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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정은 본성이 흉악 난폭하므로 가강은 권하여 치부를 공격하게 하고 인하여 난을 일으키려 하였는데, 가강이 치부와의 원한을 풀게 되자, 그의 화심(禍心)을 풀 길이 없어 불평을 많이 하다가 마침내 가강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전 비전수(前田肥前守) 및 비전 중납언ㆍ중장 정종(中將政宗)ㆍ장강 월중수(長岡越中守)ㆍ흑전 갑비수(黑田甲斐守)ㆍ천야 탄정(淺野彈正)의 부자 등과 더불어 피를 내어 서로 맹세하고, 함께 가강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갈라 가질 것을 약속하였는데, 그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오직 휘원ㆍ금오 등 5ㆍ6인 뿐이었습니다. 맹약은 이미 결정되었으나 지체나 덕망이 막상막하로 서로 누구는 통솔하고 누구는 소속되고 할 수가 없어 비전수ㆍ청정 등 태반이 사읍(私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기해년 9월 9일에 가강이 대판에서 수뢰에게 조알(朝謁)한다는 것을 비전(肥前)의 도당이 미리 알고, 길 왼쪽에 복병하였다가 맞아서 치기로 하였는데, 토견감병(土肩勘兵)이라는 자가 자기가 가강을 찌르겠노라고 나섰습니다. 석전 치부는 이미 청정 등과 틈이 생겼으므로 가강에게 아첨하려고 몰래 편지로써 가강에게 알리니, 가강이 탄정(彈正)에게 물었으나 탄정은 굳이 숨겼습니다. 처음에 수길의 양자 관백이 수길에게 피살되고 탄정이 관백의 도당이라 하여 잡혀 죽게 되었을 때에 가강이 힘써 구해 주어 죽음을 면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가강은 탄정을 심복으로 대접하여 맨먼저 탄정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탄정은 비전과 맹세한 사이이므로 감추고 알리지 아니하자 다음에 위문정(衛門正)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나도 들었소.” 이 사이의 절차는 이미 비전수 조에 나와 있다. 하였습니다. 가강이 크게 노하여 탄정에게 자결하라고 하였더니, 탄정이 말하기를, “수뢰는 비록 소주(小主)이지만 수뢰가 나에게 죽음을 내린다면 나는 마땅히 그 명령을 듣겠소. 그러나 내부(內府)는 비록 대반(大班)이지만 내부가 나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은 나는 따를 수 없소.” 하여, 가강은 마침내 탄정을 축출하여 그의 고을 갑비주(甲斐州)로 돌려보냈습니다.
가강은 또 수길의 유언이라 하여 수뢰의 어미를 아내로 삼고자 하였으나, 어미는 그때 대야 수리(大野修理) 등과 통하여 임신 중이라 거절하고 따르지 않으니 가강은 더욱 노하여 수리를 잡아다가 관동에 귀양보내고 또 도중에서 죽음을 내렸으며, 토견감병(土肩勘兵)도 잡아다가 관동으로 귀양보냈습니다. 그리고 관동의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비전이 올라오는 길목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대판에 있으면서 인심을 진정시켰으며, 그의 맏아들 삼하수(三河守)ㆍ막내아들 일기수(一岐守)로 하여금 복견성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가운데 아들 강호 중납언(江戶中納言)은 관동의 옛 근거지를 지키게 하고, 제 고을로 돌아가 있는 여러 왜장들을 급히 불러 그 거취를 보니, 가강에게 아부하는 자는 곱게 보이려고 하고, 가강의 비위에 거슬린 자는 스스로 밝히려고 하여 한꺼번에 길을 나섰는데, 오직 청정만은 명령을 듣고도 물러가 숨어 있다가 3월이 지나서야 올라왔습니다. 월중수(越中守)는 단후(丹後)의 사성(私城)을 수리하며 말하기를, “이것을 지키면 그만이다. 어찌 내부(內府)에게 쓰이려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런 때에 휘원이 만약 한 발이라도 움직이면 승패는 그 자리에서 결정될 것인데, 두 우두머리가 이미 화목하고 있으니 여러 왜장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인하여 비전 중납언ㆍ축전 중납언으로 하여금 가서 복견성을 지키게 하니 비전은 사양하기를, “태합(太閤)께서 비전수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수뢰를 받들고 대판을 지키라고 한 유언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니 감히 명령을 듣지 못하겠소.” 하였으나, 가강은 굳이 거절하고 듣지 아니하므로 수가는 할 수 없이 복견으로 옮아가 주둔하였습니다. 이전에 수길이 여러 왜장들에게 집을 왕경ㆍ복견ㆍ대판 세 곳에다 지어 주고, 자기를 따라 왕래하면서 살게 하였으나 가강이 대판에 살게 되자 여러 왜장들이 한꺼번에 내려가서 복견이 텅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 가강의 사읍(私邑)은 관동에 있는데 관동에서 왜경까지 먼 데는 20일 이상이 걸리고 가까운 데는 15일은 걸렸으며, 휘원의 사읍은 산양ㆍ산음에 있는데 산양ㆍ산음에서 왜경까지 먼 데는 15일 이상이 걸리고 가까운데는 7ㆍ8일이 걸렸습니다. 왜인들은 모두 말하기를, “가강은 관동에서 왜경까지 쌀가마니로 육로를 만들 수 있고, 휘원은 산양ㆍ산음에서 서울까지 은전(銀錢)으로 바다 다리를 놓을 수 있다.” 하였으니, 옛날에 이른바 중국의 연(燕) 나라ㆍ조(趙) 나라의 수장(收藏)이나, 한(韓) 나라의 경영(經營)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 나머지의 여러 왜들을 이 두 왜와 비교하면 도저히 대적할 수 없으니, 차례차례 미루어 보면 대략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천 석의 땅은 정병 50명을 기르고, 1만 석의 땅은 정병 5백 명을 기르니, 갑병(甲兵)의 수효는 곡식의 수효를 들면 알 수 있습니다. 가강ㆍ휘원ㆍ경승(景勝)ㆍ좌죽(佐竹)ㆍ정종(政宗)ㆍ최상(最上)ㆍ의홍(義弘)ㆍ용장사(龍藏寺)ㆍ생전(生田)ㆍ굴미(崛尾)ㆍ굴리(崛里)ㆍ통정(筒井)ㆍ진전(眞田)ㆍ토좌(土佐)의 성친(盛親)과 찬기(讚岐)의 아락(雅樂) 등은 토지가 모두 세습(世襲)이고, 부곡(部曲)은 모두 세신(世臣)이므로 주장(主將)이 싸움에 패하여 자살하면 그 부하들도 모조리 따라서 자결하니, 제 나라 5백 의사(義士)가 전횡(田橫)을 따라 죽은 일은 한낱 한사(閑事)일 뿐이요, 옛날의 이른바 환문(桓文)의 절제(節制)나 제초(齊楚)의 기격(技擊)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습니다. 그 밖의 여러 왜들은 모두 고용된 노예와 천한 것들입니다. 수길은 천한 몸에서 갑자기 일어나 완력과 용맹으로써 스스로 부귀를 이룩하였으며, 토지는 모두 새로 얻은 것이요, 그의 부곡(部曲)은 모두 오합지졸이었습니다. 비록 크기가 수길이나 금오와 같고 날래기가 청정ㆍ장강과 같은 자라도, 주장이 싸움에 지고 자결하면 그 부하는 흩어지거나 항복한다고 합니다.
○ 언젠가 여러 왜인에게 묻기를,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은 사람이나 동물이 다 마찬가지 마음인데, 일본 사람만은 죽음을 즐기고 삶을 싫어하니 어찌된 일이냐?”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일본의 장관은 백성에 대하여 생살여탈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터럭 한 개도 백성에게는 속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장관의 집에 붙어 살지 않으면 의식(衣食)이 나올 길이 없고, 한 번 장관의 집에 붙어 살게 되면 제 몸이 제 몸이 아니고, 한 번 비겁하다고 이름이 나면 그 어디에도 얼굴을 나타내지 못하며, 찬 칼이 정하지 못하면 사람의 축에 들지를 못한다. 칼이나 창 자국이 얼굴에 있으면 용맹한 사나이로 지목되어 많은 녹을 받을 수 있고, 그 자국이 귀 뒤에 있으면 달아나기 잘하는 자로 지목되어 배척을 받는다. 의식(衣食)이 없이 살기보다는 차라리 적에게 나아가 죽음을 다투는 것이 더 나으니, 그들이 힘을 다하여 싸우는 것은 실상은 자신을 위한 꾀요, 주인을 위한 계책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더욱 독사같이 독하고 범이나 이리처럼 탐내어 무력을 믿고 잔인한 것을 예사로 하게 됩니다. 왁자지껄 싸움을 좋아하는 그들의 심리는 천성에서 오고 이목에 습관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법령이 또한 그들을 얽어매고 상벌이 또한 그들을 몰아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장수의 태반이 노둔하지만 모두 사람을 얻어 결사적으로 싸울 수 있고, 그 졸병들이 거의 어리고 약하지만 모두 적을 향하여 죽음을 다툴 수 있습니다. 만 명만 되어도 당할 수 없다는 것이 이놈들을 두고 한 말인데 하물며 그것이 수십여만 명에 있어서 이겠습니까. 천하의 화는 으레 소홀한 데서 오는 법입니다.
우리 나라는 야인(野人)에 대한 방비책으로 남북의 두 병사(兵使)를 두되 모두 2품의 높은 벼슬로 하고, 서북의 두 평사(評事)를 두되 모두 명망 있는 문관으로 하였으며, 호남ㆍ영남의 변장에 이르러서는 그저 전례에 따르고 있을 뿐이니, 2품의 높은 벼슬이나 명망 있는 문관은 방어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하며, 그 남쪽을 경시하고 북쪽을 중시한 것은 이를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 일찍이 가만히 생각하기를, “백만의 야인이 10만의 왜병만 못한데, 나라에서 남쪽을 경시하고 북쪽을 중시하는 까닭을 알 수가 없다.” 하여, 그것을 제 마음속에 두고 왜에게 알아보았더니 수백 년 전의 왜국 법령은 대개 중국 및 우리 나라와 별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귀가(貴家)에는 사종이 있고 평민에게는 사전(私田)이 있으며, 원을 경질하는 것이라든지 과거에서 시험보이는 것 등이 대략 서로 같았으니, 대개 수천 리의 안락한 나라이었는데, 관동장 원뢰조(關東將源賴朝)가 싸우기 시작한 뒤로 드디어 싸우는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이른바 포수라는 것은 전에는 없었고 오직 창이나 검을 쓰는 것을 으뜸가는 기술로 삼았을 뿐이었는데, 지금부터 50년 전에 남만선(南蠻船) 한 척이 왜국에 표류되어 총포와 화살 및 화약 따위를 가득 싣고 있어서, 왜인들이 이때부터 총쏘는 법을 배웠으며, 그들의 천성이 영리하여 잘 익혔으므로 4ㆍ50년 동안에 명포수가 온 나라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왜놈은 옛날의 왜놈이 아니니, 우리 나라의 방어도 옛날대로의 방어이어서는 안 되며, 국경에 대한 염려도 전날보다 백배나 더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난날의 일을 오늘에 거울삼아 남쪽을 경시하고 북쪽을 중시하는 폐단을 뜯어고치고, 하나로 인심을 단결시키며, 변장을 골라서 변방을 튼튼히 하고, 성과 해자를 수축하고 배를 수리하며, 봉수(烽燧)를 단속하고 군졸을 훈련하며, 기계를 익히기에 힘쓴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대개 오랑캐를 막는 것과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구하는 일은 한가지인데, 흉년에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데는 다만 두 가지 방법이 있을 뿐입니다. 그 첫째는 화기(和氣)를 불러 일으켜 풍년이 들게 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오직 저축을 하는 방법이 있을 뿐인데, 만약 굶주리게 된 때를 당해서 이해하려 들면 무슨 묘책이 있겠습니까. 외적을 막는 데도 두 가지 길이 있으니, 그 첫째는 춘추(春秋)에 도(道)가 있으면 지키는 것이 사이(四夷)에 있는 것이고, 그 다음은 오직 변방을 튼튼히 하는 계책이 있을 뿐인데, 만약 충돌이 생긴 뒤에 이해하려면 다시 무슨 묘안이 있겠습니까.
○ 왜국 안에는 천재지변이 매우 많아, 대낮에 붉은 안개가 사방을 가리고 흙비ㆍ털비가 연일 그치지 않으니 왜인들 중에는 그것을 상서로운 것이라 하여 주머니에 넣어 차는 자도 있었는데, 왜승(倭僧)으로 약간 유식한 자만은 말하기를, “한 무제(漢武帝) 때에 토목공사와 정벌을 자주 일으켰으므로 비에 털이 섞여서 내린 일이 있다. 일본은 옛날부터 오늘까지 토목공사의 부역이 지금보다 심한 때가 없으므로 하늘이 털비를 내린 것이다.” 하였습니다. 을미년과 병신년 이래 큰 지진이 일어나 4ㆍ5년 동안에 걸쳐 며칠을 사이에 두고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해년 12월 24일에는 복견(伏見)에 화재가 있어 대전 비탄수(大田飛彈守)의 집ㆍ소서 섭진수 행장(小西攝津守行長)의 집ㆍ증전 위문정(增田衛門正)의 아래 위의 두 집ㆍ토견감병(土肩勘兵)의 집들이 한꺼번에 연소되었고, 불은 가강의 외성(外城)으로 번졌는데, 북풍이 몹시 불고 불기운이 매우 성하였으나 내성 위에 쳐놓은 장막 돗자리를 끄집어 올려 바람의 기세를 꺾었으므로 내성은 타지 않았습니다. 경자년 2월 10일에는 비전 중납언(肥前中納言)의 집에 화재가 있었으며, 4월 2일에는 궁부 병부(宮部兵部)네 집에 또 화재가 있었으니, 아마도 오랑캐가 덕이 없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곧 적의 괴수가 지극히 흉악해서 천지의 괴기(乖氣)를 불러들인 까닭입니다.
○ 소신(小臣)이 왜경(倭京)에 오면서부터 왜국 안의 정보를 얻고자 하루 걸러 왜승(倭僧)들과 함께 놀았는데, 그 중에는 글자를 알고 사리를 아는 자도 없지 않았습니다. 의사(醫師) 의안(意安)ㆍ이안(理安)이라는 자가 자주 소신이 갇혀 있는 데를 찾아와서 만나보곤 하였고, 또 묘수원(妙壽院) 순수좌(舜首座)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경극황문(京極黃門) 정가(定家)의 손자요, 단마수(但馬守) 적송좌병광통(赤松左兵廣通)의 스승인데 자못 총명하여 고문을 이해하고 통하지 않은 서적이 없었으며, 성품이 또한 강직 엄정하여 다른 왜인들에게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내부(內府) 가강(家康)이 그가 재주 있고 어질다는 말을 듣고 왜경(倭京)에다 집을 지어 주고 매년 쌀 2천 섬을 주었으나, 순수좌는 그 집을 버리고 살지 않았고 그 곡식을 사양하고 받지 않았으며, 다만 약주(若州)의 소장(小將) 승준좌병광통(勝俊左兵廣通)과 사귀어 놀았습니다. 광통은 그 나라 환무천황(桓武天皇)의 9대손으로 6경(六經)을 몹시 좋아하여 비록 비바람 속이나 말위에서도 일찍이 책을 놓은 일이 없었으나, 그 성품이 노둔해서 번역한 것 없이는 단 한 줄도 읽지를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가 언젠가 말하기를, “일본의 괴로움이 이토록 극도에 달한 때는 없었으며, 민생의 피폐함이 지금처럼 심한 때는 없었다. 조선이 만약에 중국 군사와 함께 백성을 위문하고 죄진 자를 다스리며, 우선 항복한 왜인과 역관에게 일본말로 방을 붙여 다 알게 하여 백성을 수화(水火) 속에서 구해 줄 뜻을 보이고 군사가 지나가는 곳에만 털끝만큼도 범하는 일이 없다면 비록 백하관(白河關)까지 오는 것도 가하지만, 만약 왜인이 조선에서 사람을 죽이고 물자를 약탈하던 식을 여기에서 그대로 바꾸어서 한다면 대마도도 건너지 못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일본의 장관은 모두 도적이지만 오직 광통(廣通)만은 자못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는 본래 상례(喪禮)가 없으나 광통만은 3년상을 행하였으며, 매사에 반드시 중국이나 조선을 본받으려 하니, 비록 일본에 살고 있지만 일본 사람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드디어 신의 사정을 광통에게 이야기하였더니, 광통이 가끔 와서 찾아보면서 자신은 청정ㆍ좌도수(佐渡守) 등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 절대로 도수 집에 알게 해서는 안 된다 하고, 또 일찍이 포로로 있는 우리 나라 선비 및 신의 형제에게 6경의 대문을 구해 달라 하고 남몰래 은전(銀錢)을 주며 신 등의 여비에 보태어 돌아가는 길에 쓰라고 하였습니다. 또 언젠가는 우리의 오례의서(五禮儀書)와 석전의목(釋奠儀目)을 그의 단마(但馬) 사읍(私邑)에서 얻어 보고 공자의 사당을 세웠고, 또 우리 나라의 제복(祭服)ㆍ제관(祭冠)을 만들어 가끔 그 부하를 데리고 예의를 익혔습니다. 금년 2월 9일에, 좌도(佐渡)가 가강의 명령에 응하여 그의 사읍으로부터 복견(伏見)에 왔는데, 대구(大丘)의 포로 김경행(金景行)이 일본 글을 조금 알아서 신 등이 그 사람에게 부탁하여 일본글로 써서 좌도에게 보내기를, “열 식구를 공연히 먹이는 것은 그대에게 이익됨이 없을 것이요, 4년 동안을 외로이 갇혀 있으니 나는 죽느니만 못하다.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문밖으로 내보내 주기를 바라며 내보내 주지 않는다면 살아도 의미가 없소.” 하였더니, 왜승 경안(慶安)이 좌도에게 힘써 권하기를, “어버이를 생각하고 고향 땅을 그리워하는 것은 피차에 마찬가지이니 문밖으로 내보내 주면 제 나라로 돌아가는 길이 있을 것이요.” 하였더니, 좌도가 곧 신의 온 가족을 문밖으로 내보내 주었습니다. 신은 전에 약속을 맺은 우리 나라 선비들을 모으고, 왜인 집에 있는 수부(水夫)들을 끌어내어 그 동안 마련해 둔 은전으로 몰래 배 한 척과 식량을 샀으나, 다른 나라 사람으로서 홀로 범의 굴 같은 천리길을 지나가자면 뜻밖의 예기치 못한 화가 있을지도 몰라서, 순수좌(舜首座)와 광통(廣通)을 찾아가 만나보고 출국하는 데 힘을 빌리자고 하였더니, 광통이 사택 지마수(寺澤志摩守)의 글월을 얻어 관문이나 거리에서의 검문에 대비케 해 주고, 또 수로를 가르쳐 주기 위하여 뱃사공 한 사람을 마련해 그 사람더러 대마도까지 갔다가 돌아오라 하므로 신은 드디어 신의 가족 10사람과 포로되었던 선비 및 수부와 그들의 아내, 모두 38명이 한 배에 타고 4월 5일 왜경(倭京)을 출발하였습니다.
그런데 뱃사람들의 손발이 잘 맞지 않고 풍세 또한 불리하여 5월 19일에야 겨우 부산에 도착하였습니다. 포로가 되었다가 나오려는 사람들은 으레 대마도를 귀문(鬼門)으로 알고 있으므로, 신이 곧 한 격문(檄文)을 만들어 돌아가는 왜인에게 부쳐, “대마도가 별로 저해하는 일이 없으니 대마도를 험한 곳으로 의심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8월 1일 승정원(承政院)에서 다음과 같이 계사하였다.
소신이 왜경(倭京)을 떠나던 날, 왜승 순수좌(舜首座)가 대구(大丘)에서 사로 잡혀 간 김경행(金景行)을 불러다가 귀엣말로 속삭이기를, “어제 축전 중납언(筑前中納言) 금오를 만났더니 내부(內府)가 명년에 다시 조선을 침범하려 하는데 만약 그리 되면 나도 가게 될 것이오. 수길이 살아 있을 때 가강은 전쟁을 그만두도록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이제 이런 의논이 있는 것은 반드시 내부가 비전(備前)ㆍ비전(肥前) 등과 사이가 벌어져서 그들을 그냥 놓아두면 변란을 일으킬 염려가 있으므로, 이 무리들을 조선에 보내어 그 군사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요. 올해 안에 비전(肥前)과의 화의가 성립되지 않으면 자기네 본거지가 안정되지 못하기 때문에 조선에는 환난이 없을 것이요, 만약 성립이 되면 내년 안으로 군사를 동원할 것이 틀림없으니, 조선은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그대가 돌아가거든 오늘의 이 말을 잊지 마시오. 조선이 무고히 수길의 병화를 입은데 대하여 나는 일찍이 기가 막혔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알리는 것이오.” 하였고, 또 의사(醫師) 이안(理安)이 금오의 처소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명년의 재거(再擧) 때 내부(內府)는 그의 맏아들 삼하수(三河守)를 장수로 삼는다.” 하여, 신은 몹시 놀랍고 얼떨떨하여 며칠 동안 출발을 멈추고 여러 곳에 수소문하였더니, 어떤 이는 말하기를, “금년 정월 중에 내부(內府)는 5만 석 이상 왜장의 아들을 내놓으라 하여 볼모로 잡아 관동으로 보내는데, 여러 왜장들은 양자를 보내기도 하고 친아우를 보내기도 하였으나, 청정ㆍ월중수(越中守) 등만은 그의 친어미 친아들을 맡겼고, 내부는 또한 세배(歲拜)차 왕경(王京)에 가서 왜국황제에게 조알하려 하자, 청정 등은 무장한 병사를 거느리고 먼저 복견(伏見)으로 올라가 그를 맞으려고 하였더니, 내부는 그 소식을 듣고 병을 핑계하고 올라오지 아니하였으므로 왜인들은 모두 내부를 겁장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약주(若州)의 소장(小將) 승준(勝俊)이 그때 수길 본부(本府)를 모시고 왕경에 있었는데, 가강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황금 40여 덩이를 들여서 접대 준비를 하고 있다가 그가 병이라는 말을 듣고 몹시 실망하였다고 합니다. 청정 등의 욕망은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니며, 가강도 일찍이 하루도 이 무리들을 잊은 일이 없었습니다. 일본이 수백 년 동안 사분오열되어 관동이 한 나라가 되고 오주(奧州)가 한 나라, 중국(中國)이 한 나라, 사국(四國)이 한 나라, 구주(九州)가 각각 한 나라가 되었는데, 신장(信長)이 일어나서 잠시 통합시켰으나 그 말년에 또 다시 이산되었고, 수길이 일어서자 또한 잠시 통합되었으나, 이제는 그가 죽어 그 세력이 또한 이산하려 하니, 뒤에 반드시 수길과 같은 자가 있어야 조선이 다시 전쟁의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조석으로 변하는 판국이라 어쩌면 끝까지 굳게 뭉칠지도 모릅니다. 가강이 넓은 땅과 많은 백성을 차지하고 두 도읍지를 점거하여 모든 왜장들을 호령하고 있어서 심복하는 자는 비록 적으나 억지로 따르는 자가 많으니, 우선 왜가 침범하지 못할 만한 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는 것이 귀국에 유리한 계책일 것입니다.” 하였고, 차아원(嵯峨院)의 왜인 여일(與一)의 말임.휘원(輝元)의 참모 승(僧) 안국사(安國寺)란 자는 으레 그 국정에 간여하고 있고, 그의 좌우가 모두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다 본국을 생각하는 마음을 잊지 않고 있다 하기에 지나는 길에 비밀리에 불러서 물어보았더니, 모두들, “수십 년 안으로는 결코 재침의 근심이 없을 것이다. 왜의 무리가 한창 이권을 다투고 있는 판이라 제 국내가 걱정인데 어찌 남의 나라를 침범할 겨를이 있겠는가?” 하여, 전에 들은 이야기와 뒤에 들은 이야기가 서로 같지 않으므로 이 말도 아울러 아룁니다.
○ 평조신(平調信)은 의지의 집안 어른으로 왜인들이 양천 하야수(楊川下野守)라 일컬으며, 대마도의 일은 모두 그의 손아귀에 들어 있고, 의지는 다만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신 등의 배가 대마도를 지날 때에 의지는 막 왜경(倭京)으로 갔으며 조신은 의지를 위해 대신 지키고 있으면서 조그만 배 한 척을 보내어 와서, “어디로 가느냐?” 묻기에, 신 들이 부득이 사실대로 말했더니, 조신이 곧 식량과 채소를 보내오고 통역을 시켜 재삼 만나기를 청하였습니다. 신 등이 부득이 내려서 만나보았더니, 조신이 공경하고 삼가는 태도와 온순하고 신중한 언사로 통역을 시켜 말을 전하기를 “수길이 일본에 태어난 것도 천운이요, 상국(上國)이 전화를 혹심하게 입은 것도 천운인데, 상국이 매양 임진년 일에 대하여 허물을 이 섬에 돌리니, 이 섬에서는 매번 사실을 밝히고자 하였으나 여러 번 보낸 사정(使丁)이 모두 돌아오지 못하여 상달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 섬이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니, 수길이 상국을 침범하는 것을 이 섬이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군사를 동원하기 전에 미리 침범하는 시기를 알린 것은 상국으로 미리 준비하게 하려는 것이었으며, 일본이 많은 군중을 몰아갈 적에는 이 섬이 억지로 따르지 않을 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번복이 있는 법이니 조만간 일본이 쇠약해지고 상국이 부강해져서 상국의 대군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쳐들어 가게 되면 이 섬 또한 억지로 따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2백 년 이래로 몰래 출발하는 왜선(倭船)이 혹 바다로부터 호남을 침범한 일이 있었지만 아직 한 번도 영남지방에까지는 가지 않은 것은 모두 이 섬이 방패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상국이 통로를 일절 허락하지 않는다면, 이 섬으로서는 비록 감히 상국을 범하지 않겠지만 다른 왜가 이 섬을 지나가는 것은 이 섬이 무슨 말로써 거절하겠습니까? 따르기 어려운 청은 모두 수길이 한 일이었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청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매년 내려 주던 쌀도 다시 꼭 내려주지 않아도 무방하며, 사신도 반드시 고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산 태수(釜山太守)가 보낸 사람으로 예조의 공문을 받들고 오면 이 섬 안에 잡혀 있는 사람들은 우선 딸려 보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신 들이 물러나 잡혀간 우리 나라 사람에 물었더니, “임진년에 교전한 이래로 대마도를 지나가는 모든 왜병들은 으레 집과 땔나무, 채소 등을 징발하였는데, 때로는 그것을 왜병이 구하지 않을 경우에도 한 번도 대주지 않은 일이 없어서, 번거로운 씀씀이가 많아 매우 지겨운 마음을 가졌었는데, 철병한 지 3년이 되자 한숨 돌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만가지 방법을 다하여 반드시 통로를 구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우리 나라 사람이 바다를 지날 때마다 으레 접대하고는 상달해 주기를 청하였다.” 합니다. 신 등이 또 조신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4년 동안이나 외국에 있었으므로 본국의 사정을 도무지 듣고 아는 바가 없소. 다만 명 나라 군사가 8도에 가득하다는 소문을 들었을 뿐이오.” 하였더니, 조신이, “이 섬에서도 그런 말을 들었소. 예조에 아뢰는 글월을 당신네 일행에게 부칠 수 없겠소?” 하기에, 신 등은, “이 섬에서 글월을 올리고자 하거든 배를 따로 내어 사람을 보내는 것이 좋겠소. 우리들이 가지고 가는 것은 마땅치 않소.” 하였더니, 조신이, “지당하오. 지당하오.” 하였습니다. 신은 들으니, 화약ㆍ유황이 우리 나라에서는 나지 않는다 하므로 대마도를 지나면서 남은 여비로 유황 30여 근을 사서 좌수사(左水使) 이운룡(李雲龍) 처소에 주고 올라왔습니다.
○ 무릇 이른바 장왜(將倭)라는 자들은 문자를 약간이라도 아는 자는 한 사람도 없으며, 그 사람들은 흩어져 싸우면 한때의 승리를 얻을 수 있지만 병법에 대하여서는 한 가지도 들은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포로들도 일찍이 듣고 본 것으로서 만고의 어리석은 백성이나 잘 무너지는 졸병들의 의혹을 풀어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의 궁실(宮室)은 극히 높고 시원하고 밝고 깨끗한 것에만 힘쓰고, 튼튼하고 치밀하게 하는 데는 힘쓰지 않습니다. 그 까닭을 물어 보았더니, “병화가 자주 일어나 아침저녁을 보장할 수 없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실(茶室)을 짓고 겨우 드나들 만한 작은 구멍을 뚫어 놓고 귀빈이 오면 그 구멍을 열고 맞아 들여 그 안에서 차를 마시는데 이것은 그 본심이 소박함을 남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뿐만 아니라, 잔을 들고 서서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트집이 생기는 일이 허다하므로 여러 종자(從者)를 못 들어오게 하여 불의의 사고를 미연에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반드시 칼을 차는데 일단 칼을 차면 다스리는 것은 오직 싸움하는 일과 힘드는 역사에 종사할 따름이며, 중만은 칼을 차지 않고 혹은 의술을 배우거나 장사를 업으로 하며, 혹은 점치는 일을 하기도 하고, 혹은 장왜의 집 다실 청소를 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모두 처자가 있으며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저자거리에 섞여서 살고 있습니다. 또 혹은 생도를 가르치기도 하고 혹은 범패(梵唄)를 부르기도 하며, 혹은 공자 교훈을 외기도 하고, 혹은 산야를 방랑하며 화복을 이야기하면서 동냥을 하기도 하는데 이들도 모두 처자가 없으며, 고기를 먹지 않고 숲속에서 따로 거처합니다. 왜의 남자는 열이면 너덧이 머리를 깎았는데, 싸우는 일과 힘드는 역사에 싫증이 나서 오로지 몸을 보전하고 피해를 멀리 하려는 것입니다. 장왜가 된 자는 그 벼슬을 혹은 사(寺)라 하고, 혹은 원(院), 혹은 법인(法印)이라 하며, 장왜가 되지 않은 자는 그 벼슬이 처음에는 장사(藏師)라 하고, 다음은 수좌(首座), 그 다음은 동당(東堂), 그 다음은 서당(西堂), 그 다음은 화상(和尙), 그 다음은 노장(老長)이라고 하는데 그 노장이 최고입니다. 중으로서 불경을 닦는 자는 혹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주장하기도 하고 혹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절마다 어지러이 다투어 마치 원수 같으며, 성경(聖經)을 익히는 자는 혹은 공안국(孔安國)ㆍ정현(鄭玄)의 주석을 주장하기도 하고, 혹은 주회암(朱晦菴)의 훈해(訓解)를 주장하기도 하여 문(門)을 갈라 끼리끼리 오가며 갈라서서 파당을 세우니, 그 풍속이 다투기를 좋아함이 이와 같습니다.
고조원(高照院)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대불사(大佛寺)의 범왕(梵王)이요, 황제의 숙부로서 식읍이 1만 석이고, 66주 모든 절의 중들을 도맡아 다스려 매년 정월에는 모두 다 와서 예를 드리며, 태로장(兌老長)이라는 자는 수길에게 아첨해 섬겨 실제로 봉록 2만 석을 얻었습니다. 간혹 의사 노릇하는 중으로서 문자를 약간 해독하는 자가 때로 장왜를 섬겨 그를 따라 우리 나라에 온 자도 왕왕 있었는데 모든 중은 중으로서 논합니다. 승관(僧官)은 모두 왜황(倭皇)으로부터 직첩을 받는다고 한다. 그 풍속이 귀신을 몹시 믿어 신을 섬기기를 부모 섬기듯이 하며 부모가 죽은 날에는 더러 재계(齋戒)와 소식(素食)을 지키지 않기도 합니다. 신인(神人)이 꺼린다 하여 애초에 고기와 생선을 금하고, 엄숙하고도 깨끗한 성복(盛服)으로 문에 올라서서 돈을 던지는 자가 길거리를 메우며, 신사(神舍)는 크고 아름다워 단청이 휘황합니다. 천조황대신(天照皇大神)은 그들의 시조가 여신(女神)이요, 웅야산권현수신(熊野山權現守神)은 서복(徐福)의 신이며, 애탕산권현수신(愛宕山權現守神)은 신라 사람 일라(日羅)의 신이요, 또 춘일대명신(春日大明神)ㆍ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ㆍ대랑방(大郞房)ㆍ소랑방(小郞房) 등의 신이 있는데 그 수효는 한없이 많습니다. 그들이 맹세를 하거나 금계(禁戒)를 할 때에는 반드시 이런 신들을 끌어대어 맹세를 하는데, 간혹 팔을 지지고 힘줄이 잘려도 차마 맹세를 깨뜨리지 않는 것은 반드시 천도(天道)와 천둥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 왜놈의 성미가 큰 것을 좋아하고 공을 기뻐하므로 먼 나라 배들이 서로 오가는 것을 항상 성대한 일로 여기고 있으므로 배를 타고 오는 상인을 가리켜 꼭 사신이라 합니다. 신이 왜경에 있을 적에 왜적이 남만의 사신이 왔다고 선전하여 나라 안이 떠들썩하며 아름다운 이야기로 삼기에 우리 나라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상인 10여 명이 흰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의 물건을 왜졸들이 가끔 도둑질하게 되면 그들이 다시는 오지 않을까 두려워서 도둑질한 자는 반드시 그 삼족을 멸합니다. 전년 8월에 복건(福建)의 상선이 살마주(薩摩州)로 향하였는데 바닷가의 왜졸이 그 시기를 미리 알고 배에 무기를 싣고 가서 그 보화를 빼앗고 잠깐 그 사람을 억류했을 뿐이었는데, 그 사람이 살마주에 와서 고발하였더니, 의홍이 가강에게 고하여 보화를 뺏은 자를 서울로 사로 잡아다가 거열(車裂)에 처하고 그 보화는 가져다가 그 사람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천축(天竺) 등의 나라는 왜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왜놈의 왕래가 끊이지 않으며, 복건의 상선 및 남만ㆍ유구ㆍ여송(呂宋) 등의 상선은 의홍과 용장사(龍藏寺)가 맡아 다스리고, 우리 나라 배는 정성(正成) 및 의지가 맡아 다스리는데, 당나귀ㆍ노새ㆍ낙타ㆍ코끼리ㆍ공작ㆍ앵무 등이 해마다 끊임없이 오니, 가강 등은 으례 금은ㆍ창검 등을 후하게 주고 사들입니다. 무익한 것을 유익한 것과 바꾸게 되니 그들 또한 왜의 시장에 즐거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 이정(里程)은 왜경에서 복견(伏見)까지 육로로 3리이고, 복견에서 대판까지는 수륙 모두 10리, 대판에서 섭진주(攝津州)의 병고(兵庫)까지 수로로 10리인데 좌우는 모두 육지입니다. 병고에서 파마(播摩)의 보진(寶津)까지 20리, 보진에서 비전(備前)의 우창(牛窓)까지 10리, 우창에서 비후(備後)의 호망(戶望)까지 23리인데 이상은 좌우가 모두 육지입니다. 호망에서 주방주(周防州)의 상관(上關)까지 35리인데 바다 어귀가 극히 좁고 조수가 빨라서 관상(關上)이라 합니다. 관상에서 장문주(長門州)의 하관(下關)까지 35리인데 해협(海峽)이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너비는 우리 나라 금강(錦江) 어귀와 같아서 배를 부리기가 매우 곤란합니다. 하관에서 간도(間島)까지 25리 하관ㆍ박다(博多)ㆍ일기(一岐) 사이에 있으므로 간도(間島)라고 한다. 인데, 오른쪽은 육로가 거기서 끝나고 바다로 영남(嶺南)의 좌도(左道)에 접해 있다고 하며, 넓은데 나루도 섬도 없습니다. 간도에서 일기(一岐)로 곧 바로 건너가면 48리이고, 비전(肥前)의 당진(唐津)에서 건너가면 21리입니다. 당진에서 명호옥(名護屋)까지 3리, 명호옥에서 일기까지 15리, 일기에서 대마도의 방진(芳津)까지 48리, 방진에서 풍기(豐崎)까지 35리이며 풍기에서 부산까지 38리인데, 동ㆍ남ㆍ북풍에 모두 돛을 올릴 수 있습니다. 풍기에서 부산ㆍ김해ㆍ웅천(熊川)ㆍ창원(昌原)ㆍ거제(巨濟) 등지를 바라다보면 역력히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기장(機張) 이북은 바다가 넓어서 풍세가 약간 불리하면 반드시 파선할 염려가 있습니다. 한산(閑山)에서 서쪽은 수로가 아득히 멀어 쉽사리 건널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의 1리는 우리 나라의 10리이다. 부산에서 왜경까지는 우리 나라 이수(里數)로 계산하면 3천 3백 10리이다.
27일 나는 이름난 호랑이를 잡았다. 이에 앞서 기해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양남(兩南)의 경계에 사나운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밤낮으로 사람을 물어 갔는데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남원(南原)의 수성령(宿星嶺)ㆍ구례(求禮)의 석주(石柱)ㆍ순천(順天)의 송치(松峙)ㆍ장수(長水)의 수분원(水分院)ㆍ함양(咸陽)의 팔량(八良) 등지 같은 곳에서는 호랑이의 피해가 더욱 심하여 넉넉치 못한 인원에 매일 5ㆍ6명씩이나 해를 입어 마침내 사람과 물자가 통하지 못하게 되고, 산 밑의 여러 고을에서는 몇 달 동안에 피해자가 거의 2백여 명에 이르렀다. 금년 여름부터는 산골 사람들이 나무 울타리를 세우고 그물을 치고 한 집에 모여서 잤는데, 호랑이는 역시 흉측하여 그물을 찢고 나무 울타리를 부수고 마구 들어와 해를 입혔다. 한 마리의 범이 날뛰었으므로 그놈이 남원에 있으면 운봉(雲峯)에 해가 없고, 송치(松峙)에서 해치면 팔량(八良)에서 자취가 끊기고, 이렇게 차례로 7일 만에 다시 나타나곤 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잇따라 두 사람이 물려갔으므로 감사 이홍로(李弘老)가 여러 고을에 공문을 내어 잡게 했으나 여러 고을에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그 범을 잡을 수 있다는 뜻을 부사에게 알리니, 부사는 전 방어사가 범을 잡던 폐단에 물려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나는 걱정한 나머지 따로 활과 쇠뇌를 이문(里門)에 설치하여 집을 보호하는 계책으로 삼았다. 이날 밤 삼경에 사나운 호랑이가 함부로 덤벼 들어오다가 마침내 쇠뇌에 맞아 뜰에 고꾸라졌다가 서서히 달아났다. 범을 꾀어 쇠뇌가 있는 데까지 오게 한 것은 그 사이에 꾀를 썼던 것이다. 이튿날 나는 종들을 데리고 범이 있는 곳을 추적하였더니 범은 집 남쪽 산 숲속에 엎드려 있었다. 나는 종일토록 나아갔다 물러났다 하면서 점점 가까이하였더니 범은 달려들어 종 한 사람을 죽이고 곧 쓰러졌다. 내가 그것을 방어사에게 바쳤더니 방어사는 감히 숨기지 못하고 감사에게 바쳤다. 그 뒤로부터는 호랑이에 대한 염려가 영원히 없어지고 고갯길도 무사해졌다.
[주-D001] “못을 파고…… 쌓으라.” :
등문공(滕文公)이 맹자(孟子)에게, “등(滕)은 작은 나라인데 제(齊) 나라와 초(楚)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니 제 나라를 섬기리까? 초 나라를 섬기리까?” 물으니, 맹자는 이와 같이 대답했음.
[주-D002] “서로 빼앗을…… 지킨다.” :
한유(韓愈)의 《원도(原道)》에 나온다.
[주-D003] 안시성(安市城) :
고구려(高句麗) 보장왕(寶藏王) 때에 당 태종(唐太宗)이 장군 이세적(李世勣)을 데리고 친히 동정하여 안시성(安市城)을 쳤으나, 성주(城主)가 지혜와 용맹이 놀랍고 백성들도 더욱 굳건히 지켜서 오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태종은 어찌할 방법이 없어 안시성 아래서 군사를 사열하고 돌아가니, 성주는 성에 올라 감사를 드렸고 태종은 그가 고수한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백 필을 선사했음.
[주-D004] 즉묵성(卽墨城) :
춘추전국시대에 연(燕) 나라가 제(齊) 나라를 쳐서 점령할 때에 72성 중에 전단(田單)이 지키는 즉묵성(卽墨城)만이 보전되었다고 한다.
[주-D005] 진회(秦檜)ㆍ왕윤(王倫) :
금 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고 충신 악비(岳飛) 등의 주전론자를 모략해 죽인 간신들이다.
[주-D006] 정백(鄭伯)은…… 보전하였고 :
춘추전국시대에 초(楚) 나라가 정(鄭) 나라를 쳐서 항복을 받았는데, 정백이 죄인의 옷차림으로 천민이 하듯이 양을 몰고 초왕을 맞이하였음.
[주-D007] 남자는 적국의…… 이룩하였습니다 :
월(越) 나라 왕 구천(句踐)이 오(吳) 나라 왕 부차(夫差)에게 패하여, 남자는 신하가 되고 여자는 첩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회계산(會稽山)에서 강화하였다가 섶에서 자고 쓸개를 핥으면서 국력을 다시 길러 드디어 부차의 오나라를 쳐부셨다.
[주-D008] 교주고슬(膠柱鼓瑟) :
《사기(史記) 염파 인상여 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나온다. ‘기러기 발에 아교를 칠해 놓고 비파를 한다.’는 뜻으로, 고집스럽고 융통성이 없음을 의미한다.
[주-D009] 정족(鼎足) :
유비(劉備)가 조조(曺操)ㆍ손권(孫權)과 천하를 3분하였던 것을 말한다.
[주-D010] 도인(導引) :
신선이 되고 오래 사는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의 하나로서 신선한 고기를 체내로 끌어들이는 호흡법이다.
[주-D011] 고래를 탔다[騎鯨] :
이태백(李太白)이 물에 빠져 죽었는데, ‘이태백은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李白騎鯨飛上天]’는 시가 있음. 곽재우가 죽은 것을 비유함.
[주-D012] 유후 :
유후(留侯)는 한(漢) 나라의 명신 장량(張良)이다. 그가 한 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후에 봉해진 뒤에, “내가 더 바랄 것이 무엇이랴. 이제는 신선을 따라 놀겠노라.” 하고, 화식(火食)을 끊고 도인법(導引法)을 배웠다고 함.
[주-D013] 관백(關白) :
본디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에, ‘모든 일은 우선 곽광에게 관백(關白)한 뒤에 천자에게 아뢰었다[諸事皆先關白光 然後奏御]’에서 나온 말인데, 일본에서 천황을 보좌하여 나라의 정치를 집행한 중직이었다. 섭정에서 되는 것이 관례이며, 이 직을 겸하는 자는 태정대신(太政大臣)의 윗자리에 앉았다.
[주-D014] 대납언(大納言) :
태정관(太政官)의 차관인데, 국정에 참여하여 가부를 천황에게 아뢰고 선지(宣旨)를 전달하던 벼슬이다. 아래로 중납언(中納言)ㆍ소납언(少納言)이 있다.
[주-D015] 봉행(奉行) :
일본 무가시대(武家時代)에 위의 명령을 받아 사무를 담당하던 부서의 장관이다.
[주-D016] 복견(伏見) :
복견성(伏見城)은 지금의 교오또시 복견구(伏見區)에 그 유적의 일부가 남아 있다.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은거(隱居)한 곳으로 교오또의 관문이 되는 요소를 점하고 있다.
[주-D017] 야마대(野馬臺) :
야마대(耶馬臺), 야마추(邪馬推)로도 적었다. 일어의 야다모[太和]의 음역(音譯)인데 중국 사람이 일본을 일컫는 말이다. 《후한서(後漢書) 왜국전(倭國傳)》에, “그 왜왕이 야마대(邪馬臺)에서 살았다.” 하였고, 같은 책 〈동이전(東夷傳)〉에는, “그 왜왕이 야마대 나라에서 살았다.” 하였다. 야마(野馬)와 같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불려졌다는 것은 잘못이다.
[주-D018] 동해도(東海道) :
옛날 일본의 8도(道)의 하나로서 기내(畿內)의 동쪽, 동산도(東山道)의 남쪽 주로 바다에 닿아 있는 지방을 말한다.
[주-D019] 하이(蝦蛦) :
일본 관동지방 이북 북해도(北海道) 일대에 걸쳐 살던 종족, 곧 지금의 아이누족을 말한다.
[주-D020] 동산도(東山道) :
일본 8도의 하나로 기내(畿內)의 동쪽에 있는 지방인데 일부는 동해도(東海道)와 북륙도(北陸道) 사이에 끼어 있다.
[주-D021] 북륙도(北陸道) :
동해쪽으로 면한 일본 북서부의 북륙지방(北陸地方)에 있는 8도의 하나.
[주-D022] 산음도(山陰道) :
일본의 서북부 지방에 위치한 8도의 하나.
[주-D023] 산양도(山陽島) :
서부 일본의 뇌호내해(瀨戶內海) 쪽을 차지한 8도의 하나로 기후가 온화하다.
[주-D024] 남해도(南海道) :
기내(畿內)와 산양도(山陽島) 남쪽에 위치한 사국(四國) 지방을 중심으로 한 일본 8도의 하나.
[주-D025] 남만(南蠻) :
본디 중국에서 남쪽 오랑캐를 일컫는 말인데, 샴(타일란드)ㆍ쟈바ㆍ루손 등 인도차이나 및 남양 제도의 종족을 가리킨다.
[주-D026] 여송(呂宋) :
필리핀 군도의 루손도.
[주-D027] 서해도(西海道) :
일본 구주(九州)ㆍ유구(琉球)지방을 차지한 8도의 하나.
[주-D028] 오처경(吾妻鏡) :
겸창막부(鎌倉幕府)에서 일기체로 엮은 52권의 겸창시대의 역사책이다. 원뢰정(源賴政)이 군사를 일으킨 데서부터 전 장군(將軍) 종존친왕(宗尊親王)이 서울로 돌아오는 데까지 87년 동안의 일본 최초의 무가(武家)의 기록이다.
[주-D029] 원뢰조(源賴朝) :
겸창막부(鎌倉幕府)의 초대 장군으로서 무가정치(武家政治)의 창시자이다.
[주-D030] 토규(土圭) :
주(周) 나라 때에 땅의 깊이와 해의 그림자를 재던 그릇.
[주-D031] 의총(疑塚) :
남이 파낼 것을 겁내어 남의 눈을 속이고자 똑같은 것을 여러 개 만들어 놓은 무덤. 조조가 72개의 의총을 만
들어 놓았다고 한다.
[주-D032] 귀역(鬼蜮) :
음흉하기 그지없다는 뜻이다. 역(蜮)은 물여우인데, 물여우는 귀신과 같이 그 형태를 감추고 있다가 물에 비친 그림자에 모래를 물어서 뿌리면 그 사람이 병에 걸려 죽는다고 한다.
[주-D033] 제 나라 5백…… 따라 죽은 일 :
전횡(田橫)이 항우(項羽)와 싸워 제(齊) 땅을 회복하고 3년 동안 왕노릇을 하였으나, 한(漢) 나라에 눌려 부하 5백을 거느리고 섬으로 망명해 들어가 살고 있었다. 뒤에 한 고조(漢高祖)가 불렀으나 그 신하 되기를 거부하고 자결하였다. 섬에 있던 5백 명도 전횡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그의 뒤를 따라 순사(殉死)하였다.
[주-D034] 환문(桓文)의 절제(節制) :
춘추시대 제(齊) 나라의 환공(桓公)과 진(晉) 나라의 문공(文公) 두 임금은 오패(五覇)의 우두머리로서 제후(諸侯)를 잘 제어(制御)하고 주(周)의 왕실을 높였다.
[주-D035] 사이(四夷) :
동이(東夷)ㆍ서융(西戎)ㆍ남만(南蠻)ㆍ북적(北狄) 등 중국 사방의 이민족을 말한다.
[주-D036] 백하관(白河關) :
옛날 아이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든 일본 오우(奧羽) 3관문(關門)의 하나로서 복도현(福島縣) 서백하군(西白河郡)에 있다.
[주-D037] 귀문(鬼門) :
점장이들이 말하는 28수(宿)중에 귀성(鬼星)이 있는 방위를 귀문이라 한다. 귀신이 드나드는 곳이라 하여 매사에 꺼리는 방위이다.
[주-D038] 공안국(孔安國) :
공자의 11대 손으로 《논어》《예기》《효경(孝經)》 등을 교주(校注)하였음.
[주-D039] 정현(鄭玄) :
후한(後漢) 말의 대학자로서 문도(門徒)가 천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모시(毛詩)》《주례(周禮)》《의례(儀禮)》《예기(禮記)》《논어》《효경(孝經)》 등의 주석이 있다.
[주-D040] 천조황대신(天照皇大神) :
일본 천황의 시조라는 여신(女神)으로 해의 신이라 하며, 황실과 일본 국민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세황대신궁(伊勢皇大神宮)에 모셔놓고 있다.
[주-D041] 웅야산권현수신(熊野山權現守神) :
웅야삼소권현(熊野三所權現)이라는 것인데, 웅야 3신사(神社)에 제사지내는 본궁(本宮)의 가도어자대신(家都御子大神)ㆍ신궁(新宮)의 속옥지남신(速玉之男神)ㆍ나지(那智)의 부수미신(夫須美神)의 셋을 말하는 것이다.
[주-D042] 서복(徐福) :
진(秦) 나라의 방사(方士)인데 서시(徐市)라고도 한다. 삼신산(三神山)의 불로초를 구해 온다고 진시황을 달래어 동남동녀(童男童女) 각 3천 명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일행은 일본에 건너갔으며, 화가산현(和歌山縣) 신궁(新宮)에 그의 유적이 있다고 전한다.
[주-D043] 일라(日羅) :
백제 위덕왕 때의 중인데, 일본 규유수우의 아리사등(阿利斯登)의 아들이다. 백제에 들어와 달솔(達率) 벼슬을 지내다가 위덕왕 때 일본 민달천황(敏達天皇)의 초청으로 은솔(恩率)ㆍ덕이(德爾)ㆍ여노(餘怒)ㆍ가노지(哥奴知) 등과 함께 일본에 돌아갔으나, 백제에 불리한 헌책(憲策)을 하여 같이 간 덕이 등에게 피살되었다.
[주-D044] 춘일대명신(春日大明神) :
내량(奈良) 시대의 춘일 신사(春日神社)의 제신(祭神)으로 등원씨(藤原氏)의 조상 넷을 모셨다.
[주-D045] 팔번대보살(八幡大菩薩) :
규우슈우에 있는 팔번궁(八幡宮)에 모셔 놓은 신을 말하는데, 일본 내량(奈良)시대 이후 신불(神佛)이 뒤섞여져 나오게 된 칭호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종오 권덕주 (공역)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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