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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풍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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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佛會♡이야기 화엄경: 제6권 二 여래현상품11,게송으로 부처님 덕을 찬탄함 5)북방의사자보살편
이두창 추천 0 조회 86 24.02.11 21:57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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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4.02.12 08:34

    첫댓글 지인께서질문하셨읍니다,: 그렇다면 부처님 말씀대로 인과율 대로 인연되어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가난하고 불리한 환경에
    사는 사람등으로 차별화 되어 사는 사람이 이러한 부처님 말씀의 공정한 차별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신다면, 그러한 환경에서 불리함을
    자각하고 인식함은 좋은데, 사회적 통념상의 지각하는 분위기에 늘 위축되고 살아야 하는 것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읍니까? 하는 회의감을 의문하여 말씀하셨읍니다.: 이에 대하여 간단하게 답변할 수 있다면, 그러한 인식은 사람은 반만 보고 내는 인식체라서 진리의 본질과
    는 다르기 때문에 이를 자세하게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도 생존하실때 이러한 질문을 사부 대중들에게 많이 들었고 답변한 사실이 있읍니다.
    이것이 바로 인도 바라문계통 힌두니즘의 카스트 제도를 혁파한 원래 차별지어지는 고정된 것은 없다고 설파하여 바라문과 불교가
    분리되어지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원래 가난과 부자 불리함과 유리함 죽음과 삶, 늙고 병듬 등은 없는 것입니다. ,무슨까닭인가?
    법의 본질은 가난이 무엇인지 모르며 부자가 무엇을 부자라하는지를 모르는 자리입니다, 그러면서 늘 깨어나 있는 생명성품을
    지니는 것이 있는데 이를 의미합니다,

  • 작성자 24.02.12 08:40

    우리가 가만히 인생지락의 희로애락우비번사 를 잘 관찰해 본다면, 어떠한 순수하고 청정한 경지에 들어가 본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진리를 견하는 부처님 입장의 말씀을 가지고 말입니다.
    어느덕 깨어나게 되면 스스로 내가 고생을 합니다, 가진것 없고, 늘 사회형편상 잘 못한게 많아 가족한테도 주변인연에게도
    늘 소원함을 당해야 하고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눈치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차별되었읍니다.
    이것은 제 경험입니다, 매일 시켄트 600 포를 하루 4 대 정도를 새벽에 일어나 혼자 (돈이 없었으므로) 다 하차하고 내려주어야만
    해당 화물차는 차를 비우고 다시 운송하러 다른 거래처에 가야겠지요, 한포당 무게가 40 키로 입니다, 3 시간 동안 세대를
    내려야 합니다, 당시 하루에 세대를 팔아야 하는 상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시멘트 경험도 없는 저로서는 마음은급하지
    빨리 무거운 중량을 전부 힘으로 해결해야 했읍니다, 울었읍니다, 하도 힘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힘이드는 과정에서
    이를 마땅하게 받아들이면 , 제 마음이 조용해집니다, 고요하고... 무엇이 힘이드는것인지 고통인지에 대하여 어떤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상태로 빠지는

  • 작성자 24.02.12 08:47

    것입니다, 이와 같읍니다, 우리가 남보다 잘 산다는 여러가지 인식은 원래 그런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 전혀 인식이 안 되는
    고유한 자리가 내 정신에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살 사는것이 무엇인지, 고통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자세하게 관찰하면 무엇을 잘 사는것인지 무엇이 고통인지 그 의식이나 감각상태가 반영이 안되는 상태로 주어질때가 있다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기인하는 정신적으로 인식하는 여러 지각상태는 여기에 마땅하게 인정한다는 것으로 여긴다면
    이미 잘 산다는 것은 잘 사는 것이 아니고, 고통이라는 것도 이미 고통은 마땅하다는 사실로 받아들일때 잘 삶과 유불리의
    정의적 관점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의 정신체계로 진행하는 것은 반드시 고통이 아님의 반대 개념이 동시에 와 주기 때문에
    우리의 감성적인 반만보고 분별하는 것을 상계하여 O 으로 청정하게 해 주는 본질마음이 있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어느길을 걸어가는데 소아마비 걸린 젊은이가 길을 막으며 질문하였읍니다, 내가 다른사람보다 장애를 지니고 있고
    내가 다리를 저는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아버지 어머니의 죄입니까 나의 죄입니까? 이때 에수님은 길위의 작대기를 가지고
    생각하시다가

  • 작성자 24.02.12 08:54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네 부모죄도 아니고, 네 죄도 아니며 하느님의 뜻이니라. ... 이 말씀을 들은 젊은이는 이렇게 말 합니다.
    그렇다면 주 예수께서 저를 고쳐주소서... 이에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여 고쳐주셧읍니다.
    장애이고 비장애이고 그런 의미는 마음작용에 본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뜻으로 하나님은 장애인을 창조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말 합니다.
    단지 인과율인데 이는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소식을 동시에 내려주신 것이므로 O 적인 은총입니다. 이를 평등성지라 이름합니다.
    우리가 희노애락우비고뇌는 착각입니다.반드시 반대개념 O 으로 굴러가는 과정이지 고정된 고생같은 것은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하면 반드시 비고생이 동시에 와 있음을 알때 우리는 유불리에 대하여 마음이 쫏겨가서는 아니된다 하는 것입니다.
    고생하면 고생자체가 되면 달리 고생이라는 것은 없는 이치인데, 우리마음의 본질 이 그렇게 주어져 있다는 것을 보지 못햇기
    때문에 일어나는 고생에 집착하는 결과입니다. 단지 고생하는 자에게 고생하지 않고 유리한 자가 저 사람은 가난하고 못살고
    그렇게 여기면서 무시하는 자는 반드시 다시 전도하여 집접 당사자는 그런 인과율을 받아야 합니다,

  • 작성자 24.02.12 09:00

    그러므로 본래 주어진 부자가 없고 본래 고생만 하는자로서 주어진 것이 없읍니다, 돌이켜 다시 생각만큼 제공해주는 영견이
    빛으로 늘 비추어주기 때문입니다. 고생을 고생으로 보는자가 윤회할 뿐입니다, 윤회해서 상대적 개념으로 서로 상계해야
    여래행을 하는 이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 여호아선도 그렇게 행함은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므로 무위적 차별이고 인과의 의미로서 극복하게되면 본연의 자리는 고생과 비고생, 잘사는것과 못삶은 원래 없는 것을
    발견하는 것일때, 청정한 정신의식이 깨어난다, 이것을 종교의 본질로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유불리에 빠지면 유불리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주)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이라는 그 말씀을
    잘 헤아려 보아야 하고, 원래 고생 비고생 잘살고 못 삶, , 윤회가 카스트 제도처럼 따로 고정된 것은 없다 하신 말씀을
    잘 헤아려 보시며 이러한 속세간의 개념을 잘 통찰하면 소기의 답은 스스로 찾아내는 과정이 중요하다 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는 과정이 전부 수행하고 공부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므로 출세간이나 속간이 따로 구별 될 수 없는
    상태에서 정신혁명을 이룰때 대인이 되고 장부가 되며 평등성지를 보는 자가 된다

  • 작성자 24.02.12 09:02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것입니다.
    남을 무시하면 뒤집어 무시를 당하는 인과 작용이 여래행입니다, 이 여래행을 어느누구나 그 마음본질에 다 지니고 스스로
    의지 작용을 행하신다는 것을 관찰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부라 생각하고 있읍니다,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현명하신 질문에
    어리석은 답변 을 또 내놓습니다, 잘못답변했으면 혜량하시길 - 합장-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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