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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22. 그들은 예수를 골고다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골고다는 번역하면 '해골 곳'이다.)
23. 그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께 드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24.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제비를 뽑아서,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를 결정하였다.
25.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26. 그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27. 그들은 예수와 함께 강도 두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하나는 그의 오른쪽에, 하나는 그의 왼쪽에 달았다. (28절 없음)
2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말하기를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30.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너라!" 하였다.
31.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그렇게 조롱하면서 말하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하였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그를 욕하였다.(막15:21-32)
21 On the way they met a man named Simon, who was coming into the city from the country, and the soldiers forced him to carry Jesus' cross. (Simon was from Cyrene and was the father of Alexander and Rufus.) 22 They took Jesus to a place called Golgotha, which means “The Place of the Skull.” 23 There they tried to give him wine mixed with a drug called myrrh, but Jesus would not drink it. 24 Then they crucified him and divided his clothes among themselves, throwing dice to see who would get which piece of clothing. 25 It was nine o'clock in the morning when they crucified him. 26 The notice of the accusation against him said: “The King of the Jews.” 27 They also crucified two bandits with Jesus, one on his right and the other on his left. 28 [a]
29 People passing by shook their heads and hurled insults at Jesus: “Aha! You were going to tear down the Temple and build it back up in three days! 30 Now come down from the cross and save yourself!”
31 In the same way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made fun of Jesus, saying to one another, “He saved others, but he cannot save himself! 32 Let us see the Messiah, the king of Israel, come down from the cross now, and we will believe in him!”
And the two who were crucified with Jesus insulted him also.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주동 인물들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장로들!
그 사람들은 옆구리에 노상 성경 끼고 다니고
밥 먹고 성경 구절 외우고 읽고.......
아이큐는 대충 한 200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완전 모순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 종교인들이 제 생명을 아비스로 내동댕이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죽였으니까!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아보기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리스도가 제대로 보입니까?
최후의 심판의 자리에서 천국을 제대로 들어간 사람이 이 고백을 했습니다.
37. 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38.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39. 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할 것이다.(마25:37-39)
그들은 그리스도를 잘 영접해 놓고도 막상 자신들은 그들이 언제 주님은 대접했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 일도 그렇습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조차 그 십자가 지는 일을 두고 시간을 따로 내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 장소가 겟세마네였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많은 사람이 엉뚱한 일에 종교적인 공을 들이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마7:21-23)
짝뚱 하나님의 일에 제대로 속고 만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가?
주님은 이런 일을 염두에 두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요8:23)
“나는 생명의 언어를 쓰는데 너희는 죽음의 언어를 쓴다.
죽음의 언어에 익숙한 너희가 생명의 언어를 알아먹는 것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신앙은 죄인들에게는 완전히 외국어입니다.
그 외국어를 하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단어를 외우는 일입니다.
단어를 모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많은 단어 중에서도 특별히 죽음이라는 단어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제대로 알아먹기가 왜 이처럼 힘든가!
죽음 안에 생명의 길이 있다니!
예수님의 죽음이 생명의 길입니다.
지금 주님은 빌라도의 군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는 순간이었습니다.
21. 그런데 어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길에, 그 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로서, 구레네 사람 시몬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였다.
21 On the way they met a man named Simon, who was coming into the city from the country, and the soldiers forced him to carry Jesus' cross. (Simon was from Cyrene and was the father of Alexander and Rufus.)
시몬이라는 사람이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던 길이었습니다.
괭이 사러 왔다가 유월절까지 지키고 가려 했을 것입니다.
성전을 가려던 참이었는데 그 길에서 예수님의 행렬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저 사람은 뭐 하러 저렇게 비참하게 죽을 일을 했을까?
나처럼 조용히 농사나 짓지......’
그 때 시몬의 눈이 충혈된 군인 눈과 마주친 것입니다.
이유는 그 한 가지였습니다.
군인과 눈이 마주 친 일입니다.
군인은 너 하면서 시몬을 가르켰습니다.
그는 그 군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십자가 밑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가 분대장이었는지 짝대기 하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좌우간에 그들 문화에서는 한 인간이 그런 식으로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는 회초리가 등짝을 내리치기 전에 먼저 달려가서 십자가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땀과 피에 젖어 미끈거렸습니다.
그 군인은 빙긋이 웃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일이 반은 장난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셨을 때도 그랬습니다.
왕이라는 작자의 말 한마디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16. 헤롯은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몹시 노하였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그 박사들에게 알아본 때를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마2:16)
대문짝을 걷어차고 들어온 그 군인의 칼이 휙 소리를 내더니 젖 빨리던 광주댁의 아기 목이 어머니의 젖가슴과 함께 잘려 버렸습니다.
마당에 굴러다녔습니다.
시몬도 그렇게 당한 셈인데 고난이 신비였습니다.
시몬은 그 경험을 하고 주님을 진심으로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의 자녀인 알렉산더와 루포까지 주님을 각별히 따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시몬의 아내는 바울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여 주십시오.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이기도 합니다.(롬16:13)
이런 일들은 시몬이 예루살렘에 갔다가 당했던 일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의 그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죄를 지었고 그 죄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품으셨던 뜻입니다.
22. 그들은 예수를 골고다라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 (골고다는 번역하면 '해골 곳'이다.)
22 They took Jesus to a place called Golgotha, which means “The Place of the Skull.”
그렇게 예수님은 빌라도의 졸개들에게 끌려가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던 당시 예수님은 33세 셨습니다.
로마 군병 역시 예수님과 동갑도 있었고 그 나이 또래였습니다.
그 중 두 명 정도는 동생들이고.......
그들이 군인만 아니었어도 예수님과 형 동생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이 군병들이 잔인하게 예수님의 등짝을 회초리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날 군대에 징집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훈련을 마치고 보직을 보니 사형집행수였습니다.
자기 전에 점호받고
자고 있는데 운동장에 집합해서 정신없이 얼차려 받고
유격에 각개 전투에 그 다음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별생각 없이 잔인하게 굴었고 자색옷을 친구들과 구하러 다녔습니다.
가시를 구해다가 밤을 새우면서 왕관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 입혀 놓고 낄낄거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런 일을 미리 아셨던 것입니다.
이 일을 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때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뜻을 두고 씨름하셨습니다.
군인들은 제 삶을 장난질처럼 허비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앞일을 두고 진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23. 그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께 드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23 There they tried to give him wine mixed with a drug called myrrh, but Jesus would not drink it.
그 자리에 여인들이 등장했습니다.
이 제 일 여전도회 회원들은 사형틀 앞에 꼭 나타났습니다.
그 봉사가 그들의 몫이었습니다.
실제로 그 일을 할 때마다 그들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진통을 줄여주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봉사를 거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10명이 있으면 그 도시를 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몰약 탄 포도주를 들고 봉사하는 일이 아니라 그 열 사람 안에 끼는 일을 감당하셔야 합니다.
24.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는데, 제비를 뽑아서, 누가 무엇을 차지할지를 결정하였다.
24 Then they crucified him and divided his clothes among themselves, throwing dice to see who would get which piece of clothing.
그 때 군인들이 한 일입니다.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나는 여지껏 못을 나무에 박는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을 못 박는다는 말은 성경에서 처음 들었습니다.
죄인이라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33세의 청년을 나무라고 생각하고 손목에 못을 박았습니다.
다음에는 다른 놈들이 발목을 잡고.......
이 십자가 형벌은 사람이 고안해 낸 것입니다.
그 때 사람이 지르는 괴성이 그 군인의 귀에는 무슨 소리로 들렸을까?
그 때 튀는 피는 그들 눈에 어떤 색깔로 보였을까?
광주 민주 항쟁에서 곤봉으로 머리를 내리칠 때 그 군인의 눈에 사람의 머리가 돌멩이로 보였을까?
아무리 죄인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사람을 두고 못질하는 호모사피엔스!
한 손으로 사람을 못질하고 다른 손으로 제비를 뽑는 장난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람 죽이는 것은 장난질이었습니다.
저도 사람이면서.......
그런데 유대인의 유월절을 맞아서 한 사람에게 사면을 베푸는 이유는 무엇인까?
6. 그런데 빌라도는 명절 때마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죄수 하나를 놓아 주곤 하였다.(막15:6)
우리나라에서는 왜 그런 독재자들을 사면하는가?
그런데 그 군인은 피 묻은 그 손으로 제비를 뽑고 있었습니다.
기회가 주어졌다면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어머니를 두고 있었는데 아버지 따라서 러시아에 살다가 총 들고 외가를 향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사촌이 북에 사는데 한 손에 M16 들고 다른 손에는 제비 뽑고!
그런데 이들이 이 예수님의 옷에 관심을 가지는 종교적인 동기가 있었습니다.
8. 그 때에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벗어 말아서, 그것으로 강물을 치니,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두 사람은 물이 마른 강바닥을 밟으며, 요단 강을 건너갔다.(왕하2:8)
신통력을 드러내니 그 옷이 얼마나 귀한가!
한 여인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27. 이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서, 뒤에서 무리 가운데로 끼어 들어와서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여자는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터인데!" 하고 생각 했던 것이다.)(막5:27,28)
그 녀의 생각이 확인되었습니다.
십이년 앓던 혈루증이 감쪽같이 나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필코 옷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잘못된 그 녀의 생각을 교정하셨습니다.
이런 생각이 아주 사탄적입니다.
옷자락이 예수님을 대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들이 교회 혼란의 원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는 꽹과리 소음입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으로 말을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13:1,2)
방언이 신앙의 본질인 사랑을 대치하고 기적이 예수님의 말씀의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절대적인 요구는 예수님 자체입니다.
사람의 생명 자체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유일한 요구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죽을 생명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25.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
25 It was nine o'clock in the morning when they crucified him.
그들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때가 아홉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그 아홉 시에 우리들은 죄로부터 해방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푸친이 다니는 교회 목사는 주일 낮예배에 무슨 설교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K2, K9, F50 무기 수출 이야기만 하나?
경제와 과학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 나라에서 발전했다는 설교만 하나?
남과 북이 대립하는 이 땅에서 그 아홉 시가 와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던 그 아홉 시!
26. 그의 죄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혀 있었다.
26 The notice of the accusation against him said: “The King of the Jews.”
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자색옷을 입혔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17. 그런 다음에 그들은 예수께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서 머리에 씌운 뒤에
18. "유대인의 왕 만세!" 하면서, 저마다 인사하였다.
19. 또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무릎을 꿇어서 그에게 경배하였다.(막15:17-19)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죄패도 만들어서 달았습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썼습니다.
누추한 외모에 예수님은 두들겨 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은 이 비참한 현실을 승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이 왕의 말을 깨닫기나 하겠습니까?
이 죄패는 희롱이었습니다.
저 모습이 어떻게 왕의 모습이냐!
그 죄패는 빌라도의 신앙고백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들어 주었지만 빌라도는 그것만큼은 확고부동했습니다.
21. 유대 사람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유대 사람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 사람의 왕'이라고 쓰십시오" 하고 말하였으나,
22. 빌라도는 "나는 쓸 것을 썼다" 하고 대답하였다.(요19:21,22)
제 정치권력을 보장하시는 기복주의자의 신앙고백!
그러나 우리는 그 죄패를 우리 신앙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스스로를 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왕에게 기꺼이 생명까지 바치기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죄패를 밑에서 올려다보고 그들은 예수님의 이 죄패를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입니다.
어떤 시각에서 이 예수님을 보는가?
교회는 군인들이 붙인 이 죄패를 세상과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하여금 이 예수님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27. 그들은 예수와 함께 강도 두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하나는 그의 오른쪽에, 하나는 그의 왼쪽에 달았다.
27 They also crucified two bandits with Jesus, one on his right and the other on his left.
(28절 없음)28 [a]
예수님께서는 당시 두 사형수와 똑같은 대우를 받으셨습니다.
세 개의 십자가가 예루살렘의 언덕에 차이가 없이 한 줄로 서 있었습니다.
이 두 사람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다는 같은 명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칼을 들고 그 일을 한 사람이고 예수님은 반대로 적의 칼에 찔리기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싸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방식을 세상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막상 예수께 혜택을 입었던 백성들!
그들은 며칠 전 호산나 다윗의 아들이라고 그를 환영했습니다.
그러다가 돌변한 것입니다.
바라바를 살리라고 한 것입니다.
“칼에 찔리는 것이 어떻게 승리야!” 그들은 단체로 대들었습니다.
29.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말하기를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29 People passing by shook their heads and hurled insults at Jesus: “Aha! You were going to tear down the Temple and build it back up in three days!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셨을 것입니다.
그 영화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잔인하게 다루었는지를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의 등짝이 찢어지고
창에 찔려서 창자가 몸 밖으로 흘러내리고..... 성경은 거기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그리스도의 인간을 위한 인내를 표현한 것이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다른 면을 더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하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그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탁월하신 능력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칼 앞에서 바로 그 능력을 드러내시기를 원했습니다.
아주 간절히!
그러나 주님의 입장을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주님은 그 능력을 부인하시기를 위해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앞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그것은 죄인들의 진심이었습니다.
그 행위가 진심이었던 이유를 그들은 성전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주님은 실재로 오해의 가능성이 있는 말씀을 성전에서 하셨던 것입니다.
18. 유대 사람들이 예수께 묻기를 "당신이 이런 일을 하다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겠습니까?" 하니,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였다.(요2:18,19)
제가 목사였다면 무슨 밭에서 저는 갓끈을 고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오해 살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들은 이 물리적인 금덩이와 벽돌들을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화려한 건물을 지어두고 흥분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건물이 하나님 나라에 지어진 진짜 성전인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무너뜨리심으로 표적을 보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물리적인 건물을 허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20.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짓는 데 마흔여섯 해나 걸렸는데, 이것을 사흘 만에 세우겠습니까?"
21. 그러나 예수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22.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그가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서, 성경 말씀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요2:20-22)
주님은 물리적 건물이 아니며 부활하실 주님을 두고 하신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세상 죄인의 말로 통역하다가 일어난 일입니다.
조직 신학 시간에 진정한 교회란 무형의 교회를 이른다고 해놓고 막상 교회를 두고 성전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건물을 지어대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성전을 예수님의 몸을 두고 이르신 것입니다.
성전은 성령이 계시는 교인 자신을 이르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 후에 제대로 이해했으니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여보고 주님의 말씀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에덴에서 그들이 죽음의 정체를 알았을 때는 이미 죽음의 나라로 쫓겨난 후였습니다.
그 죄인의 버릇이 또 도진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성전 건물이 무너지고 난 후에 진정한 성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왜 또 세워!
30.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너라!" 하였다.
30 Now come down from the cross and save yourself!”
여기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인들의 죄성은 첫째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있습니다.
이런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그리스도를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나 먼저 구원하지.......”
이사야 53장은 이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1. 우리가 들은 것을 누가 믿었느냐? 주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53:1)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데에는 그 이유가 분명합니다.
2. 그는 주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사53:2-3)
첫째 사람들이 외모를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 껍데기만 보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고운 모습이나 풍채가 없으십니다.
둘째로 사람들의 이기적인 관점으로 인해 주님은 못 알아볼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에 대해서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로 인해 고난을 당하실 것인데 사람들은 그 고난의 원인을 모조리 그리스도에게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그리스도는 역사적으로 희생을 당하실 것입니다.
그는 두들겨 맞고 못 박히고 욕 듣고 그 역사적인 고난의 현실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 그리스도의 고난을 승리로 수용한다는 말입니까!
다시 이르지만 그 고난이 성경이 수없이 고백하는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는데 그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지만 그의 고난을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겁쟁이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31. 그러나 베드로는 힘주어서 말하였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선생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모두도 그렇게 말하였다.(막14:31)
그는 용감했고 주께 죽음이 온다면 그 죽음의 장소까지 따라가서 대들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대제사장 종의 귀를 잘라 놓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31. 그리고 예수께서는,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서, 사흘 뒤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께서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예수께 항의하였다.(막8:31,32)
주님은 적과 대들다가 죽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스스로 고난의 길을 택하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투항하시겠다니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31.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그렇게 조롱하면서 말하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31 In the same way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made fun of Jesus, saying to one another, “He saved others, but he cannot save himself!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 앞을 지나가던 사람에 이어서 당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의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입장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박식한 지도자들에게 있어서도 그들의 구원이란 물리적인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주님이 당장 피 흘리며 고난당하시니 그 물리적인 현실이 입증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구원을 이루시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리스도의 몸도 물리적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물리적으로 사라져도 소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보이실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 지도자들 역시 유물론적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전제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성부 하나님을 절대 전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육신으로 무덤에 묻혀도 성부께서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부활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사흘 동안 잠시 주무시다가 일어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무시러 가신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죽으심을 그렇게 수용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보이신 믿는 사람의 죽음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 죽음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54.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55.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15:54,55)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하였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그를 욕하였다.
32 Let us see the Messiah, the king of Israel, come down from the cross now, and we will believe in him!”
And the two who were crucified with Jesus insulted him also.
그리고 그 지도자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제 믿음을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32.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32 we will believe in him!”
도대체 이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이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들이 일관되게 요구하는 기적이란 분명합니다.
당장에 물리적인 십자가의 고난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초지일관하시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순종이었습니다.
말씀의 뜻은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과 예수님 사이에 타협할 수 없는 대립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역사를 초대해서 물리적인 고난을 피하라는 사람들의 구원관입니다.
고난의 역사적인 수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예수님의 구원관입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간증이 사람으로 완전히 오판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걷어차는 믿음!
역사적 고난의 현실을 초역사적인 방식으로 회피하는 믿음!
지금 마귀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을 통해서 마귀의 믿음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리고, 터무니없는 욕 듣고.......
그 완전한 실패가 승리로 보이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없는 한 마귀에게 그대로 속고 말 것입니다.
마귀는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입을 통해 십자가를 부인하는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믿음을 말하는데 거짓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간증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예수님의 양 옆에 똑같이 못 박힌 두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저들도 죽을 처지에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 손에 못이 박혀 가지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그들이 농담했겠습니까?
그 비난은 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열두 군단의 천사를 동원해서 자신의 물리적인 국가를 회복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고백은 인간의 고질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못에 박히는 물리적인 고난과
모욕당하시는 정신적인 고난을 감수하셨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문제였기에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심으로써 대응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가장 먼저 유다의 배신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동료의 배신을 극복하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 장로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내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종교로 포장된 그들의 신앙 고백의 내용은 시기심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위선을 참으셨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영적인 체험으로 두려움과 제 양심을 인해 예수님을 변호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제 정치 생명을 챙겼습니다.
주님은 빌라도 졸개들의 무지한 폭력을 당하셨습니다.
그를 이기셨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에 열심당원 둘이 십자가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 죽을 순간에도 제 소신을 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이 사람들의 사이에서 묵묵히 십자가를 감당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십자가 위에서 침묵하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