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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년 상 만력 28년, 선조 33년(1600년)
1월 제독 이승훈(李承勳)이 요동(遼東)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왔다. 이내 호남으로 내려가 남원(南原)에 머물렀다가 영남으로 향하는데 접반사가 따라갔다.
○ 하지 배신(賀至陪臣) 한덕원(韓德遠)이 명 나라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유구국(琉球國) 중산왕(中山王) 상녕(尙寧)은 두터운 은혜로 보답하는 일로 우리 사자인 장사(長史) 정도(鄭道) 등을 명 나라 서울에 보내어 방물(方物)을 조공하고, “감히 토산물을 받들어 북경에 와 있는 귀국 사신에게 수교하여 변변치 못한 정성을 전합니다. 또 소속되어 있는 칠산도(七山島)에서 온 보고에 의하면 관백(關伯)이 26년 7월 6일에 죽었다 하오니, 귀국을 위하여 매우 다행한 일로 생각합니다.”라는 자문과 보내준 토하포(土夏布)ㆍ파초포(芭蕉布) 각 20필과 배초(排草) 20근을 보내 왔다. 《고사(攷事)》
○ 배신 이시언(李時彦)을 보내어 앞으로 의주(義州)에 남겨 놓은 쌀과 콩을 요동으로 도로 가져가지 못하게 하여 뜻하지 않은 일에 대비하도록 해 줄 것을 황제에게 아뢰었다. 《고사(攷事)》
○ 나막신이 처음으로 나왔다.
○ 이원익(李元翼)을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하였다. 이원익이 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가 영남 성주(星州)에 머물렀다.
2월 비로소 과거(科擧)를 복구하고 9일에 서울과 지방의 감시(監試) 초장(初場)을 정하였다. 전라 좌도의 시험장소는 광주(光州), 우도는 태인(泰仁)이었으나 얼마 안 되어 파방(罷榜)하였다.
○ 명 나라 조정에서 의주에 남겨 놓은 쌀 12만여 석을 하사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하므로 배신 정광적(鄭光績)을 보내어 사은하였다.
○ 난리를 치른 뒤로부터 염치와 도의가 상실되어 수령들은 한 없는 욕심을 더욱 부리니 백성들은 착취당하는 괴로움을 못 이겨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오히려 계사년과 갑오년보다 심하였다. 임금이 이 사실을 듣고 살아 남은 백성들을 염려하여 신하 다섯 사람을 불러 여러 도를 암행하게 하여 윤계선(尹繼先)에게 호서를 맡기고, 유숙(柳潚)에게 호남을 맡기었다. 유숙은 서울에 있을 적에 이미 들은 말이 있었으므로, 본도에 이르자 먼저 남원ㆍ장흥으로 들어가 관고(官庫)와 관청에서 문서를 수색하여 가혹한 정사를 적발하였다. 남원은 12건이었는데 그 중에서 사람을 결박하여 함정에 넣은 것이 으뜸가는 폐단이었다. 인하여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었더니, 명령을 내려 원신(元愼)과 이광악(李光岳)을 잡아다가 여러 해 동안 가두어두고 국문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사명(李思命)을 방어사(防禦使) 겸 남원 부사로 삼고, 안위(安衛)를 병사 겸 장흥 부사로 삼았다. 그때 곡성(谷城)을 폐하고 운봉(雲峯)은 남원에 합쳤다.
○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곽재우(郭再祐)가 돌아가겠다는 소를 올리고 진(鎭)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잡아다가 국문할 것을 명하니 곽재우가 말을 달려 서울에 올라와서 죄를 기다렸다. 드디어 의금부에 하옥(下獄)시키고 비방한 죄로 다스려 전라도 영암군(靈岩郡)으로 귀양을 보내었다. 그의 소에 이르기를,
“신의 지극히 어리석은 소견으로 오늘의 나라 형편을 보건대 위태롭기 그지없습니다. 종묘와 사직은 흩어져 연기가 되고 없어져 차가운 재가 되었으며, 백성은 죽고 없어져 열에 한둘도 없으니, 이런 때를 당하여 중흥의 업을 세우기는 역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적의 괴수 수길(秀吉)이 죄악이 가득 차서 하루아침에 죽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우리 나라를 도와서 전하로 하여금 중흥을 이룩하게 한 것이고, 중국에서는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왜놈을 쫓아버렸으며 왜놈들이 바다를 건너간 뒤에도 아직 군사를 주둔하여 멀리 와서 지켜주는 것은 성천자(聖天子)께서 우리 나라를 진념하여 전하로 하여금 중흥을 이룩하게 한 것이니, 전하께서는 참으로 뉘우치고 깨닫고 분발하여 어진 이를 친근히 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 하여 중흥을 꾀하여야 하오며, 여러 신하들도 또한 마땅히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다하여 함께 나라를 구제하여 중흥에 협력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조정에는 동서남북의 당파가 있다 하오니, 만약 과연 그렇다면 잘은 모르겠지만 전하께서는 어느 당을 군자라 하고 어느 당을 소인이라 하겠습니까. 어느 당에 군자가 많고 소인이 적고, 어느 당에 소인이 많고 군자가 적다고 하겠습니까. 친근히 하여 맡기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 어느 어진 이에게 있으며, 멀리하여 버리더라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어느 간신에게 있습니까. 전하께서 어찌 어진 이를 친근히 하고자 하지 않으시리오만 그 어진이를 확실히 알 수 없어서입니까. 전하께서 어찌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고자 하지 않으시리오만 그 간사한 이를 확실히 알 수 없어서입니까. 대소 신료들이 당파로 갈려서 들어온 자는 가까이하고, 나간 자는 배척하여 각각 사사로운 패거리를 지어 서로 시비하고 날로 헐뜯기를 일삼으며, 국세의 위급과 민생의 이해와 사직의 존망이 달려 있는 일에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으니, 장차 전하의 나라로 하여금 반드시 위망(危亡)의 지경에 이르게 하고야 말 것입니다. 아! 통곡하고 눈물 흘리며 긴 한숨을 쉬어야 할 노릇이라 하겠습니다. 그 통곡하고 눈물 흘리고, 긴 한숨을 쉬어야 할 일의 한 두 가지를 신이 피력하고, 신이 물러가야 될 것도 감히 상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들으니, 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성지(城池)는 믿을 것이 못 된다. 성지를 지키는 것은 예전 도적에게는 적당할는지 모르나 지금의 도적에게는 적당하지 않으니, 백성의 마음을 거슬려 가며 성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오직 형세를 보고 힘을 헤아려서 싸우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면서 적을 섬멸하는 것이 지난날의 일을 징계삼아 눈앞의 화에 대비하는 일이다.’ 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만약에 성지가 적을 방어하는 데 무익하다면 맹자(孟子)는 어찌하여, “못을 파고 성을 쌓으라.” 했겠으며, 한유(韓愈)는 왜, “서로 빼앗을 때는 성곽과 갑병을 만들어 지킨다.” 하였습니까. 안시성(安市城)을 지켰기 때문에 고구려는 망하지 않았으며, 즉묵성(卽墨城)이 홀로 보전되었으므로 제 나라가 다시 일어났는데, 성지의 수비를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지금 수군에만 전력하고 성을 지키는 일을 내버리자 하고, 조정(朝廷)에서 낸 계책이니 다시 의논하기를 용납하지 않는다 하니, 이것은 자사(子思)가 이른바, ‘공경대부(公卿大夫)가 말을 내놓고 스스로 옳다 하므로 사서인(士庶人)은 감히 그 그릇됨을 바로잡지 못한다.’는 것과 비슷한 일입니다. 대저 수군이 저 왜적에 대하여 유리한 점은, 배 밖은 모두 다 사지(死地)이니 군졸이 도망칠 수가 없고, 도망쳐 흩어질 수가 없으니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싸우기 때문에 왕왕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군은 진실로 폐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수군에만 전력하면서, ‘적을 막아 육지에 내리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신은 진실로 믿지 않습니다. 육지에 내린 뒤에는 장차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곳곳에서 패하여 달아날 것이 임진년 때와 다름 없을 것입니다. 신은 그것을 적이 걱정합니다. 걱정해 보았자 나라에 유익함이 없으니, 이것이 신이 물러가야 할 까닭의 첫째입니다.
신은 들으니, 논하는 자의 말이, ‘옛날 송(宋) 나라가 망한 것은 화친하자는 의논이 그르친 것이다. 그때에 화의를 주장한 자는 진회(秦檜)ㆍ왕윤(王倫)의 무리이다. 그 죄가 하늘에 사무쳤으니 천 년을 내려오면서 누군들 그의 머리털을 뽑아 수죄하며 죽이려 하지 않겠는가. 화의로써 송 나라를 그르치지 않고 종택(宗澤)ㆍ악비(岳飛)의 무리가 그 마음과 힘을 펼 수 있었던들 송 나라의 융성은 날짜를 정해 놓고 기다렸을 것이다. 오직 화의가 잘못임을 끝까지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요금(遼金)에게 멸망당하였으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지금의 왜적은 곧 송 나라의 요금이니 화친할 수 없음은 결정적이다. 종묘 사직이 망할지언정 이 적과는 화친할 수 없으며, 백성이 다 죽을지언정 이 적과는 화친할 수 없다. 이 적은 우리 나라 백대의 큰 원수이니 화의를 말하는 자는 곧 송 나라의 진회이다.’ 합니다 이것은 당당한 정론이라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병법에 이르기를, ‘병(兵)이란 속임수다. 능하면서도 능하지 못한 것같이 보이고, 쓰려면서도 쓰지 않을 것같이 보이며, 가까운 것을 먼 것처럼 보이고, 먼 것을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하였고, 제갈양(諸葛亮)이 말하기를, ‘전쟁은 속임수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서로 승패를 다투고 존망을 결단하는 판에 어찌 계획적으로 속이는 꾀를 수치로 삼고, 한결같이 바르고 곧은 길만을 갈 수 있겠습니까. 정백(鄭伯)은 웃도리를 벗어 살을 드러내고 양을 몰며 초 장왕(楚莊王)을 맞이하였으므로 마침내 그 나라를 보전하였고, 구천(句踐)은 회계(會稽)에서 욕을 당할 때 남자는 적국의 신하가 되고, 여자는 적왕의 첩이 되기를 청하여 마침내 패업을 이룩하였습니다.그러나 때에 알맞는 권모(權謀)는 진실로 버릴 수 없는 것인 동시에 남에게 굽히지 못하는 것은 필부(匹夫)의 용기입니다. 무릇 화친이라는 용어는 동일하지만 화친을 하는 목적은 같지 않습니다. 화친만 믿고 준비를 하지 않는 자는 망하고, 화친을 말하면서 자기 할 일을 다하는 자는 보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송 나라가 화친으로 망한 것은 그 화친을 과신했기 때문입니다. 그 화친을 과신하지 않았다면 왜 망했겠습니까. 적국을 얽매어 두는 것은 화친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분을 참고 화를 늦추는 것도 화친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적을 게으르게 만들고 적을 잘못되게 만드는 것도 화친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군사를 쉬게 하고 백성을 안식케 하는 것도 화친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화친이란 병가의 속임수로서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을 버린다면 교주고슬(膠柱鼓瑟)의 격이 될 뿐입니다. 안으로는 화친하지 않을 마음을 굳히고 겉으로는 화친하려는 말을 내는 것이 무엇이 의리에 불가합니까. 더욱이 요금(遼金)은 송 나라와 육지가 이어 있었으나 이 왜적은 바다를 사이로 하고 있으며, 송 나라는 큰 구원이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명 나라의 구원이 있으니, 그 상황이 같지 않습니다. 저 왜적이 화친을 구하거든 곧 응하면서, ‘황제의 조정에서 화친을 허락하는 것을 우리가 어찌 감히 화친하지 않으며, 황제의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는 것을 우리가 어찌 감히 화친하겠는가.’ 하고, 전쟁 중에도 사신의 왕래는 있는 것이니 그 사신을 억류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들으니, 왜의 사신이 구금을 당하고 화친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하오니, 신이 적이 염려되는 것은 강적의 원망을 도발하여 위태로운 화를 부를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하를 위하여 말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으니, 신은 그 점이 몹시 슬픕니다. 슬퍼하여도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하니, 이것이 신이 물러가야 할 까닭의 둘째입니다. 신은 들으니, ‘집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를 생각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재상을 생각한다.’ 합니다. 집이 비록 가난하나 아내가 진실로 어질면 가난을 부자로 만들고, 나라가 비록 어지러우나 재상이 참으로 어질면 난국을 태평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에서의 어진 아내와 나라에서의 어진 재상이 그 관계되는 바가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하(夏) 나라의 소강(少康)은 1성(成)의 토지와 1여(旅)의 군사밖에 없었으니, 중원을 회복하는 것은 하늘을 오르기와 같았는데, 한 사람의 구신(舊臣)으로 인하여 두 나라의 망한 나머지를 능히 수습해서 우(禹) 임금의 옛 업을 계승했고, 한 나라의 소열(昭烈)은 비록 황실의 자손이라고 일컬었지만 근거(根據)할 땅이 없고 부릴 백성이 없어서 한 나라의 황실을 복구하기란 아득한 일이었는데 제갈양(諸葛亮) 한 사람을 얻어 능히 정족(鼎足)의 형세를 이루어 한 나라의 사직을 연장하였던 것이니,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 현량한 재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망이 없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지난번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삼으신 것을 온 국민들은 모두 전하께서 인재를 얻으셨다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승을 삼은 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그의 직임을 체직시키시니 신은 실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어진 재상이 이런 때에 용납되지 못함을 속으로 한탄합니다. 이 아무개의 재능이 국민의 소망에 부응될지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이전에 신이 체찰사로 있으면서 그의 언론을 듣고 그의 시책을 보니,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우러나오고, 공평하고 청렴하고 삼가는 행동이 천성에서 온 것입니다. 어리석은 생각으로 헤아리건대, 그는 참으로 나라 일이라면 태연히 죽음에 나갈 수 있는 사직의 신하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를 신임하지도 친근히 하지도 아니하여 그로 하여금 조정에 편안히 있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이(李) 모의 진퇴의 의(義)는 옛사람에 부끄러울 것이 없겠으나 장차 나라 일을 어떻게 합니까? 신은 적이 고민하였으나 그 고민이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물러나야 할 까닭의 셋째입니다. 신은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어 세상 사람과 사귀기를 끊고, 변란 전에는 강 언덕에 초가를 짓고 꽃 피는 아침과 달뜨는 저녁에 물고기와 새를 상대로 스스로 즐기면서 매번
삼공(三公)과도 이 강산은 바꾸지 않겠다 / 三公不換此江山
는 시구를 읊었습니다. 불행히도 난리를 만나서 모옥(茅屋)과 솔과 국화는 모두 재가 되고 낚시터는 풀밭에 덮여 버렸으니 꿈에도 못 잊어서 매양 한숨이 저절로 나옵니다.
늘 생각하기를 적이 바다를 건너가기만 하면 강호로 돌아가 여생을 마치리라 생각하였는데, 외람되이 전하의 은혜를 입어 중임을 받고, 뒤이어 선대추증(先代追贈)의 직첩(職帖)을 내리시어 그 영광이 저승에까지 미쳤으니 감격한 나머지 스스로 눈물을 닦을 따름입니다. 제 소원은 변성(邊城)을 지켜 물방울이나 티끌 만한 보답이라도 하고자 하였으나, 그 어리석은 계획이 허사가 되니, 다시 할 일이 없고,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다가 적이 오면 물러나야 하니, 신은 실로 부끄럽게 여깁니다. 더구나 신은 평소에 담질(痰疾)을 앓고 또 심열(心熱)이 있어 가래가 가슴을 메워 밤낮으로 헐떡이고 있습니다. 심열이 더욱 심해지고 현기증이 겹쳐 앞뒤를 잊어버릴 형편이니 결코 임무를 살피기 어렵습니다. 그저 자리나 지키고 헛 녹만 받아먹다가 장차 일을 망치고 나라를 욕되게 하기보다는 차라리 강호에 물러나 용맹한 장수를 양성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적이 물러가고 무사할 때에는 신이 비록 강호로 물러가지만, 만약 변란이 급할 때에는 신은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사졸의 앞장에 설 것이며, 절대로 목숨을 아끼고 구차스럽게 살아 남아 전하를 저버리지는 않겠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을 어부로 보시어, 벼슬로써 얽매거나 직책으로 묶어 놓지 마시고 강호 사이에서 한가로이 지내도록 맡겨 주시옵소서.
강호의 한낱 어부가 비록 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지만, 당파를 만들어 자기 편을 옳다 하고 남을 그르다 하며, 나라의 존망을 잊어버리고 다만 제 몸만을 생각하는 자와는 역시 다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굽어 살피소서. 신은 떨리고 두려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하였다. 곽재우는 영암(靈岩)에서 1년 동안 귀양살이하다가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로부터 길이 인간사를 끊어버리고 곡식을 먹지 않고 도인(導引)을 행하였다. 여러 번 함경도와 전라도의 감사로 임명되었으나 한결같이 사절하면서 말하기를, “방장산(方丈山)의 솔잎이 푸릇푸릇 다함이 없으니, 만 번 죽어 마땅한 신이 이것으로써 여생을 마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그 뒤 임인ㆍ무신년 사이에 과감히 나라 일로 여러 번 소를 올렸으며, 왕명으로 불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혹은 방장산에, 혹은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10여 년 동안을 한 알의 쌀도 먹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시 억지로 권하면 잠깐 수저를 대었다가 곧 귀와 코로 토해 버렸다. 만력(萬曆) 45년(1617, 광해군 9) 정사년 6월에 객과 더불어 강가의 정자에서 시를 읊으며 놀다가 대낮에 고래를 탔다[騎鯨]. 이 전후의 일들은 진실로 근거 없는 허황한 전설이 아니니, 후인들은 모름지기 우러러 그것을 믿고 허황하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 병옹(病翁)도 역시 의를 사모하는 무리라 감히 존경하는 뜻을 졸렬한 시구로 표현한다.
승전을 아뢰어 신하의 절개 바치고 / 奏捷輸臣節
소를 올리어 충성을 다했네 / 封疏盡巳忠
마침내 유후의 뒤를 따르니 / 終隨留侯跡
당대의 으뜸가는 영웅이로다 / 當世一英雄
○ 한효순(韓孝純)이 갈리고 이홍광(李弘光)이 전라 감사가 되었다.
4월 대마도(對馬島)의 왜구 평의지(平義智)가 귤지정(橘智正) 등을 보내어 포로된 남녀 3백여 명을 돌려보내달라고 하며, 화친하고 통상(通商)하기를 애걸하므로 배신 유근(柳根)을 명 나라에 보내어 사유를 아뢰고, 아울러 예부ㆍ병부ㆍ군문 등 아문에 자문(咨文)을 보냈다. 《고사(攷事)》 또 동래(東萊) 사람 박희근(朴希根)을 뽑아서 예조(禮曹)의 공문을 가지고 대마도에 갔다 오게 하였다.
5월 경리(經理) 만세덕(萬世德)이 본국에 소장을 올려 왜란이 이미 끝났으니 대군을 철수하겠다고 청하였다. 《고사(攷事)》
○ 배신 신경진(辛慶晉)을 보내어 앞으로 주둔군을 다 철수하면 남병(南兵) 3천을 머무르게 하고 아울러 그들에게 월급을 주어 남쪽 변방을 지키게 하여 달라고 황제에 주청하였더니, 황제는 중병(重兵)을 주둔시켜 뒷처리를 잘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명령하였다.
○ 배신 민몽룡(閔夢龍)을 보내어 표를 올려 사은하였다. 《고사(攷事)》
○ 왜인 귤지정(橘智正) 등이 또 와서 화의하자고 협박하고 명 나라 군사의 유무를 정탐하였다. 군문(軍門) 만세덕에게 그때 서울에 있었다. 자문을 보내어 위관(委官)을 파견하여 엄한 말로 타이를 것을 청하였다. 이상은 《고사(攷事)》에서 나옴. 이때, 일본으로 잡혀 갔던 사람들이 잇따라 석방되어 돌아왔다. 전 좌랑(佐郞) 강항(姜沆)전라도 영광(靈光) 사람으로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랑에 이르렀으며, 정유년 난리에 온 집안이 잡혀 갔다. 도 일본으로부터 전 가족이 바다를 건너 돌아왔는데, 따라온 선비가 10여 명 있었다. 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일일이 적어서 아뢰니,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제왕 천자는 곧 왜의 황제인데, 머리를 깎지 않고 당(堂)에서 내려가지 않으며, 보름날 전에는 소식(素食)을 하고 보름날 뒤에는 생선을 먹습니다. 전세(前世)에는 위복(威福)이 그로부터 나오고 다만 섭정(攝政)ㆍ관백(關伯), 대납언(大納言) 등의 벼슬을 두어 임금의 일을 돕더니, 중세(中世) 이후에는 섭정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여 이른바 천황은 그 호령이 왕성(王城) 밖에 나가지 못하며, 봉행(奉行) 한 사람을 두어 왕성의 안팎을 보살피게 합니다. 수길(秀吉)이 정치를 할 때에는 덕선원현이(德善院玄以)라는 자가 왕경 봉행(王京奉行)이 되었습니다. 봉행이라는 것은 전수(典守)하는 관직의 칭호이다.
○ 백관(白官)에는 섭정전하(攝政殿下)ㆍ관백전하(關白殿下)ㆍ장군 막부(將軍幕府)ㆍ대납언(大納言)ㆍ육부(六部) 등의 이름이 있습니다.
○ 8도(道) 66주(州)가 있습니다. 산성(山城) 일명 옹심(雍尋)이라고도 하고 성주(城州)라고도 한다. 은 8군(郡)을 관할합니다. 왕경(王京)과 적의 괴수가 쌓은 복견(伏見) 새 서울은 태화(太和)화주(和州) 에 있는데 15군(郡)을 관할하는 왜의 남도(南都)입니다. 왜왕(倭王)이 여기를 옛 도읍으로 하여 화국(和國)이라 이름하였고, 또한 야마대(野馬臺)라고도 불렀는데, 야마대는 양(梁) 나라 무제(武帝)가 명명한 것입니다. 왜인이 경박하기가 야마(野馬)와 같으므로 그의 수도를 이렇게 이름 지어준 것입니다. 왜인들이 지금도 태화(太和)를 일컬어 야마대라 하고, 4백 80사찰이 있는데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증전위문정(增田衛門正)이라는 봉행(奉行)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는데 땅이 기름지고 쌀이 매우 하얗습니다. 하내(河內)하주(河州) 는 15군(郡)을 관할하며, 수길(秀吉)의 여러 작은 장수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화천(和泉) 천주(泉州) 은 3군을, 섭진(攝津)섭주(攝州) 은 13군을 관할하고 있습니다. 왜의 서경(西京)은 대판(大坂)입니다. 이상의 기내(畿內)의 다섯 나라는 모두 관백(關白)에게 소속되어 있다.이하(伊賀) 이주(伊州) 는 4군을, 이세(伊勢)세주(勢州) 는 15군을 관할하는데 백금(白金)이 그 지방에서 납니다. 지마(志摩) 지주(志州) 는 2군을, 미장(尾張) 미주(尾州) 은 8군을, 삼하(參河) 삼주(參州) 는 8군을, 원강(遠江)원주(遠州) 은 14군을, 준하(駿河) 준심(駿尋) 는 7군을 관할합니다. 이곳에 부사산(富士山)이 있습니다. 그 모양이 항아리를 엎어 놓은 것 같고, 산꼭대기에 큰 구덩이가 있는데 그 깊이는 밑바닥을 모르며, 따뜻한 기운이 그 밑에서 바로 위로 올라와 구름 안개 같습니다. 올라가 구경하는 사람은 반드시 열흘 동안을 재계(齋戒)하고야 올라가는데, 그렇게 삼가지 않으면 으레 실족하여 떨어져 죽는 화를 당하며, 6월에도 항상 눈이 있습니다. 이두(伊豆) 두주(豆州) 는 3군을 관할하고, 내부 가강(內府家康)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갑비(甲斐) 갑주(甲州) 는 4군을 관할하고, 도류 천야탄정(都留淺野彈正) 및 그의 아들 좌경대부(左京大夫)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상모(相模) 상주(相州) 는 9군을 관할하는데, 왜나라에서 이름난 고을로서 내부 가강(內府家康)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무장(武藏) 무주(武州) 은 21군을 관할하고 가강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안방(安房) 방주(房州) 은 4군을 관할하는데 가강 및 이견씨(里見氏)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상총(上總) 총주(總州) 은 11군을 관할하는데 가강이, 하총(下總) 총주(總州) 은 12군을 관할하는데 가강이, 상륙(常陸)상주(常州) 은 11군을 관할하는데 좌죽(佐竹)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동해도(東海道)의 15국이다. 근강(近江) 강주(江州) 은 13군을, 미농(美濃) 농주(濃州) 은 13군을, 비탄(飛彈) 탄주(彈州) 은 4군을 관할(管轄)하는데 황금(黃金)이 이 지방에서 납니다. 신농(信濃) 신주(信州) 은 10군을 관할하며 명마(名馬)가 이 지방에서 납니다. 상야(上野) 야주(野州) 는 14군을, 하야(下野) 야주(野州) 는 9군을 관할하며 가강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육오(陸奧)오주(奧州) 는 54군을 관할하는데, 땅이 하이(蝦蛦) 에 접했고 한없이 넓습니다. 하이란 곧 우리 나라의 야인(野人)의 땅으로 그 고장에서는 문어.ㆍ초피(貂皮)가 많이 납니다. 왜놈들이 항상 말하기를, “오주(奧州)에서 곧바로 조선에 건너가면 동북도(東北道)에서 아주 가깝지만 북해의 풍랑이 높아서 아마도 감히 건너지 못한다.” 합니다. 출우(出羽) 우주(羽州) 는 13군을 관할합니다. 이상은 동산도(東山道)의 8국이다.약협(若狹) 약주(若州) 은 3군을, 월전(越前) 월주(越州) 은 12군을 관할하는데, 전 관백 신장(信長)의 아들 신웅(信雄)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월중(越中) 월주(越州) 은 4군을, 월후(越後)는 7군을 관할합니다. 능등(能登)능주(能州) 은 4군을 관할하는데 전전비전수(前田肥前守)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좌도(佐渡) 좌주(佐州) 는 3군을 관할하고 월후 납언 경승(越後納言景勝)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북륙도(北陸道)의 6국이다. 단파(丹波) 단주(丹州) 는 6군을 관할하고, 덕선원현이(德善院玄以)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단후(丹後) 단주(丹州) 는 5군을, 단마(但馬) 단주(但州) 는 8군을, 인번(因幡) 인주(因州) 은 7군을, 백기(伯耆) 백주(伯州) 는 6군을 관할하는데 안예 중납언 휘원(安藝中納言輝元)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출운(出雲) 운주(雲州) 은 5군을 관할합니다. 이상은 산음도(山陰道)에 딸린 8국이다.파마(播摩) 파주(播州) 는 14군을, 미작(美作) 작주(作州) 은 7군을 관할하는데 휘원(輝元)과 수가(秀家)가 나누어 차지하고 있습니다. 비전(備前) 비주(備州) 은 11군을 관할하는데 수가(秀家)가 차지하고 있으며, 비중(備中) 비주 은 9군을 관할하는데 수가가 차지하고 있고, 비후(備後)는 14군을 관할하는데 휘원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안예(安藝) 예주(藝州) 는 8군을, 주방(周防)방주(房州) 은 6군을, 장문(長門)장주(長州) 은 6군을 관할(管轄) 하는데 모두 휘원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상은 산양도(山陽島)의 8국이다.기이(紀伊) 기주(紀州) 는 7군을, 담로(淡路) 담주(淡州) 는 4군을 관할하는데, 왜인들이 말하기를, “왜의 시조가 이 섬에 내려왔으므로, ‘나라의 어머니’라고 한다.” 합니다.
아파(阿波) 파주(波州) 는 9군을, 찬기(讚岐) 찬주(讚州) 는 10군을, 이예(伊豫) 예주(豫州) 는 14군을, 토좌(土佐) 토주(土州) 는 7군을 관할합니다. 이상은 남해도(南海道)의 6국이다.축전(筑前) 축주(筑州) 은 10군을, 축후(筑後) 축주 는 10군을 관할하는데 금오(金吾)가 차지하고, 풍전(豐前) 풍주 은 8군을 관할(管轄)하는데 일기수(一岐守)가 차지하고, 풍후(豐後) 풍주 는 8군을, 비전(備前) 비주(肥州) 은 11군을 관할합니다. 중국 배와 유구(琉球)ㆍ남만(南蠻)ㆍ여송(呂宋) 등의 상선의 왕래가 그치지 않습니다. 당진(唐津)ㆍ명호옥(名護屋) 등지는 사택 지마수 정성(寺澤志摩守政成)이 차지하고 있으며, 그는 수로 봉행(水路奉行)이 되어 우리 나라 사람의 왕래ㆍ접대를 주관합니다. 비후(肥後)는 14군을 관할하는데 가등 주계 청정(加藤主計淸正) 호개(虎介)라고도 한다. 과 소서 섭진 수행장(小西攝津守行長)이 갈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일향(日向) 향주(向州) 은 5군을 관할하는데 도진 병고두 의홍(島津兵庫頭義弘)이 차지하고 있고, 대우(大隅) 우주(隅州) 는 8군을 관할하는데 의홍(義弘)이 차지하고 있으며, 살마(薩摩) 살주(薩州) 는 14군을 관할하는데 의홍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상점의 반 이상이 중국 사람의 것으로서 중국 배와 남만(南蠻) 배가 와서 정박하지 않는 날이 없습니다. 이상은 서해도(西海道)의 9국이다. 일기(壹岐) 일주(一州) 는 2군을, 대마도(對馬島)대주(對州) 도 2군을 관할하는데 우시대마수의지(羽柴對馬守義智)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시는 수길(秀吉)의 본성인데, 수길이 의지(義智)를 우리 나라에 쳐들어올 때 앞잡이로 삼았기 때문에 그의 성을 내려주어 그의 공로를 표창한 것입니다. 평조신(平調信)은 의지의 가노(家老 문중의 어른)인데, 왜인들은 그를 양천 하야수(楊川下野守)라 일컫고, 온 섬의 살고 지키는 일을 주관합니다. 현소(玄蘇)는 의지의 모주(謀主)인 중인데 왜인들이 안국사서당(安國寺書堂) 왜승의 벼슬 이름. 이라 일컬으며, 우리 나라와의 문서에 관한 일들을 맡아보고 그가 사는 고을은 방진(芳津)이라 부릅니다. 산형과 지세는 비록 좋으나 왜의 성곽과 절대 서로 같지 않으며, 큰 산 아래 바다 어귀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높은 성과 깊은 못이 없어도 족히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쪽으로는 일기(一岐)와 격해 있는데 풍랑이 매우 나쁘고, 서쪽으로는 풍기(豐崎)와 서로 격해 있는데 뭍으로 가면 이틀, 배로는 순풍을 만나면 하룻길입니다. 풍기에서 서쪽으로 우리 나라 해면(海面)과의 거리는 배가 바람을 타면 겨우 반나절 밖에 안 걸립니다. 그 산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으며, 그 땅은 모래 자갈밭으로서 논은 한 이랑도 없습니다. 채소나 보리는 모두 모래와 돌 위에 심는데 자라도 두어 치도 못 되므로 평시에는 다만 우리 나라와 통상하여 생계를 유지합니다. 묵각(墨角)ㆍ호초(胡椒) 따위가 남만(南蠻)에서 나오며, 달피(獺皮)ㆍ호피(狐皮) 따위는 왜국에서는 쓸 데가 없으므로 이놈들이 오랑캐들에게서 헐값으로 사서 우리 나라에 비싼 값으로 팝니다. 사라(紗羅)ㆍ능단(綾段)ㆍ계포(罽布)ㆍ금은 등은 그 나라에서 소중히 여기는 것이므로 우리 나라에 전매(轉賣)하지 못합니다. 그 이른바 왜사(倭使)라는 자는 모두 도주(島主)의 부하로서 도주가 보낸 자이며, 갑오년 왜사 소서 비탄수(小西飛彈守)라는 자도 역시 행장의 부하로서 행장이 보낸 자였습니다. 그곳 여자들은 우리 나라의 옷을 많이 입으며, 남자들은 거의 다 우리 나라 말을 압니다. 왜국을 일컬어 반드시 일본이라 하고 우리 나라는 꼭 조선이라고 부르며 일찍부터 오로지 일본 사람이라 자처하지 않습니다. 평시에는 우리 나라에서 이익을 보는 자가 많고 일본에서 덕을 보는 자는 적으므로, 장수 왜놈과 졸개 왜놈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의 환심을 사는 것이 일본에 붙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항상 길이 멀고 풍랑이 험하다는 것으로 본토 깊이 들어앉아 있는 왜에게 고하였던 것입니다. 수길이 66주(州)를 삼키게 되자 의지(義智)는 일본을 멀리한 죄가 두려워 드디어 우리 나라를 팔고 수길에게 아첨하여 앞잡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수길이 축전(筑前) 박다(博多)의 1만 5천 석의 땅을 떼어 주고 그 공을 표창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대마도의 장수 왜놈은 비로소 제 땅의 밥을 먹었고, 그 이전에는 오직 우리 나라에서 내려준 쌀을 먹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의지가 왜의 서울에 있을 때는 아직 거처할 집이 없어 시루(市樓) 근처에 있는 그의 장인 행장의 집을 얻어 잠시 셋방살이를 하고, 여러 왜장들의 축에 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대개 본토의 왜는 날래고 독하기는 하지만 우리 나라와의 일에 있어서 교묘한 속임수는 쓰지 못하였으며, 또 동서(東西)를 알지 못하여 8년 동안을 교전하면서도 우리 나라 변방 장수의 이름도 모르며, 대마도의 왜는 날래고 독한 점은 부족하나 교묘한 속임수가 백출하여 우리의 일에 있어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평소부터 섬안의 영리한 사내 아이들을 골라서 우리 나라 말을 가르치고 또 우리 나라의 문서ㆍ편지 등의 억양과 곡절을 가르쳐서 비록 안식이 밝은 사람도 얼른 그것이 왜인의 글이라는 것을 변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리 나라에 틈이 없을 때에는 전적으로 와서 붙고, 왜놈이 성하고 강할 때에는 우리 나라를 팔고 농간질을 하여 길잡이를 자청하니, 그 흉악한 꾀와 속임수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변장의 어루만져 다스림이 간혹 정도를 벗어났을 때는 반드시 이놈들의 속임수를 당하게 되니, 어루만져서 얽매어 두는 계책을 조만간 실시하면 북도의 야인을 평안히 살 수 있게 한 전례에 따라, 감사나 병사가 그들이 오는 시기를 미리 알아서 부산ㆍ동래에 모아서 기다리게 하는 것이 좋고, 서울까지 끌어들여 번거롭게 하거나 서울의 허실을 알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며, 북도의 야인에게 상을 내린 전례에 따라 간단한 토산물(土産物)로써 그 방물(方物)에 응하면 될 것이요, 영남의 전세(田稅)를 날라다 도적에게 싸주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지고 있는 묵각ㆍ단목ㆍ후추ㆍ유황ㆍ호피ㆍ수달피 등은 감사나 병사가 부산 태수(釜山太守)에게 단단히 타일러서 그 상ㆍ중ㆍ하에 따라 물건 값을 정하여 부산에서 팔고 돌아가게 하는 것이 좋으니, 서울까지 날라 인마(人馬)를 지치게 하고, 서울 사람들에게 억지로 사게 하여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가지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이 공물(貢物)을 가지고 오는 시기는 반드시 언제나 그 달 초하루로 정하고 무시로 왕래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하며, 공물을 가지고 오는 배는 반드시 그 척수를 미리 정하여 배가 잇따라 들어와 어리둥절하게 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묵는 곳은 출입을 일절 금하고 잘 지켜 간세(奸細)한 백성으로 하여금 변방 수비의 허실을 알리지 못하게 해야 하며, 저놈들로 하여금 성지(城池)의 험하고 허술함을 알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약속이 정해지고, 방금(防禁)이 분명하고 예의로 대하고 은혜와 신의로써 어루만져 주면 이놈들은 장차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덕에 보답하기에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서울에 오지 못하게 하고 세미(歲米)를 내려주지 않는다고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본토에 있는 왜가 모반할 계획이 있을 때에는 대마도 사람으로 하여금 공물을 바치는 달에 구애되지 말고 무시로 와서 알리게 하면, 이놈이 우리 나라의 신용을 얻어서 전날 우리 나라를 팔고 농간질한 죄를 보상하려고 기필코 기일 전에 와서 알리고 미리 대비할 것을 청할 것입니다. 왜놈을 대비함에는 먼저 대마도를 대비해야 하고, 대마도를 대비함에는 이 계책보다 뛰어난 것이 없습니다. 뒷날 변방을 다스리는 선비로서 이놈의 형세를 소상히 알고 있는 사람은 나라를 위하여 이놈을 다룰 때에는 반드시 이 계책을 알고 선택할 것입니다. 이 밖에 또 영랑부(永郞部)ㆍ평호도(平戶島)ㆍ오도(五島)ㆍ삼도(三島)ㆍ팔장도(八丈島) 지방이 있는데, 그 중에는 일기(一岐)ㆍ대마도 등보다 큰 섬도 있습니다. 그 선대에 신인(神人)이 있어 칼 한 자루 옥새 하나 거울 하나를 가지고 일향주(日向州)에 내려와 일향(日向)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대화(大和)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다시 장문주(長門州)의 풍포(豐浦)로 옮겼다가 또 다시 산성주(山城州)로 옮겼는데 지금의 왜경(倭京)이 그곳입니다. 개벽 이래로 한 성(姓)이 서로 전하여 지금까지 변하지 아니하였다 합니다. 신(臣)은 그 국사편년(國史編年) 및 이른바 《오처경(吾妻鏡)》 나의 득실(得失)이 곧 나의 처에 나타나니 나의 처에서 보면 나의 득실을 볼 수 있으므로 역사책의 이름으로 삼았다. 이라는 것을 얻어 보았는데, 이른바 4백년 전 왜의 천황은 아직 그 위복(威福)을 잃지 않았고, 전세(前世)부터 대신을 뽑아서 국정을 도맡아 보게 하였습니다. 대납언(大納言)ㆍ태정대신(太政大臣)ㆍ대장군(大將軍)ㆍ관백(關白) 등의 관원이 그것을 하였다.
그러나 아직 천황의 명을 받들어 행하였던 것입니다. 관동 동해도(東海道)가 곧 관동이다. 장군(關東將軍) 원뢰조(源賴朝) 이후는 정치를 관백에게 맡기고, 제사만은 천황이 지냈습니다. 적의 괴수 수길이 신장(信長)을 대신하게 되자 민생의 고난이 극에 달하여, 천황의 기내(畿內) 각 현(縣)의 토지는 모조리 적의 괴수가 빼앗아 차지하고, 그것을 갈라 그의 여러 부하 장수들에게 주었는데, 모두 고용살이하는 노예나 장사치 출신으로 잘 싸워 전공을 세운 자들입니다. 여러 주(州)에는 대관(代官)의 토지를 많이 두고, 그 토지를 차지한 여러 장수로 하여금 대관의 토지를 겸하여 보살피게 하여 그 토지에서 나는 곡식을 거두어 그것을 팔아서 은전으로 바꾸어 서울에 운반해 두어 나라의 재용으로 삼았습니다. 대관의 토지에서 3만 석이 나면 그 땅을 차지한 자가 1만 석을 먹으므로, 왜장으로서 대관 토지를 많이 받은 자는 으레 부유한 자가 많았습니다. 수길이 다스리기 이전 시대에는 토지를 차지한 자가 백성에게서 다 거둬들이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서 그 절반을 남겨 농민에게 주었으므로 농민들이 몹시 가난하지는 않았고, 왜장 역시 그리 풍족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수길(秀吉)이 신장을 대신하게 되자 수탈은 극도에 달하여 흉년에도 조세는 정액대로 받아들이고 백성은 지푸라기도 차지하지 못하였으므로 왜장의 부유함은 수길에게 비길 만한데 농민은 가난하여 한두 섬의 곡식도 없었습니다. 그 이른바 섭정(攝政)이라는 것도 수길이 다스리기 이전 시대에는 반드시 등(藤)ㆍ귤(橘)ㆍ평(平)ㆍ원(源)의 사대성(四大姓)만이 하여 귀족이 귀족의 뒤를 잇고 천민은 천민의 뒤를 이었으므로, 권력을 맡은 왜도 오히려 그 명의(名義)를 아끼고 중히 여겨, 감히 부도(不道)한 것은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신장(信長)이 그의 하인 명지(明知)에게 피살되자 수길이 노예의 신분으로 갑자기 일어나 여러 대신을 죽이고 변란을 일으켜 국사를 거리낌 없이 제 마음대로 행하였습니다. 그의 성이 평(平)이라는 것도 다만 그가 거짓으로 꾸며낸 것입니다. 왜승(倭僧)으로 약간 유식한 자는 모두 말하기를, “일본이 생긴 이래로 이런 때는 없었다.”고 합니다.
○ 홍법대사(弘法大師)라는 사람이 있는데, 찬기(讚岐) 사람으로 중국을 거쳐 천축(天竺)에 들어가 불법을 배워 대성하고 돌아왔는데, 그 나라 사람들은 그를 생불(生佛)이라 부릅니다. 왜인들이 글자를 모르므로 방언(方言)을 48자로 나누어서 일본 언문을 만들었는데, 그 언문이 한자의 형태를 섞어서 쓴 것은 우리 나라 이두(吏讀)와 아주 비슷하고, 섞어 쓰지 않는 것은 우리 나라 언문과 아주 비슷합니다. 일찍이 그 나라 지도의 부록을 얻어 보았더니, 일본은 도(道)가 8, 주(州)가 66인데 일기(壹岐)ㆍ대마(對馬)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도(島)가 2, 향(鄕)이 9만 2천, 촌(村)이 10만 9천 8백 56, 논이 89만 9천 1백 60정(町), 성지(城池)가 있는 곳을 향(鄕)이라 부른다. 왜인은 우리 나라의 5자[尺]쯤의 길이를 1간(間)이라 부르며, 55간이 1정(町)이 되고, 36정이 1리(里)가 된다. 왜국에서의 1리는 우리 나라의 10리 길이와 같다. 밭은 11만 2천 1백 48정입니다. 불우(佛宇)가 2천 9백 58, 신궁(神宮)이 2만 7천 6백 13이며, 남자의 수가 19억 9만 4천 8백 28명이고, 여자의 수가 29억 4천 8백 20명인데, 비록 연혁에 따른 증감은 대(代)마다 각각 같지 않으나 대략은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일본의 동쪽 끝은 육오(陸奧)이고 서쪽 끝은 비전(肥前)인에, 육오에서 비전까지는 4백 15리요, 남쪽 끝은 기이(紀伊)이고 북쪽 끝은 약협(若狹)인데, 이이에서 약협까지는 88리 왜국에서 3리는 우리 나라의 30리다. 라고 합니다. 일찍이 왜국의 크기가 우리 나라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는데 중 의안(意安)이라는 자를 만나보니 그는 왜경(倭京) 사람으로 그의 조부와 아버지 때부터 중국에서 북학(北學)을 배워와 의안(意安)에 이르러서는 산학(算學)ㆍ천문ㆍ지리를 조금 깨우쳐 일찍이 토규(土圭)를 만들어 해 그림자를 재었고, 하늘이 둥글고 땅이 모난 것과 산천의 멀고 가까움을 대략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임진년 싸움 때에 왜인이 조선 호조(戶曹)의 전적(田籍)을 모조리 가져갔는데 일본 전적의 반도 못 되더라.”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우직하고 어눌하여 믿을 만하니 아마도 함부로 한 말은 아닌 듯 싶습니다. 그리고 관동(關東)과 오주(奧州)의 거리로 미루어 보면 우리 나라에 비하여 극히 멉니다. 동해(東海)ㆍ동산(東山)ㆍ북륙(北陸)의 3도는 거리가 우리 나라에서 몹시 멀어서 임진년부터 우리 나라를 침범하는 데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기내(畿內)ㆍ산양(山陽)ㆍ산음(山陰)ㆍ남해(南海)의 4도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므로 임진년부터 오래도록 번갈아 가면서 군대를 우리 나라에 주둔시켰던 것입니다.
○ 임진년에 쳐들어온 왜장은 36명인데, 안예 중납언 휘광(安藝中納言輝光) 영우(嶺右)를 관장하고 개령(開寧)에 주둔하였다. ㆍ그의 양자 안예 재상 수원(安藝宰相秀元)ㆍ비중 납언 수가(備中納言秀家) 대장(大將)으로 서울을 관장하고 들어와 남별궁(南別宮)을 점거하고 있었다. ㆍ축전 중납언 금오(筑前中納言金吾) 그때 나이 15세이다. ㆍ증전 위문정 장성(增田衛門正長盛)ㆍ중장 정종(中將政宗) 먼저 진주(晉州)로 올라갔다. ㆍ호전 치부대보(戶田治部大輔)ㆍ석전 치부소보(石田治部少輔)ㆍ도진 병고두 의홍(島津兵庫頭義弘) 이른바 세상에서 심만도(甚萬度)라고 말하였는데 임진년에 평양(平壤)에 있었다. ㆍ비전주 지주 용장사(肥前州地主龍藏寺)ㆍ장강 월중(長岡越中)ㆍ천야 탄정(淺野彈正)ㆍ그의 아들 천야 좌경대부(淺野左京大夫)ㆍ생구 아악정(生駒雅樂正)ㆍ그의 아들 찬기수 일정(讚岐守一正)ㆍ장증아부 토좌수 성친(長曾我部土佐守盛親)ㆍ봉수하 아파수 가정(蜂須賀阿波守家政)ㆍ지전 이예수 수웅(池田伊豫守秀雄)ㆍ등당 좌도수(藤堂佐渡守)ㆍ대곡 형부소보(大谷刑部少輔)ㆍ가등 좌마조(加藤佐馬助)ㆍ소천 좌마조(小川左馬助)ㆍ궁부 병부소보(宮部兵部少輔)ㆍ복고 우마조(福藁右馬助)ㆍ중천 수리대부 수성(中川修理大夫秀成)ㆍ가등 주계 청정(加藤主計淸正) 함경도를 관장하고 육진(六鎭)에 있었다. ㆍ소서 섭진수 행장(小西攝津守行長) 임진년에 기성(箕城)에 있었다. ㆍ흑전 갑비수(黑田甲斐守)ㆍ모리 일기수(毛利一岐守)ㆍ송포 법인(松浦法印)ㆍ조천 마주두 장정(早川馬主頭長政)ㆍ모리 민부대보(毛利民部大輔)ㆍ양천입 귤좌근(楊川入橘左根)ㆍ죽중원개(竹中源介)ㆍ사택 지마수 정성(寺澤志摩守正成)ㆍ우시 대마수 의지(羽柴對馬守義智) 임진년에 기성(箕城)에 있었다. 등이었습니다.
○ 정유년에 다시 쳐들어왔을 때의 왜장은 27명인데, 안예 재상 수원(安藝宰相秀元)ㆍ수가(秀家)남원(南原)성을 함락한 후 왜교(倭橋)에 있었다. ㆍ금오(金吾) 그때 나이 15세이었는데 대장으로 부산(釜山)에 머물러 있었다. ㆍ좌경대부(左京大夫)ㆍ의홍(義弘) 남원을 함락하고 사천(泗川)에 주둔하였다. ㆍ청정(淸正) 금오평(金烏坪)으로 내려와서 부산(釜山)에 주둔하였다. ㆍ용장사(龍藏寺)ㆍ행장(行長) 남원을 함락하고 왜교(倭橋)에 주둔하였다. ㆍ갑비수(甲斐守)ㆍ가정(家政)ㆍ일정(一正)ㆍ성친(盛親)ㆍ좌마조(左馬助)ㆍ우마조(右馬助)ㆍ장정(長政)ㆍ수리대부(修理大夫)ㆍ일기수(一岐守)ㆍ모리 민부(毛利民部)ㆍ귤좌근(橘左根)ㆍ좌도수(佐渡守)ㆍ정성(正成)ㆍ수웅(秀雄)ㆍ단견 화천수 일직(但見和泉守一直)ㆍ법인(法印)ㆍ웅곡 내장윤 직무(熊谷內藏允直茂)ㆍ의지(義智) 남원을 함락하고 남해(南海)에 주둔하였다. ㆍ내도수(來島守) 벽파(碧波)에서 패하여 이 통제사에게 피살되었다. 등입니다. 이들은 모두 거물급 우두머리들이었습니다. 조신(調信)ㆍ원랑(元郞) 같은 자들은 비록 대군을 거느리고 각 포구(浦口)에 주둔하고 있었으나 이 숫자에 넣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모두’라고 말한 이하는 내 생각을 적은 것이다.
○ 가강(家康)은 등원 원의정(藤原源義定)의 11대손이다. 의정이 일찍이 관백(關白)에 임명되어 그 자손이 대대로 관동에 살면서 그 식읍이 8주에 뻗어 있고, 그 사람됨이 사납고 용맹스러워 싸움을 잘했으므로 나라를 통틀어 감히 그와 창을 겨룰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강의 대에 이르러 수길이 비로소 신장(信長)을 대신하였는데, 가강이 성(城)에 의거하여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자신이 가서 공격하였습니다. 가강이 정병 1만 8천 명으로 상모(相模)에서 맞아 싸웠는데, 수길의 군사가 패하여 드디어 화의를 하고 가강 또한 원한을 풀고 귀순하여 항복하고, 종신토록 신하로서의 예를 잃지 아니하였습니다. 그의 맏아들은 삼하수(三河守)이고, 둘째 아들은 강호 중납언(江戶中納言)이었으며, 막내 아들 일기수(一岐守)는 나이가 10살이었다고 하는데, 그때 가강의 나이는 63세이었고, 토지에서의 소출은 2백 50만 석이지만 실상은 그 곱절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의 성품이 침잠하고 말이 적으며 생김새는 풍만하고 중후하였습니다. 그의 성시(城市)는 매우 험하여, 수길이 살아 있을 때는 여러 사람의 인심을 많이 얻었으나 수길을 대신하게 되어서는 왜인의 여망에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수길은 성을 공격하여 적을 깨뜨리고, 적이 항복한 뒤에는 곧 원수로서의 원한을 잊어버리고, 성지(城池)와 민가를 하나도 빼앗지 않고 도리어 다른 고을을 덧붙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가강은 남모르게 은원(恩怨)을 행하여 조금이라도 반목하면 그를 사지에 넣었으므로, 모든 왜인들은 힘이 무서워 겉으로는 복종했으나 심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 휘원(輝元)은 모리 중납언(毛利中納言)이라고도 하고 혹은 안예 중납언(安藝中納言)이라고도 하는데 모리는 그의 성이요, 안예는 주(州)의 이름입니다. 백제(百濟)가 망하기 시작하자 임정태자(臨政太子)가 배를 타고 왜국으로 들어가 대내 좌경대부(大內左京大夫) 왜인은 왕을 ‘대내’라 하므로 지금도 주방주(周防州)에 대내전(大內殿)이라는 칭호가 있다. 가 되어 주방주(周防州)에 도읍하였으며, 자손이 47대를 거쳐 대대로 왜국의 관리가 되어 그 토지를 세습(世襲)하였는데, 휘원의 선조는 곧 그의 종자(從者)였습니다. 임정(臨政)의 자손이 이미 끊어지고, 휘원의 조상이 대신하여 그 토지를 이어받아 안예주(安藝州) 광도(廣島)에 도읍하였는데, 물력(物力)의 웅장하고 풍부함이 왜경(倭京)에 견줄 만하였으며, 그 풍속이 보기에 자못 너그럽고 느린 것이 우리 나라 사람의 기상이 많이 있었습니다. 휘원의 그때 나이는 48세였고, 토지의 소출(所出)은 1백 50만 석이라지만 실은 그 배나 되었습니다.
○ 전전 비전수(前田肥前守)는 가하 대납언(加賀大納言)의 아들인데 전전은 그의 성입니다. 대납언은 평소에 가강과는 벼슬과 세력이 서로 비등하였는데, 수길이 죽을 때에 수뢰(秀賴)를 비전수에게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비전 중납언 수가와 함께 수뢰를 받들고 대판(大坂)에 살면서 모든 일을 보살펴 주도록 하라. 너에게 일임한다.” 하였습니다. 수길이 이미 죽고, 대납언도 죽어서 비전수가 월중(越中)ㆍ가하(加賀)ㆍ능등(能登) 3주의 땅을 이어받아 수뢰를 받들고 대판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 세력의 불길이 가강에 못지 않아 높이 세운 문루(門樓)는 대판의 내성(內城)과 가지런하였습니다. 몰래 경승 정종(景勝政宗)ㆍ좌죽 수가(佐竹秀家)ㆍ청정 월중수(淸正越中守) 등과 함께 가강을 죽이고 그의 토지를 같이 나누어 가질 것을 모의하고 피를 입에 발라 서로 맹세하여 맹약이 이미 정해졌는데, 월중(越中)의 석전 치부소보(石田治部少輔)라는 자가 그때 가강에게 유배(流配)되어 그의 사읍(私邑)에 물러나와 있다가 그 모의를 알고 몰래 서면으로 가강에게 알렸습니다. 가강이 기해년 9월 9일에 수뢰(秀賴)에게 조회를 드린다고 핑계하고 빈틈을 타서 들어가 대판성을 점거한 후 비전(肥前)의 휘하 군사를 불러 그 문루를 허물게 하였으나 휘하 군사는 말하기를, “우리 주공(主公)은 밖에 있고 우리는 아직 명령을 듣지 못하였소.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내부(內附)의 명령을 어기고 죽는 것이 차라리 우리 주공의 명을 어기고 죽는 것보다 낫소.” 하니, 가강의 노여움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수가(秀家)가 비전수에게 처조카가 되므로, 가서 비전수의 하인들을 타일러 철가하게 하며 말하기를, “너의 주공께서 말이 있으면 내가 책임지겠다.” 하여, 가강이 드디어 그의 관동의 모든 장수들로 하여금 비전수가 왜경(倭京)으로 올라가는 길을 막게 하고, 또 석전 치부소보로 하여금 근강주(近江州)의 요해지를 끊어서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비전수도 또한 성과 호(壕)를 개수하여 굳게 지킬 계책으로 며칠에 한 번씩 사냥을 핑계하고 정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월중(越中)ㆍ월후(越後) 등지에 출몰하면서 경승(景勝) 등과 서로 돕기를 비밀리에 맹약을 맺었습니다. 여려 왜들이 가강에게 화친을 허락할 것을 권고하려 했으나 그가 듣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대개, 그 형세가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고 화친하지 않으면 싸울 것이니, 다행히 화친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추한 왜놈들의 나라가 장차 한바탕 싸움터로 변할 것이니,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나라의 다행함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 경승(景勝)은 지금은 월후 납언(越後納言)이라 일컫는데 대대로 월전ㆍ월중ㆍ월후 3주(州)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적의 괴수 수길이 신장(信長)을 대신하게 되자 경승은 싸움에 지고 항복을 청하니, 수길은 출우(出羽)ㆍ좌도(佐渡)를 경승에게 넘겨 주고, 월후의 땅을 빼앗아 굴리 구태랑(掘里久太郞)에게 주었으므로 경승의 마음이 편안할 리가 없었으며, 월후의 백성들도 또한 경승이 상전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가강이 수길을 대신하게 되자, 비전수가 가강과 사이가 벌어졌으므로 경승은 제멋대로 사읍(私邑)에 돌아가 비전수와 군사를 연락하여 월후의 땅을 쳐서 빼앗고자 하니, 구태랑이 크게 겁이 나서 가강에게 이 사실을 여러 번 보고하였습니다. 가강도 본래의 근거지인 관동이 염려되므로 여러 번 글월을 보내어 서울로 돌아가기를 권하였으나 경승은 듣지 않았습니다. 왜인이 모두 말하기를, “경승이 진실로 비전수와 군사를 연합하여 가강의 근거지를 바로 두들긴다면, 가강이 가서 구하려 하더라도 청정(淸正) 등이 한꺼번에 일어나 두 서울을 잃게 될 것이 염려되고, 그렇다고 가서 구하지 않으면 옛 근거지가 먼저 무너져서 앞뒤로 적을 받게 될 것이니 경승 등이 움직이기만 하면 일을 이루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그 우둔하고 나약한 것이 매우 애석하다.” 하였습니다.
○ 정종(政宗)은 대대로 육오(陸奧) 한 주(州)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그 부귀(富貴)가 왜국에서 으뜸갔습니다. 수길이 신장을 대신하게 되자, 정종은 싸움에 지고 항복을 청하였으며, 금과 곡식이 여러 왜장보다 배나 되지만 길이 아주 멀고 북해(北海)에 풍랑이 높았으며, 배가 또 많이 침몰되므로 인부(人夫)의 조정이 휘원(輝元) 등에게 반도 못 미쳤습니다. 정종은 흉악하고 사나움이 다른 자보다 더욱 심하여 친형과 친아들을 죽였으며, 또 꾀가 많았습니다. 복견성(伏見城)에 물이 없었는데 정종이 계책을 마련하여 성 밖의 강물을 끌어들이되, 긴 틀을 만들어 수길의 성안까지 곧바로 들어오게 하였으니, 성안 사람들이 지금도 그 힘을 입고 있습니다.
○ 금오(金吾)는 휘원의 사위인데, 어려서부터 수길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경자년 그때 나이 19세에, 정유년 싸움에 원수가 되어 부산에 주둔하였는데, 적의 괴수가 대부분 군율을 잃은 것으로 벌을 받았습니다. 대개 성질이 경박하고 감정의 기복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순수좌(舜首座)라는 자가 일찍이 금오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자상히 압니다. 토지의 소출은 99만 석입니다.
○ 풍수가(豐秀家)는 수길의 양녀 사위로서 처음에는 적송 파마수(赤松播摩守)의 휘하였는데 수길에게 붙어 갑자기 출세하였습니다. 그의 조상은 우리 나라 사람으로 비전(肥前)의 한 주와 비중(備中)의 반, 미작(美作)의 반을 차지하고 비전의 강산(岡山)에 도읍하였는데, 병졸이 정예로우며 토지가 기름지고 재물이 풍부하였습니다. 임진년에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와서 서울 남별궁(南別宮)에 들어왔는데, 자못 살생과 약탈을 금하고 우리 나라의 소년 남자들을 많이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가강과는 시기와 원한이 쌓여 있는 사이였으며, 정유년 이후에는 또 사리에 어긋나고 망령된 일이 많아 사졸들의 신임을 잃었습니다. 경자년 2월에 그 휘하들이 수가의 소행에 분노하여 일제히 창칼을 들고 앞으로 다가가 수가를 위협하기를, “소행을 고치지 않으면 예기치 못한 화가 있을 것이다.” 하니 수가가 당황하여 어디로 빠져나가야 할지를 몰랐는데, 대곡 형부소보(大谷刑部少輔)가 듣고 수가를 맞이하여 빠져나와 함께 배를 타고 대판(大坂)으로 내려갔습니다. 이 때문에 일이 모두 중지되니, 주모자 몇 사람이 자살하거나 도주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불문에 부쳤습니다. 가강은 수가가 망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 배반한 자의 죄를 다스리지 아니하니, 여러 왜들이 이것으로써 더욱 가강을 작게 여겼다고 하며, 토지의 소출은 69만 석입니다.
○ 의홍은 도진 병고두(島津兵庫頭)라 일컫는데 도진은 그의 성이고, 병고두는 무고(武庫)의 장(長)입니다. 대대로 살마(薩摩)ㆍ대우(大隅)ㆍ일향(日向) 등의 주(州)에 살았고, 지역이 당 나라와 유구(琉球)ㆍ여송(呂宋) 등의 나라와 가까워서 중국배와 남만배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으며, 왜인으로 중국 지방과 남만에 왕래하는 자는 반드시 이곳을 경유하였습니다. 중국과 남만의 물화(物貨)가 저자에 가득하고, 중국인과 남만인의 상점이 즐비하였습니다. 의홍은 무용이 또한 여러 왜중에 뛰어났으므로 왜인이 모두 말하기를, “의홍으로 하여금 무용을 발휘할 만한 처지에 있게 한다면 비록 일본 전국도 무난히 삼켜 버릴 것이다.” 하였으며, 그 휘하 군사들도 극히 정예롭고 용맹하였으며, 또한 모두 대대로 내려오는 가신(家臣)들이었습니다. 신장(信長)의 말년에는 구주(九州) 서해도(西海道) 를 다 점령하였고, 수길이 대신하여 서게 되자 친히 가서 투쟁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의홍은 6주(州)가 수길에게 돌아가자 다만 전에 가지고 있던 3주만을 차지하였습니다. 정유년 싸움에는 그의 휘하가 사천(泗川)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왜놈이 선전하기를, “명 나라 군사가 무술년 봄에 사천의 왜병을 포위하였다가 크게 패하였다.” 하였으니, 남의 굳은 성을 공격하려다가 내 굳은 성에 흠이 생겼다는 말은 이것을 두고 이름입니다. 기해년 봄에 그의 가신(家臣) 중에 8만 석을 받는 땅을 가진 자가 다른 모의를 하였으므로 의홍이 계책을 써서 그에게 죽음을 내렸는데, 그의 아들이 그때 일향주(日向州)에 있으면서 17세의 나이로 성지(城池) 12개소를 수축하고 반란을 꾀하므로, 의홍이 친히 가서 포위 공격하여 싸우다 쓰러진 시체가 산더미 같았으나 겨우 3성을 함락했을 뿐이었습니다. 금오ㆍ청정이 원병을 보내겠다고 하였으나 의홍이 사양하면서, “나의 수하 장수가 모반하였으니 마땅히 내가 죽일 것이요, 어찌 남의 원병의 신세를 지겠는가.” 하였습니다. 반란자도 역시 가강 등에게 널리 뇌물을 보내어 화의하여 죽음을 면하게 해달라고 했다고 하며, 의홍의 정예롭고 건장한 병졸의 반 이상이 1년 동안에 죽고 부상하였으므로 가강 등은 마음속으로 기뻐하였습니다.
○ 그 나머지의 왜장으로 굴미씨(崛尾氏)ㆍ굴리씨(崛里氏)ㆍ통정씨(筒井氏)ㆍ진전씨(眞田氏)ㆍ증전 위문위(增田衛門尉)ㆍ석전 치부(石田治部)ㆍ복도 대부(福島大夫)ㆍ중전 병부(中田兵部)ㆍ궁부 병부(宮部兵部)ㆍ대곡 형부(大谷刑部)ㆍ청정(淸正)ㆍ행장(行長) 등 30여 우두머리들이 차지한 토지는 많은 것은 혹 4ㆍ50만 석에 이르고, 적은 것도 10만 석 이하로 내려가지는 않았습니다.
○ 적의 괴수 수길은 미장주(尾張州) 중촌향(中村鄕) 사람으로 가정(嘉靖) 병신년 5조(條) 모두 병신(丙申). 에 났는데, 생김새가 초라하고 키는 작아 몰골이 원숭이 같았으므로 어렸을 적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나면서부터 바른 손가락이 여섯이었는데 자라서 말하기를, “사람은 모두 다섯 손가락인데 여섯 손가락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고, 스스로 칼로 잘라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집이 본디 가난했으므로 농가의 꼴베는 머슴이 되어 생활하였으며, 장년이 되자 스스로 분발하여 전 관백 신장(關白信長)의 종이 되었으나, 자기의 기이한 재주를 나타낼 수 없어서 관동(關東)으로 달아나 몇해 동안 살다가 다시 와서 자수하니 신장이 그 죄를 용서하고 옛 자리로 되돌아오게 하였으므로, 수길은 애써 상전을 받들며 밤낮으로 비바람을 가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신장이 매양 여러 종들을 시켜 시중의 물건을 사오라 하면 반드시 비싼 값을 청구하며 값이 조금만 맞지 않으면 사가지고 돌아오지 못하였으나, 수길에게 시켰더니 시중의 값진 물건을 헐값으로 척척 사서 들여오므로 신장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습니다. 실상은 수길이 신장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매양 자기 돈을 절반씩 보태곤 하였으나 여러 다른 종들은 그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신장이 북주(北州)의 반란자를 친히 치게 되자 수길이 창을 들고 돌진하여 싸우는데 향하는 곳마다 초목이 바람에 쓰러지듯 하여, 신장이 드디어 파마주(播摩州)의 희로성(姬路城)을 떼어 주고 그 공을 표창하였고, 얼마 안 되어 또 축전수(筑前守)로 승진하였습니다.
처음에 부르던 그의 성은 목하(木下), 이름은 등길(滕吉) 혹은 등귤(滕橘)이었는데, 이렇게 지위가 올라가자 성을 우시(羽柴)라 고쳐 우시 축전수(羽柴筑前守) 왜놈은 으레 그가 처음 태어난 고장의 마을 이름을 성씨(姓氏)로 삼아 부르는데, 귀하게 되면 반드시 천하던 때에 부르던 것을 고치고, 천하게 되면 귀하던 때의 성씨를 고쳐서 부른다. 라고 불렀습니다. 신장이 말년에 자기 멋대로 형살(刑殺)을 행하고 대신들을 시기하니, 사람들이 제 목숨을 보장할 수가 없어 혹은 성을 수축하고 해자를 수리하여 스스로를 지킬 계책을 하였습니다. 별소소삼랑(別所小三郞)이라는 자가 파마(播摩)와 인파(因播)를 점거하여 배반하자 신장이 가서 당장 죽이라고 하니, 수길이 자기가 가서 타이르겠다고 자청하므로 신장은 그것을 허락하였는데, 수길이 겨우 친병 백여 명을 이끌고 가서 군사를 성 밖에 두고 말하기를, “너희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다. 내가 혼자 들어가겠다” 하니, 그 부하들이 울면서 청하기를, “단신으로 성안에 들어가면 사태가 어떻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따라 들어가 생사를 같이하겠소.” 하였습니다. 수길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만약에 승부를 겨루게 된다며 백여 명의 잔졸(殘卒) 들이야 굶주린 범에게 고기를 던져 주는 것과 다를 것이 있겠느냐? 만약 승부를 겨루지 않는다면 혼자서 들어가도 걱정 없을 것이다.” 하고, 혼자서 말을 타고 창ㆍ칼을 버리고 장사치의 모습으로 성문을 들어서니 문지기가 말리지 아니하였습니다. 바로 별소(別所)의 장막 앞으로 가서 뛰어가 별소의 손을 덥석 잡고, “주공(主公)은 공을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무엇이 못마땅해서 모반하였소? 지금의 계책은 무장을 풀고 휴전하고 몸을 묶어 사죄함만 같지 못하오. 그렇게 하면 부귀를 잃지 않을 것을 보장하리다.” 하니, 별소가 말하기를, “신장과의 사이에 벌어진 틈이 이미 깊어 어찌할 도리가 없소.” 하였습니다. 별소의 휘하가 수길을 죽이자고 하였으나 별소가 말하기를, “저 사람이 나를 위해서 한 계책인데 어찌 죽일 수 있겠느냐?” 하고, 수길을 호송하여 성문 밖으로 내어 보냈습니다. 수길의 부하들이 수길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가 성문으로 나오는 것을 보자 모두들 놀라 어리둥절해 하면서 반겨 맞이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신장에게 회보하였더니, 신장이 드디어 수길로 하여금 가서 별소를 치게 하여 별소의 군사가 패하고 서로(西路)로 도망쳐 달아났습니다. 휘원(輝元)이 그때에 산양(山陽)ㆍ산음(山陰)의 11주에 의거하여 신장의 지휘를 듣지 않자 신장이 또 수길로 하여금 군사를 통솔하여 휘원을 치게 하였는데, 휘원의 별장이 별성(別城)을 굳게 지키며 말하기를, “고송(高松)이 마땅히 수길의 군사와 부딪쳐 싸우리라.” 하였습니다. 수길이 성을 둘러싸고 흙산을 만들어 물을 끌어들여 성을 공격하였는데, 흙산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물은 점점 깊어져서 성이 침수되지 않은 부분은 겨우 한길 남짓 밖에 안 되었으나 성지기의 뜻은 더욱 굳기만 하였습니다. 이때 마침 일향수(日向守) 명지(明知)가 신장을 죽여 그 부고를 전하는 자가 밤낮으로 달려왔는데, 수길은 그 소문이 알려지는 것을 꺼리어 부고를 가지고 온 자를 막하에서 손수 죽이고, 성에 대한 공격을 더욱 다급히 하면서 짐짓 한가로운 체해 보였습니다. 안국사(安國寺)라는 자가 휘원의 모주승(謀主僧)으로 있었는데, 수길이 글월을 보내어 만나기를 청하였더니 안국사가 명령을 듣고 곧 오니 수길이 막사 안으로 맞아들여 말하기를, “성의 함락이 아침저녁에 달려 있으나 나는 차마 수만의 인명을 어육으로 만들 수는 없다. 만약 성주가 배를 갈라 자결하면 나는 마땅히 싸움을 멈추고 화의를 하겠다.” 하였습니다. 안국사가 들어가 성주에게 알렸더니, 곧 혼자서 수레를 타고 나가 강물에 빠져 자결하였는데, 수길이 그것을 바라다 보고 곧 휘원과 원한을 풀어 화목하기로 하고 군사를 거두어 동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일향수가 친히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섭진주(攝津州)의 산기(山崎) 대판(大坂)과 복견(伏見) 사이 우치하(宇治河) 어귀에 있다. 에서 맞아 싸웠으나, 노고와 안일의 차이가 현격하고 군사의 많고 적음이 또 차이가 나는데, 수길의 기세는 더욱 장하고 싸움은 더욱 힘써 친히 일향수의 머리를 많은 군사들 속에서 베니 그의 군사들은 싸우지 않고 저절로 무너져 버려, 수길이 여러 군사들에게 옹위되어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신장의 시체가 있는 곳을 찾아서 그 머리를 가져다가 절에 모시고 21일 동안 재를 올렸습니다. 그때 온 나라에 주인이 없어 민심이 뒤숭숭하였으나, 수길의 행동이 태연하여 염려하고 꺼리는 기색이 조금도 없으니 여러 대신들도 감히 소리도 내지 못하였으며, 자기에게 붙지 않은 자를 공격해 죽이느라 거의 평안한 날이 없었습니다. 기이(紀伊)의 백성들이 군중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켜 수십 리를 뻗쳐 진영을 연결하였는데 수길이 친히 가서 격멸하였습니다.
의홍은 대대로 살마(薩摩) 등 3주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나라안에 변란이 일어난 틈을 타서 구주(九州)의 온 섬을 점령해 버렸는데, 수길이 또 가서 공격하니 의홍은 다만 전에 가졌던 3주만을 차지하고 그 나머지를 모두 바쳤습니다. 가강은 관동 8주를 차지하고 성패(成敗)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수길이 친히 가서 쳤으나 도리어 싸움에 지고 드디어 가강과 화의를 맺으니, 가강도 역시 몸을 굽혀 섬기고 신하의 예를 한결같이 하였습니다. 휘원이 그 소식을 듣고 또한 비전(肥前) 등 2주를 바치니 66주가 이제 평정되었습니다. 대마수 의지(對馬守義智)는 섭진수 행장(攝津守行長)을 통하여 우리 나라를 침입하는 앞잡이로 시켜 줄 것을 청하니, 행장은 드디어 그 딸을 의지에게 시집보내고, 의지를 데리고 들어가 수길을 만나보니, 수길이 크게 기뻐하여 의지에게 그의 성인 우시(羽柴)를 내려 주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신이 오니 수길이 왜승(倭僧) 태장로(兌長老)ㆍ철장로(哲長老) 등으로 하여금 복서사(復書使)로 삼아 명지(明知)가 군사를 동원하여 신장을 죽인 상황을 회답하였는데, 그 부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선 좋은 말로써 그 편지에 회답하여 저들이 예기치 못한 때에 행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으나, 수길이 말하기를, “그것은 잠자는 사람의 목을 자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지금 사실대로 써 보내어 저들로 하여금 미리 대비하게 한 다음에 가서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 옳다.” 하였습니다. 중국 사람 허의준(許儀俊)이 살마주(薩摩州)에 표박(漂泊)하여 약을 팔아 살아가면서 왜국의 비밀들을 자세히 적어 중국 조정에 보고하였는데, 이웃에 사는 중국 사람이 그 글을 몰래 훔쳐 천야 탄정(淺野彈正)에게 고하였습니다. 탄정이 수길에게 고하자 허의준을 사로잡아 왜경(倭京)으로 송치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은 모두 그를 삶아 죽이자고 하였으나, 수길이 말하기를, “그는 명 나라 사람이니, 명 나라를 위하여 일본 일을 알리는 것은 사리에 불가함이 없으며, 또한 남을 불의에 친다는 것은 실로 내 뜻이 아니다. 명 나라로 하여금 미리 대비책을 강구하게 하는 것도 또한 불가할 것이 없다. 더구나 예부터 제왕은 모두 거칠고 어두운 세상에서 일어났으니, 명 나라로 하여금 우리가 본래 미천하였다는 것을 알리는 것도 또한 해로운 일은 아니다.” 하고, 허의준의 죄를 불문에 부치고 도리어 고해 바친 자에게 이르기를, “너도 명 나라 사람으로서 감히 명 나라 사람을 고발하였으니 너는 흉측한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임진년에 많은 왜를 보내서 우리 나라를 침범하게 하고 가만히 이르기를, “조선을 삼켜 버리는 일이 성공할 것은 해를 가리켜 말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행장이 평양에서 패하고 여러 왜적이 영남 변방으로 물러가 머물게 되자, 적의 괴수 수길은 크게 노하여 자신이 여러 왜장을 거느리고 계사년 3월에 구주로 내려가 신궁(新宮)을 비전(肥前) 명호옥(名護屋)에다 짓고 거기에 오래 있으면서 싸움을 독려할 계획이었습니다. 호남과 영남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친히 부산으로 건너가겠노라고 성명하였으나, 마침 그의 어미가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룻길을 두 배로 달려 동쪽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때에 왜장으로서 날뛰는 자가 금량(金亮)을 죽이고 오록(烏祿)을 세우자고 의논하였는데, 불행히 수길이 일찍 돌아가는 바람에 그 계획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유구국(琉球國)은 살마주에 가장 가깝고 섬들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어 수로가 매우 편하므로 수길이 군사를 이동시켜 유구를 치려고 하니, 살마수 의홍이 몹시 겁이 나서 수길이 총애하는 신하 석전 치부소보(石田治部少輔)에게 많은 뇌물을 보내어 수길에게, “유구국은 양쪽 섬으로 되어 탄알만하고 별로 진기한 그릇이나 보화가 없으니 백성을 수고롭게 하여 군사를 동원할 만한게 못 된다.”고 말하게 하고, 또 유구 사람을 불러다 글월을 가지고 방물(方物)을 싣고 가서 수길에게 사과하게 하니, 수길이 유구 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경서(京西)의 여러 왜병들은 이미 우리 나라에서 싸움에 지쳤으므로 수길이 이번에는 경동(京東)의 여러 왜병들을 지키게 하려고 산성주(山城州) 복견리(伏見里) 우치하(宇治河) 강가에 모았는데 왕경(王京)에서 10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새 성을 쌓고, 높은 산꼭대기를 깎아서 궁실을 지었는데, 얼마 안 되어 큰 지진이 있어 성사(城舍)가 모조리 기울어졌는데, 다시 옛 성 동쪽에 새 성을 마련하고 한결같이 이전의 제도를 따랐으며, 바깥 성을 둘러싸고 집을 지어 여러 총애하는 신하들을 살게 하고, 강물을 끌어 성 동문으로 대었는데 깊이가 20여 길이나 되었습니다. 사면의 빈 땅에는 소나무와 전나무를 줄지어 심어 몇 달이 안 되어 남산이 울창하게 되었는데,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우고, 돌을 옮기고 나무를 날라 들여, 한 번 돌아보고 호령하는 사이에 공사가 이루어지고, 널따란 집 수천 칸을 번거로이 헐지 않고 사람의 어깨로 메어 날라 동쪽에 있는 것을 서쪽에 갖다 놓았습니다. 날마다 지팡이를 붙들고 삽을 메고 몸소 역사를 감독하여 비록 심한 추위와 한더위에도 회피하는 일이 없으니, 가강 등이 분주히 역사에 종사하면서 소리 높여 역사를 돕는 품이 종들과 같았습니다.
수길이 죽은 뒤로 복견(伏見)이 빈성이 되었는데, 일찍이 왜승을 따라 몰래 그 성안에 들어갔더니 다섯 걸음에 한 절이요, 열 걸음에 한 전각이 있었으며, 죽 뻗어 돌아가는 것이 정신이 어지러워 어느 길을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귀신의 재주로도 몇 해에 마치지 못할 공사를 한 해도 못 되어 끝마쳤다고 하니, 이것은 그가 백성을 혹사한 것과 왜인이 고된 역사를 감당할 수 있었던 사실을 모두 이로써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앞서, 적의 괴수 수길은 아들이 없어 그 누이의 아들을 양자로 들여 자기의 아들로 삼았는데, 수길이 자기를 태합(太閤)이라 부르게 되자 그 양자를 관백(關白)이라고 부르고 이세(伊勢)ㆍ미장(尾張) 등지를 나누어 주어 그 식읍(食邑)으로 삼게 했습니다. 임진년 겨울에 이르러 수길의 애첩이 아들 수뢰(秀賴)를 낳았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대야 수리대부(大野修理大夫)라는 자가 수길의 총애를 받고 노상 침실에 드나들면서 몰래 그의 첩과 간통하여 낳았다.” 합니다. 수뢰가 출생하자 관백이 속으로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몰래 딴생각을 품게 되었고, 석전 치부(石田治部)라는 자가 또한 붙좇아 죄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수길은 관백을 자결케 하니, 관백이 기이주(紀伊州) 고야산(高野山)으로 도망쳐 달아나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나 수길은 그곳을 찾아서 또 죽음을 내렸습니다. 왜국의 법에 죽을 죄를 지은 자도 토지를 버리고 중이 되면 으레 불문에 부치기로 되어 있는데 수길만은 관백을 꼭 죽이고야 말았으며, 관백의 집을 포위하고 수종하던 벼슬아치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집을 가하 대납언(加賀大納言)에게 주었습니다. 이로써 내란이 겨우 평정되었는데, 우리 나라를 침범한 군사가 또 공이 없으니, 가강 등은 군대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그릇된 계획이라 하였으며, 석진 치부도 항상 말하기를, “66주면 만족스러운데 무엇하러 딴나라에까지 가서 악착스레 싸우겠는가?” 하였는데, 오직 청정만은 재침의 거사를 마땅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수길은 말하기를, “해마다 군사를 내어서 조선의 인물을 모조리 죽여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들어 버린 뒤에, 서로(西路)의 백성을 옮겨서 조선에 살게 하고 동로(東路)의 백성을 서로에 옮겨 살게 하면 10년 뒤에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재침의 의논이 드디어 결정되자, 쳐들어오는 여러 왜병들에게 명령하기를, “사람의 귀는 둘이지만 코는 하나이다. 조선 사람의 코를 베어 오는 것으로써 수급에 대신케 하는 것이 편리하니, 한 병졸이 각각 1되의 코를 베고 기준에 도달한 뒤에는 사로잡는 것을 허락한다.” 하여, 여러 왜병들이 명령대로 각각 우리 나라 사람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서 수길에게 보냈습니다. 수길이 그것을 검열한 뒤에 모아서 북쪽들 10리쯤에 있는 대불사(大佛寺) 옆에 묻었는데 그 높이가 한 언덕을 이루었다 하니 우리 혈육(血肉)의 참상을 이것으로써 알 것입니다. 무술년 5월에 모든 왜병들이 영남 해안으로부터 모두 철수하여 돌아가고, 오직 청정ㆍ행장ㆍ의홍ㆍ의지ㆍ갑비수 등 10여 진만이 우리 나라에 머물러 있었는데, 수길이 그 여러 장수들에게 간절히 부탁하며 말하기를, “조선의 일이 아직까지 끝을 맺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니, 가강 등이 말하기를, “조선은 큰 나라라, 동쪽을 치면 서쪽을 지키고, 왼쪽을 치면 오른쪽으로 모이곤 하니 설사 10년 기한을 잡아도 일이 끝날 기약이 없소.” 하니, 수길이 울면서, “공들은 나를 늙었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나의 처음 뜻은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지금은 늙어서 얼마 안 있으면 죽을 것이니 조선과 휴전하고 화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그 부하들은 모두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용모와 언사의 오만 무례함을 생각해 보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립니다. 그러나 강화의 의논은 그가 죽기 전에 이미 나온 것입니다. 수길은 성질이 몹시 간사하고 교활하며, 실 없는 말로 농지거리나 잘하고 오만하게 웃어대며 여러 부하들을 희롱하였는데, 그는 가강 등을 업신여기고 희롱하기를 어린애 다루는듯 하며, 또 간장을 팔고 떡을 파는 장난을 즐겨 하여 가강 등으로 하여금 지나가는 사람이 되어 사 먹는 시늉을 하게 하고서 한 푼의 돈을 재미삼이 따지곤 하였습니다. 또 오로지 권모술수로 부하 장수들을 제어하는데, 일찍이 영을 내리기를, “오늘 밤은 동쪽에서 잔다.” 하고는 밤이 되어서는 문득 서쪽에 있으니, 대개 조조(曹操)의 의총(疑塚)과 같은 술법이었습니다. 또 일찍이 사냥을 나가서 한참 동안 거짓으로 죽어 있었는데, 여러 종자(從者)들이 당황해 하였으나 대신들은 태연하여 끄떡도 하지 아니하였으니, 거짓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한참 있다가 다시 살아나는 체 하였답니다.
무술년 3월 그믐부터 병을 얻어 여름에는 병이 심하여지고 그의 아들 수뢰(秀賴)는 나이가 겨우 7살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꼭 죽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러 장수들을 불러 뒷일을 부탁하되, 가강으로 하여금 수뢰의 어미를 아내로 삼고 정사를 보살피다가 수뢰가 성장하여 자립하게 되면 정사를 돌려주도록 하게 하고, 가하 대납언(加賀大納言)의 아들 비전수로 하여금 수뢰의 유부(乳父)로 삼아 비전 중납언 수가(秀家)와 함께 끝까지 수뢰를 받들고 대판(大阪)에 살라고 하였습니다. 또 남의 딸을 많이 데려다 길러 자기 딸로 삼아서 조금이라도 권력이 있는 사람에게 모조리 시집 보내어 인척관계로 얽어놓고 또 금은과 토지를 후히 상주어 은혜로 남겨 그들의 뒷날의 야망을 끊도록 하였으며, 가강의 아들 강호 중납언(江戶中納言)의 딸을 수뢰의 아내로 삼게 하였습니다. 대판은 서경(西京)인데 섭진주(攝津州)에 있고, 복견(伏見)은 동경인데 산성주(山城州)에 있습니다. 대판의 지세는 복견에 비하여 훨씬 나으므로 가강으로 하여금 동쪽의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대판에 살게 하여 서쪽의 여러 장수의 역적 모의를 막고, 휘원에게는 서쪽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복견에 살게 하여 동쪽 여러 장수가 일을 꾸미는데 대비하였으며, 대판의 상점들을 철거시켜 성지(城池)를 넓게 만들었습니다. 대개 왜놈의 성미가 수다스러워서 일을 만들기를 좋아하여 한두 달만 편안히 있으면 반드시 난을 일으킬 마음이 생기므로, 잠시도 쉬지 않고 힘써 일을 시켜 그 권력을 빼서 날래고 독한 기운을 사그라뜨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조치를 다 마치고 수길은 7월 17일에 죽으니, 가강 등은 그의 죽음을 숨겨서 장사를 지내지 않고 그 배를 갈라 소금으로 채우고 평시의 옷을 입히니, 비록 여러 왜장들도 그가 틀림 없이 죽었음을 알지 못하였으며, 몇 달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대개 나라 안에 변고가 생길까 염려해서 이렇게 조용히 장사를 지내어 민심을 진정시키려는 것으로, 그가 생전에 거짓 죽은 척하던 것이 이런 때를 위해서 계획했던 것입니다. 수길이 이미 죽은 뒤에 여러 왜장이 피를 입에 바르고 함께 맹세하며 기필코 수길의 어린 아들을 함께 받들기로 했으므로 내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수길의 유해(遺骸)는 대불사(大佛寺) 위에 안치하고 금전(金殿)을 그 밑에 지었는데 극히 웅장 화려하였습니다. 기이주(紀伊州) 웅야(熊野)의 백성들이 반란을 꾀하자 가강이 장수를 보내어 섬멸하였는데, 이는 대개 적의 괴수의 남은 위력이 아직도 온 나라 안에 떨치고 있고 또 그 권모술수가 능히 사람을 얽어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가강 등이 대대적으로 배를 모아 거제(巨濟) 등지에 있는 군량을 다 실어 오게 하고, 또 석전 치부소보(石田治部少輔)로 하여금 가서 의홍ㆍ청정ㆍ행장 등을 불러 오게 하는데, 며칠 후에 비사(飛使)가 비선(飛船)을 타고 부산(釜山)을 떠나 7일에 왜경(倭京)에 도착하였는데, 이것은 청정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비사가 전하기를, “중국 배와 조선의 병선이 바다를 뒤덮고 와서 왜성(倭城) 16군데가 거의 다 포위를 당하였으니, 구원병이 빨리 오지 않으면 내가 먼저 내 배를 갈라 죽고 남의 칼날은 받지 않겠다.” 하였습니다. 치부(治部)도 비전(肥前)에 머물러 있었으나 감히 건너가지 못하니, 가강 등이 여러 왜장들을 모아 의논하였으나 결정하지를 못하였습니다. 구원병을 보내자니 가겠다는 자가 없고, 보내지 않자니 그들이 몰살될 염려가 있었는데, 등당 좌도수(藤堂左渡守)라는 자가 유독 가겠다고 청하므로 기꺼이 허락하였습니다.
얼마 안 되어 급보가 또 날아들었는데, 이르기를, “중국 군사가 사천(泗川)의 왜장 의홍의 진을 포위하자 의홍이 패한 체하고 성으로 들어가 성문을 닫지 않았더니, 중국 군사가 성안으로 마구 쳐들어온 것을 의홍이 군사를 놓아 돌격하여 성안에 들어온 자는 남김 없이 죽였다.” 하니, 여러 왜병들이 그 소식을 듣고 약간 생기가 돌았으나 왜놈은 과장하기를 좋아하므로 수급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은 서울을 멀리 떨어져 긴 밤중과도 같은 암흑 속에 살고 있으므로 밝은 세상일은 전혀 들어 알지 못하니, 병가의 임기응변은 죄를 진 천신으로서 멀리 추측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왜놈들의 형세를 보건대, 우리 나라를 위한 계책으로는 왜놈들의 정상을 통찰하여 그들을 조종하고 신축성 있게 대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왜놈의 형편을 자세히 적고 외람되이 세 가지 계책을 마련해서 역관에게 돈을 주어 왕래하는 왜선에 태워 보내어 국경 밖에서 상달케 하였는데, 통역이 미처 떠나지 못하고 여러 왜병들은 다 철수하였습니다. 무술년 섣달 보름 후에 청정과 갑비수가 먼저 왜경(倭京)에 도착하였고, 행장과 의홍은 섣달 그믐께 뒤이어 왜경에 도착하였는데, 청정은 먼저 와서 행장의 비겁함을 비웃었습니다. 행장이 도착하여 또 공언하기를, “청정은 조선 왕자를 기다리지 못하고 갑자기 병영을 불사르고 물러났기 때문에 화의가 거의 성립될 마당에서 실패케 하였다. 나와 도진(島津)은 중국 지관(質官)을 거느리고 조용하게 맨 뒤에 왔는데 내가 비겁하냐 청정이 비겁하냐?” 하였습니다. 휘원 등은 화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허물을 청정에게 돌리고, 청정은 편을 드는 자는 또한 행장이 우리 나라에서 딴 생각을 품었던 것을 허물하여 의논이 분분하니, 두 사람 사이에 틈이 더욱 벌어졌습니다.
석전 치부소보(石田治部少輔)는 수길의 총애를 받은 신하로 식읍은 근강주(近江州)에 있는데 땅이 기름지기로 왜국에서 으뜸이었으며, 증전 위문정(增田衛門正)ㆍ천야 탄정(淺野彈正)ㆍ덕선원 현이(德善院玄以)ㆍ장책 대장두(長策大藏頭) 등과 함께 5봉행(奉行)이 되어 국론을 좌우하였습니다. 정유년 싸움에서 돌아온 복원 우마조(福原右馬助)라는 자가 석전 치부 때문에 싸움에서 머뭇거리고 나아가지 못하였다고 여러 장수들을 모조리 고해 바쳤으므로, 아파수(阿波守)ㆍ갑비수(甲斐守)ㆍ좌도수(佐渡守)ㆍ청정(淸正)ㆍ주마두 장정(主馬頭長政)ㆍ죽중 원개(竹中源介) 등이 모두 귀양을 가게 되었고, 수길은 주마두(主馬頭)와 원개(源介) 등의 풍후(豐後)의 6만 석 땅을 빼앗아 우마조(右馬助)에게 상으로 주었습니다. 청정 등이 모두 철수해 돌아오자 수길이 이미 죽었으므로 우마조를 꼭 죽여 버리고야 말려고 하였고, 치부의 도당은 또한 우마조를 구하려고 하여 당파가 더욱 갈리게 되었습니다. 가강과 청정ㆍ장강 월중수(長岡越中守)ㆍ복도 대부(福島大夫)ㆍ갑비수(甲斐守)ㆍ아파수(阿波守)ㆍ좌도수(佐渡守)ㆍ천야 탄정(淺野彈正)의 부자 등이 한 당이 되었는데, 그 밖의 여러 작은 장수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고, 휘원(輝元)과 비전 중납언(備前中納言)ㆍ축전 중납언(筑前中納言)ㆍ석전 치부(石田治部)ㆍ증전 위문정(增田衛門正)ㆍ상주(常州)의 좌죽(佐竹)ㆍ오주(奧州)의 정종(政宗) 및 최상(最上)과 출우(出羽)의 경승(景勝)ㆍ장책 대장두(長策大藏頭)ㆍ도진 의홍(島津義弘) 및 행장이 한 당이 되었는데, 그들에게 붙은 자는 더욱 많아서 밤낮으로 모여 모의하는 품이 마치 귀역(鬼蜮) 과 같았습니다.
기해년 정월 12일에 가강이 수길의 유언이라 하여 수뢰(秀賴)를 대판으로 보내어 거기서 살게 하고, 자신은 복견(伏見)에 머물러 있었는데, 변란의 싹이 트려하자, 하루에도 몇 번씩 놀라고 거리의 상점들은 반이나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윤 3월 왜의 역법(曆法)은 이와 같다. 9일에 청정 등이 무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복견(伏見)으로 올라가 치부(治部)를 공격하려 하였고, 휘원의 참모 구실을 하는 중 안국사(安國寺)라는 자가 휘원을 설득하기를, “관백 섭정은 단 한 사람뿐이니, 신하로서의 부귀가 그대보다 나은 이가 없는데 싸워서 어쩌자는 거요?” 하니, 휘원도 그렇게 생각하고 드디어 안국사로 하여금 가서 가강을 설득케 하였더니, 가강도 받아들였으며, 장책 대장두(長策大藏頭)는 치부와 혼인한 집안이라, 또한 치부를 설득하여 가서 가강에게 사과하게 하였습니다. 휘원 등은 드디어 가강을 맹주로 추대하여 복견성에 들어가 살게 하였으며, 치부가 주모자이므로 그의 아들을 가강에게 불모잡히니, 가강은 치부를 그의 식읍으로 내쫓았습니다. 우마조(右馬助)는 화(禍)의 표적이라 하여 그 토지를 빼앗아 주마두(主馬頭) 등에게 돌려주니, 우마조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녹운(綠雲)이라 이름을 고치고 절을 짓고 거기에 살았습니다. 대개, 그들의 기상이 춘추전국 시대의 세상과 꼭 같았습니다. 치부라는 것은 예부(禮部)이고, 소보(少輔)라는 것은 원외랑(員外郞)입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오 권덕주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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