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록의 종류, 작성 동기, 활용상황(박정해 “풍수결록서의 종류와 활용”독후감)
1. 풍수학자(風水學者)와 현장지사(現場地師)는 거리가 있다.
필자는 선사(先師)들이 작성한 도록을 근거로 결록지를 찾는 도록파(圖錄派)이다. 박정해 한양대교수의 “풍수결록서의 종류와 활용”(2024.1 문화와 융합 46권)를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책상과 현장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박교수는 2023.3 “산도의 변화와 발전과정에 나타난 분석”이란 논문도 발표하였는데 인용할만한 부분은 없었다.
2. 풍수결록서의 종류
* 산도와 결록을 합쳐 도록이라 하는데 보통 개인이 사용할 생지인 음양택을 말한다.(양택은 수가 적다) 이 의미(意味)의 산도는 혈이 맺히는 용의 움직임과 주변구조의 핵심을 추려서 그린 것이다. 이에 대하여 기존의 왕릉 태실 시조 묘에 대한 산도가 있다. 앞의 산도는 이미지 도면이고 뒤의 산도는 초상화와 같은 개념인데 도록파가 추구하는 도록은 앞의 것이다.
* 이 논문은 결록 작성자를 도선, 무학, 남사고, 서산대사, 박상희, 두사충, 나학천(봉안), 성지, 일이승과 일지성을 들고 있으나 도록파들이 이용하는 도록은 전국적이고 내용이 구체적이어서 혈 찾기에 도움이 되는 것 그리고 선사들이 많이 이용하여 검증된 것(명당급에 못 미치는 동네길지급은 도록의 가치가 없다)을 선택하는 바람에 두사충, 나학천(충청서부), 일이승(스승인 일지승 포함) 도록을 주로 이용한다. 그리고 일제 때 무명고수들이 선철들의 도록을 찾아보고 자기나름대로 풀이하여 작성한 만산도와 만산결이 애용되었다. 예컨대 예산 해복형, 금산 낙안부사도강형에 대한 현대의 논쟁을 보면 고전적 도록외에 만산도가 많이 인용되고 있다.
특기할 점은 해방후 장익호선생의 유산록(전편은 고전에 있는 전국적 대혈을 싣고 후편은 고전적 도록과의 중복을 피하면서 다수의 혈처를 게재하였다)이 산서(山書) 중에는 가장 많이 팔렸다. 그 밖에 유명 무명의 도록이 다수 있으나 신빙성이 없어서 외면되고 선철의 작품인양 위조한 도록이 끼어들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 이와 같이 도록파들이 사용하는 도록은 많지 않다는 사실은 도록파들이 저술한 책(이명석의 “명산의 명혈을 찾아서”, 이정암의 “한국최고의 명당” 이상규의 “천하명당 여기에 있다” 유청림의 “풍수기행”)과 이터넷에 올라 있는 간산기(예컨대 김기설의 자미원카페, 리귀홍의 도선국사풍수비법회카페)를 검토해 보면 쉽게 확인 되는 터이다.
3. 도록을 작성한 시기
* 풍수의 도입시기에 관하여 신라중기 당나라에서 도입하였다는 의상대사說 등 이설(異說)이 있으나 신라말 도선국사(827~898)가 최초로 풍수이론을 도입하여 체계적으로 전개하였다고 본다. 음양택은 풍수이론을 공부하지 않아도 자연의 힘(민속적으로는 山神)과 영적인 지혜(소위 地通)로써 명당을 점할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경주에 있는 정씨들의 도시조 지백호(기원전 57년), 박혁거세의 경주오능(서기4년), 우리나라 제일의 명당인 김해 김수로왕릉(199년)등은 중국에서 풍수의 원조라는 곽박(274~324 금난경)보다 앞섰다. 풍수이론이 존재하지 않던 시기에 천하제일 대지에 김수로왕릉을 쓴 것은 풍수에 영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수 없다.
* 우리나라 도록은 도선국사가 전국적인 도록(구전해오던 것을 후세인이 문서화 하였다)을 최초로 만들었고 무학대사가 대구등 일부지역에 도록을 남겼다. (불가에서 개인의 음택은 正道가 아니고 포고의 방편이다. 무학대사가 소점한 곳은 많이 있으나 결록을 남겼다는 말은 의심스럽다) 이조초기에서 임란전까지는 도읍지와 왕릉을 두고 대신과 지관들 사이에 논의가 많았고 왕이 나서는 경우도 있었으나 개인을 위한 도록은 작성되지 않았다. 임란직전 남사고는 격암유록을 저술하여 십승지를 기록하였고 정감록의 십승지론에 재료가 되었으나 현존하는 격암유록은 위작이라는 견해가 정설이다. 남사고의 부친 묘와 자신의 신후지(윤씨에게 출가한 딸이 차지하였다)를 보면 남사고는 음택풍수에서 고수는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풍수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은 임란 때 귀화한 두사충 이문통(패철 도입) 나학천 등의 중국지사들에서 비롯 되었고 두사충의 도록이 전국적이고 숫자도 제일 많다.(다만 용혈도는 적고 결록은 많은 데 결록은 찾기 어렵다). 이들의 뒤를 이어 박상희 이의신이 풍수행을 하고 도록도 남겼으나 내용이 간단하여 도움이 안된다.
* 그 뒤를 이어 일지승과 일이승사제의 도록이 작성되었는데 전국적이고(다만 경북 강원이 적다)내용이 세밀하고 충실하여 도록파의 경전이 되었다. 일이승의 전라도지역 산도를 보면 노정(蘆汀)이란 이름으로 산도를 작성하고 작성 년월일을 표시하였다(작성 명의가 없고 작성년월일만 기재한 것도 있다). 이를 서기로 환산하면 일이승은 1660년경 6년간(정유년~임인년) 80건의 전남지역 산도를 작성하였다는 말이 된다. 그럼에도 단재 신채호선생님이 일이승은 1800년대초 사람으로 홍경래의 풍수스승이었다고 말함에 따라 현재 1800년대 사람이라는 주장이 정설로 되고 있다. 명혈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이후에는 민일스님등 몇 건의 결록이 만들어졌을 뿐이다.
* 일이승 산도의 작성명의자와 작성년월일---
4. 도록의 작성 동기와 활용상황
* 왜 도록을 작성하였고 어떻게 활용되었는가?
논자에 의하면, 도록은 신안(神眼)들이 길지를 찾은 뒤 적격자가 찾아서 사용할 수 있도록 기록을 남긴 것인데 제자들이 재물욕심에 유출하였고 조선시대에는 과객으로 떠돌던 풍수사가 실력을 증빙하는 자료로 비결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몸값 올리는데에 활용하였다. 전란으로 어려웠던시기에 위기를 극복하려는 방안으로 도록이 극성을 부렸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지관들이 몸값을 올리려는 수단으로 도록의 결록지를 찾았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전란 때 도록이 극성을 부렸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임란 때 전사와 아사한 백성이 3백만명에 이르고 병자호란과 대(大)기근시에 굶어 죽고 유랑한 백성이 부지기수이었는데 피난민을 상대로 십승지라는 피난처를 안내하는 도록(예컨대 속리산 우복동 산도)을 판매하는 장사꾼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음택 도록은 관심을 끌 수 없었다. 우리의 시조와 옛 무덤은 대부분이 실전하였다가 몇 백년 뒤 다시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전란과 사화(士禍)로 인하여 후손들이 피난가서 외지에 정착한 탓으로 실전하였던 것이다. 제 한 몸 간수하기 어려운데 조상 묘를 챙길 여유가 있겠는가?
* 왜 풍수를 공부하고 산서를 저술하는가?
등산가는 산이 거기에 있으니 등산한다고 말한다. 명혈이 거기에 있으니 찾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풍수적 유전요인이 있고 발복에 관심이 있으니 풍수계에 입문하고 일정수준이 되면 소수는 지관으로 진출하고 대다수는 가능하면 자기 가계가 묻힐 곳을 찾겠다는 생각으로 도록을 연구한다. 혈처를 찾는다고 하더라도 토지를 취득하기 어렵고 자기에게 맞지 않는 경우가 있으므로 그냥 기쁨을 만끽하는 풍수동호인이 절대다수이다. 풍수인구가 2만명쯤 되는데 그중 전업 또는 부업으로 풍수에 임하는 지관은 1천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도록파를 장사꾼으로 매도하는데 동의할 수 없다.
* 현대인이 저술한 어떤 산서를 보니 인연있는 자가 명혈을 사용하여 위인이 탄생함으로써 국가가 번영하도록 할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 글쎄, 개인이 국운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다. 남연군 묘가 흉지이기 때문에 고종이 망국의 임금이되었는가?
5. 도록의 문제점과 활용 방안
* 논자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도록에 적힌 명혈이 실제 존재한다는 입증방법이 없다, 위성지도로 지형이 비슷한 곳을 찾아 결록지라고 주장하는 경우를 지적한다.
* 발복은 필연도 아니고 긴 시간이 지난 뒤에 나타므로 명혈이라는 입증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풍수공부를 열심히 하고 경력이 10년이 지난 지사 중 전업지관이 아닌 사람 10명에게 현장을 설명한 결과 6~7명이 동의하면 명혈로 볼 수 있다. 전업지관은 자기의 틀에 고정되어 있어 현명한 판단이 어렵다.
그리고 재혈은 한치의 오차가 있어도 천지차이가 있다는 것이니 위성지도로 혈처를 확정지울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장에 가지 않았다면 일고의 가치도 없다
* 논자는 도록을 활용할 방안을 제시하지 않았으나 다음과 같은 방안도 있을 것 같다. ①도록에 심혈법을 적용시켜 다양한 심혈법이 어떤 방식으로 적용되는가, 나아가 기존의 대명당으로 알려진 묘에 심혈법을 적용시켜 볼 때 심혈법이 맞지 않는 것이 있는가를 밝힌다. ②장사속으로 이용되는 것을 경계한다. ③도록에 있는 혈처를 찾아서 재미를 느끼게 하여 풍수의 저변을 확장시킨다.(2024.10)
첫댓글 예천박물관에 두사충선생의 감여요람이 모종가의 기증으로 보관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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