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레노와 크루는 촌장의 집으로 향했다. 매일같이 맞고 들어오는 레노 때문에 약값을 감당하기 힘들어진 크루가 촌장에게 크루를 자신의 조수로, 예비 아잘로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물론 레노는 영문도 모르고 더 이상 천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마냥 기뻐했다.
"크루, 이제 나한테 검술 가르쳐 주는거지? 그치?"
"... 쳇... 빨리 팔아먹어야지."
"뭐야~"
가끔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이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레노는 하늘이라도 날 듯 한 기분이었다.
크루와 레노는 촌장의 집에 도착했다. 촌장의 집이라고는 해도 푸른 사람들의 삶은 워낙에 힘들었기 때문에 이 집도 간신히 집의 형태만 유지한 오두막집이었다. 크루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레노는 그를 쫓아들어가며 문을 신나게 닫았다. -쾅!
"... 그러한 연유로 테이루 레노에게 아잘의 계급을 부여해주셨으면 합니다."
"... 자네... 흠... 뭐, 좋네. 자네의 그동안 실적을 보아서 허락하지. 하지만 레노."
"아, 앗. 네!"
촌장은 훌렁 벗겨진 100% 순종 대머리에 허리는 휘고, 배까지 나왔지만 단 하나, 눈만큼은 품위있고 무게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지혜롭지만 어딘가 한구석에 무서운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금빛 눈으로, 당황하며 대답하는 레노를 쏘아보며 천천히, 하지만 힘있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넌 지금 이 집을 나가면서부터 아잘이지만..."
-꿀꺽 무언가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한 큰 소리를 내며 레노는 마른침을 삼켰다. 촌장의 눈빛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빛나며, 떨리고 있었다.
"검을 쥔 만큼의 책임과 의무, 그리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네..."
촌장은 싱긋 웃어보이며 마름모 꼴의 금속조각이 달린 가죽목걸이를 건네주었다.
"나가보거라, 새로운 아잘, 아니 후보생."
"네!"
레노의 눈에는 기쁨이 가득 차 있었다.
"크루, 나 칼"
"으... 젠장... 그냥 목검 써"
"그런거 가지고 뭐해? 나두 칼 줘~!"
촌장집을 나온 뒤, 집에 가는길에 레노는 집요하게 크루에게 칼을 구해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크루는 '아직 어려' 라는 이유로 그의 요구를 철저히 묵살했고, 결국 레노는 집에 거의 다 와갈 무렵, 다른 방법으로 칼을 얻기로 했다.
"쳇, 크루한테 부탁 안해. 내가 알아서 구할거야."
"뭐야? 흠... 그래, 구해오면 검술을 가르쳐 주마. 난 먼저 간다."
"어? 진짜지?!"
레노는 약속이라도 받으려는 듯이 크게 소리쳤다. 크루는 힘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집으로 들어갔다.
"에휴... 그래 알았다. 알았어..."
레노는 그 특유의 어린아이 답지 않는 사악한 눈빛을 반짝반짝 빛내며 대장간 쪽으로 향했다.
-땅! 땅!
대장간은 주인 아필만이 혼자서 망치를 쥐고 있지만 언제나 쇠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조수들도 셋이나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 쇠를 두드릴정도의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푸른사람들은 언제 붉은사람들이 쳐들어올지 몰라 누구나 하나씩은 무기를 지니고 있었고, 거의 모두가 사냥으로 생계를 이어가기 때문에 이 하나 밖에 없는 대장간은 하루도 쉴날이 없었다.
레노는 힐끗거리며 자신을 돌아보다가 목걸이에서 시선을 멈추곤 다시 일에 열중하는 아필의 조수들에게 비웃음을 슬쩍 흘리며 아필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은근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이봐, 아필~"
"에? 뭐야, 이 테이루 녀석"
"아저씨, 그녀석 아잘 됐어요. 목걸이요, 목걸이"
아필은 조수의 말에 레노를 위아래로 한번 훑어 보고는 탐탁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일감으로 눈을 돌리고는 물었다.
"왜 불렀냐? 이녀석아?"
"무기 하나 내줘"
"미쳤냐? 아무리 아잘이래두 넌 아직 어리잖아"
레노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특유의 사악한 미소를 흘리며 느끼~~~ 하게 노래라도 부르듯이 중얼댔다. 옆에 있는 사람 다 들으라는 듯이.
"보름달~ 보름달~ 쇳가루와 밀가루가 하나가 되니~ 방앗간에서~ 방앗간에서~"
"에? 뭐야. 웬 헛소리냐. 인석아... 헙?!"
이녀석이 무슨 헛소리를 하나 하고 생각하던 아필은 그 흥얼거림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그리고 잠시후 자신의 지대한 약점이 들통났다는 것을 깨닳았다.
아필은 생애 최고로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레노의 어깨를 위고 뒤흔들었다.
"컥, 너! 너 어떻게..."
"더 말해줘? 아예 마을 사람들 다 알게 해줘?"
"크으윽... 따라와!"
아필은 레노의 손을 이끌고 대장간 뒤뜰로 뛰어갔다.
"크...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고 싶지도 않고... 비밀이다"
"무기, 기왕이면 검으로"
"안돼"
"조금 비싼걸 줘야 내 입이 그만큼 무거워 질거야"
"안돼"
"흠흠, 아아~ 오늘은 목소리가 잘 나오네, 됐어"
"안돼..."
"뭐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알려주는게 예의겠지?"
"안돼... 제발... 인석아..."
레노는 급기야 30살 넘은 노총각이 12살 짜리 꼬마아이에게 매달리며 애원하는 진풍경을 자아냈다. 하지만 레노는 그 애처로운 모습에도 조금의 양보도 없이 밀어 붙였다.
"아~ 아필이랑~ 미슈테르랑~"
"제길... 알았다! 주면 되잖아!"
"아~ 좋아. 그럼 계약 성립"
레노는 만족스런 얼굴로 대장간 안으로 다시 들어갔고 아필은 머리를 휘휘 내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따라 들어갔다.
레노가 천천히 무기 진열대쪽으로 향했다. 진열대라 봐야 죽은 아잘들의 무기와 아필이 만든 몇몇의 무기, 그리고 붉은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들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레노는 천천히 검들을 둘러보며 고르기 시작했다.
"이게 좋을려나? 엑, 이건 너무 무거워. 음... 이건 너무 삭았어."
"적당히 골라."
"흠... 이건 날이 너무 새거라 뻣뻣하고... 이건 너무 딴 놈한테 길이 들어놓은 것 같구."
"헛참 어린녀석이 그딴것만 잘 알아가지고..."
"다 크루덕이지 뭐, 하루 웬종일 칼만 만지는 그 녀석덕에 나도 괜히 눈이 높아졌다니까... 어, 이게 좋겠다"
"드디어 골랐냐? 헉!"
레노가 들어올린 것은 붉은 색의 장검이었다. 무엇으로 만든 검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특이한 붉은 빛을 발했다.
아필은 당황해서 그의 손에서 검을 뺏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레노는 그 검에 마음을 뻇겨버린 듯 했다.
"이 녀석아, 그건!"
"후~ 이거 맘에 든다. 그럼 '당분간'만 비밀로 해둘게."
"뭐?"
레노를 제지하려던 아필의 손이, 아니 온몸이 멈칫 했다. 그리고 얼굴에 무지막지하게(그의 조수들도 본적이 없을 만큼)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뭐야? 당분간이라고? 야이 꼬마녀석아!"
"몰라, 그냥 앞으로 잘해. 그럼 나 간다"
"으악!~ 레노!!!"
크루는 원래 무뚝뚝하고 표정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레노가 구해온 롱소드를 본 크루는 당황으로 버무려진 풍부한 표정으로 레노를 즐겁게 해주었다.
"... 정말 구해온거야?"
"엉"
"사악한 새끼, 전에 말해준 걸로 협박 한거냐?"
"당연하지" -레노는 사악하게, 또 당당하게 웃어 보였다.
"... 젠장... 내일 부터야. 그나저나 그 롱 소드는 아직 너한테 무겁고 익숙치 않을테니 오늘 해지기 전까지 그거 500번 내려치기해. 시작!"
"어? 뭐야?"
레노는 당황해 하면서도 가죽 칼집을 벗기고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곧 크루가 한마디 던졌다.
"바보야, 그러다 놓쳐서 집 부술일 있냐? 칼집 다시 씌워, 그리고 손에 너무 힘 넣지 말고. 세상에 12살 짜리가 롱소드를 쓰겠다는 녀석은 너 밖에 없을거다"
"그렇다고 시키는 놈도 너밖에 없어"
"미친놈, 네가 하자구 별 지랄을 다한건 생각 안나냐? 헛소리 말고 똑바로 해"
그렇게 투덜대긴 해도 레노는 착실히 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엔 롱 소드의 무게도 지탱하기 힘들었지만 곧 순조롭게 검을 휘둘렀다. 크루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보다가 약간은 놀라며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가 뭐가 어떻게 된 녀석이냐... 12살 된 녀석이 롱소드를 단지 내려치는 거라지만 저렇게 쉽게 다루다니... 아니, 잠깐... 혹시?!'
"야, 그거 줘봐"
"왜?"
"일단 줘봐"
크루는 거칠게 레노의 검을 빼앗으려 했지만 레노는 혀를 베~ 내밀면서 뒤로 휙 피했다. 하지만 크루는 그 긴 다리로 가볍게 레노의 정강이를 걷어차 그의 행동을 저지했고, 가벼운 난투 끝에 크루는 레노의 머리를 짓밟고서 왼손으로는 그 팔을 붙잡고, 오른손으로 검을 쥐고있는 손을 비틀어 검을 빼앗았다.
"앗~ 내놔!"
"잠깐 보자고. 어디..."
천천히 검신과 손잡이를 살펴보던 크루의 눈이 놀라움으로 갑자기 커졌다. 그리고 그는 허리춤의 단검로 손가락끝을 찔렀다. 푸른색의 피가 송글송글 솟아났다. 크루는 재빨리 그 손가락으로 검의 표면을 꾸욱 눌렀다.
-치이익! 가열된 금속에 물을 끼얹은 듯한 소리와 함께 푸른 연기와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검의 표면이 더더욱 붉어지면서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크윽..."
크루는 얼굴을 찌푸리며 결국 검을 놓아 버렸다. -텅 검은 바닥에 떨어져서도 피를 더 원하는 듯 부르르 떨고 있었다. 크루는 예상했다는 듯 기분나쁘게 검을 발로 밟아버렸고, 레노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뜨고 물었다.
"크루, 이거 뭐야?"
"... 젠장... 블루 슬레이어(blue slayer)"
"그, 그게 뭔데?"
이름을 들은 순간, 레노도 짐작을 했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크루는 검에서 발을 떼고 거꾸로 쥐어올리며 천천히 말했다.
"푸른사람의 피를 태워버리는 블러드 실버(blood silver)로 만든 무기지. 유명한 푸른사람 사냥꾼이라면 필수품이지."
-탕!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벽에다 검을 꽂아버리곤 무서우리만치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내구도와 절삭성 모두 특1급이지. 풀 플레이트 메일도 소용없어. 또 하나 좋은거 알려줄까? 블루 슬레이어는 붉은 사람과 너같은 테이루에게는 더 많은 힘을 주지. 크큭... 어쩌면 이게 네 운명인지도 모른다. 푸른 사람 사냥꾼..."
"아니야..."
"아니, 네 운명이야. 아마 이 검에 제일 먼저 죽는 푸른 사람은 내가 되겠지"
"아니야..."
레노의 작은 어깨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툭, 투툭 바닥에 눈물이 떨어졌다. 레노는 마침내 온몸을 들썩이며 울고 말았다. 아이답지 않던 레노가 눈물을 뚝뚝흘리며 힘겹게 부정의 절규를 외쳤다.
"아니야... 아니라구!"
"..."
크루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 해가 지기에는 일렀지만 그는 자신의 클레이모어(claymore)를 들고 나갔다. 레노는 홀로 남아 계속 눈물을 흘렸다.
'아닐거야...'
[뭐가?]
'난... 난!'
[테이루, 붉은사람, 푸른사람의 반쪽. 푸른사람 사냥꾼의 아들]
'... 아니야! 난 테이루긴 하지만.'
[하지만? 결국 넌 푸른 사람을 죽이게 될거야. 네 의지든, 세상의 뜻이든...]
'그, 그래... 그들은 나를 천대하고 짓밟았어! 하지만 난 그들을 지키고! 꼭 인정받고 말겠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어차피 더러운 족속들, 짓밟으면 그만이야. 그들이 그러했듯이.]
'...'
[넌 태양을 동경하지? 푸른사람에겐 태양은 경외의 대상이야. 모두들 두려워 하지. 아니, 태양 아래 움직이는 살아있는 붉은사람들을 두려워 하는 것이지. 하지만 넌 그런 모습을 동경해. 그들중의 하나가 되려하고 있어]
'... 하지만...'
[하지만 뭐? 크루, 그녀석이 맘에 걸리나?]
'...'
[크큭... 네 기분이나 마음정도야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읽어볼 수 있어. 놀라워 할 것 없다고.]
'어쩌면... 너는 나일지도 모르겠다.'
[너? 내가 너라구?]
'나의 억눌리고 짓밟힌 마음, 그게 너일거야. 그래, 너일거야'
[후후...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어쨌든 좋아. 우린 곧 만나게 될거야.]
"으악!"
-헉 헉 거친 숨소리를 내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싸구려 양초 하나 켜놓지 않아 새까만 어둠만이 두눈에 들어왔다. 방바닥에 웅크린 몸을 펴려니 약간 뻐근했다. 꽤나 오래 잔 것 같았다.
"꿈이었나... 그렇겠지... 내가 푸른사람 사냥꾼이라니..."
레노는 옷을 추스리고 자신의 검을 힘없이 땅에 질질끌며 바깥으로 나섰다.
"크루..."
바깥으로 나오자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마을의 모든 것을 하얗게 밝혀주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태양빛 처럼 강렬하게 레노의 눈을 강타했다. 찔끔, 눈물이 나왔다. 눈을 사악 훔치고 나니 마을의 사람들이 보였다. 이젠 자신에 대해서 신경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좋군..."
-그그극 검이 땅을 거칠게 긁어댔다. 하지만 레노에겐 가려운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듯한 소리로 들렸다. 그 시원함이 절정에 다다르자 마침내 크게 노래마저 부르며 신나게 달려나갔다.
푸른 달이 떠오르고
푸른 기운이 충만한 때
달은 차고 별은 기운다
시퍼런 강을 타고 흐르는
아름다운 달빛
아침엔 사라질 지라도
어둠을 밝히는 둥근 달이
푸른 만월이 이 세상을 비추는구나
"으아아!"
검푸르게 잠긴 산을 향해 목이 터져라 외치고 털썩 주저앉은 레노의 눈동자에는, 보랏빛 눈동자 한가운데에 차갑도록 새하얀 보름달이 떠올랐다. 시리도록 차가운 빛... 그리고 왠지 모를 따스한 바람.
매일같이 겪었을 일임에 틀림이 없을 텐데... 레노에겐 모든게 새롭게 느껴졌다. 맨 처음 대지를 덮은 어둠, 맨 처음 떠오른 달빛, 맨 처음 불어온 바람, 맨 처음 부른 노래...
"후... 아...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내쉰 레노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검은 바다에 뿌려진 유리조각이 아름답게 빛났다. -레노는 처음으로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느꼈다.
"나는 푸른 사람이다! 나는 푸른 사람이다!"
"레노?"
"아... 크루... 여긴 무슨 일이야?"
미친 듯 외쳐대던 레노의 앞에 마치 어둠이 토해내듯 크루가 나타났다. 크루는 싱긋 웃으면서 -레노에겐 멋진 비웃음으로 보였다-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 뒤엔 그 보다 조금 작은키의 사람이 서있었다. 하지만 두터운 로브를 입고 후드까지 푹 눌러쓴 상태여서 얼굴은커녕 성별조차 분간할 수가 없었다.
- 쳇 두 놈(?)이서 내가 지랄하는 걸 다 봤다는 말이지... 레노는 답지않은(?) 아이다움을 발휘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인간이란 족속의 호기심이란 것은 멈출줄을 몰랐다.
"누군데?"
"응, 내 친구이자... 푸른 사람들의 수호자."
"푸른 사람들의... 수호자?"
레노는 그 이름을 되새기며 숨겨진 기억의 계곡에서 그와 같은 이름을 캐내어 보려 했다. 하지만 레노의 복잡무쌍한 고뇌의 표정을 먼저 읽어낸 크루의 설명이 빨랐다. - "일론드"
"아! 일론드?!"
레노는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이미 그에게 가있었지만) 그... 로브를 뒤집어쓴 자, 일론드에게로 돌렸다. 일론은 후드를 걷어내며 인사했다.
"안녕, 레노. 오면서 크루에게 이야기 들었어. 당차고 용감한 아이라면서? 반갑다. 설명 들어서 알겠지만... 난 일론드이라고 해"
레노는 일론이 내미는 손을 잡기 전에 일단 의심을 가득 품은 눈을 크루에게 돌렸다. - 저 새끼가 날 좋게 말할 리가 없는데? - 물론 레노의 예상은 정확했다.
"야, 일론드. 내가 언제 그랬냐. 띠껍고 겁없는 멍청이랬잖아"
"에이, 왜 그래. 크루.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그런말을 하면 쓰나. 좋게좋게 가자고"
일론드는 싱긋 웃으면서 손을 설레설레 흔들었다. 로브자락에 가려 보이지 않던 주렁주렁 달린 장신구들이 -잘그렁 왈그렁 맑은 금속성 소리를 냈다. 그의 은빛 머릿결에 어울리는 은제 장신구들이 달빛을 반사해 그렇지 않아도 하얀 그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었다. 하지만 보통사람이라면 초라하리만치 파리해 보였을 텐데 그의 얼굴은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런 그를 멍하니 쳐다보던 레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일론드에게 물었다.
"당신이 정말로 푸른 사람의 수호자, 일론드가 맞아요? 정말로 맞는거에요?"
"그래. 내가 일론드란다. 레노"
일론드는 부드럽게 웃으며 레노를 안아올렸다. 이미 안아줄만한 나이도 지났고, 게다가 안기는걸 싫어하는 레노로서는 당연히 거절해야 했겠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그러한 생각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레노는 잠깐동안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끝났을땐 이미 레노는 잠든 후 였다.
"일론드, 잘 왔네. 그동안 별일은 없었지?"
"네, 뭐 붉은 사람들의 추적이 더 심해졌다는 것 외에는..."
"우리도 들었네, 현상금이 두배로 늘었다며? 하기사 그런 현상금 사냥꾼들 자네에게 위협이 못 될테지만..."
촌장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탁자에 놓인 '물건'을 내려다 보았다. 검은 천에 둘러싸인 그 '물건'은 어둠속에서도 조용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촌장의 눈빛이 그 빛에 살짝 겁을 먹은 듯 사그라 들자 일론드는 그 '물건'을 다시 품에 넣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시다시피 이 일대 어딘가의 지하에는 우리 선조들께서 만드신 팔라니아 Falarnia 가 잠들어있습니다. 이것, 팔라이나 오브 Falarnia orb 는 절대병기 팔라니아를 깨우는데 쓰이는 동력원이지요. 그것만 다시 움직일 수 있다면 우리 푸른 사람들은 붉은 사람들의 광적인 살인행위에 복수를 해줌은 물론..."
길게 말을 이어가던 그는 차가운 밤공기를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시원한 기운이 폐부에 스며들어 뇌까지 파고올라갈 긴 시간... 이 지나고 일론드는 이야기를 이었다.
"우리 일족의 안전도 영원히 보장될 수 있습니다."
"알고 있네..."
-파칫! 일론드의 눈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그 불꽃은 촌장의 눈을 살라먹을 듯 날름거렸다. 그의 주먹이 탁자를 강타했다. -꽝!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허락을 해 주시지 않는 겁니까!"
"그건 안돼! 조화와 균형을 생각하신 선조들께서 묻어두신 것이야. 우리 선조들께서 하신 일이 틀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그만두게!"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조화와 균형?! 개나 갖다 줘버리십시오! 균형과 조화라면 지금 저 붉은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려도 맞추기 힘들 마당에, 예?! 어째서 허락을 하지 않으십니까!"
"..."
. . .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르고, 두사람은 아무 말도 않고 서로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 먼저 돌아선 것은 일론드였다. 일론드는 뚜벅뚜벅 거친 걸음으로 촌장의 집을 나섰다.
새까만 어둠속으로 해가 조금씩 황금의 머리칼을 흩뿌릴 무렵이었다. 그 햇살에 눈부심과 동시에 욕지기를 느끼며 일론드는 마을의 서쪽 산봉우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