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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 보는 창의적 의미 공간
-단시조를 중심으로
1.
3장 6구 12음보의 단시조에는 다양한 전개 유형이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 이 유형에 대한 연구가 적잖게 이루어졌다. 한 편 한 편의 작품에 시인이 부여하는 틀은 그때마다 언제나 다르게 마련이다. 작품마다 시인의 의도하는 바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요는 형식과 내용이 얼마나 적절하게 잘 맞아 떨어지느냐가 관건이다. 형식적 장치가 우수해도 내용이 따라 주지 못하거나 내용이 뛰어나도 형식에 문제가 드러나면 완결에 이르지 못한다. 흔히 틀에 매이지 않는 것을 두고 형식을 자유자재로 부릴 줄 알아야 한다고 이르는데 옳은 말이다.
또한 3장의 틀은 자칫 딱딱한 느낌을 주기가 쉽다. 이 점을 일찍이 간파한 정완영은 3장 중 한 장은 반드시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설득력 있는 탁견이다. 그러나 이 말 역시 일괄적용 되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 예외가 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기는 하나 내용과 형식의 균형과 조화에 대해 ‘내용적 균질성과 형식적 고전미(유성호)’를 잘 갖추어야 한다거나 ‘간명한 단시조 형식에 담을 수 있는 시적 심상이 헤아릴 수 없이 깊을 수 있다는 사실(장경렬)’ 등은 핵심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말이다. 시조는 정형률을 가지고 있지만 늘 새로운 율격 체계의 시조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은 시조만이 가지는 매력이다. 물론 이는 정형미학을 훼손하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의 일이다.
이 글은 시조의 본령인 단시조 작품들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시조 한 편에 축조된 창의적 의미 공간의 다양한 변주와 변용을 조망하는 일은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종장은 시조의 창의적 의미공간의 중핵이므로 결에 해당하는 종장의 구조를 살피는 일은 좋은 시조의 모델을 제시하는 일이며, 실제적 창작에도 도움이 되리라 본다.
2.
하루에 한두 권의 시조집이 배달된다. 그런 까닭에 보내온 책들을 다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몰아서 읽을 때가 많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손길이 가는 책이 있다. 표지와 더불어 첫 장을 펼치면 그 자리에서 다 읽게 만든다. 순간적 직감이기는 하지만 무언가 은밀한 내적 소통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좋은 시조는 자기장을 가지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자체 발광이랄까. 그러한 깊은 울림을 가진 작품은 오랫동안 눈길을 끈다.
형식적․내용적 매너리즘과의 부단한 싸움 없이 기대할 만한 작품을 창작할 수 없다.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새로운 탐구 끝에 우리의 시선을 압도하는 명작은 탄생 된다. 구체적 실질을 획득하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정격의 언어와 고전적 태도로 형식적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은 시조의 품격과 위의를 지키는 일이다.
요즘 시조문단은 다변이다. 수다스러운 것도 때로 필요할 것이다. 지나치게 산문화 되고 무슨 소리인지 모를 만연체가 넘치는 일부 자유시의 바람직하지 못한 경향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니겠으나, 장광설이 시조 고유의 맛과 멋을 떨어뜨리고 있다.
시조를 읽는 이들에게 ‘간결하고도 속 깊은 서정적 언어’를 경험하게 하는 것은 시조시인들의 몫이자 사명이다. 작품 속에 ‘사물과 내면을 유추적으로 상응케 하는 내밀한 상상력’이 선연하게 보일 때 독자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을 것이다. 즉 사물의 외관과 내면의 정서를 견고하게 결속시키는 고유한 힘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다음 작품을 한번 보자.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이우걸,「팽이」전문
사뭇 도전적인 발언과 개성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는가. 이미 첫머리 ‘쳐라,’에서 모든 것은 함축되어 있다. ‘가혹한 매, 무지개, 꼿꼿이, 증언, 무수한 고통, 접시꽃’이 숨 가쁘게 전개되면서 우리의 시선을 강력한 힘으로 한 곳에 집중시킨다. 대체 이 힘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참신한 비유와 독특한 형식적 장치에서 비롯된 것이다.「팽이」는 인생 축약판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요설일 뿐이다. 초장의 “무지개”와 종장의 ‘접시꽃’의 상관적 유기체계는 이 시조의 완결성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팽이」는 조동일의 탁론인‘자아의 세계화, 세계의 자아화’의 한 전범이다. 한시 이론인‘情中景, 景中情’의 예시로도 설명할 수 있다. 여름날 푸른 줄기에 따닥따닥 피어나는 ‘접시꽃’이 종장에 도입되지 않았다면 이 시조는 그만 맥이 빠져버렸을 것이다. 체험에서 비롯된 시인의 상상력이 이처럼 효과적으로 발현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가혹, 증언, 고통’이라는 아주 무거운 낱말이 이 작품 속에 잘 용해되어 있는 것도 ‘쳐라.’가 견인하는 도저한 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단시조「섬」이라는 작품 중장‘짓밟혀서 돌아오는 어두운 사내를 위해’에서 ‘짓밟혀서’와 연계지어서 곱씹어 읽을 대목이다.
아랫도리 감싸 쥐고 맨발로 뛰는 바람
고쟁이 올리다가 머리칼 뽑힌 해당화
시퍼런 손톱을 세운 안면도 곰솔 한 그루
-강현덕,「현장」전문
기승전결 즉 시조 고유의 시적 전개 논리(장경렬)에 따른 전개이다. 이 작품은 어느 한 장도 풀려 있지 않은 점에서 앞서 밝힌 정완영의 논조를 비껴간다. 또한 그 점이 이 시편의 특장이다. 초지일관 긴장의 고삐를 다잡아 쥐고 있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각 장의 끝부분이다. ‘바람’과 ‘해당화’와 ‘곰솔’이 각 장의 주체인데 이들의 관계가 미묘하게 설정되어 이 시조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어떤 교과서적 논리에서 벗어난 작품(장경렬)이라는 견해에 공감이 간다. 각 장의 끝을 체언으로 맺는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기법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과감하게 활용한 것은 시적 효과를 배가하고자 하는 고도의 테크닉이다. 물론 이런 유형의 시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현장」은 또한 정적 풍경화가 아니라 역동적인 풍경화를 완성하고 있다. 자칫하면 이러한 작품은 정적 풍경 묘사에 머물기 쉽다. 그러나 시인은 뛰어난 언어 감각과 시적 상상력을 통해 역동적인 인간사의 한 단면을 반영한 살아 있는 풍경화(장경렬)로 되살리고 있다. 그간 동적인 인간사의 면면을 담는 일에 소홀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큰 의의를 가진다.
앞서 살핀「팽이」와 일맥상통하는 흐름을 가지고 있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시조는 결코 초월적이고 정적인 상징의 세계를 지향하는 시적 장르만이 아니라 세속적이고 동적인 우의의 세계야말로 시조시인이 시조를 통해 탐구해야 할 대상(장경렬)이라는 견해를 두 작품이 잘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풋잠과 풋잠 사이 핀을 뽑듯, 달이 졌다
치마꼬리 펄럭, 엄마도 지워졌다
지워져, 아무 일 없는 천치 같은 초저녁
-박명숙,「초저녁」전문
「초저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정경은 이채롭다. 남모를 아픔과 그리움이 깊게 배어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모두 이와 유사한 유년기의 체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을 이렇듯 생생하게 복원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회상 차원에 머물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각 장마다 한 번씩 사용한 ‘,’은 이 시편의 독특한 흐름에 장애가 아니라 유기적인 구조에 이바지하고 있다. 달이 지는 것을 두고 ‘핀을 뽑듯’이라고 한 것도 예사롭지 않다. ‘펄럭’과 ‘천치’이라는 말을 배치하고 있는 점도 적절하다. ‘달’과 ‘엄마’의 소멸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다. ‘지다, 지워지다, 뽑다’와 ‘펄럭’과 같은 동적 이미지가 ‘풋잠, 핀, 치마꼬리’ 등과 맞물려서 깊은 울림을 주고 있는 점은 역동적이다. 그러고 보니「팽이」,「현장」과 같이 동적이다.
유성호는 이 작품을 두고 선명한 감각적 이미지와 그 안에 농밀하게 축약된 서사, 그리고 시인의 암시적 인 해석적 개입으로 단수 미학의 범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이울어가고 지워져 가는 존재자들을 통해 초저녁이라는 소멸 직전의 시간을 통해 소멸 지향의 상상력을 완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초저녁」은 삶의 알 듯 모를 듯한 슬픔을 우리에게 제시함으로써 아름답고 애잔한 情調에 빠져들게 하고 있다.
해장사 해장 스님께
산일 안부를 물었더니
어제는 서별당 연못에
들오리가 놀다 가고
오늘은 산수유 그림자만
잠겨 있다, 하십니다
-조오현,「산일․2」전문
「산일․2」는 속인이 노래하기 어려운 시편이다. 속진이 묻어 있지 않은 서정시로서 선적인 경지를 열어 보이고 있다. 산일에 대한 안부에는 스님의 개인사는 드러나지 않는다. ‘어제는 서별당 연못에/ 들오리가 놀다 가고’와 ‘오늘은 산수유 그림자만/ 잠겨 있다’에서 보듯 해장 스님이 눈으로 본 것만 알려주고 있다.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결국 동식물의 움직임을 유정하게 살피면서 ‘산일’의 삶을 구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들오리’와 ‘산수유’를 통해 이미 우리는 해장 스님의 일상을 눈에 보듯이 다 읽어낸 것이다. 언뜻 수수방관하는 듯한 언사로 일관하고 있는 것도 하나의 시적 기술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때
놓아준 것들
안부가 그립고
진물 마른
그루터기 앞에서도
글썽여지는
이런 날
누군가
등 뒤에 와서
눈을
감길 것만 같아
-서우승,「이런 날」전문
매우 특이한 서정적 구도를 가진 작품이다. ‘그때/ 놓아준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 안부가 그리운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공감을 하게 된다. 마른 그루터기 앞에서도 ‘글썽여지는 이런 날’ 시인은 ‘누군가 등 뒤에 와서 눈을 감길 것만 같아’서 그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린다. 이 때 시인과 독자는 혼연일체가 된다. 하나가 되어 함께 그 순간을 애절하게 기다리게 된다. 어느 누구나 한 번쯤 ‘이런 날’과 맞닥뜨린 적이 있었을 것이다. 최남선의「혼자 앉아서」를 떠올리게 한다.
눈 감으면 별이 뜨는 내 하늘의 모롱이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이의 주소에도
다정한 우표가 되어 찾아가고 싶어라
-김복근,「가을 입구」전문
소박한 서정시편이다.「이런 날」과 분위기가 엇비슷하다.「가을 입구」의 정서는 가을이었기에 가능한 감상이다.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이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가을이기에 그렇게 떠난 이의 주소를 찾아 다정한 우표가 되어 찾아가고 싶은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가을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용서와 관용을 베풀 수 있는 계절의 초입에서 시인은 한 점 티도 드러내고 있지 않은 가을 하늘 같은 마음으로 이러한 시편을 빚은 것이다.
어제는 물안개에 꽃향기에 취했더니
아침 햇살 빗질하는 새소리에 문을 연다
빈집도 파도에 닳아 맑은 악기 되느니
-김연동,「욕지」전문
‘욕지’는 적지 않은 섬이다. 섬 생활에서 얻은 시다. 공감각을 잘 살리고 있다. 서정의 결이 아주 곱다. 흉어의 소식과 젊은이들이 떠난 갯가 빈집의 아픔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다. 물안개, 꽃향기에 취했던 어제가 가고 오늘은 아침햇살이 빗질하는 새 소리에 문을 연 인적이 사라진 빈집은 파도에 닳고 있고, 그 닳음으로 말미암아 맑은 악기가 된다. 새로운 노래를 연주하지만, 그러나 그곳에 사람들은 살지 않는다. 상실의 이미지를 잔잔하게 그려 보여 줌으로써 섬의 후미진 단면을 통해 사람살이의 진중함을 일깨우고 있다.
녹두꽃
진 자리에
일어선 한 줄기 바람
세상을
바꾸려는 뜻
천지를 휩쓸었건만
소나무
휘인 가지에
옹이로 굳어 있다
-김정희,「아버지」전문
아버지의 생애를 통해 역사적 사건을 은연중 상기시킨다. 녹두장군 전봉준이나 나의 아버지나 ‘녹두꽃/ 진 자리에/ 일어선 한 줄기 바람’으로 세상을 한번 바꾸어 보려고 힘을 다해 보았지만 여의치 못한 채로 한 생을 다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소나무 휘인 가지의 ‘옹이’에서 아버지의 초상을 읽게 되었으리라. 전통서정에 충실한 시편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불 밝혀
남아 있는 일이라고
출근 길 우산 속에서
뇌어보는 비 오는 날
-하순희「걸음․12」전문
이 작품은 더 이상의 말이 필요치 않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전언을 담고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을 두고 ‘누군가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불 밝혀 남아 있는 일’이라고 한다. 아름다운 인연의 결정을 이름이리라. 원하든 원치 아니 하든 때로 그렇지 않는 일들을 우리는 종종 겪는다. 몸과 마음이 다 젖어드는 날이었기에 이러한 생각이 불현듯 들었을 것이다. 어려운 말 한 마디 없이 우리의 심금을 조용히 울린다. 그리고 사람살이에 대해 오랫동안 묵상하게 한다.
그래도 나는 쓰네 손가락을 구부려
떠나는 노래들을 부르고 불러 모아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
-이달균, 「저무는 가내공업 같은 내 영혼의 한 줄 시」전문
흡사 시조 쓰는 일을 두고 노래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래도 나는 쓰네’라는 구절은「팽이」에서 ‘쳐라, 가혹한 매여’와 같은 도치와 같은 경우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쓰겠다는 것은 굳은 의지의 표상이다. 오래 전 어떤 한 이론가는 시조가 ‘떠나는 노래’, 아니 ‘이미 떠난 노래’라고 말하면서 시조 무용론을 거론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2,000여명의 시조시인들은 ‘저무는 가내공업’과도 같은 시조 한 편을 직조하기 위하여 각자의 골방에서 가내공업에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오늘도 불철주야 시조 창작에 매진하고 있는 지구촌 곳곳의 시조시인들의 ‘영혼의 한 줄 시’를 우리는 기대를 하고 기다려도 좋을 것이다.
3
이왕 단시조 미학을 짚어 보았으니 창의적 의미 공간의 중핵인 종장의 구조에 대하여 얼마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적지 않은 시조시인들이 종장의 자수율에 대하여 무감각한 측면이 있다. 얼마 전 보내온 단시조로만 엮여진 시집을 한 권 조망하면서 이 점을 여실하게 읽게 되었다. 종장의 정형미학에 대한 철저한 인식의 결여 탓이 아닌가 한다.
예문을 보자. 모두 종장 후구 끝마디이다.
1) 불현듯 그 물 속으로 뛰어드는 벌레 한 마리
2) 한 송이 空華였구나 산방에 비 오시려나
3) 바람에 그저 떠도는 버들잎의 그림자일 뿐
4) 여보게! 뒤돌아보면 날아가는 賓雀 한 마리
5) 흰 새가 꽃이 됩니다 그 꽃 다시 새가 됩니다
6) 살며시 내민 손끝에 쏟아지는 반생의 눈물
7) 지순한 하늘의 묵례 일곱 빛깔 곡진한 눈물
8) 하현의 뺨을 오가는 손에 꼭 쥔 강물 한 조각
9) 하얗게 날리는 꽃잎 그대 지금 보고 있을까
10) 물속에 잠긴 하늘로 미망을 지우고 있다
11) 온기만 남은 벤치에 꽃그림자 다가옵니다
12) 꿈에 본 그리운 나라 그 바다를 향하고 있다
시조는 첫머리를 ‘3’으로 시작하여 끝마디 ‘3’으로 마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좋은 시조가 요구하는 자연스러움에 가장 근접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종장 자수율 ‘3/ 5/ 4/ 3’은 반전으로서 대단히 혁신적이다. 이러한 마무리는 최상의 품격을 담보한다. 물론 부득이한 경우에는 얼마든지 가감이 필요하겠지만, 위의 예처럼 별 다른 자각 없이 느슨하게 처리하게 된다면 시조의 고유의 맛과 멋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조의 율격에 대한 기초를 다지지 않으면 아니 되리라 본다. 종장의 매력을 살리지 못한다면 굳이 시조를 써야 할 까닭이 없다.
또 한 가지는 근간에 다시금 대두된 단장시조와 양장시조 문제이다. 기본적인 전제에 충실하자면 시조는 3장의 유기체계이다. 그러므로 한 장이 없거나 두 장이 없는 것은 굳이 시조라고 부를 수 없고 다만 시조 가락을 가진 1행시, 2행시로 규정하는 것이 더 옳을 듯 하다. 태생 때부터 3장의 틀을 가진 시조가 한 장 또는 두 장을 상실한 상태의 시를 두고 시조라고 고집하는 일은 언어도단 즉 어불성설이다. 단시조의 확산이 연시조․사설시조로 나아갔다면 축소도 일종의 확산이라고 볼 때 양장시조나 절장시조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논리를 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앞서 언급한 데서 판가름 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름 문턱에 맞지 않지만 겨울 정경을 아름답게 그린 한 편의 단시조를 소개하고 이 글을 맺고자 한다.
모든 걸 덮겠다는 약속은 잊었나요
하늘과 땅의 경계 그마저 허물더니
내 눈길
닿은 곳으로 다시
길을 여는
당신
-김미정,「눈길」전문
단순히 자연 현상에 대한 시인의 느낌으로만 읽히지 않는 시적 장치를 보인다. 즉 ‘눈길’에서 ‘눈’은 시인의 눈이자 자연의 ‘눈’을 가리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다층의 의미 읽기를 가능케 하는 점에서「눈길」은 단시조이지만 그 어떤 형태의 시조보다 깊이와 무게를 느끼게 한다.(장경렬) 그렇다. ‘약속’과 ‘눈길’과 ‘당신’이 묘한 일직선상에서 서로에게 강한 울림을 안겨주면서 의미의 진폭에 깊이와 넓이를 더한다. 단시조의 한 좋은 본보기이다.
장경렬은 현대시조의 미학적 가능성에 관한 글에서 ‘절제, 간명, 함축의 공간으로서의 단시조’를 논한 바가 있다. 단시조는 긴장의 시 형식으로서 가장 적절한 시의 그릇이라는 것이다. ‘절제된 언어, 간명한 시적 이미지, 함축적인 시적 진술’을 시조미학의 요체로 보고 시조시인들에게 열정과 정성을 요청한 바 있다. 새겨들을 논지이다. 지나치게 장광설을 늘어놓기보다 본령에 충실한 창작을 통해 이와 같은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는 단시조 창작에 주력함으로써 시조문단을 더욱 두텁게 하고 윤택케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단수 미학의 심미적 완결성을 위하여 자신만의 고유한 미학적 진경을 펼쳐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시간이나 공간의 형상을 가장 구체적이고 독자적인 감각으로 신생시키는 일에 대한 다각도의 노력과 천착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 현대시조가 새롭고 개성적인 감각으로 쓰일 수 있는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주는 일은 온전히 시조시인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눈앞에 자기 갱신과 새로운 도전의 길이 넓게 열려 있는 것이 환히 보인다.(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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