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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강 정몽주와 정도전
1. 아(我)와 타(他), 고(古)와 금(今)
지난 설을 즈음하여, 이색(李穡) 문중에서 나에게 자료를 보내왔다. 그것은 좋은 일인데, 수취인 성명이 “돌 김용옥 박사님”으로 되어 있었다. 자기 조상을 훌륭하다고 소개하는 사람이 남을 깔보고 있다. 남을 깔보면서 자기 조상만 높이는 멘탈리즘(Mentalism)가 배어있다.
@ 이색(李穡, 1328~1396) 한산 이씨. 성리학의 대가.
고려말 개혁파 신진유생들이 거의 다 그의 문하생이었다.
나한테 어떻게 ‘돌멩이 박사’라고 적어 보낼 수 있느냐 말이다. 내가 정도전을 강의해도 봉화 정씨하고 나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다. 또한 이색을 강의해도 한산 이씨와 아무 관계없다.
이들은 역사화된 사람들이고, 역사 속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문중의 사람들이 아니다. 역사 속의 인물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사상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어려움은 문중에서 씹어 대는 통에 객관적인 연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고소가 들어와서, 제대로 연구를 할 수 없다고 한다.
내가 이퇴계 후손이라고, 퇴계 선생을 자랑하지 말고, 내가 퇴계 선생만큼의 훌륭한 인격과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 봐야 한다.
제1명제 : 아(我)의 훌륭함을 인정하면 동시에 타(他)의 훌륭함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녀석이 자기 조상이 퇴계라는 이야기를 한들, 어떤 놈이 그놈 말을 통해서 퇴계를 숭배하겠나?
우리 사회는 자기 잘난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남이 잘한 것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옛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오늘날 이 땅에도 옛사람에 못지않은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2명제 : 고(古)의 훌륭함을 인정하면 동시에 금(今)의 훌륭함을 인정해야 한다.
이 말은 여러분에게 나를 올바르게 인지해달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과거의 역사를 만들어 온 것과 같은 기라성 같은 훌륭한 정치가, 예술가, 사상가, 지식인들이 우리 시대의 각 분야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2. 포은과 삼봉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1337~1392) 선생은 삼봉 정도전(三峰 鄭道傳) 선생보다 나이가 5살 위이며, 학덕에 있어서 삼봉보다 더 탁월한 면이 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
포은, 삼봉 두 분은 다 문무(文武)를 겸비했다. 정몽주를 문신으로만 생각하는데, 대단한 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대마도 정벌도 가고, 일본, 중국도 여러 차례 갔다 왔다. 무장으로서도 대단한 사람이다.
정몽주는 1377년 큐우슈우(九州)에 가서 왜구를 단속하고 고려백성 수 백 명을 귀국시켰고, 1380년 이성계와 함께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했다. 그는 국제 감각이 탁월한 외교가며 문, 무를 겸한 명재상이었다.
정몽주는 그 당시 중국 고전에 대한 이해가 엄청 탁월했다. 정도전이 성리학에 눈을 뜨게 된 계기도 정몽주의 지도 덕분이었다.
정도전 25살 때 부친, 모친의 상을 함께 당하여 시묘살이 한 곳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속골
삼봉이 시묘살이를 할 때, 정몽주가 정도전에게 <맹자:孟子>라는 책을 보냈는데, 정도전은 이 책을 하루에 반 페이지씩만 읽으면서, 뜻을 생각하며 읽었다고 한다. 그렇게 맹자를 정독한다.
맹자 사상은 공자 사상과 아주 다르다. 맹자 사상에는 무서운 혁명사상이 들어 있다.
공자(孔子)는 체제의 변혁보다 인간의 심미적 완성에 관심이 컸다.
맹자(孟子)는 철두철미 사회적 관심 속에 혁명(革命)을 말한다.
<맹자>라는 책은 당시 공산주의서적보다도 더 무서운 혁명의 책이었다.
이렇게 정도전이라는 사람은 혁명의 꿈을 키우게 된다.
2. 고려 말의 개혁 과제
고려 말 상황은, 백성들의 삶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정치라는 것도 경제적 토대가 빈약하면 그 나라는 흔들린다. 우리가 가장 민감하게 느끼는 것은 경제이다.
지주와 소작민 사이의 계약은 최근까지도 반타작이었다. 소출을 하면, 반쪽씩 나누어 가졌다. 국가에서는 반타작 하는 것은 건드리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토지에서 나오는 소출의 10분의 1만을 세금으로 거두어 갔다. 즉 소작인이 5할, 지주가 4할, 국가가 1할을 갖는 셈이다.
소작인 지주 국가
5 4 1
그런데 화폐가 발달하지 못했던 물물교환 시대에 소출이 나면, 국가가 10분의 1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어려웠다. 소출량도 정확하게 잴 수가 없었고, 세리(稅吏)가 돌아다니면서 10분의 1을 거두어 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봉록이라는 것은 벼슬아치들에게 일정 구역에 한하여 10분의 1을 받아먹으라고 주는 것이었다.
옛날 관리들의 봉록(俸祿)이란 수조권(收租權)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 사또(관리)가 현직에서 물러나면, 다른 사람이 임명되어 온다. 국가에서는 새로 부임한 사람에서 10분 1을 받아먹을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런데 사또라는 직을 그만 둔 사람이 계속 받아먹었다.
관리는 퇴임 후에 땅에 대한 소유권은 없다 해도 수조권은 계속 유지했다.
물론 이것은 불법관행이었다.
새롭게 임명된 사람만 받아먹고, 물러난 사람은 자신의 권한을 끝내야 하는데, 권세가문은 그것을 계속 받아먹었다. 게다가 자기만 받아먹는 게 아니라, 자신이 죽고 나면, 그 아들이 받아먹었다. 그리고 또 손자가 받아먹었다.
지금 같으면, 안 줄텐데, 옛날 인심은 그렇지 않았다. 할아버지 때부터 받아먹었던 것이므로 당연하게 생각했다.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이나 모두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한 토지에 소작인은 한 명인데, 9명의 권리자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즉 소작인이 농사를 지어서 소출이 나오면 10분 9는 다 도둑질해 가는 셈이 되었다. 소작인은 뼈 빠지게 고생만 하고, 10분 1만으로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고려 말은 전부 이 지경에 빠져있었다.
당시 고려말 농민들은 불법 수탈로 인한 빈곤을 이렇게 표현했다.
목구녕이 호랑이보다 무섭다
이게 제일 큰 문제였는데, 그 누구도 이 문제를 바꿀 길이 없었다. 받아먹는 놈들은 받아먹을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 땅은 자기 땅으로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오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불쌍한 서민들만 족쳤다. 답전보의 전보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이런 것을 없애는 것이 고려말 개혁의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모든 사전(私田)을 폐지하고 공전(公田)만을 인정하는 균전제(均田制)를 주장했다. 모든 자영농자가 땅을 골고루 분배받는 계민주전(計民授田)의 원칙을 고수했다.
정도전은 이런 지경까지 왔으니깐, 토지를 완전히 국가에서 몰수해서, 경작자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하자는 것이었다. 완벽한 토지공개념을 처음 생각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전국의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기 어려웠다.
한편 동시대의 조준(趙俊)은 현직 관리 외에는 받아먹을 수 있는 권리를 전부 없애자고 한다. 현직에 있는 사람에게 나누어 준 것을 과전이라고 한다. 과전만 살리자고 하는 것이 과전법이다.
조준(趙浚)은 토지소유권은 불문하고 수조권만을 문제 삼고, 수조권을 현직관리에게만 제한시켰다. 권문세가의 모든 불법적 수취를 박탈했다.
과전법(科田法)이란 현직 관리의 등급에 따라 수조권을 분급한 것인데, 이것도 경기(京畿) 지방에 한정시킨 것이다.
3. 포은과 삼봉
고려 말 사회에서 이런 개혁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었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정몽주이다.
후배인 정도전이 똑똑하니깐, 정몽주가 키운 것이다. 삼봉을 이성계와 만나게 해 준 것도 정몽주이다. 포은 선생이 다리를 놓아준다.
1383년 가을 정도전은 함경도 함주막(咸州幕)을 찾아가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를 만나 혁명을 결의한다. 이 만남은 정몽주가 주선한 것이다. 위화도회군 5년전이었다.
함경도를 찾아가서, 몰래 어느 막사에서 이성계를 만났는데, 그때 삼봉은 아주 구체적인 혁명안을 내 놓았던 거 같다. 도저히 현 체제로는 안 된다. 이것을 근원적으로 갈아엎자고 한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무서운 이야기다. 그 당시 젊은 정도전은 그렇게 나갔다.
정도전도 토지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정몽주도 초기에는 그런 개혁에 찬동한다. 그래서 개혁을 밀고 나가지만, 475년을 유지해온 고려왕조를 갈아엎는 데는 반대했다.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대안을 물었다. 아마 포은도 대답을 못했을 것이다. 고려왕조의 신하로서 고려왕조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개혁을 하려고 했던 사람인데, 새로운 왕조가 어찌 될지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나갈 수 없었다.
그래서 포은과 삼봉은 결별을 한다.
포은은 사랑했던 동생 삼봉을 죽이려고 한다. 왕조를 엎는 것까지 가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정도전은 영주 봉화에서 체포되어 보주(甫州, 예천)의 감옥에 갇힌다.
공양왕 4년 4월, 고려의 마지막 해였다.
삼봉 입장에서는 고려말 체제로는 도저히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여기에 엄청난 시대적 갈등이 있는 것이다. 이 고민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똑같이 있는 고민이다.
4. 정몽주의 결정
이방원은 맹랑한 사람으로 열렬한 혁명아였다. 총칼밖에는 없는 사람이다.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부상을 입자 개혁파는 타격을 입고 정몽주가 득세한다. 이때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의 활약이 시작된다. 26살이었다.
이방원은 아버지를 개성에 모셔다 놓고, 정몽주를 떠보려고 하여가를 부른다.
如此亦何如, 如彼亦何如
城隍堂後垣, 頹落亦何如
我輩若此爲, 不死亦何如
이런들 엇더하리 저런들 엇더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엇더하리
우리도 이같이얽혀 천년만년 누리리라
얽히고, 섥혀서 살아남는 것이 장땡이지, 뭔 폼을 잡느냐는 말이다.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한다.
@ 단심가(丹心歌)
이몸이 죽고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없고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也歟.
이방원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철퇴로 죽인다.
이성계 일파가 이미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고, 국운은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에 정몽주 자신도 이미 시대가 기울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방원의 기세를 보고, 자기가 죽게 될 몸인 줄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자신의 운명은 받아들였다. 선죽교를 가 보았는데, 아직도 그 핏자국이 있다. 돌에 박혀있는 광물로 보인다.
도올은 2003년 6월 30일 선죽교를 방문했다.
5. 정몽주와 정도전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정몽주는 훌륭한 사람이었을까? 우리 심상에 정몽주는 아주 훌륭한 분이다.
그런데 삼봉은 포은만큼 국민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지 않다. 삼봉은 정몽주와 서로 사랑하는 친한 친구였고, 형님아우 사이였고, 혁명의 동지였다. 하지만 조선건국을 기점으로 서로 갈라지게 된다.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정몽주는 어디까지나 구질서를 지키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여러분 마음에 정몽주는 훌륭한 사람이다. 일편단심의 충절을 과시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조선왕조 입장에서 보면, 정몽주는 반역자이다. 우리 의 정통은 조선왕조다. 조선왕조이 새로 세워졌고, 유학을 본위로 하는 새로운 문명을 건설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조선왕조의 적통상 정도전이 더 우위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는 재미있다. 혁명에 성공한 이후에 혁명의 결과를 따먹은 권력자들은 새로 성립한 조선왕조를 위해, 또다시 포은이 필요했다. 죽을지언정 포은 정몽주와 같이 충절을 다하는 인간들이 되라고 해야 했다. 그러면서 삼봉은 반역도로 몰리게 된다.
여기에 역사를 보는 중요한 문제가 걸려있다. 정몽주는 조선왕조로 볼 때, 역적이다. 물론 고려왕조로 볼 때는 충신이다. 그러나 진짜 충신은 삼봉 정도전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의 삼봉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형편없다. 이것은 너무도 억울한 일이다.
정도전이나 정몽주나 동일한 개혁성향의 훌륭한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둘 다 똑같이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둘 다 비슷한 나이에 죽었다.
포은은 자기 사회의 개혁에 대해 헌신하다가, 충절을 지키다 죽은 사람으로 추앙을 받는다. 그런데 삼봉 정도전은 마치 권력 투쟁에서 실패한 정객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모반을 하고, 반역을 저지른 사람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조선왕조 초기의 평가에 따라서 조선실록도 만들어진 것이고, 모든 역사가 씌여졌다. 이것이 바로 조선왕조를 낙후시키고, 조선왕조의 보수적인 성격을 규정한 것이다.
포은 정몽주를 자기의 신념에 따라 끝까지 헌신한 사람이다. 삼봉 정도전 또한 자기 신념에 끝까지 헌신하다가 죽은 사람이다. 결코 권력투쟁에서 낙후한 그러한 패배자는 아니었다.
우리가 포은을 사랑한다면, 그와 똑같은 마음으로 삼봉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인정해야 한다. 그의 혁명에 대한 의지와 국가에 대한 사랑과 역사에 대한 정의감을 똑같이 인정해야 한다.
정몽주가 자기 신념에 따라 고려조에 충절을 지킨 비장한 인물로 평가된다면, 정도전 또한 자기 이념에 따라 비장한 최후를 마친 성공적 혁명가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그를 권력투쟁에 패배한 역모자로 휘몬 모든 조선왕조의 기록은 조선왕조의 보수적 성격 그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배자의 역사의 왜곡이며 민중의 불행이었다.
그래서 내가 삼봉 정도전을 강의하고 있는 것이다. 삼봉은 고려 말의 상황을 볼 때, 썩은 뿌리에서 건질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6. 정보위의 가치
이런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썼다. 성종 때 <경국대전>이라는 조선법률이 만들어지는데, <경국대전>에는 <조선경국전>에 들어 있는 철학이 빠져 있다. 권력자들이 국민들을 다스리기 위한 법제적인 것만 자세하게 만들어 놓았다. 철학이 빠져있다.
그런데 <조선경국전>은 전혀 다르다. 여기엔 철학이 들어 있다. 그 철학은 철저하게 민본주의적인 것이다. 철저하게 개혁적인 것이다. 그리고 왕권(王權)을 철저히 제약했다. 왕이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 정보위(正寶位) 군주의 보배로운 위치를 바르게 함
<조선경국전>의 헌법적 총론. 성종대에 편찬된 <경국대전>의 기초
7. 민주주의의 진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민주라는 건 사실 웃기는 것이다.
민주라고 하면, 희랍사상에서 나오는 데모크라시(Democracy)를 생각하는데, 희랍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아테네의 시민한테만 국한된 것이었다.
플라톤의 국가론을 보시면, 수호자(phylax), 보조자(epikouroi), 다중(hoi polloi)라는 세 계급이 나온다. 그 세 계급 밑에는 광범위한 노예가 전제되어 있다.
수호자(phylax), 보조자(epikouroi), 다중(hoi polloi)
플라톤의 이상국에 나오는 세 계급
노예는 데모크라시에서 싹 빠져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건 데모크라시가 아니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말하면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희랍의 민주제도(democracy)는 광범위한 노예제도를 전제로 한 것이며,
오늘날의 민주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동양사상에 있어서 민주(民主)를 말하면, 공자나 맹자의 사상은 민주주의 측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앞서는 진보적인 철학이었다.
유교 고전은 민주(民主)의 정신으로 말한다면 세계역사상 가장 전위적인 것이다.
인간 존엄의 보편성과 혁명을 시인하고 있다.
공자의 민(民)의 개념에는 노예라는 것이 없다. 유교무류(有敎無類)라고 했다. 즉 인간의 교육에는 계층적 차등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 유교무류(有敎無類)
인간의 교육에는 계층적 차등이 있을 수 없다. -공자
공자와 맹자는 철저한 민본주의(民本主義)사상가였다.
우리 문명은 민의의 보편적 도덕성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확보한 문명이지만, 단지 불행하게도 민의를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가 없었다. 이것이 가장 결정적인 문제였다.
영국에서는 <마그나카르타>를 하면서 귀족들이 왕권을 제약했다.
@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1215년의 대헌장. 이것은 왕권으로부터 귀족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귀족헌장(Articles of Barons)으로부터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마그나카르타라고 하는 것도 민주주의 헌법이 아니다. 그건 귀족들이 왕한테 자기 재산을 함부로 빼앗아 가지 말라는 것이다.
마그나 카르타에는 민(民)의 개념이 빠져있다. 그것은 민주헌장이 아니다.
거기에는 민의 개념이 빠져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 헌법이 아니었다. 그런데 비해서 우리가 공부하려는 삼봉의 <정보위>는 철저한 민본사상이 깔려있다.
우리 민족은 서양으로부터 선거라는 제도를 들여왔다. 그리고 불과 50년 만에, 불과 반세기만에,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객관적인 체제를 확보했다.
서구라파 역사상 선거라는 제도를 수출해서 이렇게 빠른 시기에 정착된 유래가 없다.
한국은 서구의 선거제도가 가장 빠른 시일내에 정착한 문명이다. 동아시아에서는 물론 세계사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정신에 원래 민주주의 정신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삼봉 전도전의 사상에서부터 이미 민주주의가 확보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의회민주주의는 전통적 민본사상의 연속적 발전이다. -도올
8. 반부패의 역사
그런데 민주라는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계 어느 민족보다 먼저 민주적 전통을 이미 가지고 있었던 민족이다. 민주라는 말로 위장하고 나타나는 정치인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
민주라는 말은 애매해서 위장하기 쉽다. 민주라는 말은 추상적이기 때문에 국민들을 기만하기 쉽다. 민주라는 것은 역사의 목표가 될 수가 없다.
민주는 치세(治世)의 방법(methodology)에 관한 것이며 역사의 목표가 될 수 없다.
민주라는 것은 우리나라를 다스리는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고, 민의를 반영하여 대통령을 뽑는 제도와 같은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민주라는 제도를 통해서 우리 역사에서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는지 목표를 수립하는 것이다.
민주는 그것 자체로 목표가 될 수 없으며, 그것은 항상 무엇인가를 위해서 존속하는 정치방법론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과제는 삼봉이나 포은이 똑같이 당면했던 문제와 똑같다. 단 하나의 문제다. 우리 역사의 목표는 민주가 아니다. 우리 역사의 목표는 반부패이다.
방금(方今)의 우리민족역사의 목표는 민주(民主)가 아니라 반부패(反腐敗)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무서운 부패를 뽑아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삼봉이 외치는 바이다. 우리는 이 부패의 뿌리를 뽑아야 한다.
구한말 우리 역사는 썩을 대로 썩어 있었다. 여태까지 우리는 그 썩은 역사를 잘 모르고 있었다.
해월 선생 같은 분이 외친 것은, 동학이 외친 것은, 보국안민이었다. 보국안민을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보호해서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의 보국안민(保國安民)으로 알고 있는데, 동학에서는 이런 말을 쓰지 않았다.
保國安民(X) ---> 輔國安民(O)
보국안민에서 ‘보’는 반드시 輔자를 썼다. 보(輔)는 정야(正也)라고 했다. 바르게 하는 것이다. 나라의 썩은 것을, 틀린 것을, 부패를, 그릇된 것을 바르게 해야만 백성이 편안해진다는 뜻이다. 보국안민(保國安民)과는 차원이 다르다.
輔, 正也.
동학의 외침은 외세로부터 우리나라를 보호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 사회가 썩었고, 우리 사회가 잘못되었고, 우리가 살아왔던 사고방식, 생활방식이 근원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왕정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걸 뒤엎어야 하고, 이걸 다시 개벽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문명을 새롭게 다시 만들자고 했던 것이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용담유사 안심가-
동학하는 사람들은 왕조를 뒤엎고 다시 만들려는 수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문명을 새롭게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자각을 수운 선생이 했던 것이다.
다시개별=인류전체 문명의 개벽 Remaking of Civilization
그런데 동학 운동을 짓밟고, 일제 식민지의 썩은 새끼들이 이 땅을 지배하고, 해방 후에도 그 썩은 새끼들이 지배하고, 그 썩은 새끼들이 독재를 했다. 썩은 뿌리를 근원적으로 갈아엎어야 한다.
삼봉이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왕조를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는 20세기의 조선을 무너뜨려야 한다. 그리고 21세기의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곧 총선이 있다. 이것은 우리 국민이, 우리 민중이, 우리 역사의 진로를 구조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우리 역사의 목표는 민주가 아니다. 그런 애매한 말에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역사의 목표는 반부패, 즉 썩은 것을 도려내야 하는 것이다.
여기도 장사하는 분이 있겠지만, 우리나라처럼 장사하기 힘든 나라가 없다. 왜냐? 다 썩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다 뜯어먹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겉으로 근사해도, 썩어 곪아터진 나라이다.
9. 반부패의 역사
고려사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정도전은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왕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자신이 왕이 된 것도 아니다. 이성계를 옹립하고, 어떻게 왕위를 규정해서 새로운 민중의 사회를 만들지 고민했던 사람이다.
쌀밥을 이밥이라고 한다. 이성계의 개혁이 성공해서 쌀을 못 먹던 사람이 쌀밥 먹으면서 감격해서 이밥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게 조선왕조에 새로운 기운을 준 것이었다.
이밥 흰 쌀밥을 의미. 이성계가 내려준 밥이라는 뜻으로 고려말에서부터 내려온 말. 삼봉, 조준의 전제개혁의 성공을 반영한다.
결국 조선왕조의 역성혁명은 이밥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삼봉 정도전이라는 사람이 그런 개혁을 이룬 것이다. 이밥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준 것이다.
우리 역사도 지금 그러한 변화의 전기가 필요하다. 오늘날의 우리 젊은이들도 정신 차려야 한다.
10. 정보위와 주역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쓰면서 <정보위>라는 정치철학의 대 테제를 내걸고 있다.
正 寶 位
易曰。聖人之大寶曰位。天地之大德曰生。何以守位。曰仁。天子享天下之奉。諸侯享境內之奉。皆富貴之至也。賢能效其智。豪傑效其力。民庶奔走。各服其役。惟人君之命是從焉。以其得乎位也。非大寶而何。天地之於萬物。一於生育而已。蓋其一原之氣。周流無間。而萬物之生。皆受是氣以生。洪纖高下。各形其形。各性其性。故曰天地以生物爲心。所謂生物之心。卽天地之大德也。人君之位。尊則尊矣。貴則貴矣。然天下至廣也。萬民至衆也。一有不得其心。則蓋有大可慮者存焉。下民至弱也。不可以力劫之也。至愚也。不可以智欺之也。得其心則服之。不得其心則去之。去就之間。不容毫髮焉。然所謂得其心者。非以私意苟且而爲之也。非以違道干譽而致之也。亦曰仁而已矣。人君以天地生物之心爲心。行不忍人之政。使天下四境之人。皆悅而仰之若父母。則長享安富尊榮之樂。而無危亡覆墜之患矣。守位以仁。不亦宜乎。恭惟 主上殿下。順天應人。驟正寶位。知仁爲心德之全。愛乃仁之所發。於是正其心以體乎仁。推其愛以及於人。仁之體立而仁之用行矣。嗚呼。保有其位。以延千萬世之傳。詎不信歟。
정보위에서 처음 인용하는 것이 주역 계사 하편에 나오는 것이다.
주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 天地之大德曰生(천지대덕왈생),
[천지의 대덕은 말해서 生이라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천지의 위대한 성덕은 무엇이냐? 모든 것을 生하게 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길거리 지나가면서 산천초목을 보면, 내버려두어도 천지는 항상 생명을 부여한다. 모든 것을 生하도록 하지 죽이지 않는다. 우리 인간들처럼 서로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
씨앗이 하나 떨어져도 천지는 어떻게 하면 그 씨앗을 트이게 할지 생각한다. 이게 천지의 마음이다. 인간의 마음은 서로 죽이고, 서로 미워한다.
천지대자연의 마음은 만물을 생(生)하는 마음이다.
▶ 聖人之大寶曰位(성인지대보왈위):
[인간 세상을 다스리는 성인의 가장 큰 보배는 그가 바로 존엄한 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 옛날 군주가 위대한가?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명의 대통령을 만드는 동시에 거기에 위(位)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위(位)때문에 세(勢)가 생긴다. 권력이 생기는 것이다. 그게 무서운 것이다.
위(位) ----> 세(勢)
▶ 何以守位曰仁(하이수위왈인),
[그 위(位)라는 것을 어떻게 지키느냐, 그것은 인(仁)으로만 지킬 수 있다.]
인(仁)이라는 것은 국민들의 마음이 항상 천지(天地)의 대덕(大德)처럼 생생(生生)할 수 있도록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죽어 가면 성인이 필요 없고, 정치가 필요 없고, 국가가 필요 없고, 법률이 필요 없다. 다 필요 없다. 우리 마음이 천지지심처럼 살아갈 수 있을 때,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仁)해지는 것이다.
▶ 可以聚人曰財(가이취인왈재):
[어떻게 해서 사람을 모을 수 있느냐? 그것은 돈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문구에서 재미난 것은 당연히 천지가 먼저 오고 성인이 온다. 이 두 구절은 대구(對句)이다. 다음의 두 구절도 대구(對句)이다.
정도전은 처음에 이것을 인용하는 방식이 파격적이다.
天地之大德曰生(천지지대덕왈생)을 먼저 인용하지 않고, 聖人之大寶曰位(성인지대보왈위)를 앞세웠다. 정도전은 위대한 중국의 고전을 우습게 여기고 과감하게 자기 마음대로 칼질한다. 과거에는 이렇게 하지 못했다. 정도전은 그렇게 기개가 있는 사람이었다.
내(정도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말하려는 조선왕조의 문제는 바로 성인이라는 것이다. 내가 1차적으로 혁명을 하려는 것은 어떻게 우리 조선 왕조를 바르게 건국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천지보다 성인이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聖人之大寶曰位를 인용한다.
정도전은 天下之大德曰生을 먼저 인용하지 않고 聖人之大寶曰位를 앞세운다.
그의 문제의식은 천지(天地)보다도 성인(聖人)에 있었다.
그 다음에 인용하는 것은, 위(位)는 인(仁)으로만 지킬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可以聚人曰財는 빼버린다. 원래 이런 대구(對句)를 이렇게 막 잘라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天地之大德曰生를 聖人之大寶曰位 다음에 끼워 넣었다.
성인의 대보는 위(位)인데, 그것을 지키는 것은 인(仁)이다. 당신이 누구든지 위(位)를 가졌기 때문에 다스릴 수 있는 것인데, 그 위를 지키려면 백성들의 인(仁)한 마음을 얻으라는 것이다.
위(位) ---> 생(生) ---> 인(仁)
Legalistic Confucian
법가적 유가적
백성들의 인(仁)을 보장하는 방법은 어떠하냐? 그것은 바로 천지의 대덕과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국가(조선)를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근본은 우리의 모든 문명이 인(仁)하게 생생(生生)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生)하고 또 생(生)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역에서 역(易)이라는 말을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라고 했다.
富有之謂大業, 日新之謂盛德, 生生之謂易.
<주역 계사 상>
이 천지가 생하고 또 생하면서 끊임없이 생성하는 그 모습이 바로, 역(易)이라고 했다. 주역에서 역은 천지가 생생(生生)하는 것이다.
민(民)을 다스리는 사람의 마음도 생생해야 하고, 새로새로 태어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산출해야 하고, 백성들의 마음도 끊임없이 생생해야 하고, 그 양자(兩者)가 살고 있는 천지라고 하는, 이 모든 대자연의 환경도 끊임없이 생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모든 생생(生生)을 돕는 방향에서 국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 왕조는 죽이고 죽이면서 이루어졌다. 이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것이 내(정도전)가 말하는 혁명이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새로운 왕조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경험한 19, 20세기는 철저하게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두 세기였다.
내가 이 시간에 삼봉 정도전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우리 문명이 새로운 모습으로 끊임없이 태어나고 태어나는, 생성하는 그러한 세기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우리 역사에 새로운 혁명을 꾀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떠한 새로운 가치관을 확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강의의 문제가 아니라, 매일매일 살아가는 우리 삶의 모습에 관한 것이다.
정보위라는 조선왕조의 헌법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다음 시간에 계속 강의하겠다. 전달하고 싶은 내용이 많은데 비해 시간이 한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