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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력의 선생님!
불지종가佛之宗家 통도사通度寺 아래에서 십칠 년째 고등학교 교사의 길을 걷고 있다. 학교에서는 학생부장 소임을 맡고 있다. 아이들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교내 선도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수요일에는 통도사 일주문을 지나 무풍한송舞風寒松 길을 걸어 부처님 전에 절을 올리는 시간을 넣었다.
소년들을 데리고 통도사로 향했다. 학교에서 통도사까지 가는 것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이들이 통도사 대웅전 부처님 전에서도 이러면 어쩌나, 다른 신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배배 꼬여버린 소년들에게 부처님을 소개해주고 싶었다. 부처님 전까지 데리고만 가면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부처님을 만나 달라진 경험이 나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큰 재산을 안겨주고 싶었다.
작은 부처를 위해
과연 부처님이었다. 대웅전 안에서 학생들이 사라졌다. 교실에서 삐딱하게 앉아 선생님에게 반항하던 아이, 징계 기간에도 담배 피우다가 적발된 아이, 무풍한송 길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아이, 대웅전 들어서기 전까지 날 선 눈빛으로 원망하던 학생들은 더 이상 없었다. 포단 위에 신심 가득한 보살님들 따라 절하는 작은 부처들만이 있었다.
삼십 년 전 부처님을 만나고 다시 꿈을 찾은 나의 모습이 되살아났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못했다. 부처님의 가피로 십칠 년째 책상 유리 아래에 《반야심경般若心經》을 펼쳐놓고, 책꽂이에는 《금강경金剛經》을 두고 교사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기들을 만나면 뭐하며 지내냐고 묻는다. 고등학교 교사를 한다고 하면 이구동성으로 “니가아?” 하며 끝말을 길게 빼며 되묻는다.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포기했던 네가 어떻게 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다는 말이냐?’ 그런 뜻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못났던 내가 교사를 한다. 학생들에게 부처님을 소개하며 지낸다’고 말한다.
소년, 늪에 빠지다
1985년 3월 초 경상남도 진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진주는 연합고사 적용지구로 그 당시 입학시험 커트라인이 높았다. 서부 경남 각 중학교에 열심히 한다는 소년들은 다 모여들었다. 소년도 초등학교 입학 후 중학교까지 반장, 부반장 소임을 수행했다. 책임감 있게 임무를 행한다는 담임 선생님들 의견도 늘 성적표 한 부분을 차지했다. 동네 어른들도 소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높은 기대를 하는 편이었다.
1985년 3월 16일 토요일 10시 05분 2교시. 늪이 소년을 삼켰다. 이 지역에서 공부를 열심히 한 축들이 입학 후 친해진 시점이었다. 부푼 꿈을 안고 각지서 모인 소년들이 주말을 맞아 수업 시작 전 떠들고 있었다. 수업에 들어온 교사가 조용히 하라고 두세 차례 고함을 질렀다.
소년 뒤에 앉은 산청에서 온 소년이 불렀다. 소년이 돌아보았다. “고개 돌린 너, 나와.” 나가면서 최소 5대는 맞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엔 그랬다. 교사들이 체벌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학생은 자신이 왜 맞는지 이유조차 생각하지 않고 맞던 시절이었다. 소년의 뺨으로 교사의 손바닥이 날아 들었다. 1대, 2대 3대, 4대, 5대… 끝난 줄 알았다. 6대, 7대…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뺨이 부풀어 오를수록 자존감은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스무 대가 넘어가도 체벌은 끝날 줄을 몰랐다. 결국 58대까지 이어졌다. 소년의 꿈이 바닥으로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 있었다.
소년의 가슴에 품었던 꿈이 눈물이 되어 찐득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교실은 조용해졌다. 소년은 흘러내리는 것을 훔치며 자리로 돌아왔다. 아이들과 만난 지 2주일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른 소년들 앞에서 만신창이가 되었다. 부끄럽고 두려웠다. 소년의 머리를 부셔버릴 듯이 이어졌던 길고 긴 따귀 세례가 지나간 후 소년은 더 이상 이전의 소년이 아니었다.
소년의 꿈
소년은 서울대학교 축산학과에 입학해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국립 종축원에서 일하고 싶었다. 우리나라를 축산대국으로 만들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에는 소년의 또래가 없었다. 노파들을 따라 들로 산으로 가 나물을 캐거나 나무를 하러 갈 때 따라다니는 것이 놀이였다.
친구 중엔 닭도 있었다. 봄이면 병아리를 사서 길렀다. 어미닭이 부화하여 병아리를 관찰하는 것이 놀이였고, 취미였고, 공부였다. 가금家禽, 중소가축, 대가축에 관한 교과서를 구해 읽었다. 인근 농업고교생들이 보는 그것들이 소년에겐 동화책이었다. 농고 실습장을 방문하여 농고생들이 가축을 기르는 현장을 지켜보는 것이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도시인 진주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것도 서울대학교 축산학과 진학을 향한 여정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이 끊긴 것만 같았다. 자기의 잘못도 아닌데 무자비하게 내려치는 따귀를 맞고서 학교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깜깜하기만 했다.
학교에 있는 것이 두려웠다. 소년은 가방을 들고 교문을 나섰다. 찾아간 곳은 어릴 적 축산학도의 꿈을 키웠던 고향의 농고 실습장이었다. 실습장에서 여물을 되새김질 하고 있는 소, 어릴 적부터 그렇게 좋아했던 닭들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귓가를 맴도는 환청
학교로 돌아왔지만 의지할 데가 없었다. 위로도 치유도 없었다. 소년은 공부를 해야 할 이유도 찾지 못했고, 자신을 추스릴 의지도 잃었다. 그저 숨만 쉬는 상태가 된 것이다. 학교 주변에는 재수생과 삼수생들이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학원에 다니며 재수, 삼수 준비를 했는데 이미 머리가 큰 아이들은 청소년들이 노출되지 않아야 할 환경까지 아우르며 어른의 일탈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 중생들은 유흥비가 필요했다. 집에서 식비로 받는 돈은 다른 데 써버리고 학교에 와서 소년의 도시락으로 배를 채웠다.
쉬는 시간에는 자신들과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을 교실로 불러 도박을 했다. 그들의 기세에 눌린 소년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축구 도박에 소년들을 이용하기도 했다. 다른 반과 내기 축구를 하여 자기가 돈을 걸고 이기면 그 돈을 다 차지하며 소년들의 노력을 가로채기도 했고, 지는 날엔 상대편 반에게 돈을 주지 않는 수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소년들은 세면장으로 불러 린치를 가했다.
부모님 품을 떠나 청운의 꿈을 간직한 소년들이었다. 린치를 가하는 녀석들은 숫자가 늘 많았다. 이성과 합리를 아는 소년은 그들의 위세가 두려웠고, 울분을 느꼈다. 그런 날이면 자신의 뺨을 후려치던 58번의 소리가 환청이 되어 귓가를 때렸다. 학교 측에선 그런 사실을 몰랐다. 그 시절엔 학생들도 학교 측에 피해 사실을 신고하는 것도 몰랐다.
자율학습 참가 인원이, 다른 학교보다 서울대학교 입학생 숫자가 많은 것이 중요했다. 학교의 모순을 지켜보는 것도 고苦였다. 소년은 고해苦海가 된 학교가 점점 두려워졌다.
저 멀리 달아난 교과 진도 역시 두려웠다. 의미 없이 자율학습 머릿수를 채워야 하는 현실이 두려웠다. 야간에 교사들이 빠져나간 자리에 권력자로 군림하는 재수생, 삼수생이 두려웠다. 귓가를 맴도는 체벌의 환청이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그 소리는 소년이 어른이 되어 군대에 입대한 후에도 들려왔다. 병영생활을 하면서도 혹시 모를 운명의 손찌검을 당할까 노심초사했다. 그뿐이던가. 직장에 들어와서도 몇 년 동안은 새학기가 되면 으레 그 환청이 들려와 몸을 사려야 했다.
부처님, 늪을 말리다
학업을 포기한 지 1년 반, 소년의 키는 180센티미터까지 자랐다. 그런데 몸무게는 58킬로그램에 그쳤다. 말라버린 몸은 말라버린 소년의 심리 상태를 대변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두꺼운 수학 정석 참고서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을 때 소년은 숨이 멎는 순간을 궁리하고 또 궁리했다. 그 시간에 소년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부처님 전에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세상에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할 의지를 잃어버리고도 기쁜 사람이 있을까? 꿈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꿈을 가슴에 심고, 물 주고, 거름 주고 실하게 키웠던 사람이 더 큰 꿈을 꾸기 위해 노력했다가 가지가 부러진 채 뿌리마저 썩어가는 상황.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보충수업에 참석하지 않은 날, 새처럼 작은 체구의 어머니 뒤를 어깨도 펴지 못하고 고개 숙인 소년이 따르고 있었다. 말수를 잃은 소년의 얼굴은 바닥으로 추락한 성적, 고해로 변한 학교, 괴물과 같은 재수생, 삼수생들의 횡포로 인해 포기한 자의 비애만을 간직한 채 어머니를 따라 절을 향하고 있었다. 세상 만물이 자신을 외면하고 자신은 더 이상 가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운 나날을 보냈다.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들에 대한 원망, 세상에 대한 부정만이 가득했던 것이다.
어머니와 도착한 운흥사. 갈맷빛 산 위에 있는 하얀 바위가 소년을 보고 웃었다. 현실의 모든 것이 예리한 칼날로 변해 자신을 향하는 것 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고등학교 입학 후 꿈이 녹아 흘린 상처가 아물지 못하고 덧나고 고름이 나고, 늪에 빠진 팔과 다리는 지쳐 나올 의지를 상실한 소년을 바위가 지켜보고 있었다. 바위가 웃었다.
어머니는 법당에 들어온 소년에게 부처님 전에 삼배를 올리라고 했다. 소년은 절을 했다. 부처님도 소년을 향해 웃었다. 포단에 얼굴을 묻은 소년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두려움에 포위된 소년의 등이 들썩거리고 있었다. 58대의 환청이 울리고 있었다. 운명의 손찌검은 소년의 등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남들처럼 가방 들고 다니며, 도시락 먹고, 수학 정석, 성문종합영어를 들고 씨름해야 하는데 출발선에서 주저앉아버린 자신이 불쌍했다.
어머니도 포단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들의 잃어버린 고등학교 생활, 늪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팔과 다리, 생기를 잃은 아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어느 부모가 서럽지 않으리. 부처님을 만난 후 소년은 자신과 남과 세상을 향해 드러냈던 이빨을 감출 힘을 얻었다. 58대의 환청도 들리는 횟수가 줄었다. 무릎을 꿇고 눈물로 진주를 빚어 부처님 전에 올리는 어머니를 본 후 함께 입학한 동기들과 같은 날 교문을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 눈물은 진주가 되어
1988년 2월 13일 졸업장을 받았다. 어머니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대학조차 못 간 아들 졸업장이 그렇게 좋았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마라톤 출발선에 서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앞서 간 사람들이 일으킨 먼지를 뒤집어쓰고 엎어져 있었다. 부처님 전에 눈물로 기도를 하여 진주珍珠로 돌아온 아들의 졸업장이 대견하고 좋았던 것이다.
어머니도 당신 아들이 고등학교 입학 전까진 부처님을 몰랐다. 아들에게 환청이 생긴 이후 부처님을 만났다. 모자母子 모두 부처님을 만나 후유증을 벗어난 것이다. 세상 부모들은 남보다 앞서가는 자식을 기대할 것이다. 낙오자가 되고 포기자로 머무는 자식을 지켜보고 싶은 부모는 세상에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출발선에서 쓰러진 아들이 남들이 반환점을 돌 때에야 일어섰지만 포기하지 않고 결승선을 통과한 그 자체로 기뻤던 것이다. 우여곡절의 고교 졸업생이 교문을 나서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옴마, 내 다음에 이 학교 교생으로 꼭 올끼다.”
“그리 해라.” 어머니는 대답은 했지만, 아들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는 기색이었다. 소년에게 다른 꿈이 생긴 것이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꿈을 잃고 방황하며 어렵게 결승선을 통과한 경험을 살려 학생들에게 진정하게 도움을 주는 교사가 되고 싶은 꿈이 생겼다. 꿈이 무너진 곳에서 다른 꿈의 씨앗을 간직하고 온 것이다.
재수를 했다. 고3까지 묵혔던 머리를 쓰기 시작했다. 친구를 끊었다. 당구를 배우지 않았다. 여학생 반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1998년, 꼭 10년 만에 교문을 나오면서 어머니와 한 약속을 지켰다. 꿈을 잃어버린 곳에서 교사가 되겠다는 다른 꿈을 키운 끝에 다시 그곳으로 교생실습을 나갔다.
1999년 봄, 보습학원 강사를 하며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학원 가는 길에 절이 있었다. 산길로 가면 집과 학원 사이의 거리를 반으로 줄일 수 있고, 시간도 절약하여 공부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금 힘들더라도 산길을 오르내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절에 들렀다.
‘소생의 염원, 운명의 존재를 깨치기도 전에 맞아 비틀거렸던 경험을 바탕으로 내공을 길러 어린 영혼들의 손을 잡아주는 존재로 살고 싶습니다.’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미래의 학생들에게 자아를 긍정하고, 타인을 긍정하고, 삶을 긍정하고,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작은 성취를 쌓아가는 삶을 들려주는 교사가 되겠습니다.
원력의 선생님
나이 31세였다. 임용고시 합격을 장담할 수 없었다.
염원만은 용맹했고 독했다. 교사가 되어 행해야 할 목표만은 뚜렷했다. 어머니의 기도도 멈출 리가 있었겠는가.
그해 8월 현재 근무하는 학교에서 교사를 모집한다고 대학교로 연락이 왔다. 교사로 근무할 수 있다면 달나라라도 갈 원력을 세우고 있었던 나였다.
이력서를 제출하고 온 날 꿈에 성철 스님이 누더기 장삼을 걸치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17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 들었던 스님의 말씀은 또렷하게 들리는 것 같다.
"스님, 반갑심니더. 우짠 일로 우리 집에 다 오심니꺼? 그란데 지는 해인사 안 가봤심니더, 학원 가는 길에 조그만 절에서 선생 할끼라고 매일 절하고 있심니더."
"야! 이 노마아-야 부처님만 배우모 되지 해인사 꼭 와야 되나?"
삼천배를 해도 친견할 수 있을까 말까 한 성철 스님을 뵌 것이다. 성철 스님을 친견했는데 교사가 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내 기도는 간절함이자 희망이었다.
1999년 9월 13일 교단에 처음 선 날의 환희심은 17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교사가 된 후 해인사 성철 스님 부도탑을 찾았다.
비가 내리는 늦가을이었다. 부도탑 바닥에 빗물이 있었지만 어찌 신을 신고 올라 절을 할 수 있을까. 신을 벗고 단으로 올라가 성철 스님께 절을 올렸다. 양말에 빗물이 스며들고 무릎이 젖었다. 성철 스님께 굳게 다짐을 했다.
'선생 노릇 잘 하겠심니더.' 마음속으로 읊조리면서 절을 했다.
부처님의 가피로 불지종가 아래에서 교단에 서게 되었다. 초심이 흔들릴 때면 부처님 전에서 용맹하게 염원들을 실천하는 교사로 살고 있는지 자문해본다. 그리고 항상 기도한다.
'부처님 교사가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는 30년 전으로 돌아가 소년을 안고 볼을 쓸어주며 잘 견뎠노라고, 그 시절 겪은 아픔은 진짜 너의 길을 가기 위한 소중한 공부였다고 말하고 싶다.
- 대한불교조계종 제2회 신행수기 공모 당선작 <가피 - 부처님이 전하는 안부> 중에서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수행기 잘보앗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가슴이 찡하네요. 대단하십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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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뭉클합니다.
교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교사를 보는 눈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나무아미타불_()()()_
이런 교사들만 있다면 앞날이 더 밝겠지요. 또 우리 주위 곳곳에 계신 좋은 분들이 많을거여요. 화이팅을 외쳐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