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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출토 "명주성" 수막새)
1. 신라 말기의 명주
명주(溟州)는 통일신라 시대의 행정구역인 9주(九州)의 하나로, 오늘날의 강원도 강릉시에 해당된다. 당나라 시대의 학자 가탐(賈耽)은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서 신라의 명주가 본래 옛 예족(濊)의 나라였다고 하였다. 이후 명주는 고구려의 영토가 되어 "하슬라(何瑟羅)" 혹은 "하서량(河西良)"이라 불렸으나 후에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로 하슬라주는 신라 북변 방어의 요충지로 거듭나게 되었다. 신라의 명장 이사부(異斯夫)는 하슬라 군주(軍主)로 임명된 후에 이곳을 발판삼아 512년에 오늘날 울릉도에 해당되는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639년에는 선덕여왕이 하슬라주를 북소경(北小京)으로 삼았으나, 658년에는 무열왕이 북방의 변경인 하슬라주를 소경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판단하여 북소경을 폐지하고 하슬라를 다시 주로 삼았다. 이후에는 종종 "하서주(河西州)" 라고도 불리다가 경덕왕 때에 이르러 전국의 지명을 한문식으로 개칭하면서 "명주(溟州)"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신라 말기에 접어들어 원종(元宗) · 애노(哀奴)의 난(889)을 계기로 지방군웅의 할거가 본격화되자 북원의 호족인 양길의 수하에 들어갔던 궁예가 891~894년에 걸쳐 명주를 공격하여 그 곳을 장악하였고, 이후 궁예는 고려를 건국하게 된다.
신라 북방의 변경인 명주에는 지금까지도 유명한 두 사람의 호족이 등장했다. 첫번째가 바로 8세기 경 왕경에서 낙향한 후 강력한 세력을 누리며 이른바 "명주군왕(溟州郡王)"이라 불리던 김주원(金周元)이었으며, 두번째는 10세기 경 고려의 태조와의 독특한 인연으로 잘 알려진 "명주장군(溟州將軍)" 왕순식(王順式)이었다. 이 글에서는 명주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던 김주원과 왕순식의 생애를 살펴보는 한편, 왕순식에 대해 널리 알려진 몇가지 가설과 그 의문점들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명주군왕릉)
2. 명주군왕 김주원
신라 김주원 : 태종왕(太宗王, 무열왕)의 자손이다. 처음에 선덕왕(宣德王)이 훙하여 후사가 없자, 군신들이 정의태후(貞懿太后)의 교를 받들어 주원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족자인 상대장등(上大長等) 경신(敬信, 원성왕)이 사람들을 겁박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니, 먼저 궁에 들어가 칭제(稱制)하였다.
주원이 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나 명주(溟州)에 거하였으며, 조청(朝請)을 따르지 않았다. 2년 후에 주원을 명주군왕(溟州郡王)으로 봉하였으며, 명주의 익령(翼領)인 삼척(三陟) ⋅ 근을어(斤乙於) ⋅ 울진(蔚珍) 등을 떼어주어 식읍(食邑)으로 내렸다. 자손들이 이로 인하여 부(府, 강릉)를 향(鄕)으로 하였다.
新羅 金周元 【太宗王之孫. 初宣德王薨, 無嗣, 群臣奉貞懿太后之敎, 立周元爲王. 族子上大長等敬信, 劫衆自立, 先入宮稱制. 周元懼禍, 退居溟州, 遂不朝請. 後二年, 封周元爲溟州郡王, 割溟州翼領⋅三陟⋅斤乙於⋅蔚珍等, 官爲食邑. 子孫因以府爲鄕.】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대도호부 인물
785년, 신라 선덕왕이 후사없이 사망하자 신라의 군신들은 당시 유력한 왕족이었던 무열왕의 후손 김주원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넘치는 바람에 김주원이 왕궁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 틈에 상대등이었던 내물왕의 후손 김경신이 김주원을 재치고 대신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원성왕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이후의 흥미로운 정황을 전하고 있다. 원성왕에게 밀려난 후 신변에 불안을 느낀 김주원은 명주로 들어가 버렸고 이후 그 곳에 틀어박힌채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2년 후, 원성왕은 김주원을 달래기 위해서 그에게 삼척 · 근어 · 울진 등을 식읍으로 떼주고는 명주군왕으로 봉하였다. 그 인연으로 인하여 김주원의 후손들은 대대로 강릉을 향(鄕)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강릉 김씨가 바로 김주원의 후손들이라 전해진다.
이후 김주원의 아들인 김종기(金宗基)가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았고, 김종기의 아들인 김정여(金貞茹) 또한 명원공(溟源公)에 봉해졌으며, 김정여의 아들인 김양(金陽)은 신무왕의 심복이 되어 그의 옹립을 보좌한 공로로 죽은 후 명주군왕으로 추봉되었다. 훗날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金憲昌)이 아버지가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을때 4개 주가 이에 호응하였으나 명주는 따르지 않았다. 덕분에 김주원의 가문은 김헌창의 난이 진압된 후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존속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김주원이 명주군왕에 봉해졌으며 그 후손들이 작위를 이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를 비롯한 고려시대의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조선시대 이후에야 보이기 시작하는데, 아마도 당시에 전해지던 강릉 김씨 가문의 족보를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의 사실여부는 장담하기 어려우나 명주 일대에 김주원과 같은 호족들이 등장하면서 점차 신라 조정의 통제력을 벗어나고 있었다는 부분 만큼은 어느 정도의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듯 싶다.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
3. 명주장군 왕순식
왕순식(王順式)은 명주(溟州) 사람이다. 본주(本州, 명주)의 장군으로서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자, 태조가 이를 근심하였다.
王順式, 溟州人. 爲本州將軍, 久不服, 太祖患之.
- 《고려사》 권92 열전 왕순식
또한 지당주군주사(知當州軍州事)인 태광(太匡) 왕공순식(王公荀息, 왕순식)이 봉모(鳳毛)로써 경사스러움을 나타냈고, 용액(龍額)으로는 상서로움을 드러냈다. (중략) 이 때에 태광(太匡, 왕순식)이 요좌(僚佐)를 거느리고 스님이 계시는 선관(禪關)으로 찾아가 함께 경하(慶賀)하는 예의를 베풀었으니, 이는 군려(群黎)의 경하를 극진히 한 것이거늘, 하물며 인주(隣州)와 비현(比縣)의 관속(官屬)들이 방문차 왕래하는 관개(冠盖)가 길로 이어져 끊어지지 아니함에 비유할 것인가.
亦有知當州軍州事太匡王公荀息鳳毛演慶龍額呈祥 (중략) 此際太匡齊携僚佐直赴禪關共陳列賀之儀皆罄羣黎之慶况復隣州比縣典郡居官冠盖相望道途不絶
-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
기록상에 보이는 나말여초 명주의 호족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만한 사람은 바로 왕순식(王順式)이다. (※ 물론 당시 명주에는 왕순식 외에도 여러 호족들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그 가운데 가장 유력했던 인물은 왕순식이었을 것이다.) 당시의 많은 호족들이 그렇듯이, 왕순식 또한 기록의 부재로 인하여 그 행적을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몇몇 단편적인 기록에 보이는 왕순식의 행적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점이 많다.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순식은 명주 사람이자 해당 지역의 "장군(將軍)"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고려에 항복하지 않아서 고려왕 왕건에게는 큰 골칫거리였다. 아직 막강한 라이벌이었던 후백제왕 견훤의 세력이 건재하였고,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킨 반동으로 인하여 지방 호족들이 이탈의 기미를 보이던 상황에서 고려의 배후에 위치한 명주와도 대치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왕건으로서는 달가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명주는 그야말로 왕건에게 있어 등 뒤에 도사린 칼날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러자 시랑 권열(權說)이 왕건에게 계책 하나를 아뢰었다. 당시에 순식의 아버지인 허월(許越)이 고려 내원(內院)에서 승려로 살고 있었는데, 그를 순식에게 보내 타일러 항복을 권유케하라는 것이었다. 허월이 어떤 까닭으로 고려의 내원에서 승려로 살고 있었고 또한 그가 고려 왕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여하튼 왕건이 권열의 계책을 따르자 과연 순식이 왕건에게 귀부해왔다.
순식이 왕건에게 귀부한 시기는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순식이 항복한 시기를 922년 1월이라 하였고, 《고려사》 태조세가에서는 922년 7월이라 하였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922년의 어느 시점에 순식이 왕건에게 귀부한 것은 사실인 듯 싶다. 당시 순식이 장남인 수원(守元)을 보내 귀순 의사를 밝히자 왕건은 그에게 왕씨 성을 하사하였을 뿐 아니라 저택과 토지까지 내주었다. 이에 순식은 아들인 장명(長命)으로 하여금 6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으로 들어가 숙위하도록 하였다.
928년 1월, 왕순식은 마침내 직접 왕건을 찾아와 내조하였다. 이전에 아들을 보내 귀부한지 6년 만의 일이었고,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당시의 왕건은 바로 지난해에 공산전투에서 후백제왕 견훤과 맞붙었으나 처절한 참패와 굴욕을 맛보고 수세에 몰린 처지였다. 그런데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 마음으로 복종해오지 않았던 왕순식이 몸소 왕건을 찾아와준 것이다. 왕건은 이에 큰 위안을 받았는지 적지 않은 보상을 베풀었다. 왕건은 왕순식에게 대광(大匡) 벼슬을 주었으며, 앞서 개경에 들어와 숙위하고 있던 순식의 아들 왕장명의 이름을 왕렴(王廉)으로 고치고 원보(元甫) 벼슬을 주었다. 순식의 수하였던 소장(小將) 관경(官景)도 마찬가지로 왕씨 성을 하사받았으며 대승(大丞) 벼슬을 받았다.
936년 9월, 왕건이 후백제왕 신검을 멸하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자 왕순식 또한 몸소 명주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일리천 전투에 참전하였다. 당시 왕순식은 아들인 왕렴 및 같은 명주의 호족 왕예(王乂) 등과 함께 중군에 편제되어 2만 명의 기병을 지휘하였다. 결국 이 전투로 인하여 후백제는 멸망하였다.
(※ 《고려사》 왕순식열전에서는 왕순식의 일리천 전추 참전에 얽힌 전설을 전하고 있다. 일리천전투 직전에 왕건이 3천 명의 갑사를 거느린 기이한 승려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 마침 그 다음날에 왕순식이 군대를 거느리고 왕건의 진영에 도착했다. 왕건으로부터 꿈 이야기를 전해들은 왕순식은 자신이 명주에서 출발하여 대현에 이르렀을 무렵 한 기이한 승려의 사당을 만나 그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기도를 올렸는데, 왕건이 꾼 꿈도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라 말하였다. 왕건은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한편 940년에 세워진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에서도 왕순식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비문은 930년에 사망한 사굴산문의 고승 낭원대사 개청(開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인데, 여기서 왕순식은 "당주군주사 태광 왕공 순식(當州軍州事太匡王公荀息)"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 "당주"는 곧 "명주"를 말하는 것이 분명해보인다.) 비문에 등장하는 왕순식은 개청의 후원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신라 경애왕이 개청을 초빙하자 몸소 수하들을 거느리고 그를 찾아가 축하를 드리기도 하였다. 그가 당시의 여러 호족들이 그러했듯이 선종 승려들을 후원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가 명주의 "군주사(軍州事)"를 칭할 정도로 유력한 호족이었다는 점 만큼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MBC 강원영동 촬영 강릉 금산리 명주산성 전경)
4. 자취를 감춘 왕순식 가문
후백제가 멸망하고 후삼국이 통일된 이후 왕순식의 행적은 더이상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 그의 가문 자체도 존재가 묘연해진다. 왕순식의 아들로서 왕건으로부터 새 이름까지 하사받았던 왕렴도 936년의 일리천 전투에서 아버지와 더불어 참전한 일을 제외하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없다. 한때 왕건에게 불복하며 배후에서 그를 불안케하더니, 문득 아버지의 설득을 따라 고려에 항복하여 왕건의 충복이 되었던 왕순식과 그 후손들이 갑자기 기록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의아한 일이다.
이처럼 왕순식 가문이 기록에서 자취를 감춘 반면에, 명주의 다른 호족들이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왕예와 왕경을 들 수 있다.
왕예(王乂)는 《강릉김씨족보》에 따르면, 명주군왕 김주원의 6대손이었다고 전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예는 왕순식과 마찬가지로 936년 9월에 일리천 전투에 참전하여 후백제의 멸망에 기여하였으며 그 벼슬이 내사령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딸은 태조 왕건의 후비인 대명주원부인 왕씨가 되었다. 940년 7월에 세워진 〈보현사낭원대사오진탑비〉 음기(陰記)에서도 "당주도령 좌승 왕예(當州都令佐丞王乂)"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데, 같은 기록에서 앞서 "당주군주사"로 언급된 왕순식을 대신하여 명주의 가장 유력한 호족으로 떠오른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가능할 듯 싶다.
왕경(王景)은 본래 왕순식의 휘하에 있던 소장으로 본래 이름은 관경이었는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왕순식이 몸소 왕건을 찾아와 내조할 당시에 함께 왕씨 성과 대승 벼슬을 하사받았다. 그는 이후 벼슬이 태사에 이르렀고 삼한공신에 봉해졌으며 그 딸은 태조 왕건의 후비인 정목부인 왕씨가 되었다.
이처럼 왕예와 왕경은 고려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으며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그 가문이 번영을 누렸던 것으로 보이나, 왕순식과 그 가문에 대해서는 이런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후삼국 통일 이후에 왕순식 가문은 이전의 세력을 지속하지 못하고 몰락하였으며 그 자리를 왕예나 왕경 등이 대신하게 된 듯 싶다. 아마도 왕순식이 오랜 세월동안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지 않고 대립했던 것이 원인이 아닐까 싶지만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게 생각된다.
(KBS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김씨로 묘사된 왕순식)
5. 여러 의문점들
앞서 둘러보았듯이, 왕순식의 생애는 기록의 부재로 인하여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그는 분명 후삼국시대 당시에 명주의 가장 유력한 호족으로 명성을 떨쳤던 것으로 보이나 정작 후삼국통일 이후에는 이렇다할 행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삶에 대해서 여러가지 가설이 제시된 바 있는데 이 또한 의아하게 생각되는 점이 많다.
① 명주군왕의 후예였나?
오늘날에는 왕순식이 명주군왕 김주원의 후예로서, 왕건에게 왕씨 성을 하사받기 이전만 하더라도 그 본명이 김씨, 즉 "김순식"이었다는 가설이 널리 퍼져있다. 이는 김주원 가문이 명주에 자리잡은 이래로 그곳에서 대대로 유력한 호족으로 명성을 떨쳐왔기에 후삼국시대 당시에도 명주에서 가장 유력한 호족으로 추정되는 왕순식 또한 김주원의 후예가 분명할 것이라는 추측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정작 왕순식이 정말로 김주원의 후예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신호철 교수가 지적하였듯이, 왕순식을 김주원의 후예로 묘사한 기록들은 대부분이 근대의 것들이며 그 출전마저도 명확치 못하기 때문이다. 당장 왕순식의 행적을 가장 상세히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 및 《고려사》 등의 중세문헌들에서는 왕순식이 왕씨 성을 하사받기 전에 그 성씨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강릉부사 맹지대가 편찬한 《임영지》에서는 이른바 "평창군고기"라는 문헌을 인용하여 왕순식이 김주원의 후손으로, 천수 11년(928) 정월에 왕씨 성을 하사받고 고려에 내투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왕순식이 그 이름을 "경"으로 고쳤다고 한 것으로 보아 왕순식과 그 휘하의 소장이었던 왕경을 혼동하고 있음이 분명해보인다.
또한 1940년에 김태제가 경주김씨 분파의 여러 족보를 편집하여 편찬했다는 《신라옥첩》에서는 왕순식이 본래 김주원의 후손으로 뒤에 왕씨가 되었다고 하였으나, 이는 근현대에 편찬된 것일 뿐더러 정작 《경주김씨족보》에서는 왕순식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왕순식이 김주원의 후손이었다면 《강릉김씨족보》에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이상할 수 밖에 없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4 강릉대도호부에서도 왕순식은 김주원과 나란히 명주의 역사적 인물들 중 하나로 언급되기는 하지만, 여기서조차 그가 김주원 가문과 어떤 혈연적 연관을 맺고 있었다는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널리 퍼진 속설과는 달리 왕순식의 본명이 김순식이었다는 주장은 실상 그 근거가 부족한 편이다.
② 궁예와의 관계는 어떠했나?
잘 알려져 있듯이, 북원의 호족인 양길의 수하에 들어간 궁예는 명주를 장악함으로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891년에 명주 관내의 주천 등 10여 군현을 공격하였고, 894년에는 명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학자들은 이 점을 들어서 궁예가 당시 명주의 대호족이었던 왕순식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그것이 훗날 왕순식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운 왕건에게 복종하지 않았던 원인이 되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전해지는 문헌상에는 왕순식과 궁예의 관계를 알려줄만한 단서가 거의 없다. 궁예가 명주를 장악할 당시 명주 호족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는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앞서 언급하였듯이 명주에는 왕순식을 제외하고도 김주원의 후손인 왕예를 비롯한 여러 호족들이 병존하고 있었음이 분명한데, 왕순식이 과연 궁예가 명주에 입성할 당시에도 유력한 호족이었을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그 또한 명주의 세력판도가 뒤집히는 상황에서 새롭게 부상한 세력이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왕순식과 궁예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지, 또한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로 왕순식이 왕건에게 오랫동안 귀부하지 않았던 원인이 되었는지는 어느 정도의 추측만 가능할 뿐 그 진상은 명확히 알 수 없다.
[출처] 명주의 호족 왕순식 : 명주군왕의 후예인가|작성자 원한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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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세요 ♡
주말에 또 비소식이 있네요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주말 오후에는 전국이 흐리고
자정부터 내일까지 비또는 눈 소식
나들이 하실분들 참고를 하세요
시작하는 지금부터 마치는 시간까지
즐겁고 행복하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