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 간 사람들<7>
천재시인 백석(白石)과 기생 자야(子夜)의 순애보
천재시인 백석(白石, 1912~1996)은 평북 정주 출생으로 1929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아오야마(靑山)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시인이자 소설가, 번역 문학가로 북한에서 활동하다가 생을 마감한 인물로 성은 백(白), 본명은 기행(夔行)이다.
일본에서 귀국한 백석은 훤칠한 키, 잘생긴 얼굴에 옷도 잘 입어서 당시로서는 최고의 멋쟁이로 별명이 ‘모던보이(Modern Boy)’ 였다고 한다.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는 모국어처럼 능통하였다고 하며 결벽증이 심하여 버스 손잡이도 잡지 않았다고 한다. 귀국 후 조선일보사 기자 등을 역임하면서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1935년, 백석은 함흥의 영생여고보에 영어교사로 부임하였는데 거기에서 함흥에 잠시 들렀던 기생(妓生) 김영한(金英韓)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백석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을 노래’한 이백(李白)의 시(詩) ‘자야오가(子夜吳歌)’의 제목에서 따서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두 사람은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1930년대 말, 당시 최고의 엘리트인 그가 기루(妓樓)의 여인에 빠져 동거(同居)를 시작하자 집안이 반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백석은 이미 결혼한 유부남으로 집안 어른들과 사회의 비난이 쏟아졌고 백석이 택한 사랑의 도피처는 러시아였다.
백석은 러시아로 가서 자야를 기다리며 쓴 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그러나 자야는 그들의 사랑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고 러시아에 가지 않는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백석과 자야가 만날 수 있는 길은 영영 끊기고 말았다.
김영한(金英韓, 1915~1999)은 서울 관철동 출생으로 기명(妓名)은 진향(眞香), 필명은 자야(子夜), 후일 불자가 된 후의 불명은 길상화(吉祥華)다.
일찍 부모의 강권으로 결혼 했으나 실패하고 기생학교인 권번(券番)에 들어가 기생 수업을 받는데 일제강점기, 정악계(正樂界)의 거목인 금하(琴下) 하규일(河圭一) 선생으로부터 여창가곡, 궁중무(宮中舞)를 전수받아 가무의 명인으로 인정받는데 당대의 황진이(黃眞伊)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김영한은 문학에도 재능이 뛰어나 ‘삼천리 문학’에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의 눈에 띄어 그의 후원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러나 해관이 일제에 의하여 함흥에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면회를 신청하지만 거절당하자 고위직들과 사귀어 해관의 출옥을 도울 수 있을까하여 유학을 포기하고 함흥 권번에 들어가 다시 기생(妓生)생활을 시작한다.
자야는 그 시절 함흥 영생여고보의 영어교사로 있던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백석은 기생과의 스캔들이 불거지자 미련 없이 학교에 사표 던지고 서울로 와서 자야와 함께 서울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지만 집안의 압력이 거세어지자 다시 러시아로 사랑의 도피를 계획하게 되는 것이다.
평생 백석을 그리워하며 홀로 살던 자야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만학으로 졸업하는 등 매우 학구적이었다.
후일 자야는 성북동에 요정(料亭)인‘대원각(大苑閣)’을 세워 큰 부(富)를 일구지만 백석의 생일(7월 1일)에는 하루 종일 일체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자야의 식을 줄 모르는 백석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당시 최고의 멋쟁이 백석 생전의 자야 춤추는 자야
자야는 법정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감화되어 1995년 1000억 원 상당의 요정 대원각의 부지 2만 3000여㎡(7000평)를 법정스님에게 시주하는데 그곳에 지은 절이 지금의 길상사(吉祥寺)다.
법정스님은 자야의 법명을 ‘길상화(吉祥華)’라 지어주었고, 절을 지은 후 그녀의 법명을 따서 길상사(吉祥寺)라 했다고 한다.
평생 백석을 그리며 홀로 살던 자야는 1999년 85세를 일기로 숨지는데 ‘내 사랑 백석’,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1995년 출간)의 저서를 남겼다. 장례는 본인의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한 후 재는 길상사 앞 오솔길에 뿌려졌다.
자야는 생전에 사람들이 그 많은 재산을 어찌 그리 쉽게 시주하느냐고 묻자
‘그 돈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고 했다고 한다.
또 그의 저서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쓸쓸한 적막(寂寞)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라고 술회했다.
자야는 임종 직전 현금 2억 원을 기금으로 백석문학상 재단을 설립하고 격년으로 상금 1000만원을 2년 내에 출간된 시집 중에서 뽑아 시상하도록 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白石) 백기행(白夔行)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이 시는 백석이 러시아에서 자야를 기다리며 쓴 시로 알려졌다.>
첫댓글 언제 한 번 썼는데 좀 더 보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