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게송으로 부처님 덕을 찬탄함
(덕(德)이라 함은 십방의 모든 생명성품이 모여 하나로 이루어지는 마 음을 말함니다)
참고)우리가 흔히 덕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십방의 어디곳에 가더라도 신뢰심이 있고
후덕하며 모든이들이 따를 수 있는 품위를 지닌 인격체를 德(덕) 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십방중 어느 한방향에서나 한굳데에서 후덕함과 신뢰심등 믿음의 품위가 없으면
덕이 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람이 제일 어려운것이 덕이 있는 사람이 되는게
제일 어렵습니다.
5) 북방의 사자보살의 찬탄
참고) 그러므로 게송으로 부처님 덕을 찬탄함이니 십방의 동 서 남 북 그리고 이 사방을 이어주는 동북 동남 남서
북서 4 곳 그리고 사방팔방이라 하는 평면이니 상화 가 연결되어 입체의 공간이 형성되어지니
총 십방세계의 덕을 해당 방위에서 활동하는 보살들이 게송으로 찬탄하는것을 말 합니다.
이번에는 십방중 5) 의 4번째 북방의 보살찬탄 부분을 공부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상하 사방 사유 의 십방은 그러므로 3 차원 세계로서 입체적 공간으로 부피가 있는 삼차함수 세계와 같읍니다.
이를 위도, 경도, 황도 라 하는 것이니 세가지 교착점을 중심으로 잡고 회전하고 굴러가는
빛의 세계를 의미함인데 이를 삼승을 탄타 , 삼위일체다, 삼신이 운동한다, 모두가 신의 자손으로 삼세를 영위한다
이렇게 표현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생명성품이 십방에 함축하여 시방을 이루는
소식을 다 몸에 내포하고 함축해서 같음의 의지만큼 생각을 내는 마음꺔냥만큼으로 자기 생명을 여래행으로 굴려 같은 인연에 따라 무위적 차별로서 세상이 나왔다 들어갔다 없어졌다 또 생기고 이렇게 거듮함을 다 보고 아시고 하는 분이 스스로 여래행을 하는 우리 중생들이기도 합니다, 이를 일께워주기 위하여 엄정하게 빛이 발하는
인과응보현상을 설 하시는 것을 화엄경이라 이름합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4 계절의 봄 여를 가울 겨울로 한바퀴 돌아온 1 년 주기 공전의 마지막
만 생명이 잠복한 기운의 빛을 행하므로 십방이 한몸과 같은 법의 일승을 내제한 총괄적으로 형성한 몸과 같으므로, 겨울의 북방은 봄 여름 가을 로서 다 이루어진 과정이 다시 물로 잠복하여 일체의 함의를 다 저장하고
움추리고 있는 생명성품을 의미하니 십방을 거슬러 다시 편안하게 주어져 빛을 관찰하는 보살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방의 경과와 과정을 죄다 관찰하였으니 함축하여 이 관찰이치를 법이라 하여, 비로자나일승의 법을 대위한 보살중 북방 보살이 법을 표하기에 사자후 보살이라 하여
북방을 대위하여 중생제도를 행하는 방향이 북방사자보살 이라 하는 것입니다.
선지식인들에게 법을청할때에는 항상 "법을 청하옵니다" 하는 것에 사자후를 설 하옵서소 하는 것과 같음으로
비유해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爾時衆中에 復有菩薩摩訶薩하니 名獅子奮迅慧光明이라
이시중중 부유보살마하살 명사자분신혜광명
이때 대중들 가운데에 다시 보살마하살이 있으니 이름이 사자분신혜광명 보살이라
참고) 보살마하살이란 보살과 다른 것은 아닌데 아주 큰 보살님이라 할 수 있읍니다.
또한 이름이 사자분신혜광명이라 하는것은 보살은 어떠한 보살이라 할 지라도 음성이나 모습을
지니지 않읍니다. 그러므로 보살이라 지칭할 때는에 할 수 없이 방편으로 이름을 붙여 보살을 지칭함인데
이러한 연유로 이름이 사자분신혜광명이라 함인 사자가 표효 하면 아주 크고 신속하게 다 사방이 들리게
소리를 내고 지혜의 광명으로 소리를 내어 법을 표하므로 사자분신혜광명이라 이름한다 이렇게
표현 하셨음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承佛威神하사 徧觀十方하고 而說頌曰하시니라
승불위신 변관십방 이설송왈
부처님의 위신을 이어받아 펼쳐보이시사 두루십방을 관찰하고 이에 찬탄하시니라.
毘盧㵂那佛이 能見正法輪하시니
비로자나불 능견정법륜
십방을 함축하여 하나의 몸으로서 법을행하는 부처님이 능히 바른 법을 굴리시니
참고) 정법, 정각은 보는 성품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는 보는것이지 스스로 행하는 것은 아닌 것이
우리 부처님품성임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서로 같은 부처님인데 아무리 우주법계의 허공 십방을
몸으로 하는 법의 부처님이라 할 지라도 우리와 같은 부처님 각 개별 부처님도 다 이 비로자나 품성이
내재 되었으므로 개별적 부처님(예를 들면) 을 당시 비로자나 부처님의 능력으로 마음대로 행할 수 가
없으며 그냥 이러한 이치를 보는 것을 우리 마음성품이라 하는 것임을 (불성)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방편상 이름이 비로자나부처님일 뿐 입니다, 실제로는 모습과 음성 등은 전혀 없는 부처님이기는 매 한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여래 이시지요, 어느누구나 스스로 여래행을 행하신다 ... 이를 다 보고 안다 하는 것을
견성한다 이렇게 됩니다.
부처님의 삼불은 법모여래부처님 비로자나, 응보 부처님 노사나부처님, 화신 부터님 석가모니 부처님 이렇게
이름합니다.-헙장-
法界諸國土에 如雲悉周徧이로다
법계제국토 여운실주변
법계 모든 국토에
(국토는 모든 법계에 몸이나 모습 지위를 가진 생명성품) 실제로 같음의 구름이 주변에 두루 하였음이로다
- 나무아미타불- 합장
참고) 구름도 각기 제각기 인과율의 깜냥만큼 같음으ㅗ 인과율로 나타나 화 해서 드러낸 법이므로 이를 같음의 구룸으로 실제 주변에 다 두루 함이로다 하며 찬탄 하는 게송인 것입니다.
十方中所有 諸大世界海에
십방중소유 제대세계해
십방중에 다 있고 모든 크게 변화하는 세계 바다에
佛神通願力으로 處處轉法輪이로다
불신통원력 처처전법륜
부처님이 원하고자 하는 원의 힘으로 펼쳐 드러내 통함이므로 곳곳마다 법의 바퀴를 굴림이로다.
- 나 무 아 미 타 불 - 합장-
참고) 우리들 중생들도 모두 각기 마음의 바퀴하나를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읍니다.
바퀴가 굴러보았자 같은것이 반복 바퀴가 굴러갑니다, 이렇게 굴러가는 것을 윤회라 하고
굴러가는 것을 수행하고 덕을 쌓고 공덕이 있으면 깨치는데 이렇게 되면 부처님의 여래행을 한다는 것을 직접 보는 자리이니 그러므므로서 윦회나 생사를 자유스럽게 초월한 생명불성으로
영원성을 유지하고 상주 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중생들은 각기 법의 바퀴( 비로자나 법 붚성을
다 몸과 마음에 지니고) 를 스스로 굴려 마음깜냥 만큼 이렇게저렇게 인연을 형성하여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一切諸刹土의 廣大衆會中에
일체제찰토 광대중회중'
일체 모든 가득찬 국토의 광대한 무리대중들이 만나는 중에
名號各不同하사 隨應演妙法이로다
명호불부동 수응연묘업
이름이 각기 같지 않게 하사 묘한법으로 멀리 흘러가며 응 하여 따름이로다
- 나 무 아 미 타 불- 합장
참고) 수응연묘업 이로다 하는 것은 소개가 필요합니다.
묘한법으로 멀리 흘러간다 함은 법이라 함은 찰나지간의 빛의 생명운동을 비추는 것이므로
생명성품 제 각기 다 다르고 순간 찰나 가득찬 것으로 모두다 죄다 같음으로 생명성품의 의지에 같게 다 비추기 때문에 법이 묘하게 흘러간다 하는 것이니
각기 중생들의 생명성품 운동의 의지작용에 따라 각기 비추어주므로 이를 "수응"(隨應) 한다 하여
부처 여래께서 먼저 행하고 구원하고 제도 해 주는 법이 없읍니다, 중생들이 자신들의 각기 의지한 바대로
즐거이 행하고 자 하는 것을 보고 그와 같음으로 응하여 비추어 주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자리는
원래 조용하고 무엇도 하지 않으면 보는 성품으로만 상주 하고 계신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如來大威力이 普現願所成이라
여래대위력 보현원소성
여래의 큰 위력이 원하는 바에 따라 이루어 널리 나타남이라.
참고) 보현(普現) 은 인과율 대로 응하여 생명성품 을 드러내게 하는 보현보살을 말 합입니다.
지금 이 여래현상품 은 부처님을 대위하여 보현보살님께서 이 를 설하고 계시는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현 보살을 찬탄하고 게송을 하는 것입니다.
一切國土中에 妙音無不至로다
일체국토중 묘음무불지
일체의 국토가운데에 ( 몸이나 지위 모습 형태를 지닌것을 국토) 묘한 소리가 이르지 않음이 없음이로다
- 나 무 아 미 타 불 - 합장-
참고) 모든 빛 운동은 (생명성품 운동) 소리를 제각기 내고 발생시키므로 이 소리를 보시는 보살님께서
인과응보데로 자연하게 각기 그와 같음으로 빛을 비추신다 하는 것을 "묘음무불지"라 합니다.
佛身等刹塵하사 普雨於法雨하사대
불신등찰진 보우어법우
불처님 몸은 미진으로 가득참으로 티끝과 같으시사 법의 비를 널리 두루 내리시되
참고) "등진찰: 은 관찰하여 지수화풍 의 빛을 보는 것을 말씀하시는데, 석공관이라 ( 공간을 분석하는
수행중의 보이는 형상) 빛을 잘개 쪼개면 첮째 우모진 (소털만큼 가늘게 보임), 두번째 양모진 ( 양의 털 처럼
더 가늘게 보임) ,세번째 토모진 (토끼털 처럼 가늘게 보임) 으로 이 세가지 빛의 모습이 가득차 동등하게
펼쳐 져 있음을 부처님의 몸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
無生無差別하야 現一切世間이로다
무생무차별 현일체세간
태어남도 생김도 없고 차별도 없음이라 일체세간에 그렇게 나타남이로다
- 나 무 아 미 타 불- 합장-
無數諸億劫 의 一切塵刹中에
무수제억겁 일체진찰중
숫자로 헤아릴수 없이 억겁의 일체의 티끝으로 가득찬 가운데에
참고) 무수제억겁이라함은 불성인 여래작용이 변화를 타는 윤회를 하게되면 숫자로 헤아릴 수 도 없는
억겁세월인데, 윤회의 본질을 알고 보게되면 시간의 장에를 타지 않고 정지 되어있으므로 지금 이 자리에 영원하게 상주부동하고 고요하게 있는 성품으로 금강좌 하는 것을 불성이라 이름합니다. 이리 저리 굴려서 통찰 하시기 바랍니다.
往昔所行事를 妙音咸具演이로다
왕석소행사 묘음함구연
지난 옛적에 행한 바의 일들을 미묘한 소리를 함축하여 갖추어서 흘러감이로다
- 나 무 아 미 타 불 - 합장-
참고) 미묘한 소리는 빛이 운동하고 일어나면 동시에 함께 일어나는 것이 소리이고, 또 냄새를 남기므로
소리와 냄새는 인과율을 지닙니다. 그러므로 말도 냄새도 잘 나타내애 합니다.
생각이 바르면 소리도 냄새도 잘 나타나고 좋게 인과율을 맺는 것이니 복덕을 받는 다는 것이므로
향적보살이나 관세음보살님게 복을 빌면 이를 다 보고 알므로 중생의 원하는 바에 따라 , 근기에 따라 그렇게
소원을 성취하게 해 준다 하는 것읍니다, 단 아주 진정성있게 기도하고 발원해야 합니다, - 합장-
十方塵國土에 光網悉周徧이어든
십방진국토 광망실주변
십방의 미진한 터럭같은 지수화풍의 빛으로 형성된 국토에 광명의 그믈이 주변에 실제로 두루함이어어든
참고) 빛의 운동은 광명의 (마음자리) 그물에 빠져나갈 수 가 없음을 말합니다.
光中悉有佛하사 普化諸群生이로다
광중실유불 보화제군생
광명중에 실제로 부처님께서 있으시사 널리 화 하여 (인연대로) 모든 무리가 생겨남이로다
- 나 무 아 미 타 불 - 합장-
佛神無差別하야 充滿於法界하사
불신무차별 충만어법계
부처님이 펼쳐 보이심은 차별이 없음이라 법계에 이와같이 충만 하사
참고) 누구는 복되게 잘 살고 , 누구는 어렵고 가난하게 태어나고 하는 것은 맨처음 생명운동 스타트는
인과율대로 공정하게 차별로 출발하니 이를 공정한 차별이라 하여 이를 평등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현실세계에서 평등이라는 것은 공정한 차별로 나타나는 것이 평등이지
모두가 됫박의 쌀 처럼 모두 동등하게 싹뚝잘라 같게 하는 것이 평등이 아닌 것입니다.
이를 무차별이라 이름하는 것이니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能令見色身하야 隨機善調伏이로다
능영견색신 수기선조복
O 으로 본 빛의 몸을 능히 봄이라 근기에 따라 잘 조복하여 같음을 행함이로다
- 나 무 아 미 타 불 - 합장-
三世一切刹에 所有中道師의
삼세일체찰 소유중도사
삼세일체의 가특한 찰나지간에 중도의 스승이 이른바 있음으로
種種名號殊를 爲說皆令見이로다
종종명호수 위설개영견
가지가지 뛰어나신 이름으로 불리기를 모두 다 O 을 보시고 이를 설함이로다
- 나 무 아 미 타 불 - 합장-
過未及現在에 一切諸如來의
과미급현재 일체제여래
과거에 이루거나 미치지 못한 것은 현재에 다 있음에 일체이 모든 여래의
(전생을 알지 못하는 것도 전부 현재 지금이 다 들어있음)
所轉妙法輪을 此會皆得聞이로다
소전묘법륜 차회개득문
이른바 묘한 법륜을 굴린다는 것은 이 법회에서 다 들음을 얻을 수 있음이로다
- 나 무 아 미 타 불 - 합장-
다음은 6) 동북방의 법해 보살 찬탄게송편을 계속 소개 하겠읍니다 - 합장- 행불하십시요.
|
첫댓글 지인께서질문하셨읍니다,: 그렇다면 부처님 말씀대로 인과율 대로 인연되어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가난하고 불리한 환경에
사는 사람등으로 차별화 되어 사는 사람이 이러한 부처님 말씀의 공정한 차별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신다면, 그러한 환경에서 불리함을
자각하고 인식함은 좋은데, 사회적 통념상의 지각하는 분위기에 늘 위축되고 살아야 하는 것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읍니까? 하는 회의감을 의문하여 말씀하셨읍니다.: 이에 대하여 간단하게 답변할 수 있다면, 그러한 인식은 사람은 반만 보고 내는 인식체라서 진리의 본질과
는 다르기 때문에 이를 자세하게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생존하실때 이러한 질문을 사부 대중들에게 많이 들었고 답변한 사실이 있읍니다.
이것이 바로 인도 바라문계통 힌두니즘의 카스트 제도를 혁파한 원래 차별지어지는 고정된 것은 없다고 설파하여 바라문과 불교가
분리되어지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원래 가난과 부자 불리함과 유리함 죽음과 삶, 늙고 병듬 등은 없는 것입니다. ,무슨까닭인가?
법의 본질은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며 부자가 무엇을 부자라하는지를 모르는 자리입니다, 그러면서 늘 깨어나 있는 생명성품을
지니는 것이 있는데 이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가만히 인생지락의 희로애락우비번사 를 잘 관찰해 본다면, 어떠한 순수하고 청정한 경지에 들어가 본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진리를 견하는 부처님 입장의 말씀을 가지고 말입니다.
어느덕 깨어나게 되면 스스로 내가 고생을 합니다, 가진것 없고, 늘 사회형편상 잘 못한게 많아 가족한테도 주변인연에게도
늘 소원함을 당해야 하고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눈치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차별되었읍니다.
이것은 제 경험입니다, 매일 시켄트 600 포를 하루 4 대 정도를 새벽에 일어나 혼자 (돈이 없었으므로) 다 하차하고 내려주어야만
해당 화물차는 차를 비우고 다시 운송하러 다른 거래처에 가야겠지요, 한포당 무게가 40 키로 입니다, 3 시간 동안 세대를
내려야 합니다, 당시 하루에 세대를 팔아야 하는 상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시멘트 경험도 없는 저로서는 마음은급하지
빨리 무거운 중량을 전부 힘으로 해결해야 했읍니다, 울었읍니다, 하도 힘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힘이드는 과정에서
이를 마땅하게 받아들이면 , 제 마음이 조용해집니다, 고요하고... 무엇이 힘이드는것인지 고통인지에 대하여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상태로 빠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읍니다, 우리가 남보다 잘 산다는 여러가지 인식은 원래 그런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 전혀 인식이 안 되는
고유한 자리가 내 정신에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 사는것이 무엇인지, 고통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자세하게 관찰하면 무엇을 잘 사는것인지 무엇이 고통인지 그 의식이나 감각상태가 반영이 안되는 상태로 주어질때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기인하는 정신적으로 인식하는 여러 지각상태는 여기에 마땅하게 인정한다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미 잘 산다는 것은 잘 사는 것이 아니고, 고통이라는 것도 이미 고통은 마땅하다는 사실로 받아들일때 잘 삶과 유불리의
정의적 관점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의 정신체계로 진행하는 것은 반드시 고통이 아님의 반대 개념이 동시에 와 주기 때문에
우리의 감성적인 반만보고 분별하는 것을 상계하여 O 으로 청정하게 해 주는 본질마음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느길을 걸어가는데 소아마비 걸린 젊은이가 길을 막으며 질문하였읍니다, 내가 다른사람보다 장애를 지니고 있고
내가 다리를 저는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아버지 어머니의 죄입니까 나의 죄입니까? 이때 에수님은 길위의 작대기를 가지고
생각하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네 부모죄도 아니고, 네 죄도 아니며 하느님의 뜻이니라. ... 이 말씀을 들은 젊은이는 이렇게 말 합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께서 저를 고쳐주소서... 이에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여 고쳐주셧읍니다.
장애이고 비장애이고 그런 의미는 마음작용에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뜻으로 하나님은 장애인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말 합니다.
단지 인과율인데 이는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소식을 동시에 내려주신 것이므로 O 적인 은총입니다. 이를 평등성지라 이름합니다.
우리가 희노애락우비고뇌는 착각입니다.반드시 반대개념 O 으로 굴러가는 과정이지 고정된 고생같은 것은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하면 반드시 비고생이 동시에 와 있음을 알때 우리는 유불리에 대하여 마음이 쫏겨가서는 아니된다 하는 것입니다.
고생하면 고생자체가 되면 달리 고생이라는 것은 없는 이치인데, 우리마음의 본질 이 그렇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햇기
때문에 일어나는 고생에 집착하는 결과입니다. 단지 고생하는 자에게 고생하지 않고 유리한 자가 저 사람은 가난하고 못살고
그렇게 여기면서 무시하는 자는 반드시 다시 전도하여 집접 당사자는 그런 인과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래 주어진 부자가 없고 본래 고생만 하는자로서 주어진 것이 없읍니다, 돌이켜 다시 생각만큼 제공해주는 영견이
빛으로 늘 비추어주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고생으로 보는자가 윤회할 뿐입니다, 윤회해서 상대적 개념으로 서로 상계해야
여래행을 하는 이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 여호아선도 그렇게 행함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무위적 차별이고 인과의 의미로서 극복하게되면 본연의 자리는 고생과 비고생, 잘사는것과 못삶은 원래 없는 것을
발견하는 것일때, 청정한 정신의식이 깨어난다, 이것을 종교의 본질로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유불리에 빠지면 유불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주)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 말씀을
잘 헤아려 보아야 하고, 원래 고생 비고생 잘살고 못 삶, , 윤회가 카스트 제도처럼 따로 고정된 것은 없다 하신 말씀을
잘 헤아려 보시며 이러한 속세간의 개념을 잘 통찰하면 소기의 답은 스스로 찾아내는 과정이 중요하다 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과정이 전부 수행하고 공부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므로 출세간이나 속간이 따로 구별 될 수 없는
상태에서 정신혁명을 이룰때 대인이 되고 장부가 되며 평등성지를 보는 자가 된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것입니다.
남을 무시하면 뒤집어 무시를 당하는 인과 작용이 여래행입니다, 이 여래행을 어느누구나 그 마음본질에 다 지니고 스스로
의지 작용을 행하신다는 것을 관찰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부라 생각하고 있읍니다,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현명하신 질문에
어리석은 답변 을 또 내놓습니다, 잘못답변했으면 혜량하시길 - 합장-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