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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라면왕’ 이철호씨의 성공 인생“열일곱 나이에 남의 나라에 가서 온갖 잡일을 하면서도 희망과 웃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금발에 벽안의 노르웨이 청소년들이 ‘우상’으로 떠받드는 땅딸막한 한국인 아저씨가 있다. 그들에겐 ‘MR LEE 누들’로 더 유명한 이철호씨.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출발하여 머나먼 이국에서 온갖 잡일에서 출발, 최고 요리사에 도전하고 ‘라면’하나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사업가가 된 이철호씨의 쫄깃하고 얼큰한 라이프 스토리를 들아보자. 지난해 11월, 해외에 거주하는 자랑스런 한국인을 소개하는 한 방송 프로그램이 끝난 뒤, 그 프로그램의 인터넷 시청자 게시판은 밀려드는 사연들로 폭주했다.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의 삶을 보고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한번 더 보고싶다’ 등이 주 내용. 대체 어떤 주인공이길래 평일 저녁 심드렁하게 TV화면을 지켜보던 수많은 시청자들을 그토록 사로잡은 것일까. 주인공은 노르웨이의 한국인 이철호씨(75). 노르웨이에서 ‘MR LEE 누들’로 통하는 그는 그곳 청소년들 사이에서 수상보다도 더 인기가 있다. 그가 벌이는 백화점 라면 시식행사를 보기 위해 초등학생들이 무더기로 결석을 할 정도라니, 여느 연예인 스타도 부럽지 않을 정도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이 오슬로에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을 때도, 노르웨이 국민들은 ‘MR LEE 조국의 대통령’이 왔다고 했다던가. 그런 그의 라이프 스토리를 소개한 책이 나왔다. <노르웨이 라면왕 MR. Lee 이야기, ‘Be Happy!’>가 그것. 책 출간 기념으로 한국을 오랜만에 다시 찾은 이철호씨를 만나보았다. 미군부대 하우스보이로 있다가 폭격으로 다리 부상 입고 노르웨이로 떠나 연간 1천5백만달러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는 ‘성공한 사업가’ 이철호씨. 그러나 그의 첫인상은 그저 마음씨 좋은 동네 아저씨 같다. 작은 눈에 뭉툭한 코, 불룩한 배와 사람 좋은 미소가 몇 마디만 나누어도 마주 대한 사람의 긴장을 확 풀어놓는다. 그리고 잠시 후엔 쿡쿡 웃게 만든다. 이런 친화력과 ‘웃음’을 잃지 않는 낙천성이야말로 그가 지닌 성공의 열쇠가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그를 가리켜 ‘웃음 바이러스’ 보균자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풀어놓은 삶 속에는 웃음보다는 차라리 눈물과 땀이 더 많았다.그가 전쟁중 다친 다리를 치료할 수 있다기에, 노르웨이 오슬로 공항에 첫발을 내디딘 게 54년. 당시 그의 나이, 열일곱살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죠. 수중에 돈이라곤 한푼도 없이 거지꼴로 보따리에 책 몇권만 달랑 넣은 채 낯선 곳에 도착하던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금은 9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당시엔 비행기로도 악천후 속에 덜컹거리며 무려 72시간이나 걸려 도착했죠. 그땐 제 인생이 이렇게 변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어요.” 충남 천안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씨가 머나먼 노르웨이에 가게 된 건 따지고 보면 전쟁 탓이다. 한국전쟁 당시 이씨는 열네살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는 은행에서 돈을 찾아서 가족들에게 고루 나눠주며 일렀다. “혹시라도 전쟁통에 헤어지게 되더라도 이 돈으로 끝까지 살아 남아 다시 만나자.” 남들은 피난 가네 어쩌네 하는 와중이었지만 ‘타고난 장사꾼 기질’을 지닌 이씨는 10대의 나이에 엉뚱하게도 돈벌이를 해보겠노라 나섰다.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려 밀짚모자 장사, 냉차 장사 등을 하며 돈을 벌었다. 전국이 난리통이었지만 이씨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목숨을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전쟁중에 우연히 알게 된 미군 병사와의 인연으로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미군들의 잔심부름과 궂은 일을 해주는 소년)’로 들어갔다. 워낙 싹싹하고 성실했던 그를 미군들은 퍽 아껴주었다. 미군부대에서 그의 별명은 ‘아치 볼’. 그가 좋아했던 만화 주인공의 이름이다. 그러던 중 어느날 폭격을 맞아 다리 한쪽을 다치게 됐다. 야전병원을 전전하며 수술과 치료를 거듭했지만 다리의 상처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평소 똑똑하고 정직한 이씨를 아끼던 당시 해병대 사단장 스나이더 장군은 이씨를 좀더 좋은 의료진에게 보이고 싶어 ‘미국 군인신문’에 광고를 내주었다. 그 광고를 보고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등지에서 도움을 주겠다는 뜻을 보내왔고, 결국 노르웨이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야말로 그분은 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죠. 당시 노르웨이로 가면서 다친 다리를 꼭 고쳐보겠다는 생각 외에 또 하나의 욕심이 있었어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죠. 당시 제가 가진 최고의 기술은 그래봤자 ‘구두 닦기’였지만요. 그런데 노르웨이에선 구두닦이도 면허증 없이는 못한다더군요.” 이씨는 닥치는 대로 일자리를 찾았다. 언어도 서툴고 몸도 불편한 그가 찾을 수 있는 일이란 허드렛일밖에 없었다. 호텔 벨보이, 서류 심부름, 연극 단역배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중에서도 ‘남의 나라에서 똥지게를 진 일’은 그의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엔 노르웨이에도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따라서 화장실 청소부로 들어간 이씨는 재래식 화장실의 용변 양동이를 꺼내 치우는 일을 해야 했다. 처음엔 냄새 때문에 미칠 것 같았지만, 1년쯤 지나자 어느새 그 냄새에 길들여지게 되어 전처럼 괴롭지가 않았다고. 일이 힘들어도 이씨는 한번도 자신의 삶 자체를 비참하거나 힘겹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화장실 청소부 일을 하러 다닐 때조차도 항상 웃는 얼굴을 잊지 않았다. 이씨는 “고생도 팔자다, 이런 고생에서 배울 게 있을 거다, 언제가는 분명히 좋은 일이 있을 거다 하고 느긋하게 생각했어요. 아마도 전형적인 충청도 성격을 타고난 덕분이 아닐까 싶습니다”라며 웃는다. 타고난 낙천적인 마음가짐 없이는 고달픈 이국 생활을 이겨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은 다 마음먹기에 따라 간다고 생각합니다. 슬프게 생각하면 슬픈 일만 생기고, 기쁘게 생각하면 기쁜 일만 생기는 법이죠.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믿고 열심히 일하면, 다 잘되는 방향으로 일이 나아가게끔 되어 있어요. 제가 평소에 농담을 잘하고 잘 웃는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죠. 낙천적인 사람, 언제라도 희망이 있는 사람은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법입니다.” 그의 생활신조가 된 ‘Be Happy!’는 사업이 성공하고 생활의 여유를 갖게 된 후 찾아낸 말이 아니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에 그의 마음에서 불씨로 자라나 등불이 되고 결국 그의 삶 전체를 비쳐주는 태양 같은 말인 것이다. 타고난 성실성과 열정으로 그릇닦이에서 노르웨이 최고 요리사가 되다 ‘구두닦이 면허증’을 받을 생각으로 진학한 상업학교 공부를 끝내놓고 나니, 공부 욕심이 더 커졌다. 이대로 구두닦이가 되지 말고 공부를 더 해서 전문적인 직업을 갖자는 생각에 이씨는 요리전문대학을 택했다. 사실 요리사가 되면 먹는 것 만큼은 여한 없이 먹겠지 하는 단순한 마음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먹고 사는 것이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이다.그런 꿈을 품고 키 작은 이국소년이 문을 두드린 곳은 ‘홀믄 콜른 파크 호텔’이라는, 노르웨이 최고의 호텔 요리학교였다. “처음엔 그릇만 닦았어요. 남이 20개를 닦으면 저는 50개쯤 닦으려고 부지런을 떨었어요. 물론 남들보다 더 깨끗하게 닦으려고 애썼고요. 그렇게 열심히 일하니까 하루는 주방장이 부르더군요. 그리곤 저한테 정말 요리사가 되고 싶냐고 물어요. 그래서 자신 있게 ‘Yes’라고 대답했죠. 결국 그 주방장 덕분에 그 학교 학생으로 선발이 되었어요.” 어렵게 들어간 학교에서 이씨는 최선을 다해 공부했고, 결국 최우수 학생으로 졸업을 하게 된다. 노르웨이에 간 지 7년 만에 이룬 결실이다. 언어도 유창하지 못하고 신체적으로도 장애를 갖고 있는 이씨가 낯선 이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유일한 방법은 한가지. 그것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남보다 서너배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는 일이다. 요리전문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이씨는 이번에는 스위스로 건너가 감자를 깎는 일부터 시작해서 기본부터 요리를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결국 이씨는 3년 뒤 최고급 호텔의 주방장으로 스카웃되어 노르웨이로 돌아왔다. 이제 이씨의 삶은 더 이상 남루한 이방인의 삶이 아니었다. 그는 펜팔로 만나 10년 동안 마음을 주고받은 독일여성 아네리스와 결혼하고 첫딸 ‘안자’를 낳았다. 꿈에 그리던 가족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노르웨이에 뿌리를 깊게 내리기 시작했다. “면이 꼭 걸레같다”던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진짜 라면맛’을 알려주다 호텔 주방장으로 활약하던 중에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노르웨이의 대형 빵 공장이 오슬로에 식당을 개업한다는 것이다.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이씨는 월급을 받는 대신 총수입에서 이윤을 배당받는 조건으로 계약하고, 평소의 소신대로 열심히 그 일에 뛰어들었다. 결과는 대성공. 나중에 빵 공장이 덴마크로 넘어갈 때까지 오슬로의 식당은 22년 동안 15개 체인점을 열 만큼 엄청난 흑자를 냈다. 그리고 그 22년 동안, 이씨는 변함없이 식당의 총지배인이었다.그렇다고 그의 인생이 이후로 늘 화창했던 것만은 아니다. 세 딸을 낳아주고 가장 든든한 조력자인 아내 아네리스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맛보았고, 엄청난 노력과 투자를 들여 시작한 인삼차 사업이 실패한 경험도 있었다. 친구와 함께 시작한 세탁사업으로 친구도 잃고 돈도 잃는 괴로움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이씨는 괴로움의 나락을 뒹굴기보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칠 때면 하늘에서 그를 지켜볼 아내를 생각했다. 89년, 빵공장이 덴마크계 회사로 넘어가면서, 이씨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회사에서는 만류했지만 그는 이 기회에 평생을 두고 이루어 갈 ‘내 일’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그러던 중 뜬금없이 ‘라면’이 사업의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이씨가 라면 맛을 본 것은 68년, 노르웨이로 건너간 지 14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인 한국으로 방문했을 때다. 그때 을지로의 한 분식집에서 처음 먹어본 라면 맛이 그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있다가 사업 아이템으로 떠오른 것이다. 일단 부딪혀보기로 마음먹은 그는 농심사 관계자를 만나 사업논의에 들어갔다. “처음엔 라면 세 박스로 시작했죠. 라면박스를 들고 슈퍼마켓을 찾아다니면서 맛을 보라고 건네주었어요. 처음엔 라면의 면 모양이 걸레같다며 손도 대지 않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군요. 물론 정식으로 첫 주문을 받기까지 3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죠.” 조심스럽게, 그러나 끈질긴 마음으로 시작한 라면사업이 일단 본 궤도에 오르자 순풍에 돛을 달고 출항하는 배처럼 매끄럽게 노르웨이 식품시장이라는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노르웨이에 처음 선보이는 ‘라면’인 만큼 이씨는 자신의 브랜드를 내걸자고 굳게 마음먹었다. 20년이 넘도록 남 좋은 일만 시키고 결국 손을 털어야 했던 오슬로 식당사업으로 인해 배운 깨달음이기도 했다. 이씨와 거래를 시작한 농심사 측에서는 처음엔 난색을 표했지만, 이씨가 컨테이너 20대 분량의 포장비용을 미리 지불하기로 하자, 자체 브랜드 제작을 수락했다. 그렇게 해서 ‘MR. LEE’라면이 노르웨이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유럽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스프의 종류를 다양하게 만든 ‘MR. LEE’라면은 곧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라면이라는 새로운 음식이 주는 매력도 컸지만, 무엇보다 이철호 사장이 ‘라면 붐’을 이끈 공신이었다. “저는 라면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갑니다. 제 시식회가 인기 있는 이유요? 글쎄요…아마 아이들이 좋아하는 편안한 외모 때문이 아닐까요? TV광고에 여러 번 출연했기 때문에 저를 굉장히 친숙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 역시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시식회에 아이들이 많이 오면 덩달아 흥이 납니다.” 빳빳하게 다린 요리사 복장을 하고, 요리사협회로부터 받은 ‘최고의 요리사’ 훈장을 달고 직접 라면을 끓여 선보이는 이철호사장. 한국인으로서 노르웨이에 그가 굳힌 입지는 대단하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한국을 ‘MR LEE의 조국’이라고 인식한다. 그만큼 그로 인해 나라 이미지까지 높아진 것이다. 그런 그의 취미이자 보람은, 노르웨이에서 한국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 6·25 참전용사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고 해마다 잔치를 벌이는 것은 물론, 참전 50주년 기념 국립의료원을 설립하는 일까지 도맡고 있다. 이런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에게 있어 놓칠 수 없는 가장 큰 보배는 바로 가족이다. 14년 전에 재혼한, 누구보다 그를 가장 잘 이해하고 도와주는 아내 이혜정씨(48)와 엄마가 없던 때 아버지 곁에서 잘 자라준 세 딸들이야말로 그가 노르웨이에서 일궈낸 가장 큰 결실인 것이다. 큰딸 안자씨는 소아과 전문의로, 둘째딸 선자씨는 오슬로 시내에 있는 큰 식당의 요리사로, 그리고 막내 이리나씨는 기자로 활동중인데, 모두 동업자 남편을 두고 있다고 한다. “방송이 나가고 난 뒤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격려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칭찬과 격려를 곰곰 들여다보면 모두 ‘성공’이란 키워드로 모아지더군요. 하지만 저는 제가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꿈이 있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것뿐이지요.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고요.” 아직도 ‘노력중’이라는 이철호씨, 그는 분명 성공에 대한 정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한국땅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을 안고 돌아간다는 그의 모습에서 아직도 처음 노르웨이 땅에 발을 딛던 청년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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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르웨이 갔을 때 이분을 봤으면 좋았을텐데요... 공부를 하고 여행을 떠나야겠군요. 유전이 많이 나오는 나라, 부자나라 라고 들었습니다... 으음, 6월 이맘때쯤엔 "..백야..." 끝내줍니다. 밤12시에도 훤 합니다. 새벽3시에는 더 밝아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