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한 번 못해보고
김 상 립
내가 1940년생이니 근대사의 웬만한 고비는 다 거친 것 같다. 비록 어렸지만 전쟁의 참화도 겪었고, 군사 정권아래서 시련도 당해봤다. 월남전 파병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가까운 친구를 셋이나 잃었다. 보리 고개란 이름으로 찾아온 가난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초등학교 동창생들 중에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일거리를 찾아 도시로 나가거나, 일찍부터 가사를 돌보는 처지가 된 친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날 때까지 내 주변에는 살기에 힘들고 지쳐 생을 포기하려는 친구 들까지 생겨났으니, 내 또래들이 성장한 시기는 가난극복이 최우선인 그런 환경이었다. 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유독 컸다. 심지어 부자 집 자식들은 교실에서 쉬는 시간이나 운동장에서 놀 때도 분위기를 휘어잡고 쥘락 펼락 했다. 또 돈으로 위세를 부리며 상전 노릇하기가 예사였지만 누구도 나서 대항하지 않았다. 자칫 시비라도 붙는 날이면 학부형이 벼락 같이 달려와 교장실로 직행하여 시끄럽게 만들었던 까닭이다.
내 고향의 주된 산업은 수산업이라 매우 기복이 심했다. 요즘처럼 인공양식을 하지도 않았고 모두들 크고 작은 배를 타고 가깝거나 먼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았는데, 당시엔 과학적인 설비를 도입하지 못한 까닭에 고기잡이도 순전히 경험과 운에 기댔고, 비바람이나 태풍에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한 시즌이 끝나고 나면 어업에 실패하여 일가족이 야간 도주하는 사례도 일어났다. 사업이라는 사자도 모르던 아버지는 시내 요지에 있던 2층집을 담보로 어업 하던 지인에게 보증을 서주었는데, 그는 이태를 못 넘기고 쫄딱 망하고 말았다. 어느 날 집으로 들이닥친 집달리들은 온 집안에 빨간 딱지를 덕지덕지 붙여놓고 당당하게 떠났다. 아차 했지만, 지인은 이미 가족을 대동하고 멀리 떠난 후였다. 졸지에 집을 잃은 우리 가족은 멀리 산 기슭에 있는 한옥을 빌려 급히 이사를 했다. 나는 그런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서 공부는 뒷전으로 밀어두고 친구들과 어울려 밤 늦게까지 싸 돌아 다니기 일쑤였고 수틀리면 싸움질도 예사였다. 어른들이 북적대는 시장 통 목로 주점에 버티고 앉아 막걸리 몇 잔에 취기가 오르면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 졌으니.
내가 고3에 막 올라갔을 때 마음에 쏙 드는 여학생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내겐 첫 사랑이었다. 그녀도 시 외곽지대에 위치한 초가에 살고 있었으니 아마 둘의 주거환경이 비슷했을 것이다. 특히 그 학생의 집은 매우 보수 적이라, 고2 학년이던 딸이 하교하면 집안에 붙들어 놓고 일체 밖으로 내놓지를 않았다. 암만 발버둥을 쳐봐도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고 어쩌다 드문 드문 만나 산길을 걷거나 가까운 공동묘지 부근에서 잠깐씩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이렇게 만남이 어렵게 이루어지다 보니 애먼 길어진 것은 한숨과 편지뿐이었다. 나는 빨리 대학을 졸업하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 그녀를 데려올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대학 2학년 여름 방학이 지나고 개학할 즈음, 그 녀는 끝내 버티지 못하고 가출한 후, 미국에 있는 언니에게로 홀연히 가버렸다. 사는 형편이 아무리 팍팍 해도 그렇지 엽서 한 장 없이 떠난 야속함에 나는 큰 상처를 입었고, 다시는 여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새로운 사랑에 목이 말랐다. 하지만 내 젊은 날의 사랑은 지나치게 감성에 빠져 정신 줄 놓고 앞으로만 내달린 탓에 이성적인 잣대를 갖다 댈 여지가 없었다. 그 결과 나에게서의 사랑은 그냥 움직이는 마음이요 몸일 뿐이었다. 성급하게 솟구치는 감정 따라 꿈길처럼 가는 것이 전부였다. 때로는 정신보다는 육체가 앞장서는 만남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엉뚱한 호기심에 또 다른 상대를 찾기도 했다. 어떤 이유로던 사귀던 사람과의 이별은 언제나 아픔이요 슬픔 이었으니 그 끝은 눈물이었다.
장수시대에 들어선 요즈음에는 예상외로 놀라운 노익장들이 많아 나는 당황스럽다. 내 나이대의 사람 중에서도 새삼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가만히 들어 보면 늦었지만 좋은 사람 만나 진심으로 사랑하기보다, 도리어 성적인 만남을 원한 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누구나 80중반쯤되면 타고난 정력가라면 몰라도 일반적으로는 한계를 느끼기 마련이다. 암만 큰 소리해도 그 이면을 보면 특별한 약물에 의존하던가 아니면 또 다른 의료 기술의 힘을 빌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자신에게 전혀 덕될 것 없는 짓이다. 만일 성이 사랑과 화음을 잘 이룬다면 나이 많이 들어도 가능성이 없지야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남 보기에도 추할성싶다.
평소 나는 인생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것 중 하나는 내가 언제까지나 성적인 차원에 묶인 채 참된 사랑의 경지에 가보지도 못하고, 끝내는 육신의 노쇠로 인해 부득이 성으로부터 멀어지는 처지는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50줄에 들어서자 여태 까지 와는 다른 별 세계를 찾아 본격적인 정신공부를 시작했으니, 앞으로는 삶이 질적으로 좀 나아 지겠지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러보니 결국은 나이 먹을 만큼 먹고 나서야 성에대한 관심을 제대로 지울 수 있었으니 할 말이 없다. 여태 남들 앞에서는 근엄한 척 시침을 떼고 살았던 날들이 양심을 콕콕 찌른다. 이런 배경에는 청소년 시절의 아픈 기억들이 잠재 의식에 너무 강하게 남아, 나를 엉뚱하게 끌고 갔기 때문이라고 변명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다. 살아온 날들이 그냥 허허하다.
사람이 어떤 계획을 세워 살아가는 일과 막상 살아낸 결과는 확연히 서로 다를 수가 있다는 게 새삼 놀랍다. 이게 나의 성취라고 들어내어 우쭐거려봐도 내 속마음이 동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까? 한 인간이 살았던 삶의 총체적 평가는 결국 그의 영혼이 내릴 것이라 나는 결론짓는다. 내 사랑얘기도 여기서 중단해야겠다. 그래 내 생긴 바탕이 이쯤이니 어쩌겠나? 받아 드려야지. 아마도 이번 생애는 내가 그토록 그리던 옳은 사랑 한 번 못해 보고 마감할성싶다. 짠하다.
첫댓글 비뇨기과 후배가 나보고 남성호르몬 검사를 해보라고 해서 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통상 4~5정도 나오고 김종국이가 '9'가 나왔다는 검사인데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1' 쪽팔려서 어디가서 이야기도 못하겠고.....머리 깎고 절에나 들어갈까 싶습니다.
대체로 남성 호르몬수치가 낮으면 여성홀몬 수치가 상대적으로 올라가니
좀 여성스럽게 사시면
차밍한 모습에 인기가
폭발할 것이니 괜히 절로가지 말고 도심에서
맛있는거 찾아다니며
행복하게 사세요.
별 검사는 다해가지고...
남평 선생님은 지금도 열심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한참동안 선생님의 글이 올라오지 않아 전화라도 한번 드려서 안부를 여쭈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왕성한 청춘이십니다.
무척 반갑습니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