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로 들어가는 들녘에 廢庄이 여기저기 汐潮를 보고있는 나그네
耨耕을 잊어버릴 시간을 마주하는 듯하는
그 쓸쓸함이 더하는 가을이라는 이름과 마주했다.
어느새 계절이 바뀌고 하늘도 높고 더 짙어졌다.
맑은 바람에 씻긴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조석의 기온 차이가 사물들은 차즘 온기를 버린다.
그 많던 열은 내리고 서늘해지며 차분해진다.
이때 곡식과 과일들은 隨處作主한다.
조롱조롱 매달린 감이 익을 것이고 석류는 곧 껍질이 터질 기세 그 풍경을 그려낼 것이다.
이파리 같은 것은 여분이다. 그 여분의 단풍
초목들은 그것부터 바닥에 버린다. 남는 것은 각기 까만 대로 익은 주인공이다.
누구를 기다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을 위해 달려온 시간들이다.
슬픔의 색조로 그려진 것 (데즈먼드 모리스)
눈 한번 깜박이면 찬란한 아름다움은 슬픔의 색조로 변한다. 된서리 맞은 단풍잎이 풋덕풋덕 떨어지는 늦가을
그 늦가을 심사가 쓰렁쓰렁하고 울울하고 헛헛한 까닭이 그래서이다.
이어 마음은 허하고 슬픔도 같이 할것이다.
街談巷說
흰 백성은 믿을 곳이 모두 사라졌다.
모든 것이 무너져 무얼 어떻게 해야 바로 설 것인가.
한마디 요약 그들은 "厚顔無恥"
anxious 불안해하는
reassuring안심시키는
이를 바로 잡아 흰 백성을 이끌어 줄, 여러 곳에서 즐거운? 삶을 이어가는 군상들은 꿀 먹은 벙어리
정의라는 단어는 어디로 가버린.... 애써외면하는...
이에 어느 국회의원의 질의 한 마디 질타! 앞에 앉아계시는 사법부 그들에게 비겁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큰 위안이 되었고 큰 울림, 환호의, 소리가 창공을 뚫고 있었지...
찰스다윈 비밀공책에 진화론을 적어 두고 20년간 남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만약 부주의로 공책이 공개했다면 갈릴레오 처럼 종교재판에 목숨을 잃고 재산도 몰수당하고 사회적 지위와 명예도 잃을 것이다.
학자의 고뇌와 갈등만은 피할 수 없는 업보, 진리를 진리라고 말하지 못하는 과학자로서 天形이었다.
기독교가 권력이었던 시절에 인간의 창조자는 신이 아니다.
종이 영구적으로 불변하지 않는다 란 말은 죽기로 작정한 짓이었다.
비유가 타당한지 모르나 ....
용기가 없는 시대
계란으로 바위를 때리는 ...
계몽주의 철학자 몽테스키외는 이를 미리내다 보았다.
입법권 사법권 집행권이 한 사람 또는 한 기관에 집중되면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그는 대안으로 3권 분립을 내 세웠다. 현대의 민주국가의 기본체제가 된다.
별을 가장 잘 보는 법은 어둠 속에 잠기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가장 완결된 해답을 제시해온 것은 종교였다.
그러나 비행가 떨어저라 그 말한디에 참이란 단어가 익어갔다.
어디 한구석이라도 시원한 구석이 있는가?
오랜만에 매봉에 오른다.
숲은 더 울창해져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변화에 우린 그저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저 모든 것은 그렇게 이어져 가는 것이다(9/16)
첫댓글
수처작주는 숨 쉬는 몸(신)과 숨이 닿는 곳(촉감)의 두 내외입처를 따라가며 법으로 작의 하기를 주의(여리작의)하면, 들숨과 날숨에서 '입처(내외입처)를 문지기(sati)에 확립할 때마다 모든 괴로움의 법에 대한 앎을 열어(개진) 보리다‘라는 연기관을 이야기한단다. 수처(隋處)가 12처(處)를 말하며 작주(作主)를 ‘내가 주인이다.’라고 해석하지 말고, ‘12처를 따라가면 주관이 만들어지고, 세워진 처에서 모든 것이 진짜 같다.’라고 해석해야 한단다. 뭔 뜻인지 이해가 안 된다. 어렵다.
고광(高光) 스님이 『임제록(臨濟錄)』에 대한 저서에서 제시한 새로운 번역(해석) 이며, 관련 내용은 그의 저서 『할! (임제선사어록)』 에 담겨 있습니다.
고광 스님의 해석
그의 해석은 '수처작주'를 "처(12처)를 따라가면서 주관을 짓는다"는 의미로 읽어 냅니다.
처(處)의 작용: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때 주관과 객관이 나뉘고, 이때 '내가 보고 있다'는 착각 속에 진짜 대상을 놓친다는 것입니다.
작주(作主)의 의미: '주인이 되라'는 기존 해석을 넘어, 감각 접촉이 일어날 때 자동적으로 반응하는 습관에 휘둘리지 않고, 알아차림(sati)을 확립하는 것을 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