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반하다(경주 남산) / 정희연
건강 검진을 받았다 고혈압과 당뇨가 경계 수치에 있다. 이제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에 다다른 것이다. 약을 먹든지 아니면 특별한 관리를 요했다. 숙소와 현장 가까운 곳에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있지만, 증축 공사가 한창이라 운동장을 이용할 수 없을뿐더러 산업 단지와 주거 지역으로 적당한 곳을 찾지 못했다. 뾰족한 대책이 없어 주말에 산에 올라가는 것으로 계획을 세웠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지켜보던 동료가 경주 남산을 추천했다.
경주는 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신라의 도읍지다. 먼 남쪽 묵장산에서 시작한 형산강은 남에서 북으로 유유히 흐르며, 경주를 지나고 포항을 거쳐 동해로 흐른다. 동쪽에서 합류하는 동천 토암산에서 내려오는 남천과 북천이 순서대로 만난다. 지명이 말해 주듯 옛 신라 중심은 지금 경주의 중심가 보다, 남쪽인 월성 주변인 것을 알 수 있다. 동궁과 월지. 황룡사지. 대릉원. 첨성대 이름만으로도 아득한 시간의 무게를 실감하게 하는 유적들이 바로 이 남천과 북천 사이에 오롯이 남아 있다.
그 아래 남산이 있다, 그 산은 금오봉과 고위봉을 아우르는 이름이다. 고위봉이 금오봉보다 약간 높지만, 두 봉우리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남북으로 8km 동서로 약 4km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 산에 담긴 이야기는 실로 거대하다. 산 곳곳엔 건물지 122개소, 불상 57구, 석탑 64기, 석등 19기, 불상대좌 11좌가 흩어져 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주하는 마애불은 마치 말 없는 안내자처럼 길을 이끈다. 산 전체가 곧 하나의 불교 박물관이요, 신라의 정신을 품은 성지다.
남산에 오르는 건 이번이 세 번째다. 처음엔 용장골에서 이무기 능선을 따라 고위봉에 올랐다. 무리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금오봉은 뒤로 미루고, 반대편 칠불암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하산했다. 두 번째는 용장골에서 곧장 금오봉으로 올라, 삼릉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을 택했다. 같은 산이지만 오를 때마다 새로운 길이었고, 그 길마다 다른 이야기와 마주했다.
아침 7시. 간단히 커피와 과일, 수육을 챙겼다. 평소 같으면 대형 컨테이너 차량들로 붐볐을 고속 도로 입구, 청량 인터체인지(IC)는 이른 시간 덕에 한산했다. 울산에서 경주까지는 한 시간 남짓. 내비게이션은 도착 시간을 오전 여덟시로 예측했다. 경부 고속 도로 양방향 6차선이 시원하게 뚫려 있어, 차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50분쯤 지났을 무렵, 활천 인터체인지에 이르렀고 곧바로 국도 35호선으로 접어들었다. 그때 오른편에 모습을 드러낸 산 하나, 전에는 스쳐 지나치기만 했을 텐데, 이번엔 단번에 알아보았다. 남산이었다. 형산강을 따라 산이 나란히 이어지고, 조금 지나니 왼편에 ‘아내 산’이라 불리는 망산도 보인다. 차는 포석골에 이르렀고, 마음은 이미 산 속 깊이 들어가 있었다.
1월 중순의 겨울은 솔잎마다 가늘게 서리가 내려 있었다.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마음은 이미 경건했다. 포석정을 지나 등산로로 접어 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길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조금 오르니 오른편으로 경주 힐링 마을이 있다. 자연과 함께 걷고 먹고 쉬면서 힐링하고 마음을 치유하는 곳이다. 계곡 옆으로 등산로가 이어진다. 남산의 소나무는 곧게 자라지 않는다. 둥치가 비틀리면서 자라 오르거나 옆으로 처진다. 척박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곧은 나무는 대들보나 서까래로 잘려 나가 그렇지 못한 것들만 남았다. 남은 나무는 역사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군상을 보는 것처럼 보였다. 40여분쯤 오르니 경주 남산의 여덟 암자 중 하나인 부흥사에 다다라 잠시 목을 축였다. 대나무 빗자루가 100년이 넘어 보이는 벚나무에 걸쳐있다. 마당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그 흔적이 선명하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조용하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능선 위로 석탑 윗부분이 보인다. 손을 펼치면 닿을 듯한 거리다. 능비봄 5충 석탑이다. 산능선 암반에 탑을 쌓았다. 산 아래로 경주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누가 봐도 명당이다. 석탑은 제 몸을 거의 잃어버렸다. 그곳에 새 돌을 다듬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금오봉 정상을 거쳐 월정사로 내려오면서 산릉 계곡 마애 관음 보살을 만났다. 그런데 머리가 없다. 목이 잘려나간 것이다.
탑이 있을 만한 곳에 탑이, 불상이 있을 만한 곳 불상이, 터가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절이 들어 섰으나 외세의 침입으로 처참하게 훼손되었다. 깨지고 부서지고 불에 타 소실되는 등 온전한 것의 거의 없다,
산에서 마주한 돌무더기들 일부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고, 어떤 것은 무너진 채로 흙 속에 파묻혀 있었다. 그저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오래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일까. 남산은 말없이 보여주었다. 지켜지지 못한 문화유산은 내 몸과 마음을 닮아 있었다. 관심을 놓는 순간 유산은 사라지고 건강도 무너진다. 한때는 눈부셨던 것들이 관리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퇴색해 간다.
그렇게 남산은 내 몸을 걷게 했고 내 마음을 멈추게 했다.
첫댓글 경주 남산을 가셨군요. 내가 간 것처럼 떠오르는 걸 보면, 잘 쓰셨다는 증거겠지요? 글이 날로 좋아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가셨군요. 두어 번 더 가야 하는 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산 전체가 하나의 불교 박물관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남산은 정말 귀한 산이지요.
선생님 발길 따라 저도 등산 잘했습니다.
부디 원하는 결과 얻기를 빕니다.
이곳 생활도 채 3개월도 남지 않았습니다. 몸도 마음도 좀 더 챙겨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암튼,
바쁜 25년이 가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간단히 커피와 과일은 이해가는데 수육까지...하하. 경치와 어우러져 더 맛있게 드셨을 듯요.
글을 쓰려면 뭔가를 담아 와야 하기에 긴 호흡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아주 좋아요. 하하하!
머릿속까지 서늘한 1월에 고도 경주의 남산을 오르셨네요. 호시탐탐 건강을 헤치려는 숨어있는 게릴라를 기분좋은 땀과 아름다운 풍광으로 색출하여 쫒아내시길 응원합니다.
그러게요. 건강검진 때마다 걱정이 스멀스멀 몰려옵니다. 다 잘 되리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