 왕경을 태자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태자도 이러한 부모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왕위에 오른 뒤에 동생 왕경을 이유 없이 미워하며 반목을 일삼게 됩니다.
어찌됐든 어머니 공예왕후 임씨의 거듭되는 청을 이기지 못한 인종이 이미 태자로 책봉된 현을 폐하고 왕경을 새로이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정습명이 이를 극구 반대하고 나섭니다. 오랜 기간 간관의 직무에 있으면서 바른말을 서슴치않는 정습명을 인종은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지라 그를 태자의 스승으로 삼아 보살피게 하였는데, 그러한 정습명이 태자를 변호하고 나서면서 자신이 끝까지 곁에서 살필 것임을 밝히자 인종은 마음을 바꾸어 태자 교체를 보류하게 됩니다.
실제로 인종은 임종 시에 태자를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마땅히 정습명의 말을 잘 듣도록 하여라.”하는유언을 남길 정도로 그를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정습명을 의종이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고 중용하였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겠지요.
의종은 그를 한림학사로 임명하고 추밀원주지사로 올려 중책을 맡깁니다.
의종 또한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상 제대로 된 정치를 펼쳐 보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의종이 즉위할 당시 고려왕실의 권위는 매우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여진족이 세력을 확정하면서 새로운 국가 금(金)나라를 세웠는데, 이 금나라가 인종 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 대륙의 지배세력으로 지위를 굳혔고, 자연스럽게 고려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과거 인종 때에 이자겸(李資謙)의 전횡과 반란 등으로 왕권이 실추된 이래, 이를 회복할 겨를도 없이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나 더욱 더 쇠약해졌고, 묘청의 난으로 인한 서경(西京)세력(勢力)의 몰락은 고려 왕실을 지원하던 유력한 세력기반이 상실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즉위 초부터 개경에 기반을 둔 문신세력들에게 심한 제약을 받았고, 왕위를 엿보는 반역 음모로 인해 항상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위 중 거동이 잦았던 것도 놀이를 좋아하는 천성 때문만이 아니라 당시의 절박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천성이 나약하고 섬세하긴 했으나 무능하지는 않았습니다. 격구(擊毬: 말을 타고 채로 공을 치던 경기)와 음률(音律)에 능했으며 시문(詩文)에도 탁월하였습니다. 당연히 이러한 성격과 재능은 어려운 시기의 군주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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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2
*방탕한 왕 왕권회복을 위한 노력
그러나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에 대한 인식은 분명하여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또 왕조를 중흥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1148년에 현릉(顯陵: 태조의 능), 창릉(昌陵: 세조의 능) 등을 참배했으며, 1154년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중창하고, 1158년에는 백주(白州: 현재 황해도 연백지역)에 별궁(別宮)을 창건해 그 명칭을 친히 중흥(重興)이라 한 것에서도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사안들입니다.
의종은 평소에 인정(人情)과 태평(太平) 등에 관한 생각과 글을 많이 남겼는데, 당시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왕조의 중흥과 좋은 정치의 실현을 염원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실제 정치면에 구체적인 성과로 나타나지는 못했고, 오히려 왕권능멸의 풍조와 신변의 위협이라는 시달림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부처나 여러 신(神)들에게 의존하거나 각처를 옮겨 다니며 유희와 잡다한 놀이로서 시름을 잊었고 문신들에게는 자기과시를 하였습니다.
사실 의종의 시대는 고려왕조를 통틀어 ‘평화 속의 사치’가 가장 두드러졌던 시대였습니다. 성종 이래 이어진 북방민족과의 갈등은 중국이 금-남송 체제로 정리되면서 잠잠해졌고, 개경파와 서경파의 대립도 선왕인 인종 때 묘청의 난이 진압되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이런 가운데 금나라와 남송의 사신과 무역상들이 어느 때보다 빈번히 고려를 드나들며 온갖 기화요초, 향료, 비단, 장신구 등 사치품들이 벽란도에서 개경으로 끊임없이 넘쳐흘렀습니다. 의종은 이런 사치품을 앞장서서 애용했을 뿐 아니라 궁궐을 새로 짓고 지방을 유람하며 잔치를 벌이는 일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민가를 헐어 대평정자를 짓고, 태자에게 현판을 쓰게 한 뒤 사방에 기화 요초를 심었다. 정자 남쪽에 못을 파고 관란정을, 북쪽에는 청자로 덮은 양아정을, 남쪽에는 댓잎으로 꾸민 양화정을 지었다 … 뭇 소인들이 왕의 비위를 맞추느라 민간의 진기한 물건은 닥치는 대로 가져다 바치게 했으므로, 길이 그런 물건을 올리는 대열로 메워지다시피 해 백성이 몹시 괴로워했다.” ([고려사] 의종 11년)
“한정과 김돈중이 절 북쪽 산의 초목이 죄다 베어져 벌거벗은 상황을 보고, 백성을 동원하여 소나무∙삼나무와 각종 기화요초를 빼곡히 심고 단을 쌓아 임금이 오르게 했다. 모두 단청으로 장식하고 기암괴석을 썼다 … 왕이 또한 물놀이를 보고자 내시 박희준 등이 배 50여 척을 모두 채색비단으로 장식하고는 물놀이를 벌였다. 한 사람이 귀신놀이를 하며 불 뿜기를 보여주던 중 잘못 옮겨 붙어 배 한 척이 불타 버리자, 왕이 손뼉를 치며 크게 웃었다.” ([고려사] 의종 19년)
이와 같은 기록을 보더라도 의종은 사치와 향락을 위해 백성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왕이 귀족들이 즐기는 사치품을 모아서 하사하고, 또 재미난 볼거리를 마련함으로써 귀족들의 환심을 사려는 뜻도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종 자신이 즐기려는 의도도 컸던 것 같으며, 이러느라 민생은 과도한 세금과 부역으로 허덕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의종의 행동에 먼저 제동을 걸고 나선 쪽은 무신이 아니라 문신이었습니다. 왕과 관료의 비리를 탄핵하는 임무를 맡은 대간들이 연일 궁궐 문 앞에 엎드려 사치를 자제하고 민생을 돌볼 것을 호소했고, 일부 대신들도 왕의 행동이 지나치다며 간했지만 의종은 듣는 체 마는 체 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문신을 견제하기 위해 두 친위세력을 크게 늘렸는데, 하나는 환관과 근시들이었고, 다른 하나는 무신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정식 관료조직과 동떨어져서 왕의 가까이에 머물며 시중과 호위를 맡는 집단이었으며, 특히 의종은 호위대인 견룡을 크게 늘리고 순검과 지유 역시 확대했습니다.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도 이때 발탁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사는 참 아이러니한 것이네요. 결국은 그들에 의해 쫓겨나고 죽임을 당하게 되고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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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3
* 왕권회복을 위한 노력
부왕 인종이 그러하였듯이 의종 역시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문벌 귀족으로부터 왕권을 되찾고자 무던히 애는 썼습니다.
기실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습명이었지만, 의종의 눈에 비친 그는 문벌 귀족의 앞자리에서 서서 자신의 왕권행사를 방해하는 인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부왕 인종의 유훈에 따라 정습명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 들이기는 하였으나, 어찌되었던지 간에 의종으로서는 정습명을 비롯한 문벌 귀족들을 멀리하면서 자신의 친위세력을 키워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종이 선택한 문벌 귀족의 퇴치와 왕권회복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친위세력이 미약하다보니 의종이 시도한 방법은 환관과 내시를 중심으로 친위세력 그리고 일부 무신들을 친위부대로 형성하는 것이었는데, 그만큼 그의 주위에는 그를 따르는 문신귀족이나 신료들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환관과 내시를 끌어들이며 의종이 행동에 나서자 문벌 귀족들은 다 같이 들고 일어나 왕의 처신을 비판하고 나섭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의종은 나 몰라라 하며 환관과 내시들에게 정사를 대신하게 하고, 어릴 때부터 즐겨왔던 격구경기나 관람하며 정사를 등한시하게 됩니다.
이처럼 어수선한 정국이 이어지자 지어사대가 문공유와 좌정언 정지원이 합문 밖으로 나가 사흘을 버티면서, 방만한 정치의 원인을 제공한 환관과 내시들에게 벌을 내릴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의종은 고집스레 버티다가 그들의 요구대로 7명의 환관과 내시들을 유배를 보내고 사태를 마무리합니다.
무관 관료들의 기세에 밀려 환관 몇 명을 귀양을 보내는 등 잠시 주춤하기는 하였으나, 의종은 다시 김존중과 정서를 측근으로 불러들이면서 친위세력을 키워나가게 됩니다. 김존중은 정습명이 잘못하고 있다고 밤낮으로 트집을 잡아온 인물이었습니다.
항상 맨 앞에 서서 임금을 꾸짖어 대는 정습명이 이제는 옛정을 떠나 미움이 더 앞서 있었던 의종은 그의 관직을 빼앗아 김존중에게 주어버립니다.
김존중이 자신의 직무를 대신하는 것을 보고 왕의 의도를 짐작한 정습명은 독약을 먹고 자결하여 버립니다.
이일로 인하여 문신 관료들이 위축된 모습을 보이자, 왕의 곁에는 아첨쟁이들이 몰려들었고 이에 왕은 더욱 방만해져 놀이만을 일삼았습니다.
한번은 왕이 귀법사에 갔다가 말을 달려 달령의 다원(茶園)까지 가보았는데, 시종하는 신하들이 아무도 따라오질 않았습니다.
의종은 홀로 기둥에 기대어 서서 측근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만약에 정습명이 살아 있다면 어찌 내가 이렇게 행동하게 되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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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4
* 유흥에 빠진 임금.
의종은 친위 세력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환관과 내시들을 측근으로 불러 정사를 팽개쳐든 채 유흥과 오락에 빠져 있다가, 간관들이 농성하면 요구를 들어 주는척하고, 다시 이와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의종의 처세였습니다.
유교적 정치 이념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불교를 지나치게 숭상하였으며, 영의를 불러 점을 치게 하는 등 온갖 폐단을 초래한 임금 의종입니다.
도대체 의종은 왜 이러한 처신을 한 것일까요. 놀기를 좋아하는 성격도 한 몫 거들기도 하였겠지만 이것이 의종의 한계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같습니다. 각종 미신을 조장하거나 놀이로 소일하며 문관들에게 자기 과시를 하는 것 외에는 미약한 권한을 가진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문신 관료들은 자신들이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려고 민생을 돌보는 것보다는 왕에게 아첨이나 하면서 왕의 주위를 맴도는 것이 그들의 일상이었습니다. 이처럼 왕에게 아첨이나 하는 간신배들만 그득하다보니, 왕이나 신하나 정사와 국방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작은 일에도 갑론을박하면서 궤변으로 세월을 보내는 문신들의 세상이었고, 반대로 나라를 지키는 무신들은 그 존재가치조차 의미가 없는 시대상황이 된 것입니다.
고려는 원래 문반과 무반의 양반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정치와 경제의 특권은 물론 군대의 지휘 통수권까지 문신들에게 내준 채 무신들은 상대적 박탈감과 소외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종 또한 문신들과 어울려 자주 주연을 배풀고 환관과 내시들을 중히 여기면서도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무신들에 대한 대우를 별도로 해 줄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흔히 의종과 문신들이 무신들을 지나치게 천대해서 무신의 난이 벌어졌다고 하지만, 원래는 도리어 왕권 강화를 위해 특별히 강화된 세력이 무신이었던 것이고, 의종은 재위 1년(1147년)에 정중부가 궁궐 문을 무단으로 출입한 일이 적발되어 처벌될 위기에 처했을 때도 이를 불문에 부치게 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운명의 날, 보현원에서 오병수박희를 열었던 까닭도 본래 무신의 노고를 위로하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1144년(인종22년) 섣달 그믐날 작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날 밤에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귀신을 쫓는 나례(儺禮)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임금의 측근 신하들과 호위 병사들도 어울려 즐겼는데, 내시 벼슬을 하던 김돈중이 정중부를 바라보다가 무엇이 못마땅하였는지 갑자기 촛불을 정중부의 얼굴에 들이대는 바람에 보기 좋게 기른 수염이 타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 무신들은 이제 한낱 내시들에게 조차 멸시당하는 신세로 전락하여 있었던 것입니다.
정중부는 “미친놈에게 수모를 당했다.”고 분기탱천하여 앞뒤를 가리지 않고 김돈중을 늘씬하게 패주며 욕을 퍼부었습니다.
김돈중의 아비인 김부식이 크게 화를 내며 임금에게 아뢰어 정중부를 고문하고자 하였는데, 임금은 정중부를 아끼는 터라 몰래 도망치게 하여 위기를 모면하게 해주었습니다.
정중부는 당시 39세의 장년으로 호위군의 하급 장교인 대정(隊正)이고, 김돈중은 새파란 젊은 문관이었습니다. 김부식의 아들인 김돈중이 과거시험에서 2등을 했는데, 임금이 김부식의 환심을 사려고 1등으로 올려주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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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5
* 마침내 터져버린 무신의 불만
기본적으로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무신의 처지에 불만이 가득한 무신들로서는 다른 생각이 드는 게 자연스러웠겠지요. 당시의 정치에 대한 백성의 불만이 커질대로 커져있는 점도 유리하다 여겨졌습니다.
여기에 의종 21년(1167년)에 일어난 ‘화살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는데, 왕의 행차 도중 좌승선 김돈중의 말이 우연히 어느 무사의 말과 충돌했고 여러마리의 말들도 같이 흥분하여 날뛰게 되자 그 와중에 누군가의 화살통에서 날아간 화살 한 대가 왕의 가마 옆에 떨어진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왕은 이를 암살 미수 사건으로 알고 충격에 빠졌고, 후환이 두려운 김돈중은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래서 화살을 날린 자를 찾느라 한동안 벌집 쑤시듯 했는데, 성과가 없자 왕의 호위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견룡, 순검, 지유들 중 14명을 귀양을 보내 버립니다.
이러한 조치는 무신들에게는 지금은 왕을 자기를 호위하는 우리를 보살펴준다고 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라는 불안감을 갖게 하였고, 여기에 그칠 줄 모르는 왕의 나들이에 호위하는 병력이 늘게 되자 병사들이 먹을 밥이나 잠을 잘 숙소가 모자라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불만이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쿠데타 일보 직전까지 다다르게 된 것입니다.
왕이 시도 때도 없이 나들이를 하면서 경치 좋은 곳에 이를 때마다 행차를 멈추고 가까이 총애하는 신하들과 술과 글에 취하여 떠날 줄을 모르니, 호송하던 장군과 군사들의 피곤은 그야말로 극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1170년 4월 신록이 한창 짙어질 무렵 임금이 화평재에 행차하였습니다. 호송군사들은 피곤함과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쓰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이때 정중부가 호위 총책임자로 있었는데 오줌이 마려워 밖으로 나왔을 때 중간 장교인 이의방과 이고가 뒤따라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문신들은 마음껏 취하고 배불리 먹으며 놀아대는데 우리 무신들은 이렇게 주리고 피곤한데도 계속 참아내야만 한다는 말입니까?”
세 사람은 임금이 교외에 있는 보현원에 행차할 때 거사하기로 의기투합을 하였습니다.
그해 8월, 임금이 보현원에 행차하려고 궁궐에서 나와 오문(五門)에 이르렀을 때, 임금은 말을 멈추고 술잔치를 벌리게 됩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며 문득 말했습니다.
“여기야 말로 참으로 근사한 장소로구나. 군사들 연습시킬 만한 곳이 여기보다 좋은 장소는 없을 것 같구나”
그는 수박시합을 명하였습니다. 사실 임금은 무신들의 불평을 알고 놀이를 시켜 후한 상을 내리려고 마음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늙은 대장군 이소응이 어느 젊은 군사와 맞잡고 경기를 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달아났습니다.
그때 문관인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오더니 이소응을 불러 세우고는 빰을 쳐서 뜰 아래로 떨어뜨려 버립니다.
임금과 여러 문신들은 이 모습을 보고 손뼉을 치며 웃었고, 한 무리의 다른 신하들은 이소응에게 욕을 해댔습니다. 정중부가 나서서 한뢰에게 소리쳤습니다.
“이소응이 비록 무관이지만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다지 욕을 심하게 하는가?”
임금은 정중부가 나서 강력하게 항의하자 그를 달래며 진정시켰으나, 그동안 불만에 쌓여있던 장군부터 병사까지 ‘더는 못 참겠다.’라는 마음이 끓어 넘치는 상황이 되어 버렸고, 그날 밤 마침내 무신들이 무지막지하게 칼을 휘둘러 대기 시작하니 드디어 무신들의 천하가 시작된 것입니다.
저녁 무렵 보현원에 이르렀을 때 이고와 이의방은 순검군에 명하여 보현원 문 안으로 들어오는 문관과 내시들을 닥치는 대로 쳐 죽입니다.
반군의 선발대는 궁궐에 들어와 숙직하는 벼슬아치들을 찾아내 닥치는 대로 죽여 버립니다.
뒤이어 이고와 이의방이 이끄는 순검군이 들이닥쳐 태자궁 등을 휩쓸어 버립니다.
정중부는 보현원을 샅샅히 다 뒤져서 낮에 대장군 이소응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한뢰를 마루 밑에서 찾아내 발밑에 깔고 분풀이를 해댑니다.
"장군, 사 사 살려 주시오." 한뢰가 다급하게 정중부에게 매달렸습니다.
“이놈, 한뢰야, 네가 그렇게 무신을 무시하고도 살아남을 줄 알았더냐? 여봐라, 뭣을 하는 게야. 문관은 씨를 남기지 말아라!"
병사들은 한뢰를 살아있는 상태에서 사지를 자르고 배를 갈라 처참하게 죽여 버립니다.
무신들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문신 50여명을 찾아내 죽여 버렸는데 계속되는 살상에 무신들의 칼날에는 붉은 피가 마를 겨를이 없었습니다.
의종은 벌벌 떨기만 하다가 정중부를 상장군에서 대장군으로 이고와 이의방을 중낭장으로 승진시켰으며, 나머지 무관들도 한 계급씩 승진시켜 무신집권을 공식 승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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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 6
- 왕이 신하의 손에 죽다.
살아남은 문신들은 숨을 죽이고 숨을 곳을 찾기에 급급하였으나 그래도 임금을 모시던 궁내 환관 몇명이 무신들의 반란에 대한 저항을 해보았으나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맙니다.
내시와 환관 10여명이 정중부 일당을 치려고 모의를 꾸미다가 잡혀 죽는 작은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정중부는 의종을 거제도로, 태자를 진도로 유배 보내고 의종의 동생을 새 임금(명종)으로 추대하니 무신들의 잔인한 쿠데타는 완벽하게 성공하게 됩니다.
이자겸이나 묘청의 반란 때보다도 더 무지막지한 살육이 자행되었으며, 특히 서로 전투를 벌인 것이 아니라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았던 문신들은 모두 찾아내 일방적으로 죽여 버렸는데, 죽은 벼슬아치의 수로 따지면 가장 큰 규모의 반란이었습니다.
사실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켰을 때는 성공을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문벌 귀족이 워낙 강한 데다 정변 자체가 치밀한 계획하에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게다가 힘있는 문신에게 들붙어서 이익을 챙겼던 일부 무신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이 터지자 예상 밖으로 군인들이 잘 움직여 주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신에 대한 차별이 워낙 심하다 보니, 군인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장교들이 많았고, 대부분 농민출신인 병사들은 상관 무신들 보다 문벌 귀족들에게 더 큰 불만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묘청의 서경천도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한 문벌 귀족들은 그전보다 훨씬 막강한 힘을 지니게 되었고, 그들은 땅을 늘리고 세금을 더 걷기 위해 백성들의 등에 빨대를 꼽아놓고 착취를 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막을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 탓에 고통을 짊어진 민중에게 무신의 난은 개혁을 이룰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시대적인 상황이 병사들이 문벌 귀족을 공격하는 데 적극적으로 앞장을 선 것입니다.
이 무렵 고통으로 얼룩진 민중의 목소리를 군인들이 대신 냈다고나 할까요?
결국 무신의 난이라기보다는 모든 고려군인의 난이었던 셈입니다.
왕의 주변을 맴돌며 비위를 맞추고 온갖 아첨을 일삼던 그 수많은 신하들이나 환관, 내시들, 변란이 발생한 초기에 그 누구 한사람도 왕을 보호하겠다고 나서거나 왕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이 없었으니 더욱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은 의종을 쫓아내고 의종의 아우인 익양공 호(皓)를 데려다가 왕위에 앉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야말로 명목상의 왕에 불과할 뿐 모든 권력은 무신들이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백년에 걸친 무신정권이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무신정권에 비판적인 우간의 김보당이 동계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1173년 이었습니다. 그는 정중부 이의방 등을 몰아내고 의종을 다시 세우고자 모의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순석과 유인준을 시켜 의종을 계림으로 옮겨오게 하고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북계의 군대를 풀어 이를 진압토록 하였는데, 이의민과 박존위가 함께 군대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김보당이 이끄는 반군세력을 완전히 진압하여 버립니다.
난을 평정한 이의민은 동년 10월 경신일에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가에서 의종에게 술을 권하고는 의종을 죽여 버립니다.
그것도 산 사람을 잔인하게 등뼈를 꺾어서. 그리고는 왕의 시체를 연못에 던져 버립니다.
권좌에서 쫓겨난 임금의 최후는 대개 비참하기 마련이지만, 의종의 죽음은 너무나 끔찍하고 비참하여, 동서고금을 통하여 그 전례를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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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1
- 무신정권이 세운 임금.
명종(明宗)의 이름은 왕호(王晧), 자는 지단(之旦), 원래 이름은 왕흔(王昕)입니다. 인종의 셋째 아들이자 선왕 의종(毅宗)의 친동생으로 1131년 인종9년 10월 경진일에 태어났습니다. 의종 2년에 익양후(翼陽侯)로 책봉되었으며, 1170년 9월 기묘일 거사가 성공했음을 확신한 정중부가 의종을 폐위시키고 나서, 군사들을 이끌고 의종의 동생 왕흔을 찾아가 왕위에 오를 것을 요청(말이 요청이지 실은 통보나 다름없는--- )합니다. 당시 왕흔은 40세로 세상사를 잘 판단 할 수 있는 나이였지만 약간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무튼 그는 무신들에 의해 선택되어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식을 갖게 됩니다.
명종은 즉위하자마자 곧 수문전(修文殿)에 나아가 정중부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이고(李高)를 대장군위위경(大將軍衛尉卿)으로, 이의방(李義方)을 대장군전중감(殿中監)으로 임명하는 등 자격과 서열을 무시하고 반란의 주체세력들이 원하는 대로 관직을 내려주었습니다. 뿐만이 아니고, 문관직과 무관직에 관계없이 정중부 일파가 바라는 대로 관직을 임명하였습니다.
형이자 선왕인 의종은 도참(圖讖)을 믿고 동생들을 멀리했습니다. 그런데 명종이 잠저에 있을 때 전첨 최여해가 신기한 꿈을 꾸었다며 찾아 온 적이 있었는데, 최여해가 들려준 꿈 내용이 명종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였습니다. 최여해가 꿈에서 명종에게 홀(忽, 신하가 임금을 만날 때 손에 쥐던 물건)을 주니 명종이 그것을 받아 가지고 용상으로 올라앉았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명종이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꿈이었지요.
“아예 다시는 말을 말아라. 이는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중차대한 일이니 임금의 귀에 들어가면 나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아무튼 신기하게도 최여해의 꿈이 맞아 떨어져 명종은 왕이 됩니다. 훗날 이의민을 극구 개경으로 입성토록 청한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무능력하고 우유부단하기 이를 데가 없는 인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무신의 핵심들은 명종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똑똑한 왕을 세우면 귀찮아지니까.
돌이켜보면 인종과 의종은 문벌 귀족들에게 빼앗긴 왕권을 되찾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인 바가 있었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염원하던 일이 무장 반란을 일으킨 무신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 또한 그들이 내세운 꼭두각시 왕이다 보니, 드넓은 궁궐에서 일없이 홀로 용상이나 지키는 처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전왕들은 왕권을 찾기 위해 스스로 노력을 하거나 문신들에게 과시라도 할 수 있었다지만, 명종은 그저 숨죽이며 무신들의 눈치나 살피며 살아가야 하는 삶만이 남아있었습니다. 권력을 장악하고 의종을 잔인하게 죽여 버리는 그들이고 보면, 도대체 어떤 구실을 가지고 자기 목숨을 거두어 가려는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하루하루였습니다.
이렇게 허수아비가 되어 버린 명종이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의 초상을 벽에 붙여놓고 벽상공신으로 삼아 눈치를 살피는 동안, 나라의 모든 크고 작은문제들은 무신들이 설치한 중방(重房)에서 결정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사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최고의 자리에 올라 단맛에 흠뻑 취해버린 그들은 서로 더 많은 것을 차지하려고 다툼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결국 욕심이 그들의 틈을 벌어지게 만들었고 모든 것을 잃게 만든 셈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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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2
*삼두정치, 이고의 죽음
정중부, 이의방, 이고 세 사람은 스스로 신하의 최대 명예인 벽상공신에 오르고, 장군직과 문관 고위직을 겸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되니 글자 그대로 “무인천하”가 열린 것입니다.
정중부는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보통 병졸이었다가 군공으로 차차 승진해 대장군(상장군이었다고도 함)까지 되어 있던 정중부는 이때 65세. 이의방, 이고보다는 상당히 연장자였던 것 같으며,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에 비해 신중하고 온건한 편이었습니다. 수박희 현장에서 곧바로 일을 벌이려던 이고를 말린 것도, “문신이란 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 버리자.”라는 주장을 억제한 것도 정중부였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 정변을 ‘정중부의 난’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이의방과 이고가 주역이고 정중부는 따라가는 입장이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거사를 처음 제의한 사람이 그들이었고, 쿠데타의 주력인 견룡을 이끌던 사람은 이의방이었으며, 정변 후 1년 뒤에는 이의방이 이고를 제거하고 사실상 일인자로 행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정중부의 신중함과 온건함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마냥 뒷전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우선 이고의 죽음 후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겠다고 하고는(그러자 이의방은 정중부의 집에 찾아가 “앞으로 아버지처럼 모시겠다.”라고 해서 은퇴를 철회시켰지만), 아들 정균과 함께 또 다른 거사를 준비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역시 권력에 대한 독점욕이 상당했습니다.
명종 3년(1173년)에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키고(이 때문에 유배되어 있던 의종은 결국 무신정권에 의해 살해된다.), 다시 이듬해에는 서경에서 서경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가 이어지자 이의방의 리더십에 대한 의심이7 불거지기 시작했고, 더욱이 이의방은 자신을 반대하는 승려들을 학살하고 절들을 불사르는가 하면, 하급 무인들의 처우를 개선하지 않는 등 원성을 많이 샀습니다.
한편 무신정변의 핵심 멤버로 정변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이고는 정변 후 대장군 위위경 겸 집주에 임명되었고, 벽상공신이 될 정도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였으나 같은 벽상공신들에 비해 자신은 얻은 것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지 정권 독단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은밀하게 이의방에 대한 거짓 제서(制書, 조서와 같은 말로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기 위해 만든 문서)를 꾸몄습니다.
이를 알아차린 이의방은 이고를 극도로 미워하였습니다. 이에 겁을 먹은 이고는 난을 일으키기로 마음을 먹게 됩니다. 그로부터 며칠후 태자에게 원복(元服, 관례 등에 어른 옷을 입히는 의식)을 가할 때 여정궁에서 열린 잔치에 이고도 참석하게 되었는데 승려들과 불량배들 그리고 몇몇 심복들로 하여금 소매 속에 칼을 품고 있다가 난을 일으키도록 계획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고의 노복이던 교위 김대용의 아들이 이고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자, 김대용은 다시 내시장군 채원과 함께 이의방 앞으로 달려가 모든 사실을 고변해 버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고에게 미운 털이 박혀 있던 이의방은 궁문 밖에서 철퇴를 휘둘러 이고를 쳐 죽여 버리고 나서 이고의 식솔들마저도 잔인하게 죽여 바립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이고를 없애는데 공을 세운 채원 또한 이의방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전날 이고와 함께 이의방을 비난 한 것이 탄로 난 까닭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차지한 자들은 또 다른 권력에 의해 숙정되거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는 교훈이자 사례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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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3
*승려들의 저항
명종시대에는 크고 작은 전란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시작을 알 린 것이 귀법사 승려들이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무신들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기 전까지만 해도 불교는 왕실은 물론이고 귀족들과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 강하게 밀착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려사회 전체가 불교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무신 정권에 의해 자신들의 기반이 무너져 내리자 불교 특히 교종 세력은 문신 귀족들과 결탁하여 무신정권에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그리하여 1172년 귀법사의 승려 백여 명이 실력행사에 들어가는데, 이들은 도성 북문으로 침입하여 선유승록 언선을 살해해 버립니다. 이에 이의방이 군사 천여 명을 데리고 나가 승려 수십 명을 죽여 버리자 겁에 질린 승려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이의방의 무자비한 진압에 분개한 승려들은 이튿날 다시 중광사, 홍오사, 귀법사, 흥화사 등 여러 절에서 2천여명이 몰려나와 성 동문 밖에 집결하였습니다.
이의방은 엄청난 수의 승려들을 보고는 성문을 닫아걸었습니다. 이에 기세가 오른 승려들이 성 밖의 민가에 불을 질렀는데 불길은 무섭게 타올라 숭인문까지 태워버립니다. 숭인문이 타면서 길이 뚫리자 돌진하여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하나 이의방이 수하들을 이끌고 승려 백여 명을 죽이며 성 밖으로 몰아내 버립니다. 숫자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고 훈련된 군사들과 경전이나 읽던 승려의 싸움은 게임이 안 되는 것이었지요. 이어서 모든 성문을 닫아 걸고 승려들의 출입을 일체 금지하고 한발 더 나아가 승려들의 봉기와 관련된 모든 절들을 불태워 버립니다.
이렇게 하여 승려들이 일으킨 난은 진압이 되고 말지만 잔인하고 무자비한 진압 때문에 이의방은 더더욱 민심으로부터 멀어져버립니다.
승려들의 봉기에 이어 1173년 8월 의종의 복위를 부르짖으며 김보당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게 되자, 의종은 이의민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문신들이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이의방은 눈도 하나 꿈쩍하지 않고 일어나는 반란들을 잘 막아 내었고, 자신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이의방의 몰락을 알리는 사건이 터졌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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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총의 반란
그러나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이의방의 몰락을 알리는 사건이 터졌으니 바로 서경유수 조위총이 1174년 일으킨 난이었습니다. 조위총은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 동계(東界: 함경도)와 북계(北界: 평안도)에 “개경의 중방(重房)에서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발했으니 각각 병마(兵馬)를 규합해 서경으로 모여라.”는 격문을 돌려 선동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절령(岊嶺, 또는 자비령으로 지금의 황해도 황주와 시흥 사이의 고개)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에 대해 개경(개성)의 조정에서는 평장사 윤인첨을 원수로 삼아 3군을 거느리고 서경(평양)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내시예부낭중(內侍禮部郎中) 최균을 동북로지휘사(東北路指揮使)로 삼아 여러 성을 찾아다니며 타이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절령에서 윤인첨이 이끄는 관군은 때마침 부는 폭풍과 폭설 때문에 반란군에게 대패하여 반란군이 개경까지 육박할 정도였습니다. 포위된 윤인첨은 싸워 죽고자 했으나 도지병마사 정균의 만류로 겨우 포위망을 뚫고 개경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절령에서 승리한 반란군이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이의방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반란군을 격파합니다. 그는 서경인 상서 윤인미, 대장군 김덕신, 장군 김석재 등을 비롯한 반군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목을 베어서 저자에 내걸었습니다.
이처럼 이의방의 군대는 승세를 타고 대동강까지 쫓아가 서경의 성 밖에 배수진을 치고 대치하지만, 때마침 닥친 혹독한 추위로 인하여 이의방의 군사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곧 철수하고 맙니다.
같은 해 11월 조정에서는 다시 윤인첨을 원수로, 두경승을 후군총관사로 삼아 서경을 총공격하게 하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출정 준비를 하던 이의방이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의 명을 받은 승려 종감에 의해 살해되는 돌발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의방이 죽자, 명종은 전중감 유응규와 급사중(給事中) 사정유를 조위총에게 보내 이의방의 일파가 제거되었음을 알리고 반란군의 거사 명분이 약해지기를 기대했지만, 조위총 군의 기세는 여전했습니다.
그러자 윤인첨은 조위총의 심복들이 있는 연주(漣州, 평남 개천)를 공격하면 서경이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연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황이 그다지 순조롭지 못하자, 명종은 사태의 마무리를 위하여 전중감 유응규와 급사중 사정유를 서경에 보내어 조서를 내려 타이르게 됩니다.
조위총이 항복하기를 기대하였으나 기대와는 달리 극렬하게 반발을 하자, 후군총관사 두경승은 연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다음해 6월에 이르러 윤인첨이 군사를 서경으로 돌려 성을 포위하고 지구전을 펼치게 됩니다.
이리하여 완전히 포위가 되어 주변의 성과 연락이 두절된 조위총은 금나라에 원병을 청하러 김존심과 조규를 비밀리에 파견합니다. 그러나 김존심이 중도에서 조규를 살해해 버리고 조정에 항복해 버리자, 조위총은 다시 서언(徐彦)을 금나라에 보내 정중부, 이의방의 의종 시해사건을 알리고,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원병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도리어 서언을 잡아 고려로 압송해 버립니다.
그 뒤 서경에서 밀고 당기는 공방전을 1년여 동안 되풀이하다가 1176년(명종 6) 6월에 이르러서 윤인첨은 서경의 통양문(通陽門)을, 두경승은 대동문(大東門)을 양면에서 공격해 들어가, 드디어 서경을 함락시키고 조위총을 사로잡아 목을 베고 그의 수하 10여 명을 처형함으로서 조위총의 반란은 22개월 만에 평정이 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위총이 죽은 뒤에도 서북민의 항거운동은 완전히 진정되질 않습니다. 서경이 함락될 때 도망한 장정(壯丁)들을 중심으로 1177년(명종 7)에 다시 봉기를 하지만 1년 6개월 만에 진압되고, 1179년(명종 9)에도 서북면지병마사 이부(李富)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봉기하는 등 서북민들은 조위총의 거병을 시작으로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였습니다.
조위총의 난은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이 뚜렷한 거병이었으나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던 점에서 주체적이지 못하였다는 점이 흠결이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위총의 난은 무신 집권기간에 각처에서 일어난 민란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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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5
*다시 바뀌는 무신정권의 주인.
이의방이 죽고 그 측근 세력들도 거의 정리가 되면서, 이제 모든 권력은 정중부에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는 문하시중이 되어 문관과 무관을 통털어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게는 되었으나, 이의방을 죽인 명분을 얻기 위해, 전에 이의방에게 살해된 의종의 국상을 반포하고 의종을 고려 제18대 왕으로 복귀 시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고려 정국은 다소 안정을 찾아 가게 됩니다.
정중부, 정균, 송유인 등은 의종이 건설했던 궁궐들을 하나씩 차지하여 자기 집으로 삼는 등 안하무인인 점도 있었으나, 대체로 온건한 정치를 펼쳤으며 왕실이나 문신들과도 화해하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종에게도 어느 정도의 권한을 보장해 주었고, 정변 이래 유명무실해져 있던 과거를 제대로 시행하여 한때 무신 일색이던 조정에 다시 문신들이 차츰씩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사실 정중부 시대에는 고위 무신들의 협의기구였던 중방(重房)이 사실상의 최고 권력기관이 되기는 했으나, 그런 가운데도 예전의 관제는 기본적으로 유지가 되고 있었으며, 이의방이나 정중부도 최고 무관으로서가 아니라 문관의 대표로서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일본의 무신정권인 바쿠후의 무사들은 무사들 사이의 주종관계에 따라 쇼군에서 하급 무사까지, 중앙에서 전국까지를 망라하는 철저한 위계조직을 갖고 있었던 반면, 고려의 무신정권은 하급 무인 및 지방과는 별다른 연계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기존의 체제에서 고위직만을 무신 출신으로 충원한 격이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맹점이 있어 권력행사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왕실 및 문신과 권력을 나눠 갖는 방식은 정권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또한 정중부는 불교계를 건드려 원성을 샀던 이의방과는 달리 승려들을 우대하여 환심을 사려 했습니다. 정중부는 정권을 안정시키려면 다시는 무신들이 딴마음을 품을 수 없도록 문관의 입지를 더욱 늘리고, 지방의 민심을 다독여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양계(평안도 지역을 북계 또는 서계라고 했으며, 함경도와 강원도 일부지역을 동계라 하여 이 두 지역을 합해 양계라고 했음)의 판관을 종전대로 문신이 맡도록 하고, 무관이면서 실제 직위가 없던 산관들이 문관이 차지하던 하급직을 빼앗으려는 시도를 차단했습니다. 그리고 명종과 의논하여 11명의 찰방사를 11도에 나눠 보내 백성을 착취한 탐관오리를 적발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천 명에 이르는 지방관들이 탄핵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문신 우대와 지방행정 개혁은 무신들의 또 다른 불만과 불안을 불러왔으며,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쿠데타가 일어나고 맙니다.
명종 9년(1179년) 9월, 청년 장교 경대승이 정중부∙ 정균 ∙송유인 등을 암살하고 정권을 잡게 됩니다. 경대승은 집권 직후 찰방사들의 감찰에 부정이 많았다는 이유로 그들이 한 탄핵을 모두 무효로 해 버립니다.
하지만 군부 중에서 정중부를 지지하는 세력의 반발을 겁낸 그는 중방을 무력화하고, 특수 무사집단인 도방(都房)을 만들어 자신을 호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경대승 역시 결국은 정중부의 문신 우대책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칼을 쥔 무신들에게 권력을 많이 주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스스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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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8
- 이의민의 독주.
경대승의 죽음은 무신들에게 짓눌린 삶을 살아온 명종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임금을 살해한 자라하여 경대승이 위협을 가하곤 하였기에막강한 이의민마저 개경을 떠, 나 경주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권력을 농단할 만한 무신들이 없는 틈에 왕권의 기틀을 다지고 이제라도 제대로 된 고려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명종은 이의민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폐위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개경으로 불러올리는 후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이의민은 경주 사람으로, 그의 부친 이선(善)은 소금과 채를 파는 것이 직업이었고 모친은 연일현(延日縣), 옥령사(玉靈寺)의 여종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천민 출신이었으나 경주를 뿌리로 하고 있었고 뛰어난 리더쉽으로 신라 재건을 부르짖으며 군사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스스로 욕심을 버리고 탐관오리를 쳐부수며 신라의 재건을 외치니 경주의 민심은 이의민 자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주위 심복들은 개경에 올라가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신라를 건설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니 출병하자고 성화를 해대지만, 이의민은 명종의 부름을 수락하고 개경에 입성하니 명종은 왕권회복의 기회를 스스로 차버린 꼴이었고, 이의민으로서는 호랑이 입에 저절로 날아 들어온 고기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아닐 터였습니다.
소금장수의 아들에 불과했던 이이민이 개경에 도착하니 그를 위해 잔칫상이 떡하게 차려져 있는게 아닌가.
독단과 부정부패 온갖 만행을 마음껏 저질러도 상관없는 절대 권력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힘 한번 안들이고 고려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의민은 쏟아져 들어오는 뇌물과 아첨과 아부를 일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입이 귀에 걸렸고, 권력의 달콤함에 푹 빠져 토지를 강탈하거나, 양가처녀를 납치 겁탈하거나, 폭행과 살인을 멋대로 하는 등 완벽한 군주 위의 존재 그 자체였습니다.
이러한 세월이 13년이나 흘러가는 동안, 그는 어느덧 “왕손은 12대에서 끝나고 다시 십팔자(⍏八子 ; 李)가 나온다.”는 말을 믿게 됩니다. 왕이 되겠다는 참람한 뜻을 가슴에 품게 된 것이지요. 이때부터 그는 집에다 사당을 차려놓고 경주 일대에서 널리 믿던 두두리란 나무귀신을 밤낮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1193년 경주와 초전(울산)에서 김사미, 효심 등이 신라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반란을 일으키자, 이의민은 토벌군에 파견된 아들 이지순을 통해 은밀히 이들과 연결해 이들을 은밀하게 지원해 주면서 이들이 버틸 수 있도록 시간을 끌며, 기회를 엿보아 반란을 일으켜 왕을 제거하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하는 계획을 은밀하게 시행해 나갑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토벌대에 파견된 아들 이지순이 김사미, 효심과 내통한 것이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나 정작 이지순은 처벌받지 않았고, 총사령관인 전존걸이 고민하다가 자결하고 마는 해프닝으로 끝나고 맙니다.
난이 진압된 후에도 이의민 일가는 변함없이 고려를 장악한 채 탐학을 자행하였습니다. 다른 아들 이지영과 이지광도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온갖 못된 짓들은 다 골라 했는데, 이 둘을 가리켜 쌍도자(雙刀子), 즉 쌍칼같이 흉폭한 아들이란 악명으로 불렀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하필이면 이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다짜고짜 뺏어가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고려사에는 워낙 기록이 간략하여 세부적인 정황을 알기 힘들긴 합니다만, 이지영이 최충수의 비둘기를 뺏었다는 기록과 이지영의 집에 최충수가 가서 비둘기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말투가 무례해서 이지영이 결박했다는 기록 등이 나옵니다.
무슨 비둘기였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당시 무신들이 쓰던 연락용 비둘기가 아니었나 추측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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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9
- 최씨의 손아귀에 들어간 고려.
아무튼 이 비둘기 사건이 발단이 되어 최충수와 그의 형 최충헌이 이의민을 처단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고, 이의민은 미타산의 별장에 머물고 있던 중
최충헌 형제의 습격을 받아 1196년 4월에 비참하게 살해되고 맙니다. 기록에 의하면 최충수가 먼저 말을 타고 있는 그를 급습하여 칼을 휘둘렀으나 빗나갔는데 바로 최충헌이 칼을 휘두르면서 덤벼들어 말에서 떨어뜨린 다음, 목을 베어 버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의민을 제거한 최충헌은 이의민 3대 일가를 부하들을 시켜 모조리 참살해 버립니다.
이것을 단순히 비둘기 한 마리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최씨들 역시 음서로 벼슬을 할 만큼 권위가 있는 가문이었는데, 이들의 재산을 이의민 일가가 함부로 뺏어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의민 일족이 얼마나 앞뒤 안 가리고 다녔는지 짐작이 가능한 일이겠습니다.
또한 이의민은 본래 천민이었는데, 천민출신들이 귀족출신 무장들을 그렇게 만만하게 보고 다녔으니 귀족출신들의 불만이 팽배한 상태였던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최충수가 이지영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도 중대한 시사점으로 비둘기는 이의민과 그 일족을 제거하게 만드는 구실이었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고려사에 실린 이의민 열전과 최충헌 열전을 보면 이 사건이 일어난 그날 밤에 최충수가 최충헌을 찾아가 이의민을 제거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바로 얼마 뒤에 이의민 일파가 제거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일찍부터 이의민을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해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신들이 나라를 장악한 의종 임금 시대 이래로 고려 왕실의 위엄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백성의 삶은 무너져 내렸으며 힘이 곧 정의가 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힘이 있고 어느 정도 지략만 갖추고 있으면 언제고 나라를 통째로 삼킬 수 있는 상황이다 보니 야욕을 가슴에 품은 자들이 많았고, 그래서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웠습니다.
최충헌이 기다리던 때가 오지 않았음에도 거사를 단행한 것은 그들의 모의가 발각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의민이 죽고 최충헌에게 반기를
들었던 자들 역시 모두 정리가 끝나자 고려의 권력은 자연스레 최충헌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고, 그 누구도 최충헌에게 대항할 수 있는 자는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라 하지만, 그래도 최충헌은 자신이 성공시킨 거사에 대한 명분을 정당화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명종 앞으로 나아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습니다.
“적신 이의민이 과거 임금을 시해하는 죄를 저지르고 백성들에게 잔학한 피해를 끼쳤으며 왕위를 엿보기까지 했습니다. 신들이 오랫동안 그의 소행을 혐오해 오던 끝에 나라를 위해서 그를 토벌했습니다. 다만 일이 누설될까 우려한 나머지 감히 먼저 아뢰지 못하였으니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실권 없는 왕이지만 28년을 왕좌에 있으면서 무력의 힘으로 나라를 지배하는 무신들의 틈바구니에서 숨죽인 세월을 살아온 명종은 이번에도 최충헌이 무었을 원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최충헌의 거사가 나라를 위한 충정의 발로였음을 인정하며 명분을 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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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10
- 봉사십조(封事十條)와 명종의 죽음.
명종으로부터 거사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최충헌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이번 거사의 정당성을 대내외에 보다 확고히 인식시키기 위해 “봉사십조" 를 명종에게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조는 왕에게 정전(正殿: 조회를 하던 궁전. 즉 延慶宮을 말함)으로 환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1171년(명종 1)에 연경궁(延慶宮)이 불에 타자 수창궁(壽昌宮)으로 옮겼는데, 연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복구가 불길하다는 설을 믿고 환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삼소궁(三蘇宮)을 경영하면서 국력만 소모하고 있었으므로, 최충헌의 이러한 요구는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제2조는 필요 이상의 관원, 즉 용관(冗官)을 도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무신정권 성립 후 무신들의 압력으로 양부(兩府: 宰樞) 이하 여러 관직의 인원을 늘리어 인사행정의 난맥상을 드러냈었는데 이를 시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말로는 작은 정부.
제3조는 토지의 점유를 시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권세를 잡은 무신들이 대토지를 점유했는데, 주(州)에서 군(郡)에 걸치고 산천(山川)으로 경계를 삼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토지제도가 붕괴되고 민생고와 국가의 재정난이 심각하였습니다.
제4조는 조부(租賦)를 공평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치기강이 문란했던 무신정권 초기에 중앙권력을 배경으로 한 지방관의 탐학과 횡포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사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먼저 세금과 부역을 공평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5조는 왕실에 공상(供上)을 금지하라는 것이다. 당시 지방을 시찰하는 사신들이 왕에게 바친다는 구실로 재물을 수탈하여 역(驛: 또는 驛傳)으로 운반해 사복을 채우는 자가 많아 폐단이 컸었습니다.
제6조는 승려를 단속하고, 왕실의 고리대업을 금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승려들이 궁중을 출입해 왕을 현혹시키거나, 무신정권에 도전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최충헌으로서 그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였겠지요. 또 왕실을 비롯해 귀족, 사원들이 민간을 대상으로 고리대업을 행하여 폐단이 컸던 것입니다.
제7조는 청렴한 주·군(州郡)의 관리를 등용하라는 것이엇습니다. 탐학과 횡포를 일삼던 지방관 아래의 향리들 또한 지방관을 믿고 횡포를 자행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은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렴한 향리를 등용하고 썩어빠진 향리를 물리치라는 청은 너무나 당연하였습니다.
제8조는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사치를 금하고 검소, 절약을 숭상케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거대한 저택을 경영하고, 화려한 복장에 귀중한 보배를 장식하던 귀족들의 사치풍조에 쐐기를 박은 것은 시의에 적합하다 하겠습니다.
제9조는 비보사찰(裨補寺刹: 나라의 운명을 돕는다는 설에 의해 세워진 사찰) 이외의 사찰을 없애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왕실·귀족들은 원당(願堂)이라 하여 사원을 남설하였고, 승려는 승려대로 사원을 남설하여 폐단이 컸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최충헌에게 불교를 억압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이 엿보입니다.
제10조는 관리들이 아부함은 물론, 언론을 맡은 성대(省臺)의 관리까지도 아부를 한다고 지적하고, 인물을 가리어 등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상의 내용은 시의에 적절한 것이었고 폐정을 시정하려는 충정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최충헌은 왕의 측근을 지키는 50여명을 추방하고 나서 독재정치의 발판을 마련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명종이 봉사십조를 지키지 않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1197년 66세나 된 당시로서는 고령에 고령의 명종을 협박하여 단신으로 향성문을 나서게 하여 창락궁에 감금해버리고 태자 도(徒)는 강화도로 추방해 버립니다. 그리고는 명종의 아우 평량공(平凉公) 민(旼)을 새로운 왕(신종)으로 세우고 그의 아들 연(淵)을 태자로 삼습니다.
창락궁에 갇힌 명종은 1202년(신종5) 9월에 이질에 걸렸는데 신종이 의원과 약을 보내려 하였으나 본인은 28년간이나 왕위에 있었고 나이가 72세 이니 어찌 더 살기를 바라겠느냐고 하며 거절하고 결국 11월 무오일에 운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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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1
- 신종(神宗)의 등극
명종에게는 무신들을 일거에 제거하고 왕권을 다시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흥과 일신의 안일에 사로 잡혀서, 자신의 친형인 의종의 허리를 꺾어 참혹하게 죽인 이의민에게 오히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어주고 그의 눈치나 보면서 살다가 결국은 또 다른 무력에 의해 비참한 생을 살다가 마감하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명종을 쫓아낸 최충수 일당은 누구를 왕으로 내세울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서로 엇갈렸는데, 동생 최충수는 “사공(司空) 왕진(王縝)은 경전과 사서에 널리 통달하고 총명하며 도량이 있으니, 그를 왕으로 옹립한다면 국가의 중흥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고 사촌인 진(縝)을 왕을 시키자고 하였는데, 이는 최충수가 왕진의 여종을 총애한 나머지 왕진을 왕으로 세우고자 한데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충헌은, “평량공(平凉公) 왕민(王旼)은 임금의 친동생이며 지략이 깊고 도량이 넓어서 제왕의 국량을 가지고 있다. 또 그의 아들 왕연(王淵)도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니 태자로 삼을 만하다.”고 민(旼)을 왕을 시키자고 주장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박진재가 “왕진과 왕민은 둘 다 임금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금나라에서 왕진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므로, 만약 왕진을 옹립한다면 저들이 반드시 왕위를 찬탈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니 왕민을 옹립하는 것이 낫습니다. 옛날 의종의 경우처럼 동생으로 뒤를 잇게 한 것이라고 보고한다면 후환이 없을 것입니다.” 하여 왕민을 옹립하기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들끼리 마음대로 왕을 정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1197년 9월 명종의 동모제(同母弟)인 민(旼)을 왕으로 내세우니 그가 바로 고려 20대왕인 신종입니다. 이름은 왕탁(王晫)으로 원래 이름은 왕민(王旼)이었으며 자는 지화(至華)였습니다. 신종은 1197년 10월에 이름을 탁으로 고쳤는데, 이는 금나라 임금의 이름과 같아 탁으로 개명을 한 것인데, 이 때문에 왕의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탁자 성을 가진 고려의 백성들은 외가의 성을 따르게 되었고, 본가와 외가의 성이 같을 경우에는 친조모나 외조모의 성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성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인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명종의 친동생인 신종은 인종 22년 갑자년 7월 경신에 태어났고, 장성한 후 평량공(平凉公)으로 책봉되었다가 명종 27년 9월 계해일에 54세의 나이로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이 군왕이지 신하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비위나 맞추어 주어야하는 왕 신종은 6년4개월여의 재위 기간 동안 힘과 권위를 잃은 왕의 비애를 통감하며 한숨으로 오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눈 한번 꿈쩍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왕을 폐위시킬 수 있었던 최충헌 일파는 더 이상 신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궁궐을 손바닥 위의 공깃돌처럼 임금을 마음대로 움직였습니다. 최충헌 일파가 무언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억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면 그뿐인 왕,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그들이 쥐고 있기에 앉으나 서나 가시 방석이었고, 행여 그들의 뜻에 거슬려 해코지나 당하지 않을까 가슴을 조이는 나날이었습니다.
상황이 그러하니 왕권의 회복을 위한 노력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왕실의 권위와 성스러움을 내팽개친 채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급급할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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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2
- 권력의 분점에는 항상 분쟁이 따르기 마련.
욕심이 욕심을 부른다는 말이야 말로 동서고금에 두루 통용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형과 함께 거사를 성공시켜 막강한 권력을 거머쥐고, 왕으로부터 “수성제난공신(輸誠濟亂功臣)·삼한정광중대부(三韓正匡中大夫)·응양군대장군(鷹揚軍大將軍)·위위경지도성사(衛尉卿知都省事)·주국(柱國)이라는 길고도 긴 벼슬의 주인이 된 최충수지만, 그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더 큰 것을 쟁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 합니다.
애초 태자는 창화백(昌化伯) 왕우(王祐)의 딸을 처로 맞아들였는데, 태자위에 오르자 최충수가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왕에게 강청을 하니 왕은 몹시 불쾌해 했습니다. 최충수가 부러 내인(內人)더러, “주상께서 이미 태자비를 내보내시지 않았는가?” 하고 떠보자 내인이 그 말을 왕에게 알렸고 왕도 어쩔 수 없이 태자비를 내보내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쫓겨나게 된 태자비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오열하자 왕후(王后)도 눈물을 흘렸고, 궁중의 모든 사람이 다 울었다 합니다.
태자비가 마침내 평민의 옷차림으로 궁궐 밖으로 나가자 최충수는 곧바로 혼례날을 정하고 장인(匠人)들을 불러 모아 혼례에 쓸 물품들을 요란스레 준비합니다. 최충헌이 그 소문을 듣자 술을 준비해 최충수의 집으로 가서 말없이 함께 마시다가 술이 취하자, “들리는 소문에 자네가 동궁에 딸을 들이려 한다던데 정말 그러한가?” 하고 묻자, 최충수가 그러하다고 하자 최충헌이 그를 타일렀습니다.
“지금 우리 형제의 권세가 한 나라를 휘어잡고 있으나 가계가 본래 한미(寒微)하니 만약 딸을 동궁의 배필로 삼는다면 비난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하물며 부부의 사이는 은혜와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법인데 태자가 비와 여러 해 동안 살다가 하루아침에 이별하게 되니 사람의 인정상 어떻겠는가? 옛말에, 앞 수레가 넘어지면 뒷 수레가 그것을 보고 경계로 삼는다고 했는데 과거 이의방(李義方)이 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았다가 결국 남의 손에 죽었네. 지금 그 패망한 전철을 밟는 것이 옳은 일인가?”
최충수가 천정을 쳐다보며 크게 한숨을 쉬다가 한참 뒤에, “형님의 말씀이 옳으니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며 결국 없던 일로 하고 장인들도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다시 생각을 고쳐먹고서, “대장부가 일을 행하려면 스스로 단안을 내려야 한다.”고 호언하고는, 다시 장인들을 불러 모아 예전처럼 혼수 물품을 만들라고 다그쳤습니다.
그 모친이, “네가 형의 말을 따르기에 내가 정말 기뻤는데 왜 다시 이런 짓을 벌이는가?” 하고 말리자, 최충수가 버럭 성을 내며 아낙네가 알 바가 아니라고 하면서 손으로 밀쳐 땅에 쓰러뜨려버렸습니다.
최충헌이 이 소식을 듣더니, “불효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어머니를 이처럼 욕을 보였으니, 하물며 나에게는 어떻게 하겠는가? 말로는 도저히 설득시킬 수가 없으니 내일 아침에 나의 수하들을 시켜 광화문(廣化門)에서 기다리게 하였다가 조카딸을 궁중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겠다.”고 했습니다.
최충수의 간자가 최충헌의 말을 그대로 최충수에게 알리자, 최충수도 자기 수하들에게, “누구도 내가 행동하는 것을 두고 감히 왈가왈부 못하는데, 형이 유독 가로막고 나서는 것은 자신의 수하가 많음을 믿기 때문이다.
내일 새벽에 내가 그 일당들을 소탕할 것이니 너희들도 힘을 합해라.”고 지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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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3
- 형제의 충돌.
동생 충수가 다음날 새벽에 자신의 수하들을 치러 온다는 말이 최충헌에게 들어가자 최충헌은 수하인 박진재, 김약진, 노석숭을 불러 경위를 설명하니, 최충헌의 외종질인 박진재가 “공의 형제는 두 분 다 제 외삼촌이니 누구를 가까이 하고 누구를 멀리하겠습니까? 그러나 국가의 안위가 바로 이 일에 달렸으니, 동생을 도와서 역적이 되는 것보다는 형을 도와 순리대로 행동하는 것이 옳습니다. 또한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멸하는 법이라고 했으니 저는 당연히 김약진, 노석숭 등과 함께 각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돕겠습니다.”하고 최충헌의 편에 서겠다고 하자 최충헌이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자정 무렵에 최충헌이 군사 천 여 명을 거느리고 고달고개를 넘어 광화문(廣化門)까지 와서 왕에게 반란사실을 고하자, 왕이 크게 놀라서 즉시 성문을 열게 하여 이들을 맞아들이고는 구정(毬庭)에 진을 치게 하는 한편 무기고의 병장기를 내어 금군(禁軍)에게 나누어주고 대비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각 위(衛)의 장군들도 군사를 거느리고 앞을 다투어 궁궐에 도착하니, 최충수가 이 소식을 듣자 겁을 집어먹고 수하들에게, “동생이 형을 치는 것은 윤리에 어긋난 짓이다.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구정으로 들어가서 형을 만나 뵙고 용서를 빌고자 하니 너희들은 각각 도망하여 숨도록 하라.”고 수하들에게 해산을 명합니다.
그러나 장군 오숙비(吳淑庇), 준존심(俊存深), 박정부(朴挺夫) 등이, “저희들이 공의 문객이 된 것은 공께서 세상을 덮을만한 기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지금 도리어 이처럼 겁을 내어 나약해지니, 이는 저희들을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한번 싸워서 승패를 결정짓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나섰습니다.
한참을 고심하고 망설인 끝에 최충수가 어쩔 수 없이 이를 허락하자, 여명에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십자가(十字街)에 진을 치고는, “죽을힘을 다해 싸워라. 저 놈들을 죽인 사람에게는 죽은 자가 가졌던 벼슬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장수들이 모두 최충헌 편에 붙었다는 소식을 들은 최충수 편의 군사들은 원군이 부족함을 알아차리고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충헌은 광화문을 나와 시가지를 향해 내려오고, 최충수는 광화문을 향해 올라오다가 흥국사(興國寺) 남쪽에서 서로 부딪쳐 교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최충헌의 화살부대의 공격을 견뎌내지 못한 최충수의 반란군은 마침내 참패하고 도망치고 맙니다.
최충수는, “오늘의 패배는 하늘의 뜻이다. 형이 임진강 이북을 차지한다면 나는 임진강 이남을 가지겠다.”고 하면서 수하들과 함께 성문을 벗어나 장단(長湍 : 개성직할시 장풍군)을 건너, 파평현(坡平縣 : 경기도 파주시)의 금강사(金剛寺)까지 도망을 하지만 추격군이 그를 잡아 참수한 후 머리를 개경으로 보냈습니다.
동생의 수급을 본 최충헌이 통곡하면서 “나는 생포하려 했는데 무엇이 급하다고 죽여 버렸는가?” 하고 꾸짖고 시신을 수습해 장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왕이 최충헌의 공을 기려 해당 관청에 분부해 초상을 그려 공신각에 붙이게 하고 그 부모의 작호를 올려 주었으며, 지주사(知奏事)·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승진시켜 줍니다. 친동생을 죽인 대가로 또 출세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