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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
지번주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116-2(가마골)
혹독한 박해의 상황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고 그에 대한 대책을 건의했던 ‘백서(帛書)’의 주인공인 황사영의 묘는 지난 1980년에 들어서야 겨우 그 위치가 확인됐다. 양박청래(洋舶請來)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능지처참 형을 받은 그의 시신이 온전할 리도 없거니와 가까운 집안사람들도 모두 유배를 당한 터라 시신을 거둘 사람조차 없었다. 다행히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황씨 문중 선산에 안장한 이들 덕택에 순교자의 유해가 전해질 수 있었다.
그 후 집안에서조차 잊혀 왔던 황사영의 묘는 180년이 지난 1980년 황씨 집안의 후손이 족보 등 사료를 검토하고 사계의 고증을 받아 홍복산 선영에서 황사영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발견하고, 이를 발굴한 결과 석제 십자가 및 비단 띠가 들어 있는 항아리가 나오면서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렵게 찾은 황사영의 묘는 현재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에 있지만, 아직 변변하게 순교사적지로 개발되지 못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건물 뒤에 가려져 있다. 첫 발굴 당시 황사영 순교자의 묘를 확인한 후 추후 교회법적 절차에 따라 발굴하고자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현재의 묘를 조성하였다.
하지만 그가 북경에 보내려 한 백서가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가 보여 준 굳건한 신앙은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황사영 순교자는 현재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어서, 시복과 도로 확장 공사 상황 등에 맞추어 최종 발굴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의 묘가 하루속히 사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黃)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거족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黃錫範)과 모친 이씨(李氏)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그의 됨됨이와 재주를 높이 산 정조 임금은 친히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격려했고, 당시 풍속에 따라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을 명주(토시)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명문의 배경과 출중한 재주로 탄탄한 출세의 길을 앞둔 청년 황사영은 학문의 길을 위해 찾아간 정약종의 문하에서 일생일대의 변화를 겪었다. 과거에 급제한 후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 명련(命連)과 혼사를 치렀고, 천주교인으로 명도회(明道會) 회장이던 정약종은 황사영의 빼어난 재능에 반해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을 것을 다짐했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그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누었다. 결국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그는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로써 그는 부귀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러운 일생을 선택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을 희생시켰고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나와 탐스럽고 아름답던 수염을 깎고 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충청북도 제천의 배론으로 숨어들었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가마 토굴에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 천에 적었다. 옷 속에 이 비밀문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백서 사건은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넘기려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敬憲)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가산은 모두 몰수당해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을 탄생케 했다.
귀중한 교회사적 자료인 이 백서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 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였고 모두 1백 22행, 1만 3천 3백 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백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서, 첫째는 신유박해 중 순교한 주 신부 외 30여 명의 빛나는 사적을 열거하고, 둘째는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 간의 골육상잔(骨肉相殘)의 당쟁이었음을 피력하고, 세 번째로는 조선 교회의 회생과 교우들의 학살에 대한 대비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내용이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원래 근 1백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 오래된 문서를 정리하면서 우연히 발견돼 마침내 뮈텔 주교에게 보내졌고,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기념품으로 봉정했다. 현재 백서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 · 전시되어 있다.
오랫동안 교회 내에서 황사영의 세례명이 알렉산델(亞肋山)로 알려져 왔으나 1990년대 말 여러 사료를 연구한 결과 알렉시오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황사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사학징의(邪學懲義)”는 그의 세례명을 ‘알렉시오(亞肋叔)’로 표기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가 1845년에 작성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에도 그의 세례명을 ‘Alexis’ 또는 ‘Alexius’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처럼 황사영의 세례명이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은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에 ‘알렉산델’로 잘못 적힌 것을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그대로 표기한 데 원인이 있다.
180여 년간 땅에 묻혀 있던 황사영의 토시가 든 청화백자합. 2009년 보존 처리를 거쳐 절두산 박물관에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한편 황사영 순교자의 18대 종손 황세환 요셉 씨는 2004년 4월 6일 한국교회사연구소에 황사영의 토시가 든 청화백자합을 기증했다. 이 청화백자합은 지난 1980년 8월 31일-9월 1일 가마골에서 황사영의 묘를 발굴할 때 출토된 것으로 그간 창원 황씨 판윤공파 종중에서 보존해오다 이날 연구소에 영구 기증됐다.
황사영은 죽을 때까지 손목을 명주(토시)로 감고 다녔고, 그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자 시신을 옮긴 후손들이 이 토시를 합 속에 넣어 보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출토 당시 돌 십자가와 함께 180여 년간 지하에 묻혀 있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멸된 토시는 까맣게 응고된 형태로 남아 원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 후 보존 처리를 거쳐 2009년 9월 5일 절두산 순교성지 박물관에서 토시가 담긴 청화백자합이 최초로 전시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의정부교구는 의정부 주교좌성당에서 출발해 사패산을 넘어 남종삼 성인 묘역과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까지 순례하는 '순교자의 길'을 개발해 송추 성당을 중심으로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순례와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또한 2018년 8월 24일자 공문을 통해 송추 성당을 남종삼 요한 성인과 가족 순교자 묘소와 황사영 알렉시오 순교자 묘소 순례지로 지정했다. 또한 묘소 입구의 건물을 매입하고 마당에 대형 십자가를 세우고 묘소 한편에 성모자상을 설치하여 순례자를 반기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3년 7월 11일)]
가. 황사영 백서 : 200년 전 편지의 진실
백서(帛書)는 ‘비단에 쓴 글’이다. 한자문화권에서 고대사회로부터 쓰이던 보통명사였던 이 백서라는 단어 앞에 우리는 글쓴이 황사영의 이름을 붙여 특별히 다른 백서와 구별하여 부르고 있다. 이 황사영 백서가 로마 교황청 고문서고를 떠나 서울의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백서는 1801년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년)이 그 박해 과정을 기록하고 교회 재건책을 논한 초기교회사 연구의 주요 자료다. 종전에 우리는 이 자료의 사본만을 접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 원본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원본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원본이 작성되던 200년 전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황사영은 누구인가
서울의 아현동에서 남인 시파에 속하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1790년은 ‘운명의 해’였다.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것이다. 당시의 국왕인 정조는 그를 특별히 불러 격려하면서 나이 20세가 되면 탁용해 주겠다고 말했다. 당시 정세에서 이는 그에게 출세와 부귀영화를 확실히 보증해 주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이 해에 정명련과 결혼하여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결혼은 흔히 인생의 전환점이라 한다. 그는 결혼을 통해서 그 삶에서 진정한 전환을 겪게 되었다. 그의 처가 인척들을 통해서 천주교 신앙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가 식구들을 비롯해서 천주교와 관련된 여러 인척들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승훈과는 사돈간이었고, 처삼촌인 정약종은 초창기의 교회를 이끌던 인물이었다.
황사영은 결혼 직후인 1790년에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했다. 이후 그는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오직 교리 연구에만 매달렸다. 그는 “구원의 학문이 아닌 다른 학문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부귀영화의 길을 스스로 버렸고, 학동들을 모아 가르치며 몇 푼 안되던 학전(學錢)에 기대어 사는 가난에 찌들린 훈장의 길을 택했다.
왜 작성되었나
황 알렉시오로 다시 태어난 그는 천주교 신앙이 성리학과는 달리 조선을 구원해 줄 새로운 사상임을 확인했고, 이를 전파하려고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교회의 지도적 인물로 성장해 갔다. 그러나 정조 임금이 궂기신 뒤 일어난 천주교 박해는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1801년에 박해가 일어났다.
이 박해 과정에서 그가 그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신앙은 모독을 당했다. 자신의 동료들은 하나씩 잡혀서 감옥에서 매맞아 죽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그가 존경하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신자들에게 무고한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관청에 스스로 자수하여 죽음의 길을 택했다. 이렇게 조선교회를 이끌던 이들이 삽시간에 죽음을 당했다. 이 박해를 증언하고 조선교회를 지키고 재건해야 할 책임은 오로지 황사영에게 남겨졌다.
황사영은 신자들이 마을을 이루어 옹기를 구우며 살아가던 제천 땅 배론으로 망명을 단행했다. 그리고 토굴에 숨어서 박해에서 희생된 증거자들의 순교사실을 기록했다. 또한 그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선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의 재건책을 구상했다.
그는 길이가 세 뼘, 폭이 두 뼘 정도 되는 비단폭을 구했다. 그리고 궁벽한 옹기점의 점인들에게서 구하기는 힘들었을 매우 가는 붓으로 먹을 찍어 깨알같은 글씨를 또박또박 써내려 갔다. 아마도 그가 이상인(李喪人)이라 자처하며 피신할 때에도, 당시 선비들이 가지고 다니던 휴대용 필통에 그 붓을 넣어 가지고 다녔던 듯하다. 황사영이 작성한 일종의 박해보고서요 청원서인 이 편지는 이렇게 작성되었다.
황 알렉시오는 이 편지를 조선교회를 책임지던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 일을 중국교회에 밀사로 파견된 바 있던 황심에게 맡기고자, 그를 배론으로 오게 했다. 그러나 황심은 도중에 체포되었고, 그의 발설로 황사영의 피신처가 탄로났다. 의금부의 나장들은 득달같이 내달아 그를 체포했다. 그가 작성해 놓은 백서도 압수되었다.
어떻게 전해졌나
체포되고 백서 내용이 밝혀지자 조정이 경악했다. 백서에는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사 5-6만 명을 보내 조선에 무력으로 개교를 시도해 달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서에서 박해의 경과를 보고한 부분보다는 오직 이 부분만이 강조되어 회자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흉서’로 규정했다. 일반 관리나 지방의 선비들은 이 반역적 내용에 격분했고,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죽음을 당했다.
백서 사건이 터진 뒤 의금부 관리들은 보고서를 올린 뒤 이를 문서궤에 넣어 보관하기에 앞서 한 부 베껴두어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백서의 내용은 "벽위편"이나 "동린록"과 같은 척사관계 기록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 백서의 사본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손에 들어와 1860년대 초 다블뤼가 조선천주교회사에 관한 비망기를 작성할 때에도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백서사건이 터진 직후부터 천주교 문제로 탄압받던 남인 시파 계열에서는 이 백서가 천주교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하며 반대했던 홍낙안이 조작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음모와 모략이 성행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나올 법한 의심이기는 했지만 이 백서는 분명 황사영이 작성했음이 밝혀졌다.
세월은 바뀌어 1894년이 되었다. 나라가 개항하고 갑오경장이 단행되었다. 조정에서는 묵은 문서들을 파기했다. 이 문서가 파기되기 직전에 개화관료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이건영(요셉)이 이를 입수하여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해주었다. 조선교회의 책임자 뮈텔 주교는 이미 죽은 발신자로부터 94년 만에 한 통의 편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황사영이 전달에 실패했던 이 백서는 그가 사랑하던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1925년 조선 순교복자 79명에 대한 시복식이 로마에서 열렸다. 그들의 시복은 신앙의 궁극적 승리를 확인하는 행사였다. 이 행사에 참석했던 뮈텔 주교는 1801년의 순교자들에 관한 피와 땀의 기록인 이 백서를 로마 교황청에 전달했다. 이로써 그는 당시 시복되지 못했던 1801년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을 다짐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뒤 이 백서의 존재는 잊혀져 갔다.
1970년대 중반에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는 이 백서가 인류복음화성의 문서고에 있음을 확인하고 한국교회에 알렸다. 그 뒤 이 백서를 직접 보려는 노력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이제 그 백서는 고국을 떠난 지 76년 만에 다시 고국을 방문하여 그 피와 땀의 기록을 드러내주었다.
남은 말
백서는 분명 먹으로 작성되었다. 해서체의 글씨로 쓰인 이 원본을 주의 깊게 보면 물기 때문에 글씨가 조금씩 번진 곳을 확인하게 된다. 그 잔잔한 번짐은 백서의 보관과정에서 생긴 흔적일 수도 있다. 또한 백서를 작성하며 황사영의 땀방울과 눈물이 적셔져서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의 땀이며 눈물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황사영은 간절한 눈물을 흘리며 백서를 작성했나 보다. 나는 물기에 얼룩진 그 백서의 진본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전하고자 했던 그 진실은 오늘의 우리를 전율시킨다. [출처 :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1년 9월호]
신유박해의 순교자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년)
황사영 백서 원본이 신유박해 순교 200 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의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 동안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던 황사영 백서는 1801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참상을 기록하고 신교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재건하려는 자신의 개인적인 방안을 건의한 편지글로 한국교회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다. 조선 조정의 잔인한 박해로 겨우 움튼 한국교회가 참혹하게 찢겨져 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토굴 속에 숨어서 피눈물로 써 내려간 편지글, 가로 62㎝ 세로 38㎝의 흰 명주 천에 붓으로 쓰여진 깨알 같이 작은 해서체의 먹글씨, 122줄 1만 3384자 앞에서 200년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황사영의 신앙적 열정을 느끼며 전율했다. 세월의 흔적이 어린 비단 위에 조금씩 번지기도 한 작은 글자들은 이제 우리들을 감격의 눈물로 역사 속에 젖어들게 하고 있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년)은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으며 남인 시파에 속하는 양반가문 출신이다. 정5품 정랑직을 역임했던 아버지 황석범이 일찍 돌아가시어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이소사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본관은 창원이요 자를 덕소(德紹)라 한 그는 명문가의 자손답게 영특하고 학문에 뛰어났다. 그의 11대 할아버지인 황침이 한성판윤을 지낸 이래 10대에 걸쳐 벼슬이 떨어진 적이 없는 명문가 출신인 그는 수염이 아름다운 귀공자로도 주변의 환심과 기대를 받고 있었다.
1790년(정조 14년) 황사영은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조 임금은 특별히 그의 학문적 재능을 칭찬하며 격려하여 스무 살이 되면 탁용하겠다는 중용을 약속하여 그의 장래를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더욱 학문에 전념하도록 급양비를 하사하였는데 이 때, 임금님이 그의 손을 잡아 주어 어무가 내린 영광을 입었다. 황사영은 이 영광을 표시하기 위하여 당시의 관례에 따라 비단으로 그 손을 감고 다녔다. 이로서 절대군주제도 아래 신분계급 사회였던 당시의 황사영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온전히 다 갖추었다.
황사영은 진사시에 급제했던 그 해에 혼인을 하여 정란주(보명은 명련)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이 결혼은 그의 인생에 있어 귀중한 전환점이 되게 하였다. 부인인 정란주는 진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그 명성이 자자한 정재원의 네 아들 중 맏이인 정약현의 맏딸이었다. 정약현은 한국 초기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정약종과 다산 정약용의 맏서형이 되니 황사영은 정약종과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 것이다.
황사영은 이 무렵인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으며 정약종, 홍낙민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고, 특히 처숙인 정약종 형제들로부터 교리를 익히게 되어 알렉시오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황사영은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교리연구에 몰두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그는 현세의 행복을 버리고 구원의 학문이 아닌 다른 학문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뒤 주신부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양반인 그는 평민신분의 양인들과 어울려 남송로, 최태산, 손인원, 조신행, 이재신 등 다섯 사람과 함께 명도회 단위 조직을 구성하여 이끌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 권일신, 최창현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서양선교사 파견 요청을 위한 일에 동참하였다. 그는 1798년부터 자신의 고향을 떠나 서울 애오개(아현동)와 북촌에 머물며 신자들의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해 갔다.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다. 그는 체포를 피해 신앙생활을 바로 할 곳을 찾아 방황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금령이 강화되니 친척과 친구들 가운데 천주교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온갖 성의를 다하여 신봉하게 되었다"고 증언한 바와 같이 그의 신앙을 지켰다. 그는 신앙생활 그 하나를 바로 하기 위하여 스스로 이씨 성을 가진 상주로 변장하고, 김한민과 함께 서울을 벗어나 충청도 제천 땅 배론으로 숨어들어 김귀동의 집 옹기가마 토굴에 은신하였다.
일찍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그는 이제 이름 석 자도 밝히지 못한 채 토굴 속에 몸을 숨겼다. 진정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 이것뿐이기에 그 구원을 위한 학문 밖에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의 학문과 신앙이 조선조정의 일방적인 박해로 모욕을 당하고, 신앙의 동지들은 형장의 죄수처럼 처형되고 있음을 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는 눈물과 기도로 신앙 동지들의 장한 순교의 모습을 정리해 두었으리라. 마침내 주문모 신부마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박해과정을 증언하고 조선교회를 재건해야 할 사명을 통감했으리라! 그는 이 역사적 소명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유명한 백서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출처 : 김길수, 전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12월 9일]
황사영 백서의 서명 명의자 황심 토마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문헌들 가운데서 "황사영 백서"만큼 주목을 받고 비판과 논의를 불러일으킨 문헌은 드물 것이다. 백서(帛書)란 '비단에 쓰여진 글'이란 뜻인데,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 현황과 이에 대해 황사영이 생각한 대책을 북경 주교에게 건의하는 내용의 비밀 편지이다. 이는 가로 62센티미터, 세로 38센티미터의 흰 명주 천에 작은 붓글씨로 쓰여졌는데 모두 122줄, 13311자로 된 긴 글이다.
"황사영 백서"가 작성된 곳은 충청도 배론에 있던 김귀동의 집이었고, 백서에 쓰여진 박해와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주로 김한빈 등을 통해 수집되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정리한 때는 황사영이 배론으로 피신했던 1801년 음력 2월 전후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백서의 발신자로 서명한 사람은 황사영이 아니라 황심 토마스로 되어있다. 황사영은 이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고 하면서, 이미 조선교회의 편지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한 적이 있어 그 이름이 잘 알려진 황심의 명의를 빌려 호소함으로써 그 신뢰를 더하고자 했던 것이다.
황심 토마스(1756-1801년)는 충청도 내포지방의 덕산고을 용머리 사람으로 조선조 영조 32년에 태어났다. 양반가문의 자손인 그는 내포의 사도로 알려진 이존창에게 교리를 배워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 무렵 덕산의 황모실 출신으로 이보현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 부친을 잃고 방탕하게 살았다. 황심은 그에게 모범적인 생활과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자가 되게 하였다. 이보현은 입교한 뒤 단정한 처신과 온화한 생활로 주위 사람들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그는 박해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가족들을 격려하며 해미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하였다. 황심은 이보현의 누이와 혼인하였다.
황심의 입교 과정이나 신심생활을 특별히 소개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위험을 무릅쓴 북경 왕래와 교회의 부흥을 돕는 기록에 자주 나타난다. 이런 기록들에서 우리는 그의 놀라운 활동상을 엿볼 수 있으며, 또 얼마나 열심한 신자였는지 알 수 있다.
단 한 사람의 선교사도 없이 시작된 한국교회는 박해를 받기 시작하면서 사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교회재건운동과 사제영입운동을 동시에 전개하여 한국교회 첫 사목사제로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게 되었다. 이때 사제영입운동의 주동자였던 최인길, 지황, 윤유일 등과 함께 황심도 참여하였다. 황심은 1794년 12월 교회의 대표로 뽑혀 국경으로 나가 책문에서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였으며, 그뒤 신부의 전교활동을 도왔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발각되어 최인길, 지황, 윤유일이 순교한 뒤로는 황심이 북경과 연락하는 밀사의 사명을 맡게 되었다.
최인길의 임기응변과 희생으로 피신에 성공한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의 집에 은거하면서, 1796년 9월에 북경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 천주교회의 현황을 보고하고자 하였다. 이때 황심은 밀사로 뽑혀 주 신부의 라틴어 편지와 교우들의 한문 편지가 쓰여진 명주 두 조각을 옷 속에 감추어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고 귀국하였다. 황심은 이 일을 계기로 약 3년 동안 여러 번 옥천희, 김유산 등의 동지와 함께 밀사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조선교회에서 성사집행에 필요한 성유 등 성물을 가져와 신부의 사목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정조가 제위 24년 만에 승하하고 순조가 열한 살의 어린 나이로 보위를 계승하였다. 이에 정순왕후 김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1801년 한국 최초의 전국적 박해인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심은 강원도 춘천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그는 황사영이 피신해 있는 제천 땅 배론으로 찾아가, 주문모 신부의 순교 사실과 조선교회의 비참한 사정을 북경 주교에게 알리는 방안을 의논하였다.
이렇게 해서 황사영은 백서를 쓰고 그 명의를 북경 주교와 면식이 있고 잘 알려진 황심의 이름으로 하였다. 자신의 세례명인 토마스란 명의로 된 이 백서를 황심은 그의 동지 옥천희를 시켜 북경에 전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뜻밖에 옥천희가 책문에서 체포당하고 그의 고발로 1801년 10월 22일 황심이 체포당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옥에 갇힌 황심은 자신이 사실을 자백하면 박해가 확대되지 않으리라는 희망에서, 일찍이 "일이 위급하게 되면 나를 밀고하라."던 황사영의 명에 따라 황사영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이 때문에 황사영, 김한빈 그리고 현계험 등의 동지들이 모두 체포되어 옥에 갇혔다.
황심과 함께 이들 신앙의 동지들은 황사영의 백서 송사 사건으로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한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신앙을 고백하고 조정의 지나친 의심에 바른 해명을 했으며, 모두 사형판결을 받고 의연히 순교의 길을 걸었다. 당시 황심 토마스에게 내려진 결안은 이러했다.
"황심은 비천하고 비열하여 사교에 빠졌고, 서울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불충하고 상스러운 파당을 위하여 모든 힘을 기울이고 암약하였다. 그는 비밀히 외국에 가서 서양교의 이름을 받았으며, 주문모 신부를 위하여 여러 번 여행하고 그의 편지를 전하였다. 사교를 믿는 자들이 꾸민 일 중에 그가 미리 알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삶과 죽음을 걸고 황사영과 결탁하였고, 황사영이 법망을 벗어나기 위하여 제천으로 간 것을 알자 일부러 그를 만나러 갔다. 또한 밤에 베개를 같이 베고 누워서 그 흉악한 편지를 제 눈으로 읽었는데, 그 편지의 잔학함은 고금을 통하여 하늘 아래 비길 것이 하나도 없다. 붓으로 그 흉악함을 쓸 수 없으니 그러한 일은 일찍이 보도 듣도 못한 까닭이다.
황심은 뻔뻔스럽게도 황사영과 짜고 배들을 불러들여 나라를 위태롭게 하려고 이 편지를 외국인들에게 보내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흉측한 계획은 발각되었다. 그는 역적이요 대죄인이다. 그를 서소문 밖으로 끌어내어 육시를 하고 참수하라."
황사영 백서의 마지막 줄에 "천주강생 후 1801년, 시몬 다두 첨례 후 1일, 죄인 토마스 등 두 번 절하고 삼가 갖추어 아룁니다."라고 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으로 서명된 명의의 주인공 황심은 결안대로 참수되고 육시를 당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의 명의로 작성된 황사영의 백서 원본은 우여곡절 끝에 1894년 고문서 파기 때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주교는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께 선물하여 지금 교황청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 : 김길수, 전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 경향잡지, 2000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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