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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플레비언나비공동체 원문보기 글쓴이: 남산
박사과정을 시작하며, 단지 공부만 하는 삶이 주변의 지인들과 하나님께 죄송했다. 그래서 나는 참길교회를 개척하여 한동안 주말에는 사역을, 주중에는 공부하는 삶을 살았다. 공부만 해도 힘든데 개척은 뭐 하려 하냐며 걱정하던 선배들의 염려와 기도 덕분에 좋은 동역자를 만나고 즐겁게 사역하며 공부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패밀라 미첼 레그, 사라 리틀, 챨스 멜처트, 헨리 시몬스, 리 배럿과 같은 실력 있는 교수님들을 통해 깊은 학문의 길로 나를 이끄시는 바람에 나의 학업은 마치 날개를 단것처럼 창공을 날았다. 여기에 사족을 달자면 서부 바이올라대학교에서 선교적 마인드를 가지고 기독교교육학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레너드 스탠리, 딕 라이더, 마이클 앤소니, 쉘리 커닝햄과 같은 교수님들도 나의 성장에 한몫했다. 거기에 식구들의 전적인 지지와 기도가 있었기에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첫 사역지였던 교회가 지극히 안정적이었다면, 나는 아마도 서부에 있는 풀러신학교를 나와 시카고의 트리니티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했을지도 모른다.
신대원 학업 중, 뉴저지한인장로교회(김창길 담임목사)에서 아동부서 전도사로 주말 사역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녀들을 함께 싣고 동교회로 다닌 형 최정훈 목사의 동행은 깊은 동지 의식과 학문적 자극, 그리고 평생지기를 얻은 좋은 기회였다. 그의 진지하고 방대한 설교 준비에 매료된 나는 아동예배가 끝나자마자 청소년예배에 가서 그의 길고 장황한 설교를 들으며 반짝이는 통찰력을 얻는 기쁨을 누렸다. 다섯 번 정도의 설교 분량을 그는 매주일 단번에 소화하고 있었다. 사역에 진심이었던 김창길 목사님 부부를 만나고, 박사과정 중엔 천재 목회자 김재동 목사님을 만난 것이 공부와 인생, 그리고 목회를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워싱턴 DC 근처에서 사역할 때 버지니아장로교회에도 몇 번 방문했었는데, 훗날 손상웅 목사님을 거기에서 만났다. 버지니아주는 뉴저지나 필라델피아보다는 남쪽에 위치한 주였으나 겨울에 눈이 오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무릎 근처까지 눈이 쌓여 95번 고속도로 중간 구름다리 밑에 차를 세우고, 앞 유리에 쌓인 눈을 다 치운 후 눈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가 리치먼드로 내려가곤 했다.
리치먼드는 한가한 도시 분위기, 변함없는 학교의 차분함, 학생을 위하여 헌신하는 도서관 사서들의 친절함, 나를 학자로 만들겠다는 리클과 레그 교수님의 엄격함, 맛있는 식당의 음식, 저렴한 기숙사와 아름드리나무들이 기억나는 곳이다. 그곳에서 나는 아내와 함께 큰딸 수진, 작은딸 예진이를 키우며 보람된 학문의 길에 정진할 수 있었다.
가끔 한국에서 교수님들이 방문할 때면 이 PSCE가 Union신학교와 함께 한국에서 제법 잘 알려진 기독교교육 대학원이라는 점과 우리 학교를 나온 이들이 장로회신학대학교 등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지금도 나를 비롯해 고용수, 사미자, 송남순, 박원호, 박상진, 신형섭 교수님이 한국의 기독교교육을 위해 애쓰고 있다. 이제는 두 학교가 통합, Union Presbyterian Seminary가 되어 Presbyterian School of Christian Education이라는 고유한 명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게 무척 아쉽다.
오랜만에 들러도 변함없이 그대로인 리치먼드는 차도 사람도 행사도 많지 않은 조용한 공부 마을이었다. 반면에 워싱턴 DC 인근의 페어팩스는 펜타곤 근처와 국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정치 세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인위적인 마을이었다. 교우들 가운데도 무슨 일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전 세계를 향해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는 미국 정치 일번지의 삶이 무엇인지 그들을 통해 조금이나마 느꼈던 곳이 페어팩스였다.
그곳에는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고, 모든 박물관이 무료라는 점이 좋았다. 그러나 다양한 종류의 예술 작품들을 모두 감상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해 보일 만큼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곳에서 홀로코스트를 간접적으로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자료들을 보며, 우리도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박물관이 많이 생겨야 더 이상 과거를 부정당하거나 파묻히는 일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장로교회는 미주한인장로회에 속한 교회다. 나에게 미국에 사는 청소년들을 위해 사역할 소중한 기회를 주었다. 담임 김재동 목사님은 때때로 성인예배에서 설교할 기회를 주시고, 설교 후에는 깊이 성찰한 생각들로 나의 목회적 감성을 일깨워 주셨다. 더 좋은 설교자,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는 시간이었다.
리치먼드라는 공부 마을에서 갈고닦은 학문을 페어팩스에서 실천할 기회를 얻은 것은 나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왜, 누구와 무엇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선명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교우들은 실로 사랑과 존경으로 나의 길을 축복해 주었다. 목사 안수를 받았던 1995년 10월 10일은 기억력이 안 좋은 나에게도 또렷이 남아있다.
사진을 보니 김충성, 신기형, 정해근, 김운용, 김도현 부부, 윤덕영, 노승환, 이희숙 님의 이름이 생각난다. 지나고 보니 두 마을 리치먼드와 페어팩스가 만나 학문과 사역의 준비를 철저하게 해준 것 같다. 이 모든 발걸음에 주님이 동행하셨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주셨다.
1996년 4월 말이 되자 나의 논문 “Education or Living Religiously Together”는 온전한 윤곽을 드러냈고, 박사학위위원회가 논문을 통과시켰다. 바로 그즈음에 나는 롱아일랜드 연합장로교회(림형천 담임목사)의 청빙을 받아 사역자로서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나를 청빙하는 목적과 업부 분장에 대해, 금전적인 처우까지 자세히 적어서 정식 청빙 절차를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나는 청빙위원들과 만나기 위해 맨해튼으로 가는 출퇴근용 소형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요동이 심한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가는 길은 그야말로 스릴 넘치는 여정이었다.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거쳐 기차를 타고 롱아일랜드로 가는 길도 매우 흥미로웠다. 기차 안을 가득 채운 양복을 입은 회사원들과 키파를 쓴 유대인들이 눈에 띄는 풍경은 사뭇 새로웠다. 롱아일랜드 헌팅턴에 위치한 롱아일랜드 연합장로교회의 한 장로님 댁에 당회원들이 모여 있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담임목사님까지 한 6명 정도 계셨던 것 같다. 그들은 활짝 웃으며 진심으로 나를 환대해줬다. 그때 내 나이가 37세였다. 행복한 마음으로 전임 사역의 첫걸음을 떼었다. 지금은 세상에 계시지 않은 이희수 장로님이 아마도 당회서기 혹은 최고 연장자였던 것 같은데, 앞으로 함께 멋진 교회를 만들기 위해 림형천 목사님과 환상적인 팀을 만들어 달라고 당부하셨던 말씀이 기억난다.
만남 이후 리치먼드로 돌아가서 가족을 태우고 뉴욕으로 향하는 일만 남아 있었다. 롱아일랜드 연합장로교회에서 가족을 배려하여 전도사님 한 분을 보내주셨는데, 그분의 도움으로 이사의 모든 과정이 어느 때보다 편안했다. 그때 사라 리틀 교수님은 나에게 영미권에서 교수로 일하도록 추천하려는데 어째서 목회지로 가느냐고 아쉬워하셨지만, 나는 목회로 들어가는 것이 일차적 소명이라고 여겼다. 교수라는 직분은 아주 특별한 학자들만 하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짐을 롱아일랜드로 옮기고 나서 신나게 사역하다가 PSCE의 영광스러운 학위수여식이 열리는 그해 6월, 우리 식구 모두는 다시 리치먼드로 내려와 행복한 예식에 참여하였다. 지나고 보니 너무도 재미있는 이벤트가 계속되는 나날이었다. 그동안의 모든 노고에 기쁨으로 위안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고 마음껏 즐거워하며 보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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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김도일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cnews1970@naver.com
출처 : 주간기독교(http://www.cnews.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