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분재전시회 개최
2024년 11월 2일 로뎀나무카페에서 ‘기다림 : 待’라는 주제로 권용규(權容圭) 집사의 제2회 국화분재전시회 개회예배 및 축하행사가 있었다. 국화향기로 가득한 전시실에서 깊어가는 가을의 향기에 흠뻑 빠지는 시간이었다. 국화를 가을의 꽃으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은 분재로의 국화가 생소했지만 새롭게 태어난 국화는 모두의 탄성을 자아냈다. 진한 노랑색으로 농염하게 화장하고 손님을 맞는 분재 속 국화는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요염한 자태로 그들을 유혹한다.
국화의 역사는 중국 진나라 이전으로 추정하는데 동진시대 도연명(陶淵明)이 국화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 때는 단일 노란색에서 진하고 연한 보라색으로 개량되었다가 송나라 때 새 기술의 등장으로 새로운 품종이 대거 등장했다. 1104년 유몽(劉蒙)의 「유사거보」, 1213년 심경의 「국화보」, 1242년 석주의 「백거보」등이 출판되어 국화 재배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1630년 명나라 왕향진(王祥金)의 「군방보」에는 국화의 색과 개화시기에 따라 270종이 국화가 있다고 기록했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의 하나로 여기고 국화를 소중히 했다. 늦은 가을 첫추위를 이겨내며 피기 때문에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상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국화가 매우 비쌌던 것 같다. 정약용(丁若鏞)이 유배 중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국화 한 이랑만 팔아도 몇 달치 식량을 살 수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이 국화는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신분이 상승되어 벚꽃과 함께 일본 황실을 대표하는 꽃이 되었다. 일본 황실의 문장인 ‘십육엽팔중표국문’(十六葉八重表菊紋)은 국화를 도안한 것이고 현재의 일본 경찰과 구일본의 상징이 국화다. 일제의 해군도 십육엽활중표를 사용했다.
언젠가부터 이런 국화가 분재로 다시 태어나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분재(盆栽)는 그릇(盆)에 심은(栽) 묘목이라는 뜻으로 관용적으로 나무를 화분에 심어 묘목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 또는 그 결과물을 가리킨다. 분재 역시 중국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에도 전해진 것으로 본다. 문헌상으로는 고려 중기 때 이규보의 시에 분재가 언급되었다. 고려 말기로 추정된 사계분경도(四季盆景圖)는 분재를 수놓은 네 폭의 병풍이다. 조선시대 세종 때 부제학 강희안(姜希顔)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도 분재의 기록이 있다. 1950년대 이후 일본에서 분재가 발달하여 1980년 오사카에서 세계 수석․분재대전이 개최되었다. 이는 세계의 분재인(盆栽人)이 참가한 국제 행사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때 분재를 영어로 표기할 때 일본식 발음을 음차하여 ‘Bonsai’라고 했다. 이것이 서양인에게는 분재가 마치 일본의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들었다.
분재의 종류는 감상요소에 따라서 네 가지로 나뉜다.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로 감상하는 송백(松柏) 분재, 꽃으로 감상하는 상화(想華) 분재, 열매로 감상하는 상과(想果) 분재, 잎으로 감상하는 상엽(想葉) 분재다. 크게는 송백분재와 잡목분재로 구분하기도 한다. 국화는 상화분재에 속한다. 분재의 수형(樹形)에는 여러 모양이 있다. 직간(直幹: 하늘을 향해 곧게 치솟은 형태), 사간(斜幹: 줄기가 기울어진 형태), 곡간(曲幹: 줄기가 굽은 형태), 반간(蟠幹: 기형에 가까운 심한 곡간의 형태), 현애(縣厓: 산지의 경사지나 해안의 절벽 또는 계곡의 급사면에 매달리듯 붙어 줄기가 아래로 늘어져 있는 형태), 문인목(文人木: 문인화에서 볼 수 있는 나무의 형태), 쌍간(雙幹: 줄기가 두 갈래로 된 형태), 총생간(叢生幹: 한 뿌리에서 많은 줄기가 나온 형태), 연근(連根: 길게 옆으로 뻗은 굵은 뿌리에서 여러 줄기가 서 있는 형태), 풍향수(風向樹: 줄기와 가지가 바람이 불어 한쪽으로 기울어진 형태), 석부분재(石付盆栽: 돌을 첨부한 분재), 목부분재(木付盆栽: 나무를 첨가한 분재) 등이 있다. 국화의 종류는 대국(大菊), 현애국(懸崖菊), 분재국(盆栽菊)이 있는데 분재국은 작품에 따라서 다양하게 부른다. 즉 직간작, 모양목, 쌍간작, 삼간작, 연근작, 석부연근작, 석부작, 목부작, 버드나무형, 현애형, 합식작, 발취형, 분경작, 석식입작, 삼발일조 등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시회의 다양한 작품들은 모두 권용규 집사의 땀이 만들어낸 알찬 결실이기에 그를 아는 이들에게는 남다른 감동과 의미를 느낀다.
권용규 집사는 8년 전 2016년 한 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받고 교내 화단 가꾸기에 몰두하다가 국화를 만났다. 그 인연이 3년 전부터는 분재로 발전하여 작가로서 땀을 흘리게 되었다. 특히 2024년 8월에 교직에서 정년퇴임하여 본격적으로 국화 분재작가로서 제2의 인생 계획을 세우며 예술의 혼을 쏟고 있다. 이렇게 예쁜 국화를 피우기까지의 비결을 묻자 그는 주저 없이 ‘기다림(待)’이라고 대답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듯이(徐廷柱의 시 ‘국화 옆에서’ 중)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가지를 자르고, 삽목(揷木)하고 난 후 그가 한 일은 기다림뿐이었다. 그랬더니 때가 되니까 그 초라해 보이던 가지에서 국화 꽃이 화사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하나님은 그 꽃에 가을의 향기를 담고 온 누리에 날려주셨다. 진정 기다림은 하나님의 시간을 아는 사람만이 가지는 삶의 자세가 아니던가? 인간은 그분의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시간만 고집하다가 급한 마음에 죄를 짓는다. 그러나 자연은 태초부터 지금과 앞으로도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린다. 급할 이유도, 죄 범할 필요도 없다. 그냥 막연해 보이는 그 기다림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그 나라가 세워지더니 마침내 세상이 구원받았다. 집 나간 탕자를 살린 것은 오직 아버지의 기다림뿐이었듯이 이번 국화분재전시회를 찾는 관람객들은 이 기다림을 배우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면 좋겠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예레미야애가 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