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티니의 책(새 중국 전도)은 유럽 최초의 체계적인 한국관련보고서이다. 이 책에는 지리적 사실을 고려하여 제작된 한국의 지도가 실려있으며, 한국에 대한 소개도 분량상 주목할 만하다..
한국을 바라보는 유럽인의 시선의 시원이 되며 이후의 한국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에 관한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황제를 찾은 한국의 왕은 북경에서 우리측 신부를 알게 되었다. 이 때 왕의 최측근 몇명이 세례를 받았다...
아마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가 1644년에 귀국하던 길에 북경에서 당시 예수회 신부인 독일인 샬을 만나서 소현세자의 수행원들이 샬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39 - 41쪽
17세기 중엽 한국인과 독일인 사이의 뜻깊은 조우가 최초로 북경에서 이뤄졌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9년간의 볼모 기간을 마치고 1644년 명나라를 정벌하러 떠나는 청나라 군사를 따라 북경에 70여일을 머물렀다.
그는 그 곳에서 당시 천문학을 비롯한 유럽의 문명을 중국에 전수하며 선교활동을 해온 독일인 예수회 신부 아담 샬을 만났지만, 이들의 만남은 소현세자의 비극적 죽음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발전된 관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유럽의 과학 문명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소현세자는 아담 샬의 과학적 지식이 필요했고, 아담 샬에게는 장차 조선의 국왕이 될 소현세자와 친분 관계를 맺는 일이 조선에서의 선교를 위해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아담 샬은 귀국하는 소현세자에게 성상(聖像)과 교리책자 그리고 많은 과학 서적과 지구본을 선물했다고 한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귀국한 지 두달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아담 샬의 의지도 함께 꺽였다...
샬은 사망하기 1년 전인 1665년에 중국에서의 선교활동과 체험담을 정리한 회고록을 오스트리아 빈에서 발간했다.
이 책은 오늘날 유럽인의 시각에서 본 중국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있다. 다음은 1665년에 발행된 <역사적 기술>라틴어 초판본에 수록된 한국에 관한 내용 중 일부를 발체한 것이다.
한국에서 온 천문학자는 별로 재능이 없어 보이지만 조정의 지시로 구름이 없는 하늘을 쳐다보며 연구를 한다...
소현세자는 천체의 위상과 움직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했다. 그리고 천체만이 아니고 세상사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천문학에 관한 유럽의 서적과 다른 복합적인 과학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해하고 싶다고 말했다. 소현세자는 현명한 사람이다. 그는 지금껏 이러한 것을 몰랐다고 말했다...
아담 샬 신부의 시선은 앞에서 본 마르티니의 그것과는 다르다. 물론 아담 샬도 과학과 미신 또는 무지라는 이분법적 잣대로 한국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한국에 대해 자신이 상상한 이미지를 가미하지 않았으며, 욕망의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소현세자를 통해 한국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마르티니처럼 17세기의 유럽인들이 가졌던 타자에 대한 부정적인 요소가 없다. 그는 유럽인들이 한국에 관해 아는 바가 없음을 시인하며 이에 대해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인용문을 통해 두사람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었으며 그들은 서로에 대한 존경심마저 느꼈음을 알 수 있다...
후세의 유럽인과 독일인들은 한국에 관해 말할 때 아담 샬을 인용하거나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는 그의 지적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아담 샬 대신 마르티니를 인용하며, 나아가 그의 허구적 주장을 기꺼이 수용하여 사실로 둔갑시킨다. 그리고 마르티니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유럽 중심적 한국관을 적극적으로 생산해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47 - 50쪽
이 기록들을 통해 소현세자와 아담 샬이 서로의 문화를 이해 할 수 있는 우호적인 접촉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어떤 가능성이 실제에 가깝든 마르티니의 <새 중국 전도>나 하멜의 <하멜표류기>와 같은 사실적이고 비문학적인 문헌에 나타난 상상력이 일반적으로 허구적이라고 생각하는 문학적 상상력보다 훨씬 더 허구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02쪽
역사를 가정법으로 기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르티니와 동시대 사람이었지만 한국에 관해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에서 글을 쓴 아담 샬이 유럽인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면 어땠을까? 또한 아담 샬과 만난 소현세자가 귀국 후에 급서하지 않았다면 한국관은 어떻게 전개되었을 것이며 그 내용을 구성한느 요소는 무었이었을까?
'한국의 왕세자는 현명하며 우리 유럽인은 한국에 관하여 아는 것이 없다'고 말한 아담 샬의 지적은 유럽과 한국이 실리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로 발전할 수있는 계기가 되었겠지만 그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1901년 한국을 방문하여 전국을 탐방한 겐테는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에서 보고 체험한 내용을 견문기 형태로 <쾰른신문>에 발표했다. 이 글에서 겐테는 한국에는 미개한 요소와 문명적 발전 가능성이 공존하고 있다며 역사적 발전 가능성을 열어놓고 한국의 역동성을 강조했지만, 유럽인들이 그의 목소리를 경청하기에는 한국관이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고 당시 유럽인들의 관심은 이미 식민주의라는 거대 담론으로 옮겨간 후 였다.
마찬가지로 아담 샬보다는 마르티니가 수용되었고 하멜의 표류기 중에서도 다른 판본보다 사흐만 판본이 널리 수용된 점은 유럽인들이 무엇을 욕망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한다....293쪽
왜곡된 한국 외로운 한국, 300년 동안 유럽이 본 한국, 이지은, 2006년, 책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