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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다의 위기: "사망과 계약한 유다" (앤더슨 10장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활동을 중심으로 요약)
요약: 주의검을보내사
관련 성서 본문 : 이사야 1-11; 28-32, 미가 1-3; 6:1-8
역사적 배경 참조는 열왕기하 15:32-20:21(평행본문 대하 26032장 참조)
엘리야, 엘리사, 미가, 아모스, 호세아는 모두 분열 왕국 시대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예언자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남유다에서도 예언자들의 활동이 있었다. 아사랴, 하나니, 하나니의 아들 예후가 남유다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은 북이스라엘의 예언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도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를 앞서 있었다. 분열 왕국 시대에 대체로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보다 정치-경제- 군사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남유다는 지리적으로 고대의 주요 무역로들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구릉지대 안에서 비교적 고립되어 있었다.
반면에 북이스라엘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주요 대로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서 지정학적 위치상 가나안 지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북이스라엘이 가나안 인근 지역에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인정받고 있었을 때, 위대한 예언자들의 활동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북이스라엘에서 연이어 이루어졌다.
북이스라엘은 살인과 혁명으로 인해 영속적인 왕조가 확립되지 못했지만, 남유다는 예루살렘에서 다윗 왕조가 계속 왕위를 계승하였다. 북왕국은 상업 중심의 급격한 경제 변화를 경험하면서 사회 계층 간의 불균형이 심화되었지만, 남유다 왕국은 옛 지파 체제 중심의 단순한 사회에서 도시 중심의 발달된 경제 체제로의 이행이 비교적 순조로웠다. 이 과정에서 남유다는 놀라울 정도로 계층 간의 사회적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윗 왕조로 상징되는 남유다의 정치 사회적 안정성은 앞으로 이사야를 논의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 이러한 안정성은 하나님이 다윗과 특별한 계약을 맺으셨고, 다윗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왕위를 견고하게 세우기로 약속하셨다는 다윗 왕조 신학에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남유다에도 사회적인 악은 존재하였다. 남유다의 예언자들에 의하면 탐욕스러운 지주들은 소작농들의 토지를 강탈하였고,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등골을 뽑아 먹고, 명백한 사회적 부조리도 종교적 경건의 모양으로 포장되었다(사 1:10-17).
남유다에게 닥친 첫 번째 위기는 기원전 735년에 일어났다. 아람(시리아)과 북이스라엘의 군대가 남유다를 침략하여 반 아시리아 군사 동맹에 가담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기원전 733-732년에 디글랏빌레셀 3세가 아람(시리아)을 점령하고, 북이스라엘의 영토인 길르앗, 갈릴리, 샤론 평원까지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예언 활동 중 두 번째 중요한 정치적 사건은 디글랏빌레셀 3세의 후계자인 살만에셀 5세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포위했던 일이었다. 살만에셀 5세의 후계자인 사르곤 2세는 전임자의 정복 전쟁을 지속하여 사마리아를 멸망시키고(기원전 721년), 블레셋 도시 아스돗에서 일어난 또 다른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사야가 경험했던 세 번째 위기는 기원전 701년에 일어났다. 남유다는 아시리아를 배반하는 어리석은 정치적 결정을 하였고, 이에 아시리아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한 사건이었다(기원전 701년). 이 위기들을 경험하는 가운데 이사야는 북이스라엘의 쓰라린 경험에서 배웠듯이 반-아시리아 동맹은 "사망과 언약하는 것" 이라 주장하였다(사 28:15-18). 그러나 이사야의 메시지는 그가 정치 분석가로서 내린 결론이 아니었다. 그는 나라들의 복잡한 세력 다툼 속에서 이스라엘을 비롯한 모든 열방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활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언자 이사야의 임무는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는 당시의 정치적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무엇을 행하시는지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었다.
이사야는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는 행동을 했고(사20장), 그의 자녀들에게 상징적인 이름(스알야숩, 마헬살랄하스바스)을 지어 주기도 했다(사7:3; 8:3;18).
이 모든 것은 이사야의 예언을 확증하는 "징조" 가 되었다. 징조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이스라엘 신앙의 특징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신앙은 인간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역사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백성들과 함께" 계신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언자들의 상징적 행동이나 징조로 하나님의 활동이 "목격될 수 있다".
그러니 이사야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곤란한 사명을 받은 예언자였다(사6:9). 아하스 왕은 이사야의 예언적 권고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정치적 계산에 따라 행동하기로 이미 결정하였기 때문에, "나는 야웨를 시험하지 않겠나이다" (사 7:12) 라고 말하며 경건을 가장하여 아무 징조도 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시리아라는 "삭도"로 남유다의 털을 깎으실 것이다(사7:20). 이 징조는 아하스 왕에게 두 가지를 말해 준다. 첫째, 하나님이 아람-북이스라엘의 위협에서 남유다를 구해 주실 것이다. 둘째, 훨씬 더 큰 재난이 아시리아 제국으로부터 남유다에 올 것이다(사7:15-24).
이사야의 메시지는 믿음 없는 완고한 세대로부터 철저히 거부당하였다. 그의 예언은 '들리지 않는 귀'에, 그의 징조는 '볼 수 없는 눈'에 던져졌다. 그러나 듣거나 깨닫는 사람이 없더라도 이사야의 예언과 징조들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이사야는 하늘의 용사이자 왕이신 만군의 야웨가 모든 역사를 주관하고 계신다고 확신하였다. 아하스 왕이 결국 아시리아 제국에 가서 원조를 요청한 후에, 이사야는 예언자 공동체 내부로 들어가 자신의 예언을 듣지 않는 백성들에 대한 공적인 활동을 중단하였다. "증거의 말씀을 싸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마도 이사야와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 증거의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이 증거의 책에는 이사야의 초기 회고록뿐만 아니라, 다윗 가문에서 나올 평강의 왕과 새 시대에 대한 놀라운 약속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사야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임박한 위기를 앞두고 다시 공적인 예언 활동을 재개하였다. 아시리아 제국이 사마리아에 대해 최후의 일격(기원전 722-721)을 가하게 될 즈음에 이사야는 에브라임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 같음을 예언하였다. 북왕조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이사야서 곳곳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9:8-10:4은 가장 강력한 메시지로 손 꼽힌다. 하나님의 심판의 재앙이 백성들을 연달아 쳤지만, 그들은 준엄한 역사의 교훈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본문에는 하나님의 손이 여전히 그들을 칠 기세로 펼쳐져 있다는 후렴구가 반복된다.
"그럴지라도 야웨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사9:12, 17, 21; 10:4)
기원전 715년에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면서 남유다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종교를 개혁하고 아시리아와의 외교 관계에서 남유다의 입지를 강화하는 정책을 펼쳤다. 신명기 역사가들은 히스기야를 남유다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왕으로 극찬하며, 다윗 왕에 견줄 만큼 높이 평가하였다. 종교개혁은 히스기야의 업적 가운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특히 그는 지방의 성소들(산당들)을 제거하였다. 산당들은 가나안 민간 종교의 중심지였는데, 가나안 정착 시대부터 이스라엘 신앙을 위협하는 요소였다. 히스기야는 이 산당들과 그 안의 기구들을 제거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 성전까지 개혁하였다. 그는 백성들이 수세기 동안 숭상해 왔던 모세의 놋뱀을 파괴하고, 그것을 느후스단(놋조각)이라 불렀다(왕하 18:4; 민21:4-9).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남유다의 예배를 정화하고, 모든 종교 활동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집중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의 대담한 종교개혁은 나중에 요시야가 행하게 될 신명기 개혁 운동의 길을 예비했다. 아마도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이사야가 그의 침묵을 깨고 공적 예언 활동을 재개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사야가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다소 놀랍다.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 다른 종교적 쇄신 운동과 마찬가지로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었다. 히스기야는 아시리아 제국이 부과한 멍에에 대해 외교적으로 저항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선왕 아하스의 굴종적 외교정책은 백성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는데 조공을 바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내야 하는 사람들의 불만이 매우 컸다. 아하스의 굴종적 외교는 남유다의 종교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이나 구조를 아시리아 왕의 요구대로 변경해야 했었다.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분명히 아하스 왕 때 성전에 추가되거나 변경되었던 이방 종교적 요소들을 제거했을 것이고, 이것은 남유다의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하는 효과를 불러왔을 것이다. 이렇듯 그의 종교개혁은 사실상 히스기야가 아시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당시 아시리아 제국에 대한 저항 세력에 힘을 실어주는 정치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아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가 죽자 제국 전역에 반란의 물결이 파도쳤다. 강력한 군사력과 무자비한 억압 및 이주 정책으로 확장된 아시리아 제국이 산산조각 날 것처럼 보였다. 므로닥발라단으로 알려진 바벨론 왕국의 지도자 마르둑아팔이디나는 아시리아 전역에 반란의 불을 지
폈다. 그가 남유다에 사절단을 보냈던 이야기가 열왕기하 20장 12-19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사야는 남유다가 바벨론과 협력하는 것에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이사야 28-33장에 기록된 대부분의 예언들이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했던 것처럼 히스기야에게 반 아시리라 혁명에 가담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사야는 앗시리아가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의 날카로운 정치적 분석에 근거하여 이러한 권고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의 예언자로서 국제 정세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힘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심판을 막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 아시리아 세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러한 확신 속에 이사야는 히스기야 왕에게 반 아시리아 공모에 가담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호세아와 마찬가지로 이사야는 반 아시리아 동맹이 "사망과 계약을 맺는 것"이라고 말하며 강력하게 반대하였다(사 28: 15, 18).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계획과 희망을 완전히 무산시킬 " 비상하고 기이한 " 사역을 행하실 것이다. 따라서 이사야는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므로닥발라단과 비밀 협약을 맺은 것에 대해 규탄하였고 나중에 같은 목적으로 찾아 왔던 이집트의 사절단을 환대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이사야는 '병거의 심히 많음과 강함' 을 믿고 이집트에 도움을 청하러 간 사람들을 비난하였다(사 31:1-3).
이사야 37장(열왕기하 19장) 기록에 따르면, 산헤립이 보낸 랍사게의 침공으로 히스기야는 큰 절망에 빠졌다. 히스기야로부터 긴급한 소식을 전해 들은 이사야는 아시리아 왕의 오만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전하였다. 실제로 아시리아의 군대는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예루살렘 포위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기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이 사건은 야웨의 사자가 밤에 아시리아 진영에 들어가서 군사 185,000명을 살해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설명된다.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아시리아 본국 근처에서 더 위협적인 반란이 일어나 시간과 군사력을 작은 도시 예루살렘에 소비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 따라 퇴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은 남유다 사람들의 기억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나님이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예루살렘을 보호하실 것이라는 확신, 곧 시온은 영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일반 백성들에게 심어 주었다. 그러나 이사야가 이러한 구호에 동의할 리는 만무하다. 그의 메시지에도 선배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사1:19-20)
아시리아의 퇴각을 보며 승리를 자축하는 사람들의 방종한 모습을 보면서 이사야는 홀로 "내 딸 내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통곡하고 있었다(사 22:4).
기원전 8세기 말 산헤립의 침공(기원전 701년)이 있었던 혼란과 위기의 시대가 지난 후에 이사야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어떤 전승에 따르면 므낫세가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역행하며 패역의 정치를 펼쳤던 기간에 이사야가 순교를 당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다시 예언자 공동체 내부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예언 전승이 확장되도록 영감을 제공하고,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날을 인내로써 기다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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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 디테일한 성경 역사내용, 너무 좋습니다.
역사적인 배경이 곁들여지니 더 잘 알겠네요. 책이 두꺼워보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