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태복음 14:22~27
22절 내용은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도 열 두 바구니가 남는 기적을 베푸신 후의 예수님의 반응입니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보내셨을까요? 재촉하여(아낭카조) 직역하면 ‘강요하여, 억지로 하게 하여’라는 뜻으로, 가기 싫어 머뭇거리는 제자들을 억지로 재촉하여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요한복음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고 난 후, 무리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고 했고, 제자들도 군중심리에 휩쓸려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무리들은 더 이상 빵 문제로 걱정해야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육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고, 이는 은근히 정치적 메시야 왕국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던 제자들의 마음도 술렁이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호히 제자들을 재촉하여 먼저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신 후 무리를 흩어 보내셨습니다. 이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셔야하는 길보다는 자기들의 꿈과 계획을 실현하고자 하는 개인적 부귀영화의 욕심이 더 크게 작용했던 때입니다. 이 두 가지 일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헤어지고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주신 이유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가 가려고 하는 그 길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큰 하나님의 계획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 반대의 행동을 했고, 자기들의 뜻을 따르지 않는 예수님을 훗날 매도하고, 외면하고, 부인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음 생활을 할 때 무리들의 선동이든, 내가 너무 좋아하는 것이든,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것이라 해도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이 내 안에 머물고, 그 생각이 나를 움직이게 하며, 항상 하나님의 생각대로 내 생활에 펼쳐지게 하는 선택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귀한 자녀의 모습을 하나님이 찾으실 수 있는 믿음의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무리들과 제자들은 오병이어 이적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이 오해를 받고 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따로 산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지혜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제자들이 무리들처럼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대로 행동해 나갈 수 있는 눈과 귀와 마음이 생기기를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임을 믿고 확신하는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그 계획을 제자들이 이어나가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에 무리들과는 많이 다른 확신의 믿음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23절의 ‘저녁때까지’는 15절의 “저녁이 되매”와 혼동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5절은 오후 3시부터 해 지기 전까지의 초저녁인 반면, 23절은 해가 진 이후의 늦저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4절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에 있는 제자들의 거리를 “수리를”<여러 스타디온> 요한복음은 “십 여리쯤”<헬라어 원본에는 25스타디온 또는 30스타디온(약5~6km)>, 마가복음은 “바다 가운데”로 기록했습니다. 갈릴리 바다가 길이 21km, 폭이 13km인 것을 보면 제자들은 바다 한 가운데까지 배를 저어간 것이 됩니다. 24절에 ‘바람이 거스르므로’의 뜻은 반대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지형적으로 종종 날씨가 급격히 변화합니다. 그런 기후 때문에 제자들이 고난을 겪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신 이유가 제자들을 살피기 위한 것이라는 시선을 가지게 합니다. 즉 예수님은 언제나 제자들을 세심하게 살피셨던 것처럼 지금 현재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을 세심하게 살피시고, 도와주시기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십니다.
24절에 “고난을 당하더라”는<헬라어 바나사조>“시금석처럼 시험하다”, “심한 고통을 받다”, “고통을 주어 심문하다”, “동요하다”라는 뜻으로 마치 귀신들린 사람처럼 고통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이 어떤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는지 알기 쉽게 잘 표현한 단어입니다. 그들은 북쪽과 서쪽에서 세차게 불어오는 맞바람 때문에 거의 9시간 동안 사투를 벌이며 노를 저은 것이 됩니다.
상상해보세요. 예수님에게 등 떠밀리어 건너가라는 명령에 순종한 결과가 9시간 동안 표현할 수 없는 생사의 위기에 놓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습을 지켜보셨을 것이고, 이 고통 속에서 몸이 상하지 않기를, 또한 주님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열리기를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도와주지 않으시고 9시간 동안 내벼려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을 우리들의 고통당하는 현실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에 순종하는 생활 때문에 겪는 고통입니다. 그 고통에 휘둘리고 있을 때 그 어떤 외침에도 반응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빛조차 보이지 않는 바로 그때 드는 생각들이 (외면하심, 혼자만 사는 듯 하는 것> 바로 현재 제자들의 생각의 마음일 것입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쳐도 계속해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현실의 고통이 고난이라는 단어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고난당한 바로 그 순간 해결해 주지 않으셨을까요? 기도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 어떤 것으로도 부인할 수 없도록 그들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새겨놓으시려 했던 것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님은 밤 4경쯤이 돼서야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밤 사경은 새벽 3~6시 사이의 시간을 말합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은 온 밤을 지새우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정치적인 메시야의 등재의 대한 열망이 변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그 메시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런 예수님을 가르쳐 지키고, 끊기지 않고 전파되게 하기 위한 기도와 편함을 추구하는 사역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을 감당할 감당 해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또한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생각대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서, 또한 그들의 귀와 마음이 굳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현실의 변화를 위해 사랑으로 포용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고난 가운데 처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의 손이 내게 임하게 하고, 하나님 우편에서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입에서 기도하는 이를 위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갈 수밖에 없게 해 주실 것이 때문입니다. 잊지 마세요. 고난당할 때 그 고난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유일한 길이고, 완벽한 길입니다.
26절의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 오셨다.’는 말씀은 만유의 주재이신 예수님의 신성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보여주신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건입니다. 이것은 어떤 과학으로도 재현할 수 없는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통해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메시아이심을 각인 시켜주신 것입니다.
26절에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말한 뜻을 살펴보면 실체가 없는 허상, 곧 망령이나 요괴, 귀신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대한 확고한 믿음 없이 마음속에 잠재해 있던 미신적인 공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예수님을 몰라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헬라어 원문 성경으로 26~27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26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소리쳤다. “유령이다” 그리고 무서워서 크게 비병을 질렀다.
27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들에게 “용기를 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하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용기를 내라<헬라어 달세오> 라는 말을 ‘안심하라’로 해석했는데요, 그 뜻은 ‘안심하라’가 아니라 “기운을 내라, 담대 하라, 용기를 내라”입니다.
절망적인 낙심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담대한 마음으로 용기를 내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용기인가요? “내니”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내니’<헬라어 에고 에이미>는 “나 곧 나다”는 하나님의 이름인 “스스로 있는 자”와 같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워 떨고 있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너희의 미신을 내어던져라. 나는 너의 주요 선생이다. 염려를 영원히 멈춰라”라는 명령하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생활하다가 오늘 본문처럼 갈릴리 바다 한 가운데서 더 이상 가거나 되돌아 올 수도 없는 침몰의 위기의 순간 우리들의 입에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 저를 도와주세요.’ 라고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도, 외면하지도 않으시고 목숨을 대신해 주시는 친구이시거든요. 이 당당함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주향기교회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 우편의 자리에서 증보해주시고 계십니다. 큰 고난이 있어도, 자그마한 어려움이 끊이지 않아도, 괴로운 일이 많아도, 슬픔에서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해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용기를 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히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 구하는 것마다 받고, 찾는 것마다 찾아 소유하고, 두드리는 것마다 열려지는 축복의 생활이 펼쳐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