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내기 요양보호사
정동식
오늘은 아내가 일찍 출근하는 날. 하지가 턱밑을 막 지나서 그런지 눈을 뜨니 베란다가 훤하게 밝았다.
여느 때보다 조금 일찍 서둘러야 한다. 아내가 바쁘니 나도 덩달아 손이 분주할 수밖에 없다. 짝꿍은 바리스타다. 패션 일을 하며 바쁠 때 따 둔 자격증이라 더 의미가 있다. 그 자격증을 활용하여 성서공단 S 카페에 다니고 있다. 재작년 9월부터 오픈했으니 벌써 햇수로는 3년째가 된다. 한 주에 두 번 정도 나가니 직장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초단기 근로자여서 알바에 가깝다. 출근날이 규칙적이지는 않다.
다행히 한 달에 한 번은 일정표가 나와서 다른 계획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 내 개인적 모임이나 약속은 아내의 근무일을 참조하여 정한다. 아내와 장모님의 일정에 따라 움직이는 종속변수인 셈이다. 대개 한 번은 오전에, 또 한 번은 오후에 나가는데 장모님 요양원 입출 시간과 맞물려 아내의 공백을 내가 메우게 된다. 출근한 아내는 일터에서도 장모님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켜도 그녀의 걱정은 마냥 한 가지다. 아직 나에게 믿음이 덜 가는 듯하다. 나는 나름대로 구실을 다 한다고 생각하지만 야무진 아내의 칭찬을 받기는 역부족이다.
장모님의 일상은 몸이 편찮으시거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비슷하다.
밤마다 보따리를 몇 번이나 쌌다 풀었는지 모를 정도로 옷이 널려져 있을 때도 있고, 신문지보다 고급스럽게 보여 그런지는 몰라도 하얀 휴지를 조각조각 뜯어 비닐봉지에 담아 두는 일도 있다. 간식으로 가져온 과자류나 약과 등을 호주머니에 그대로 넣은 채, 나중에 발견되기도 하고, 초저녁잠이 들었다가 새벽 1~2시경에 깨셔서 넋두리를 할 때도 있다. 어느메 다녀오셨는지 화장실 전등과 켜놓은 환풍기가 제풀에 지칠 때도 있다.
언젠가 하루는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서서 아파트 관리 사무소까지 뒤따라가 본 경험이 있다. 그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어떻게 그런 초인적 힘이 생기는지 아직 불가사의 같다. 그래도 요즘은 요령이 생겨서 야심한 밤에 집에 간다고 막무가내로 나서면 오늘은 갈 차가 없으니 내일 아침 일찍 첫차로 가자고 설득하면 금방 수긍한다.
가장 곤란한 경우는 본인의 기저귀를 빼 버리는 일이다. 귀찮고 답답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경우에 대비해 수시로 확인은 필요하다. 낭패를 보기 전에 미리 방지해야 한다. 때를 놓치면 일을 더 크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내를 태워주고 오니 8시경이었다. 안방 문을 열고 장모님 문안을 여쭌다.
옷을 입은 채 앉아 계셨다. “일어나셨네요. 아침 드릴게요.” 장모님은 대답이 없다. 나는 가스레인지를 켜고 죽을 데운다. 아내가 어제 끓여 놓은 전복죽, 아침엔 죽이 술술 잘 넘어가 먹기 좋다. 밥 짓는 일보다 죽 끓이는 일이 훨씬 어렵다. 눋지 않도록 저어주어야 하니 정성이 많이 들어간다. 이 말은 어릴 적부터 숱하게 들어온 터라 아내의 수고를 가슴으로 공감한다. 주걱에 묻는 게 아까워 숟가락으로 저었다. 소량이기에 가능하다. 국그릇에 3/4 쯤 담아 놓고 안방에 있던 장모님 전용밥상을 가져 나왔다. 밥상에 드시다 남은 비스킷 몇 놈이 보였다. 딱딱하다고 느꼈는지 반도 드시지 않았다. 냉장고를 열어 시금치와 오이무침, 그리고 마른 김 2장을 가위로 잘게 잘라 4 등분하여 상을 차렸다. “전북죽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밥상을 차리는 사이에 다시 누워 계셨다.
그러다가도 진짓상을 들이면 금방 일어나 앉으셔서 아침을 드신다. 눈치는 빠르셔서 얼른 행동으로 옮기는 편이다. 가끔 누워서 꾀를 부리실 때도 있고 식사를 하지 않고 느긋하게 T.V만 보시다가 시간이 지체되기도 한다.
이럴 땐 “상동댁 보고 싶다고 전화가 왔네!” 하거나 “밑에 차가 와서 기다린다.” 고 말씀드리면 행동을 빨리 하신다. 장모님은 천성이 착하셔서 경우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본능이 있으신 것 같다.
나는 장모님이 잘 보이는 거실 탁자에 앉아 아침을 먹는다. 모시러 오는 분의 시간에 맞춰야 하니 잘 드시는지 아닌지, 한시라도 눈을 떼지 않으려고 애쓴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한 달 전에 타온 6개월분 약봉지에서 ‘아침 식후’라고 쓰인 치매약을 물컵 옆에 올려놓았다.
잠시 아들에게 사과를 깎아주며 한눈을 팔다 보니 장모님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얼른 욕실로 달려갔다.
다행히 세면을 하고 계신다. 비누 거품을 많이 내어 씻으라고 당부하고 밖으로 나왔다.
전화벨이 울리기 15분 전이었다. 보통날보다 빠른 편이다. “장모님, 양말 신고, 모자 쓰세요” 하니 모자를 가리키며 “이거 쓰라고?” 하신다. 애매한 건 물어보니 의사소통이 그나마 되는 편이다.
현관의 지팡이와 신발을 정돈했다. 문도 미리 살짝 얼어 두었다. 아침 등원 준비가 끝났다.
가시데이 얘기를 안했는데도 성격 급한 장모님은 마스크와 모자, 자주색 바지와 셔츠를 입고 거실로 나오신다.
구순 노인치고는 옷맵시가 괜찮다. 아내의 패션 감각 덕분에 장모님은 옷 잘 입는 멋쟁이 할머니다.
꾀죄죄한 옷보다 딸의 정성이 담긴 옷차림이 얼마나 보기 좋은가? 역시 옷이 날개다.
“따르릉, 도착했습니다.” “네~ 내려가겠습니다!”
오늘도 바쁜 아침을 보내고 어설픈 요양보호사의 감사한 하루가 시작된다.
(2023.6.23)
첫댓글 누구든지 늙고 병들면 자식의 부양을 받아야 하는데, 요즘 내몰라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장모님까지 정성껏 부양하고 계시니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