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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무덤(요한복음 20:1-8)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무덤에 장사지내는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가족들과 제자들은 아무도 여기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까지 따라가서 장례를 몰래 지켜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에 보면 그들의 이름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막15:47)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확인한 후에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였다’고 합니다(눅23:56).
사실 이때에는 이미 니고데모가 향품을 충분히 준비하여 필요한 모든 장례의 절차를 다 밟은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여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향품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계명에 따라 아무 일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쉬었다가, 안식일 다음날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 있을 새벽시간에 이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여인들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였는지 알게 됩니다.
사랑은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이 그만큼 사랑을 하고,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그만큼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본래 귀신들려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온전하게 회복된 것은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람 대접을 받아 본적이 없던 막달라 마리아가 온전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치유되고 난 후에, 그녀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십자가 죽음의 현장과 주님의 무덤까지 좇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언제나 좇을 수 있는 뜨거운 사랑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요20:1-2)
막달라 마리아 혼자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것은 아닙니다. 빈 무덤을 발견한 후 베드로에게 달려가 보고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복수형 ‘우리’가 사용된 것으로 보아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이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무덤을 함께 확인했던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동행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그들은 그 새벽에 용감하게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다가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자, 무덤이 비어있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요?
우리 같으면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생각했을 텐데, 이들은 전혀 그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추측은 ‘누군가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누가 죽은 사람의 시신이 필요하다고 훔쳐갔겠습니까? 부활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입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별별 추측을 다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으면 간단한데 믿지 않기 때문에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모든 수수께끼가 다 풀립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면 성경에 믿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에게 무슨 불가능이 있겠습니까? 병든 자를 고치거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빈 무덤의 소식을 듣고 확인하러 나섭니다. 계속해서 3-8절을 읽겠습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요20:3-8)
베드로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그 다른 제자’는 사도 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신 이후에 이들은 거의 같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안나스의 집에서 예수님이 심문을 당할 때 그들은 함께 거기에 있었고 빈 무덤의 소식을 듣고 역시 이들이 함께 움직입니다. 후에 사도행전에서도 이들은 함께 예루살렘 성전으로 기도하러 갔다가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고쳐줍니다. 그 일로 인해 그들은 함께 투옥되고 산헤드린 공회 앞에 함께 재판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늘 동행하는 이유를 그들이 가진 공통점이 많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기 쉽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의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둘이 같이 달음질하여 갑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갔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 제일 젊었고 베드로는 제일 나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동작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격에서도 큰 차이를 보입니다. 요한은 먼저 도착했지만 선뜻 무덤 속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먼저 조심스럽게 주변을 찬찬이 주의 깊게 살핍니다. 요한은 세심하게 관찰하며 생각하는 신중한 성격의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을 보면 저자가 사건들을 얼마나 세밀하게 관찰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반면 베드로는 도착하자마자 용감하게 불쑥 무덤에 들어갑니다. 베드로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스타일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전혀 서로 다른 성격인 이들이 주님의 일에 함께 동역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을 곧잘 ‘틀리다’고 말합니다. ‘틀리다’는 말에는 자기중심적인 가치판단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리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다름의 다양성이 함께 어울리면 더욱 창조적인 주님의 일들을 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빈 무덤에서 발견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세마포가 놓여있었다’고 합니다. 세마포는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천입니다. 누군가가 그 세마포를 걷어버렸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스스로 일어나서 그 세마포를 치워버렸다면 그런 상태로 그대로 놓여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머리를 쌌던 수건이 쌌던 곳에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몸을 쌌던 세마포랑 머리를 쌌던 수건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세마포랑 수건을 건들지 않고 그냥 몸만 빠져나왔다는 뜻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에도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꼭꼭 닫아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주님은 그들 가운데 서계셨습니다(요20:19). 주님의 부활하신 몸은 더 이상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귀신처럼 영혼이 떠돌아다니신 것은 아닙니다. 도마에게 주님은 손과 옆구리를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요20:27). 또한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시기도 했습니다(요21:13). 그러니까 몸은 분명히 있지만 부활하기 전과는 다른 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부활하고 나면 주님의 몸과 같은 모습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빈 무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부활을 믿으면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설명을 해주어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으면 이해가 됩니다. 이해해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도 믿음도 생기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부활의 주님을 확실하게 믿는 믿음 위에서 신앙생활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보이시다 (요한복음 20:9-18)
예수님을 장사지낸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제자들에게 알렸고 베드로와 요한이 달려가서 직접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제자들이었다면 이때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두 제자가 어떻게 했는지 9-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요20:9-10)
두 제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은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누누이 말씀을 하셨지만 아직 그들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빈 무덤’을 ‘예수님의 부활’과 전혀 연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신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라도 했을 터인데 그들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단순히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자녀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아들과 딸이 참 다르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대개 아들은 듬직한 맛은 있지만 조금은 무심합니다. 반면 딸은 부모님의 마음을 세심하게 잘 헤아립니다. 특히 어머니에게 좋은 친구가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딸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의 시신이 실종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도 그들은 무심하게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빈 무덤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11-1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20:11-13)
처음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사람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다녀간 후에 빈 무덤에 남아있었던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 혼자였습니다. 천사에게 말한 마리아의 말에서 우리는 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제자들에게 보고할 때에는 ‘우리’라고 했지만 지금 천사들에게는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 자리에 마리아 혼자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천사들이 언제부터 무덤에 있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처음 마리아가 빈 무덤을 찾았을 때에도 천사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두 제자들이 와서도 세마포와 수건이 놓여있는 것만 보고 갔습니다. 그 후에 마리아 혼자서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다가 문득 무덤 안을 보니까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이 놓였던 머리 부분과 발 부분에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이들이 천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슬픔과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던 마리아는 천사를 천사로 보지 못하고 단순히 어떤 사람들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천사들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천사들을 보지도 못하고 알아차리지도 못했습니다. 두려움과 슬픔의 지배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주님의 보좌와 천사를 보기도 합니다. 찬송하다가 마음이 뭉클하여 눈물을 쏟기도 하고 말씀을 듣다가 그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손길을 감격스럽게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저 맨송맨송하게 앉았다가 시간만 때우고 돌아가곤 합니다. 무슨 차이입니다.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면 하는 신앙생활은 아쉬움이 많이 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볼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이 존재합니다. 엘리사의 사환도 믿음이 없어서 불 말과 불 병거가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엘리사의 기도를 통해서 그의 눈이 열릴 때에 그의 마음에 있던 불안과 걱정도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주님의 임재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천사들과의 대화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아직도 주님의 부활에 대해서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주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14-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요20:14-15)
마리아는 우느라고 예수님을 보고도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 알고 주님의 시신의 행방을 묻습니다. 비록 마리아는 주님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주님의 시신을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주님의 시신이라도 가져가겠다고 하는 말에서 그녀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아시고 그녀에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것은 주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을 때입니다. 1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요20:16)
주님께서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시자 마리아는 즉각적으로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각각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10:3)
양이 아무리 많아도 선한 목자는 그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합니다.
하나하나가 목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냥 도매금으로 두루뭉술하게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우리들입니다. 그냥 조용히 대중이라는 익명성의 가면을 쓰고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내 교회’가 있어야 하고 ‘내 목사님’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신앙의 태도입니다.
이 시간 함께 기도하십시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문제에 사로잡혀서 슬픔과 걱정 속에 갇혀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저희들의 눈을 열어주옵소서.
예배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세워지게 하시고,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옵소서.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도마가 믿지 않다(요한복음 20:24-25)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네 가지 메시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평강의 메시지’, ‘파송의 메시지’, ‘성령의 메시지’, 그리고 ‘용서의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치고 중요하지 않은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부활 이후의 이 메시지들은 앞으로의 부활공동체를 위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말씀들입니다.
그 내용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는 사실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이 자리에 마침 없었습니다. 그가 바로 도마였습니다. 2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요20:24)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도마에 대해서 아주 깊은 관심을 보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전부입니다만, 요한복음에서는 몇 군데에서 도마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가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은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십니다.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를 기다렸다가 예수님은 그제야 올라가자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고 믿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대목에서 도마가 등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11:16)
도마는 전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가자’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엉뚱하게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런 비슷한 상황이 한 번 더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거처를 예비하러 아버지의 집에 갔다가 제자들을 데리러 다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요14:5)
주님은 분명히 아버지의 집으로 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 못한다고 딴죽을 걸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도마의 미숙함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에 도마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을까요? 이때는 안식 후 첫날 저녁 이었습니다.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주님이 체포되시던 목요일 저녁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던 그 현장에 몇몇 여자들과 제자들 중에는 요한만이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모두 각각 숨어버렸습니다. 빈 무덤을 발견하고 나서 막달라 마리아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그것은 그 때만 해도 다른 제자들은 그 자리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날 저녁,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을 하고 난 후에 흩어진지 나흘 만에 다시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시신이 실종된 문제를 의논하기 위해서 제자들을 소집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모였는데 유독 도마만 그 자리에 오지 않은 것입니다. 제자들과 연락이 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소식을 듣고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탓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언제나 한 박자 늦는 버릇이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도 꼭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 자리에 없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봉사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 놓고는 자기는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없을 때에 일어난 일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합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자기가 옳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도마가 그랬습니다.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20:25)
도마는 고집이 무척 센 사람이었습니다. 웬만해서는 잘 믿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아무리 말을 해줘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직접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자기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똑같은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람들은 도마와 같은 사람을 가리켜서 ‘실증주의자’라고 말합니다.
오직 사실에 근거하여, 관찰과 실험으로 현상 간의 관계와 법칙을 연구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어쩌면 모두 도마와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말보다는 객관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더 믿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스스로를 스마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이 세상에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가설(假說)에 잘도 속아 넘어갑니다. 진화론이라는 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가설입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자료들을 근거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허점투성이입니다. 그런데도 몇 가지 보여주었다고 사람들은 속아 넘어갑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맹종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부활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물론 직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다른 제자들에게 보이셨을 때에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믿을 수 있습니다. 한 두 사람이 본 것이 아닙니다. 도마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제자들이 다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증언을 듣고 적어도 부활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도마는 끝까지 믿지 않습니다. 직접 보고 만져야 믿겠다고 고집합니다. 믿을 수 없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믿고 싶지 않아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도마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그냥 형식적으로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주님께서 도마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도마의 입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는 고백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를 복음의 증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듭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잡게 만듭니다.
우리 모두 의심하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도마가 믿게 되다 (요한복음 20:26-31)
부활하신 주님께서 두려움에 숨어 있던 제자들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을 때, 마침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모였는데 왜 하필 도마는 그 자리에 오지 않았을까. 요한복음에 묘사된 도마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그는 언제나 상황 파악에 미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상황과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소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번 판단을 내리면 남들이 뭐라고 그러든지 끝까지 그것을 고집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존심이 무척 강하고 자기 고집을 쉽게 꺾지 않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저녁에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베드로가 흩어진 제자들을 소집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주님의 시신이 실종된 일에 대해서 차후의 대책을 함께 의논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순순히 그 자리에 모두 모였는데 유독 도마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한 박자 늦는 상황 판단과 자기 고집 때문에 알고서도 별로 올 생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을 보이신 것입니다. 후에 도마가 와서 그 소식을 듣습니다.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증언을 듣고서도 도마는 믿지 못하겠다고 고집을 피웁니다. 직접 보고 또한 직접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도마처럼 되기 쉽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제 성령님께서 역사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도마의 이야기는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요20:26)
처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때로부터 8일이 지났습니다. 제자들이 모두 함께 집 안에 있었습니다. 마침 도마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여전히 제자들은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문들을 꼭꼭 닫아놓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처럼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갑작스럽게 나타나셔서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인사하십니다. 이번에 주님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나타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도마를 만나기 위한 목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의 인사를 하고 난 후에 단도직입적으로 도마를 주목하십니다.
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은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한 내용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도마가 말한 내용을 마치 옆에서 들으신 것처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주님은 스스로 몸을 드러내시지는 않았지만 도마가 절대로 믿지 못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바로 그 자리에 계셨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자리에서 자신을 드러내셨다면 아마 도마는 기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러지 않으시고 8일을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주님은 도마 같은 제자도 결코 잊어버리거나 소홀히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중요한 교훈 두 가지를 얻습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말은 부활하신 주님이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은 도마와 같이 의심하는 고집이 센 제자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도마가 늦게라도 제자들의 모임에 참석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신앙생활 하십시오. 그러면 지금이라도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십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야 믿을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결국 ‘믿음 없는 자’, 즉 ‘믿지 않기로 작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아도 ‘믿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 앞에 도마는 고꾸라지고 맙니다.
28-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요20:28-29)
사실 도마의 말은 본문에 번역된 대로 완벽한 문장이 아닙니다. 그냥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도마가 직접 손을 대어 확인했을까요? 제가 보기에 그렇지 않습니다. 손을 대고 할 겨를도 없이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 도마의 고백은 요한복음의 절정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강조하는 것과 대조되는 부분입니다. 도마의 말은 예수님을 ‘주’요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을 가장 짧은 말로 가장 완벽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철저히 의심하던 도마가 주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순간입니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은 사실 도마에게 하신 것이라기보다는 오고 오는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저와 여러분은 여기에 해당되는 복 있는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쓴 저작 의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30-3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제가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하던 첫 시간에 바로 이 부분부터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은 ‘믿음과 생명의 책’이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책이요, 그 믿음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하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표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요한복음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곱 가지 표적만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마지막 표적은 바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것이었습니다. 그 표적은 주님 자신의 부활 사건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주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의심 많던 도마도 결국에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 믿게 되었습니다. 도마처럼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요한복음이 기록된 것입니다.
도마의 후기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가 인도에 가서 복음을 증거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심지어 아시아 여러 나라를 거쳐서 우리나라까지 복음을 증거했다고 주장하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도마는 결국 인도에서 풀무불에 던져진 채 창에 찔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된 도마는 그의 나머지 생애를 바쳐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순교자의 반열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마 같은 사람도 주님은 사용하십니다. 아무리 의심 많고 믿지 않는 고집불통일지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렇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믿음이 부족해도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갈릴리로 내려간 제자들 (요한복음 21:1)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요한복음은 20:30-31절로 사실상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거기에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부분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들 가운데 오직 일곱 가지 표적만을 여기에 기록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다 기록하려면 이 정도의 책으로는 턱도 없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묵상할 21장의 제일 마지막 결론 부분에 요한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21:25)
그러나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말씀을 낱낱이 기록하거나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두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오직 한 가지 목적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게 하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는 일에는 일곱 가지 표적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 일곱 가지 표적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는다면, 다른 수백 가지의 표적을 적어둔다고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모두 잘 알아야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믿음을 가지는 일에는 성경 몇 부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공부하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가진 믿음의 기초를 다지고 더욱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확실히 믿지 못한다면 다른 복음서들을 공부한다고 별로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 요한복음 강해를 통해서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의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무튼 요한복음의 본래 부분은 20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21장은 나중에 첨가된 부분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 자신이나 그가 신임하던 어떤 제자에 의해 후에 21장이 추가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부활 이후의 예수님의 행적과 사역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에필로그 형식으로 첨가된 것으로 보입니다. 본문 1절 부터 함께 읽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요21:1)
20장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예수님 부활의 기록이라면, 21장은 디베랴 호수에서, 즉 갈릴리 호수에서 목격된 예수님 부활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왜 갈릴리로 내려가게 되었을까’하는 의문입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예루살렘에서 분명히 만났습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로 내려간 것일까요?
어떤 분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잃어버리고 낙심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이들이 갈릴리로 내려가서 한 일이라는 게 고작 고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받기 이전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과 그로 인한 박해의 위협 때문에 낙향했다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주님에게서 ‘너희를 보낸다.’(요20:21)는 파송까지 받았습니다. 그런 제자들이 곧바로 갈릴리로 내려갔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사명감의 부족이나 낙심한 상태로 설명하기에는 뭔가 충분하지 못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복음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로 내려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28:16-17절을 찾아서 읽겠습니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마28:16-17)
여기에서 우리는 제자들이 분명히 갈릴리로 내려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요한복음이 갈릴리 호수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을 기록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서 만났다고 기록되어있는 차이점은 있습니다만, 여하튼 제자들이 갈릴리로 내려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갈릴리에서 주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소위 ‘지상 명령’(The Great Commision)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내려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마가복음 14:27-2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27-28)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빈 무덤에 있던 천사에 의해서 재차 확인되었습니다. 마가복음 16:7절을 찾아서 읽겠습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16:7; 비교 마28:7)
자, 그렇다면 제자들이 갈릴리로 내려간 것은 그냥 낙심한 상태에서 낙향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갈릴리로 내려갔음에 틀림없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갈릴리로 내려갔을까요? 이 질문에도 우리는 이제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굳이 만나셨던 이유는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약속을 믿었더라면 빈 무덤을 확인하는 즉시 갈릴리로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한 집에 모여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서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나고 난 후에야 부활을 믿게 되었고, 그러고 나서 그들은 ‘다시 살아난 후에 갈릴리에서 보자’는 주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갈릴리로 내려가기는 했지만 주님께서 왜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셨는지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일 없이 옛날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왜 갈릴리로 내려가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다음 시간에 계속 묵상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서 얼마나 제자들을 사랑하시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믿지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고 늘 미적거리는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한없는 사랑을 발견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믿음이 부족하고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세심하게 배려하고 끝까지 격려하며 세워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갈릴리의 일곱 제자 (요한복음 21:2-3)
주님은 제자들에게 미리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부활하고 난 후에 갈릴리에서 보자고 그러셨습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에, 제자들은 마땅히 주님의 부활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습니다. 주님이 장사된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도 제자들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미적거리고 남아있었던 이유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부활을 믿었다면 빈 무덤을 확인한 즉시 갈릴리로 내려갔어야 했습니다.
아무튼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야 제자들은 ‘부활하신 후에 갈릴리에서 보자’던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냅니다. 요한복음 21장은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갈릴리로 내려온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항상 한 박자가 늦습니다. 믿어야 할 때에 믿지 못하고, 행동해야 할 때에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직접 다가오셔서 일으켜 세워주십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요21:2)
갈릴리에 내려온 일곱 제자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명이 밝혀진 사람은 베드로와 도마와 나다나엘 세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도마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요한복음 1장에서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빈정대었던 사람입니다. 후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나서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명단에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지만, 많은 성서학자들은 ‘바돌로매’과 동일 인물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무튼 실명이 확인된 세 사람 외에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은 물론 ‘야고보와 요한’(막1:19)을 가리킵니다. 다른 제자 둘이 누구였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아마도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와 빌립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베드로와 한 동네 출신 어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일곱 제자인가’하는 점입니다.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이들이 갈릴리에 내려온 것은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신 주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베드로가 주도적으로 이 일을 진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섯 제자들만 베드로를 따라 왔습니다.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누가복음을 보면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과 달리 ‘갈릴리에서 보자’는 주님의 명령 대신 ‘성령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눅24:49)는 상반된 말씀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제자들 사이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에 대해 큰 견해차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갈릴리로 내려가자고 했고 나머지는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자고 그런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이 대목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지도력과 영향력에 상당한 구멍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베드로의 지도력 누수현상이 아닙니다. ‘갈릴리에서 나를 보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의도가 과연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일행은 갈릴리에 오기는 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갈릴리로 내려온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을 때, 막연한 기다림에 무료해진 때문일까요, 베드로가 불쑥 고기를 잡으러 가자고 제안을 합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 잡으로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21:3)
시몬 베드로는 본래 어부 출신이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평생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며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고기 잡으러 간다’고 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베드로가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 지난 3년 동안 한 번도 고기를 잡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과거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전적으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지금 갈릴리로 내려온 것도 옛날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도 두 말 하지 않고 따라 나섭니다. 아무리 몇 년 동안 고기 잡는 일을 놓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고기잡이 전문가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날 밤에 그들은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은 그냥 우연히 생긴 일은 아닙니다. 한번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끝까지 부르심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옛날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들은 옛날로 돌아갔습니다. ‘갈릴리로 내려가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왜 하필 갈릴리입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갈릴리에서 보자고 그러셨을까요?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단지 ‘갈릴리’라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하셨던 일들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갈릴리에서 시작하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메시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당하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너희보다 갈릴리로 먼저 가신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라도 갈릴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으시다는 뜻입니다. 그곳에는 아직도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어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힌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그곳에서 그들을 위해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자들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은 갈릴리로 내려가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들은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옛날로 돌아가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만났던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더 보게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진 채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그들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세 번씩이나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치고 연약하고 병들어 쓰러져있는 주님의 어린양들을 주님을 대신해서 먹이는 것,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현재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나는 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내 삶의 현장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주님의 부활과 그를 통해 주어지는 영생과 구원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단지 죽고 난 다음의 부활과 영생을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사람 낚는 어부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그 일은 하지 않고 그저 생활을 위해 고기만 잡고 있다면, 그들이 체험한 예수의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일이 있은 후에 마태복음 28장 16절 이하를 보면 드디어 열한 제자가 모두 갈릴리로 내려가 예수님이 명하시던 산에서 주님을 만나 소위 '지상 명령'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주님께서 하셨던 일을 이제 주님을 대신하여 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고 복음을 땅 끝까지 증거하는 일입니다. 사실 그곳이 갈릴리이든 예루살렘이든, 아니면 한국이든 미국이든 상관없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부탁하신 명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바로 '갈릴리로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의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다(요한복음 21:4-7)
갈릴리에 내려왔던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들은 지금 마음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우선 제자 공동체가 나누어지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제자들 일부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베드로를 따라서 겨우 여섯 명만 갈릴리로 내려왔던 것입니다. 이는 베드로의 지도력과 영향력에 문제가 생겼다는 증거입니다. 이 일로 인해 특히 베드로는 심적으로 매우 의기소침해있었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다는 자책감과 함께 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갈릴리로 내려왔는데,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주님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막연히 기다려야 하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혼란스러웠습니다. 이때 감정적이고 충동적이었던 베드로는 불쑥 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고기라도 잡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국 베드로의 충동에 따라 일곱 제자들은 모두 주님을 만나기 전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 ‘고기를 잡는 어부’의 옛 생활로 돌아간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단순하게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물론 아직까지 그들은 주님께서 ‘갈릴리에서 보리라’고 하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고기를 잡을 일이 아니라 갈릴리에서 주님께서 하셨던 일을 주님을 대신하여 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걸 모르니까 갈릴리로 내려오기는 했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막연히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고기를 잡으러 나갔는데 설상가상으로 아무 것도 잡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가뜩이나 의기소침해있던 베드로 일행을 더욱 낙심시킨 일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주님이 나타나십니다. 본문 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요21:4)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 일에 실망하고 낙심하여 문제 속에 파묻혀있으면 아무리 주님이 직접 나타나 보이셔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창세기 21장의 하갈이 그랬습니다. 아브라함 집에서 쫓겨나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물이 떨어져서 죽게 되었습니다. 자식이 죽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면서 하나님께 통곡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셔서 샘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샘물은 그곳에 본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에 파묻히니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렇게 슬픔과 문제에 사로잡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는 믿음의 눈을 뜨고 살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5-6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5-6절)
제자들은 주님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아침거리로 뭘 좀 잡았습니까?’라고 어떤 사람이 묻자, ‘못 잡았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아마추어에게는 이 말이 별 것 아니지만, 전문가들에게는 아주 수치스러운 대답입니다. 어떻게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할 수가 있습니까?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잘하는 어떤 일을 열심히 했는데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기적의 순간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닷가에 서있던 사람이 제안을 합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으로 던지고 어떻게 되는지 보시지요.” 제자들은 무엇에 홀린 듯이 그 말에 순순히 순종합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고기를 얼마나 많이 잡았는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11절을 보면 큰 물고기만 모두 153마리가 잡혔다고 합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하다가 한꺼번에 153마리를 잡은 것입니다. 잡지 못한 것도 기적이지만 이렇게 잡은 것도 기적입니다. 자, 그렇다면 제자들은 왜 고기를 잡지 못했을까요? 고기들이 배 오른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계속 왼편으로만 던진 것입니다. 물고기가 없어서 잡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가 없는 곳에 계속 그물을 내렸기 때문에 잡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습관이라는 것이 아주 무서운 겁니다.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 보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들이 있습니다. 자꾸 반복하다 보니까 그것이 익숙하고 편해진 것입니다. 문제는 그래서 자꾸 실패한다는 사실입니다. 실패하면서도 그 이유를 모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새로운 일을 명하신다면 불편하더라도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바다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 받는 비결입니다.
그런데 이미 오래 전에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건이 누가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이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5:4-6)
물론 요한복음 본문의 사건과는 차이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기적적으로 많이 잡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0-11절을 보면 이 사건을 목격한 다른 사람들의 명단이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눅5:10-11)
바로 이 장면에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을 취하리라’, 즉 ‘사람을 낚게 되리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이때부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장면이 지금 요한복음 21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바닷가에 서 있는 사람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본문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요21:7)
요한은 관찰력과 기억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요한도 처음에는 주님인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자 요한은 가장 빨리 주님을 알아봅니다.
베드로는 항상 상황판단이 가장 늦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늦게 하지만 행동은 가장 빠릅니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 내립니다. 육지에서 거리가 얼마나 먼지 앞뒤 재지 않고 그냥 무조건 뛰어내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얼마나 주님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강점입니다.
그에게는 수많은 실수와 약점들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 한 가지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귀히 여기시는 것은 바로 그 마음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다면 그 어떤 허물과 실수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결국 주님을 대신하여 주님의 양들을 먹이는 목자로 다시 세워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같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오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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