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장성집요셉(1786〜1839)
o 30여 세에 교리를 배워 수계생활을 하다가 냉담한 뒤 회두함 o 1786년 : 서울 출생
o 1838년 : 영세 견진
o 1839년 5월 26일 : 포도청에서 장살로 순교
한때 천주 교리에 의심을 품고 냉담생활을 했던 장성집1 Q) 요셉. 그러 나 이는 참 믿음살이를 위해 그가 잠시 겪어야 했던 굴절의 과정이었다.
이내 자신이 가졌던 의혹을 풀게 된 그는 이전의 잘못과 교만을 뉘우치 고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고, 끝내는 끗끗한 순교의 용 덕으로 하늘의 영광을 얻게 된다.
서울의 한 비신자 집안에서 태어난 요셉은 양순하고 온화하면서도 곧 고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장성한 뒤에는 한강변 마을인 서강(西 江,현 마포구 서강동)에 살면서 와우산 아래의 광홍창(廣興倉,조선시 대 관리들의 녹봉을 쌓아두던 창고,현 마포구 창전동)에서 서원(書M) 으로 일하였다. 그러나 상처한 뒤로는 상심한 나머지 근무에 태만하였 고, 이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말았다.
그 후 천주교 신자였던 이모11》댁으로 가서 살게 된 요셉은 약방에서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꾸려갔고, 얼마 뒤에는 재혼까지 하였으나, 다시 아내를 잃는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천주 교리를 접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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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기해일기』(96쪽)에는 그의 이름이 ‘성진’ 으로 나온다. 그러나 다블뤼 주 교의 기록에는 ‘성집’ (Sieng tsip)으로 나온다(『순교사 비망기』p. 390 :『순교자 약전』,p. 78).
11)『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3, 장 로사의 증언. 증언자 장 로사는 장성집 요셉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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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기록에는 *30세가 지나서 천주 교리 를 접하였다.’ 고 나온다. 이때부터 요셉은 열심히 교리를 배우면서 수계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갱생구속(降生救讀)과 같은 주요 교리에 의혹을 품게 되었고,12: 그 결과 신앙에 대한 열의가 식으면서 교회를 멀리하고 이전 생활로 돌 아가게 되었다. 이제 그는 신자의 본분을 잊은 채 비신자 친구들과 상종 하면서 세속 일에 몰두했으며, 잠세(督世)에서의 호의호식에만 눈을 돌 리게 되었다. 그와 친분이 있던 신자들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만단으로 회두시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소식을 들은 한 신자가 요셉을 방문하여 오랫동안 교리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요셉은 자신이 품고 있던 의 혹의 벽을 허물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자신의 무지와 교만을 깨닫고 크 게 뉘우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면서 보속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내가 이전에 냉담하게 된 것은 오로지 세 속의 영달에 눈이 멀었던 까닭이다.”
이제 요셉은 비신자들과의 교류를 끊고 거의 집밖으로 나가지도 않았 다. 집안에 들어앉아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는 시간이 많아졌고,그럴 때 면 밥을 굶기도 하고 추운 날씨에 불도 때지 않고 생활할 정도였다. 집안 사람들이 이러한 그를 보고는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이전과 같이 이웃 들과 어울려 살면서 생활해도 노의 신앙에 해로울 것이 없다.”고 권유하 곤 했지만,그럴 때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저지른 죄는 오로지 이 세상에서 풍족한 의식을 취하려는 데 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에서의 풍요를 위해 죄를 범하기보다 는 차라리 춥고 배고픈 것을 택하고 싶소. 이 잠세에서 잠깐 동안 겪 는 고통을 참아내고,죽은 뒤 천국에 올라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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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기해 • 병오 재판록』, 장 로사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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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훨씬 더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13>
이처럼 그는 이전의 잘못을 굳게 뉘우치고 오로지 진리의 가르침에 따 라 수계생활을 하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러면서 차츰 모든 이들이 그의 굳은 의지와 참 믿음살이를 흠앙하게 되었다. 이후 요셉은 1838년 4월(음력)에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았다.14>
이듬해 기해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을 때, 장성집 요셉은 순교자들의 용덕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감격해 마지않 았고, 순교 원의에 불타 자수하고픈 마음이 간절해졌다. 그래서 대부를 찾아가 상의하자,대부는 “우리의 힘은 보잘 것 없으니, 오로지 주님의 명을 기다려야 하네.”라고 하면서 그를 만류하였다. 이에 그는 대부의 말 에 따라 주님의 명 만을 기다리 기로 하였다.
그러던 중 장성집 요셉은 장티푸스에 걸려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 순 간에도 그는 ‘이러다가 순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를 걱정하고 있었 는데, 5월 18일(음력 4월 6일) 한 떼의 포교배가 그의 집으로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였다. 이때 포교들은 그가 와병중이 라는 사실을 알고는 가마 에 태워 압송하려고 했지만,그는 “나 같은 죄인이 어찌 가마를 타고 편 안히 갈 수 있겠소. 그냥 걸어서 가겠소.”라고 하면서 이를 물리쳤다고 한다.15>
그런데 이때 요셉과 친하게 교류했던 한 비신자가 그 광경을 목격하 고는 놀라서 “어찌 자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라고 한탄한 뒤 , 일행의 뒤를 따라가면서 “천주를 배반하고, 이전처럼 우리들과 함께 재 미있게 살자.”고 회유하였다. 요셉의 성품에 이끌렸던 적이 있었고,따 라서 그의 생명을 아깝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포교배들도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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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기해일기』,96쪽.
14)『순교사 비망기』, p. 390.
15)『기해일기』, 97쪽. 당시 요셉을 밀고한 것은 ‘딸 로사의 사촌 시아주버니였 다’ 고 한다(『기해 • 병오 재판록』, 장 로사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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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배교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요셉은 장티푸스로 인해 혼미한 상 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교리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권유를 뿌 리쳤다.
천지 만물을 만드신 크신 주님이 계시니 사람들은 마땅히 그분을 공경해야 하오. 그분은 우리를 낳고 기르시며 보존해 주시는 분입니 다. 앞으로 선악을 가려 천당과 지옥으로 상벌하심이 있을 것인데, 어찌 잠깐의 생명을 사랑하여 영원한 대사를 그르칠 수 있겠소.16》
포도청의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요셉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교리 에 대한 신념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고, 그의 순교 원의는 여전히 확고하 였다. 그러자 포도대장도 그의 신념을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종사관에게 감옥으로 끌고 가라고 명 하였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요셉은 다시 끌려 나가 형벌을 받을 각오를 하 고 기다렸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자신을 부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 다. 이에 그는 “죽을 죄인을 잡아다가 형벌도 하지 않고 버려두느냐?”고 여러 차례 소리쳤으나,옥 밖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 다. 그는 옥 밖으로 나가서까지 다시 소리쳤다. 그제야 종사관은 옥리에 게 무슨 일인지를 물었고, 옥리는 "죄인이 장티푸스로 인해 헛소리를 하 는 모양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요셉이 “헛소리가 아니라 진실로 하는 말이다.”라고 했지만, 종사관은 들은 체도 않고 옥리에게 “다시 가두라.” 고할뿐이었다.
얼마 뒤 요셉은 자신이 원하던 대로 다시 포도대장 앞으로 끌려가 문 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더욱 분명하게 교리를 설명하였 고, 혹독한 형벌 가운데서도 배교를 거부하며 굳은 순교 의지만을 드러 냈다. 포도대장과 종사관이 아무리 유혹해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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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기해일기』,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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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은 요셉에게 치도곤 20도를 때리고 다시 옥에 가두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요셉에게 내려진 마지막 형벌이 되었다. 옥에 갇히자마자 그는 자신의 영혼을 하느님 대전에 바쳐야만 했으니 , 이때가 1839년 6 월 5일(음력 4월 24일)로, 그의 나이 53세였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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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기해일기』, 98쪽 :〈페레올 주교의 보고서〉, 883쪽.〈앵베르 주교의 보고 서>(152쪽)와 다블뤼 주교의『순교사 비망기』(391쪽),『순교자 약전』(78 쪽)에는 ‘1839년 5월 26일(음력 4월 14일)’로 나온다. 순교하기 전에 치 도곤 25도를 맞은 것으로도 나온다(〈페레올 주교의 보고서〉, 8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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