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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23)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9구간 (삼강→상주보) ② [삼강나루→ 영풍교]
2020년 10월 16일 (월요일) [동행]▶ 이상배 대장
☐ 삼강나루→ 영풍교→ 상풍교→ (낙동강칠백리공원)→ 경천교→ 도남서원→ 상주보
* [점촌 출행]▶ [삼강]→ 풍양면 청운리→ 구룡교→ 하풍리[쉼터]→ 낙동강→ 영풍교(-923번 도로)→ (영강 합류)→ 풍양 낙동강 제방길[하풍제]→ (긴 제방길)→ 상풍교(강변식당)→ (택시)-[낙동강 칠백리공원](사벌면 퇴강리) 왕복→ 다시 상풍교→ [낙동강 제방[東路]→ 경천교→ 자전거박물관(-경천대)→ (상주보 경천호)-[도남서원]→ (만촌 부부)-[경천섬-경천호반 환상(環狀) 종주]→ [점촌 旅舍]
*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 북동쪽에서 내성천(지보면)과 북쪽에서 금천(산북-산양) 합류 유입
* [상주 사벌국면 퇴강리(낙동강칠백리공원)] ←서쪽의 이안천(외서면)과 북쪽의 영강(문경) 유입
삼강나루
‘삼강나루’는 세 강(江)이 만나는 곳이다. 삼강(三江)은 하회마을 돌아 나와 서쪽으로 흘러온 낙동강 본류에, 내성천(內城川)과 금천(錦川)이 합류하여 흘러드는 곳이다. 백두대간 봉화의 선달산-풍기 소백산에서 발원하여 영주-예천을 경유하여 흘러온 ‘내성천’은, 북쪽의 문경 동로의 대미산-황장산에서 발원하여 흘러온 ‘금천’이 합류하여, 낙동강 본류에 흘러든다. 예부터 삼강나루는 문경이나 예천 용궁에서 풍양과 의성을 오가는 길목이다.
삼강(三江)주막 ― 강건너 영순의 달봉산
이곳 삼강리 주민들의 말로는, 안동 쪽 산은 호랑이 모양을 하고 있어 ‘범디미’라 하고, 문경 쪽 산은 늑대 모양이라 하여 ‘더무깨’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니까 강(江)을 사이에 두고 호랑이와 늑대가 마주보고 서 있는 모습이다. 경북 예천 풍양 땅 삼강나루에는 푸지고 끈덕진 애환이 깃들어 있다. 그곳엔 나루와 주막(酒幕), 주모(酒母)라는 3박자의 인간적인 정감이 피어나고, 근대화 사회로의 숨 막히는 전환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풍경이 있다.
* [삼강주막의 ‘뱃가 할매’] ― 생전(生前)의 주모가 전하는 생생한 낙동강 실록
삼강(三江)에는 최근까지 주막을 지키며 살았던 할머니가 있었다. 이 할머니는 평생을 삼강나루 주막을 술장사를 하셨는데, 2005년 10월, 아흔의 나이에 세상을 뜨셨다. 삼강나루 주막을 오가던 사람들은 그 주모를 ‘뱃가 할매’라 불렀다. ‘뱃가할매요~ 나 왔소!’ 하고 주막 평상에 앉으면, 술이 나왔다고 한다. 할머니가 기분이 좋은 날은 술뿐만 아니라 ‘이바구’까지 술술 풀었다고 한다. 경상도 토속어다.
‘뱃가 할매’의 본명은 ‘유옥연’. 유 할머니는 16세 때인 1932년 이 마을 배소봉(50년 전 작고) 씨와 결혼하였으나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로된 뒤 주막을 지켰다. 할머니의 간난(艱難)한 삶은 이미 소문이 났다. 생전에 매스컴에도 한두 번 소개가 됐고, 몇 십 년 전 대구은행 사보인「향토와 문화」에 유 할머니의 육성 인터뷰가 실렸다. 제목이「나의 20세기 — 유옥연 주모」였는데, 삼강나루와 주막을 이보다 더 생생하게 이야기하는 자료는 없다. 그래서 좀 길지만 여기에 소개한다. 낙동강과 삼강나루의 역사와 정취를 현장에서 실감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생전 할머니의 이바구(말)다.
“… 내가 여 주막에 산지가 오래 되얏어요. 내 나가(나이가) 너무 많아요. 주막한지 오십년이요. 자식은 오남매를 낳았는데, 딸이 서이고 아들은 둘이라. 자식들은 벌시라(벌써) 시집 장가 다 갔어. 우리 영감은 일찌거이 천당 갔고. 내 나이 서른네 살 나던 해, 영감은 서른여덟 살 먹어 죽었어. 아파가지고 죽었지. 없는 집구석에 아(아이)를 다섯이나 나아가꾸 거북스레 그래 살았어. 아이들을 잘 갈키도(가르쳐주지도) 못하고 지구(겨우) 국민핵교 했어. 갈키는 못해도 저들꺼정 지대로 사람이 되어서 공부하고 공장도 다니고 해서 그래 잘 컸다. 남편 없제, 아는 오남매나 되제, 딱히 방도가 있어야제.
자식들하고 농사짓고 소도 믹이고(먹이고) 담배도 하고(재배하고) 살라꼬 발버둥 치다가 아이들이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여는 학교도 없고 풍양 가는 차도 없어 통학도 못하지, 이래저래 궁리를 하다가 할수 없어서 점촌 가서 집도 좋도 안한 걸 하나 사서 자식들 하고 살았어. 그것도 석잖애서(마땅찮아서) 다시 땅뙈기 선낫(조금) 있는 거 팔아 자식들 다 이사 내보내고 나 혼자 여 주막에 들어앉아 살고 있어. 그 질(길)로 우리 맏아(아들)는 점촌 가 살고 있지.
그래 이날꺼정(이날까지) 나 혼자 여 처져서 술장사 하며 주막 지키고 있는 기라. 남편 일찌거이 잃고 과부된 맏딸이 환갑 진갑 다 지나 예순여섯 살이다. 나하고 동무하고 같이 늙어가지. 막내이(막내아이)가 올개(올해) 마흔아홉잉께 내 나가 얼마나 많노.
내 사는 요 동네는 삼강이라 카는데 강이 시(세) 개가 여 와서 다 모인다꼬 삼강이라카지. 마실(마을)이 한 사십호 될라 몰라. 삼강 저 너매는 사막, 성당, 굴미, 그 다음에는 와룡 그 다음이 풍양 그렇지. 지금은 늙어서 힘도 부치고 해서 농사는 안 해. 요 앞에 텃밭이 전부야. 반찬할 거 고추, 배추, 무, 호박 심어 먹지. 살아온 세월ㆍ 아이고 그 세월이 참 기맥키지 기맥혀. 나 고향은 풍양면 우막이라카는 데지.
우막(우망리)은 요 앞에 산 너머 얼마 안 가면 되지. 글찌기는 시집은 부모님이 가라카이 멋모르고 왔지. 우리 때야 결혼은 좋기나 안 좋기나 부모가 정해주면 그런갑다 하고 했지. 열 여섯 살 먹어 시집왔어. 시방 겉으면 학교 댕기고 철모를낀데. 처음 보니까 우리 영감 키도 크고 허울도 좋아 보이더마. 우리 시집 성은 배가라. 성주 배가. 영감 이름은 배소봉이라 불렀어. 날보다 네 살 많았지.
처음 시집살이 할 때는 어른들 모시고 삼강 안마실서 살았어. 거기 들앉아서 아(아이) 너이(네명)를 나았다. 주막에서 보면 우리 시댁이 바로 보여요. 우리 시어른 성질이 참 무서웠어. 그래서 시집살이를 마이 했지. 참말로 나거치(같이) 시집살이 한 이도 없을 기구만…. 그 때는 서러븐 일이 있어도 신랑이 다둑그리 줄줄도 몰라. 모두 그래 살았은께. 모두 없이 살았어. 먹고 사니라고 거키 거북스레 버둥댔다. 쭉 여 살다가 시어른들 다 돌아가시고 영감 죽고 아들도 크고 해서, 점촌 가서 방 얻어 좀 살았어. 내가 영감 일지거이 죽어뿔고, 고상은 참 이루 말할 수 없이 했지. …우리 영감이 풍채가 참 좋았어(유 할머니 담배 한 대를 문다). 그 영감이 몹쓸병에 걸려 무다이 죽고나이 고마 앞이 깜깜해. 정신이 아득하고 강산밖에는 안 보이는데, 산을 치다바도 한숨, 강을 니리다바도 한숨뿐이라. 걸음을 옮겨도 걷는기 아닌 기라. 발이 땅에 안 디디져.
허공을 다니는 것 같애. 몇 년간은 내 정신으로 산 게 아녀. 일을 해도 늘상 같치 하다가 혼자 하려니 이상하고, 농사일도 줄어들지가 안 해. 하나 있다 없어니 그 빈자리가 그리 커 보이더라고. 집에 와도 의지할 영감 없제, 아들은 와글와글 하제. 모이(먹이) 기다리는 제비처럼 마카 나만 쳐다보제. 고마 살기가 싫어. 강에가 빠져 죽어뿌가 생각하다가도 깔방알라(갓난아기)부터 큰 아까지 내 하나 치다보고 사는데 내 죽어만 천애고아가 될 낀데 싶어 그 생각하니 또 못 죽겠어.
살기가 참 막막한 기라. 그래 일꾼도 딜이가(데려다가) 농사도 지(지어) 보다가 내 혼자 해보다가 데릴 사우도 딜이다가, 해찬 바람이 불자 연료비라도 아끼려고 큰방 대신 작은방에 내려와 있다. 영감 죽고 담배 배았어. 영감 죽자 어데 하소연할 데도 없제 말 나눌 때도 없제. 천애 고아나 마찬가지가 된 기라. 너무 답답아. 속상하고 답답으면 담배 피운다디만 마음이 하도 안 돼서 몰래 담배를 피운 기라. 담배 피우만 좀 나을 줄 알았디만 아무리 담배 피아도 가슴에 남은 바우만한 설움은 꽉 맥혀 안 빠지는 기라. 자식 다 크도록 근 십년간 바우가 가슴을 꽉 틀어막고 있는 것 같더라카이. 몰라, 죽어뿌마 빠질 란가.
여 주막이 한창일 때는 육십년대였제. 그때는 낙동강에 배가 연락부지래(연이어져 끊이지 않았다). 여 삼강나루도 큰 배 작은 배해서 배가 두 채나 있었지. 통선이라꼬 작은 배는 주로 사람 실어 나르고, 큰 배는 짐을 싣고도 소가 다섯, 여섯 마리씩 들어갔어. 여기는 차가 없으니까 저 아래에서 강따라 배가 올라와. 주로 낙동강 저 아래 왜관서 오는 배지. 겨울에는 강이 얼고 하니까 배가 없지마는, 늦은 봄에 배가 소금을 오본이(가득) 싣고 안동까지 가거든. 봄디면 장담기를 하니까 주로 소금배가 오는 거지. 소금배가 내려갈 때는 주로 나락 팔아서 갔제. 소금하고 나락 바꾼 거야. 소금 배들은 배 안에 집을 지가지고 방을 맹글어서 거서 밥 해먹고 그라대. 질이(길이)가 이 집(약 6~7m)보다 더 질어. 물이 얕으만 큰 판대기로 젓고, 사람 대씨(여럿)서 끌거나 배쭉 대로 밀고 그래 올라가더만.
내 시집오고도 한참 배가 있었는데 소금배 없어진 지가 한 오십년 정도 됐지. 여름부터 겨울까지는 배가 거의 안 다녀. 여 낙동강에는 소금배 말고는 빌로 없었어. 학생들 그석하면 여행 삼아 댕기던 배가 간혹 있었제. 여는 강따라 나루가 총총하구마는. 이 아래 백포나루(주막 건너편 영순)는 예전에 나룻배가 있디만 지금은 고기 잡는 배가 있어. 썩 니리(내려)가면 하풍다리라고 있는디 그 다리 건너면 점촌도 가고 예천도 가고 그래. 다리 없을 때는 그리 배가 있었어. 하풍나루라 캤지. 저 우(위)로는 우망나루가 있었고. 거도 당시에는 배보는 집이 같이 있었어. 인지는 그도 없지만. 배볼 사람도 없고 배도 없고 하니 절로 집이 없어진 기라. 우망 위에는 저 우에 문정자라고 있었는데 거는 예천 지보장 보고 그랬어. 거는 다리 놓이면서 벌씨라(벌써 다) 없어졌지.
여는 제방할 적에까지 배가 있었는데, 배 없어진 지 십오 년 정도 됐어. 사방에 차 있느데 요새 누가 배 탈라 카나. 일 년에 버리(보리)하고 나락하고 양 철(봄, 가을)에 배추렴(뱃삯)을 줘야 하는데, 예전같이 배를 많이 안 타니 그나마 안 주제. 배 한 번 몰라 캐도 돈이 드는데 배추렴 줄어드니 누가 적자보며 배를 보겠노. 마실에서 돌리가며 배를 보다가 결국 안돼서 치아 뿌렸지. 배추렴은 봄 가실(가을)로 나놔 주는데 많이 주는 이는 한 말썩도 주고, 없이 사는 이는 두 쪽대(두 되)도 떠 주고 시 쪽대도 떠준다. 배 많이 타는 이는 추렴을 따로 더 냈다. 거둔 배추렴은 배에도 전주가 따로 있어 사공 얼매 묵고 전주 얼매 들라주고 했지. 이 마실에서 예전에 사공하던 이는 모두 다 죽고 없어.
이 집 전기도 제방되고 들어왔어. 풍양하고 이 일대가 마카 낙동강 물 때매 살지. 여도 비 안 오마 모 못 심는 천수답이던기 요새는 낙동강에 큰 양수기를 시대(3대)나 설치해서 옥답이 다 됐어. 우리 클 적에만 해도 낙동강 칠백 리 참 소용없는 물이라 캤는데…. 물은 밑으로 니리가다 미나리꽝 서마지기밖에 못 댄다 캤는데, 지금은 큰 보화라. 농사도 되지, 식수도 되지, 공장도 돌리지. 요샌 이 물 없으면 못 살지. 암 못 살고말고. 영남사람이 마카 이 물 묵고 안사나.
제방 생긴 뒤로 큰물 진다고 캐도 걱정은 안돼 좋다만, 난 제방 해 놓으니 더 파이라(안 좋아). 제방 없을 적에는 주막 마루에 앉아 강을 보면 세 강과 세 산이 합쳐지는 기 훤히 내다보이고 해서 참 볼만했어. 시방 제방이 앞을 떡 막아섰으니 어띠구로(어찌나) 답답한지. 우로는 안동댐 생끼뿌니까 강물이 많이 안 내려오제 하니 홍수 걱정은 이자뿟다만(잊어버렸다만), 근데 강바닥 꼬라지는 안되여. 여 그전에 제방 안 되고 할 적에는 뽀한 몰개(모래)가 팽한기, 놀러오면 놀기 좋고 그랬다. 시방 제방되고부텀 풀피리가 막 들아서고 해서 볼끼 없어.
이 동네뿐 아니라 예전에 다 그랬지만 여름 되면 모기 때문에 저녁만 먹으면 이 강가로 나왔지. 안사람들은 초저녁에 나와서 놀다가 집에 가서 자는 이가 많고, 남자들은 밤새 강가서 자고 그랬다. 여름으로 강가에 놀러오면 주막에 와서 술도 한두 잔씩 먹고 그랬어. 뭣 할 적에는 불각정(갑자기) 소내기가 오고하면 집으로 들어간다고 야단이고, 강물에 떠내려갈까 싶어 아(아이) 찾는다꼬 꽥꽥 쳐 부르고 야단이제. 예전에는 여름에 강물이 확 쓸고가면 자연 청소가 돼서 몰개(모래)가 그렇게 곱고 이쁘디만. 시방은 몰개가 없고 전부 풀피리와 쓰레기가 저래 쌓여 있으니까 우얄란고 몰라.
삼강나루와 삼강 이야기는 내가 뭐 무식해서 잘 몰라. 우리 웃대부터 어른들이 그카더만. 여는 산이 세 개, 강이 세 개가 모이는데 산은 남짝으로는 대구의 팔공산, 서짝으로는 문경의 주흘산, 동짝으로는 안동의 학가산이 마카 여 와가 딱 떨어졌다 그러더만. 강은 안동짝에서 내려오는 낙동강, 문경짝에서 내려오는 금천, 영주 예천짝에서 내려오는 내성천, 이 세 강이 마카 여서 모여 어부러져(어울린다). 그래가 삼산, 삼강이라 카지.
강 건너 저짝, 문경 쪽도 옛날에 주막이 있어갖구 술 팔고 그랬어. 거도 주인 있다 어디 가고 요새 나겉은 할마이 하나 들어와 있다카더만. 달지주막이라 불렀는데 그기 암매(아마도) 문경시 영순면이야. 곧 삼강에 다리 놓인다 카데. 그땐 문경이고 예천 가는 길이 억시(아주) 빨라지지. 지금이사 저짝 하풍다리(영풍교) 쪽으로 해서 근 오십 리를 삥 둘러가지만. 근데 다리 노이만 이 세 강 절경이 다 없어지지나 않을 란가 몰라. 내사 그기 큰 걱정이라….
지금이사 풍양이 더 크고 좋지만 예전엔 예천 용궁이 더 커서 주로 용궁장을 봤어. 풍양장은 본데없었고. 그래서 풍양서는 마캉(모두) 용궁장에 다녔어. 조합일하고 비료 타는 것이고 시장 보는 것, 면서기꺼정 모두 강 건너 용궁으로 일 보러 갔으니까.
여가 질(길)이 이래 파이라(나빠) 비도(보여도) 대로여 대로. 장날이고 무신 날이고 볼 일 있으면 용궁 가니까 다 여로 다녔으니 예전에는 참말로 북적대던 길이지. 시방은 풍양에 장 서고 점촌장 떡 벌어지니 용궁장이 캑 죽어 가도 안 하지만. 나루가 한창때는 이 도로에 주막이 이 집까정 시(세) 군데나 되었어. 바로 우리 집 옆에 쭉 있었어. 우리 맏딸이 갑술년 생인데 올해 예순여섯 살이니까 그때 큰 홍수가 나서 이곳까지 물이 들이차서 주막이 다 떠내려갔어. 그때 주막 하던 사람들 마카 떠나뿔고 이 집만 남았어.
이 집도 갑술년(1994년) 물에 퍽 엎어진 것을 어떤 이가 다시 지었는데 돈이 없어 억지로 억지로 지은 집이라. 흙으로 주막을 지노이(지어 놓으니) 물만 들면 퍽 엎어져 나무로 지었어. 집이 이래 없어비도 명색이 나무집이라. 그 뒤로 여러 홍수를 맞아도 엎어지지 않고 있는데 시방도 멀리서 보면 물 나가는 힘에 휩쓸려 집이 한쪽으로 씰어졌어(기울어졌어).
주막하면서 밥은 간혹 가다 팔고 주장(주로) 술을 팔았는데, 술안주는 주로 김치였어. 겨울에는 묵도 많이 했지. 우리가 미밀(메밀)을 많이 해서 꿀밤묵 말고 미밀묵을 주로 했어. 그때 주막에 잘 이는(자고 가는 이) 잘 없어. 모두 술 마시고 쉬다 가고 그러지. 예전에야 주장 막걸리 마이 묵었지만, 인지는 막걸리는 간혹 가다 팔지 잘 안 팔아. 막걸리 띠놔(갖다 놔) 봐야 물(먹을) 사람이 마이 없어 변질되니 수지가 맞아야지. 소주야 암만 놔 도도 괜찮아. 그래 요새는 주장 소주 팔지….
집 뒤로 제방 생겨 강이 안 보이게 되디만, 인지는 집 앞으로 도로가 뚫려 앞을 딱 가로 막고 서는 바람에 집 꼬라지 영 배리 놨어. 나 죽어 돌볼 사람 없으만 이 주막도 엎어지던둥 뜯기겠지...(주막 하면서 부르던 노래가 있다던데...) 노래ㆍ 노래가 있지. 주막하며 배운 노랜데, 나이 무가 노래한다꼬 인지 노래가 될라나 몰라. 내 한 마디만 할 것이니, 간단한 것으로 하나 할 것이니.
정월이야 속속한 마음, 이월 매조에 맺어노코
삼월 사꾸라 산란한 마음, 오월 목단에 씨러(쓰러)졌네
육칠월 홍돼지 홀로만 누워, 팔월 공산에 건너본다
구월 국화 구드나(궂은) 마음, 시월 단풍에 흩어졌네
동지 섣달 설한풍에 벽설(백설)만 날려도 임생각
앉아 생각 누워서 생각 생각사로 임생각
얼씨구나 지화자 좋다 아니 노지는 못하리로다
이 노래 제목도 잘 몰라. 그냥 일 년 열두 달 풀이라 불렀어. 달달이 나오는 거 있잖아. 이 노래 배운 지 오래 됐어. 내 서른 살 넘어 주막하면서 배웠응깨. 임 생각하고 기리버(그리워)하는 노래니까. 몰라, 남편 생각하며 자꾸 불러 안지까지(아직까지) 안 잊었먹었째.
요새도 길나서면 남편하고 가는 할마이들이 글키 부러버(부러워). 그때마다 저놈의 할마이들은 복도 많지. 우야면 영감하고 저래 댕길 수가 있노 안 카나. 내사 영감복 없어 일평생 그래 다니본 적이 없응깨. 내가 바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야…. 나이는 무사코(먹고) 자꾸 아파서 자식보다는 먼저 죽어야 할낀데…. 죽기도 안 쉬워. 자식들 애 안 미고 죽을 때꺼정 별 탈 없이 있다, 여서 주막하고 같이 있다 가야 할낀데. 강물이 지대로 저리 흘러가듯 지대로 저승 가는 기 내 바램인데…. 이 주막이 눈에 밟히고 자식 손자들이 밟혀서 어찌 떠나누. …”
☆… ‘삼강나루’는 ‘세 강이 만나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본도가 이곳을 지났다. 낙동강을 따라 오르내리던 선비나 장꾼들은 여기서 숨을 고른 뒤, 문경새재를 넘었다. 나루보다 어쩌면 그곳의 주막지기인 주모가 더 유명할지 모른다. 얼마 전까지 이곳에 살았던 삼강주막의 주모 할머니는 낙동강의 살아 있는 역사이다. 도식적인 설명보다 90평생을 삼강나루의 주막에서 살다가, 삼강에서 생(生)을 마친 할머니의 진솔한 이야기가 훨씬 실감이 난다.
* [삼강나루에서 영풍교(하풍나루)까지] ― 영풍교 아래에서 영강(←이안천) 유입
* [점촌 출행]▶ [삼강]→ 풍양면 청운리→ 구룡교→ 하풍리[쉼터]→ 낙동강→ 영풍교(-923번 도로)→ (영강 합류)→ 풍양 낙동강 제방길[하풍제]→ (긴 제방길)→ 상풍교(강변식당)→ (택시)-[낙동강 칠백리공원](사벌면 퇴강리) 왕복→ 다시 상풍교→ [낙동강 제방[東路]→ 경천교→ 자전거박물관(-경천대)→ (상주보 경천호)-[도남서원]→ (만촌 부부)-[경천섬-경천호반 환상(環狀) 종주]→ [점촌 旅舍]
실제로 트레킹한 코스
[낙동강 주변 지리 참고지도]― 여기 에코트레일 코스와는 달리 낙동강 동쪽 강변로를 트레킹하다
*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 북동쪽에서 내성천(지보면)과 북쪽에서 금천(산북-산양) 합류 유입
* [상주 사벌국면 퇴강리(낙동강칠백리공원)] ←서쪽의 이안천(외서면)과 북쪽의 영강(문경) 유입
☆… 오전 10시 20분, 삼강나루의 주막에 도착했다. 오늘도 날씨는 아주 청명했다. 삼강주막은 몇 채의 초가가 늘어서 있는데, 이른 아침이라 주막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관광단지로 개발하여 너른 마당을 중심으로 여러 채한 주막의 초가가 죽 늘어서 있다. 옛날의 정취가 느껴지지 않는다. 한 집 안에서 장사 준비를 하는 여인이 보였다. 주막에 오면 따끈한 술국에 걸직한 막걸리 한 잔이 어울리지만, 좀전 아침식사를 하고 온 이른 아침, 그럴 분위기가 아니다. 아침 햇살이 환하게 내려는 주막을 둘러보고 오늘의 장정에 들어갔다. 여기 삼강주막을 기점으로 하여 오늘의 트레킹이 시작된다.
국민관광지로 정비된 삼강주막(아침 풍경)
☆… 삼강주막에서, 우망리에서 넘어오는 바이크로들 가기 위해 59번 도로를 타고 고갯마루를 넘는다. 고갯마루 못 미쳐 도로의 가장자리 낙동강 절벽에 삼강나루 나무테크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서면, 동북쪽에서 휘어져 내려온 낙동강이 크게 S자를 그리며, 삼강을 지나 다시 남쪽으로 휘어져 흐른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굽이치는 낙동강 전경과 하얀 백사장이 펼쳐져 있는 강안의 풍경, 조금 전에 지나온 삼강 주막과 삼강교 부근이 멀리 보인다. 강 건너편은 솟은 산은 영순면 달봉산이다. 그 산 아래가 영순면 이목리 백포가 있다. 삼강주막 아래쪽에서 이목리를 연결하는 다리[달봉교]가 있다. 다리 중간에 전망대를 갖춘 것을 보면 차가 다니지 않는 관광용인 것 같았다.
낙동강에 연해 있는 이목리를 병풍처럼 싸고 이어지는 산과 그 주변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유장하게 휘어 돌아가는 낙동강의 풍경이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이상배 대장과 나, 우리를 배웅하는 한학수 사장과 함께 역사적인 기념사진을 찍었다. 나의 낙동강 종주 여정에서 크게 성원을 해 준 친구가 한없이 고맙고 따뜻했다. 달붕교를 건너 백포를 경유하여 가는 낙동강 길은 산록의 절벽으로 인해 길이 없으므로, 우리는 여기서 고개를 넘어 낙동강 종주 바이크로드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히말리스트 이상배 대장 -달봉교 / 멀리 보이는 산 사이에 삼강나루가 있다
[든든한 친구와 함께] ▶낙동강 하류 방향-오른 쪽 강안이 영순면 이목리(백포)
☆… 우리는 59번 도로의 고개를 넘어, 풍양면 청운리에서 본격적인 트레킹에 돌입했다. 친구 한학수 사장의 따뜻한 환송을 받으며 오늘의 장정(長征)에 들어갔다. 이 길(바이크로드)은 낙동강과 산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내지의 마을길이다. 구룡동 마을회관 앞을 지나 산굽이를 돌고 구룡교를 지났다. 산을 끼고 들판을 바라보며 한참을 내려갔다. … 하풍리 마을 입구의 쉼터[사각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너른 들판의 길을 가로질러 낙동강 제방 길로 나아갔다. 이제 강변 길, 긴 직선의 아스콘 로드로 따라 내려갔다. 오전 11시, 영풍교(永豊橋)에 이르렀다. 삼강주막 ‘뱃가 할매’가 이야기하는 옛날에 ‘하풍나루’가 있던 자리다. 영풍교는 문경시 영순(永順面)과 예천군 풍양(豊陽面)을 잇는 콘크리트 교량이다.
구룡동 마을
하풍리 마을 입구의 쉼터
[비봉산]-백두대간 대미산에 남으로 뻗어온 문경지맥의 끝자락
[영풍교(永豊橋)] ― 옛날 하풍나루
영 강(穎江)
* [영강(穎江)] ― (문경과 상주의) 백두대간 산곡에 발원한 물줄기들이 모아진 영강
영풍교(永豊橋) 아래에는, 상주의 함창에서 이안천을 받아들인 문경의 영강(穎江)이 낙동강에 유입된다. 영강(穎江)은 문경의 백두대간 희양산-포암산-청화산과 상주의 속리산 문장대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 온 농암천과 백두대간 조령산-주흘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온 조령천이, 문경시 마성면 진남교에서 합류하여 이루어진 강이다. 영강은 문경시청이 있는 점촌을 경유하여, 함창읍 금곡리에서 이안천과 합류하여 영풍교 아래 상주시 사벌국면 퇴강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낙동강에 유입되는 영강(穎江)
영강(穎江)의 상류방향의 풍경
낙동강은 태백에서 내려오는 본류(本流)에, 강의 북쪽이나 서쪽의 백두대간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물줄기와 동쪽의 낙동정맥의 산곡에서 흘러내려오는 지천들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강줄기를 이룬다. 다시 말하면 백두대간과 낙동정맥 사이의 모든 산곡에서 흘러온 물이 하나의 낙동강을 이룬다.
[문경새재] — 영강(穎江)의 물길 따라 이어지는 영남대로
백두대간(白頭大幹)의 ‘문경 구간’은, 그 영역이 아주 장대하다.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중간 허리에 해당한다. 동쪽의 문경시 동로 [벌재](59번 국도)에서 시작하여 황장산(1,078m)-대미산(1,115m)-포암산(962m)-[하늘재]-탄항산-주흘산(1,106m)까지 서진해오다가, 안부인 조령관[새재]에서 남으로 조령산(1,025m)-(3번 국도, 이화령)-백화산(1,063m)을 경유, 다시 서쪽으로 희양산(999m)-장성봉(915m)-대야산(931m)으로 이어진 후, 다시 남행하여 조항산-밀재(문경시 농암)에 이르는 구간인데, 수많은 고봉준령이 포진하고 있다. 이후의 백두대간은 상주 구간으로 청화산-[늘재](32번 국도)를 지나서 속리산 문장대(1,050m)로 이어진다.
영강(穎江)은 문경지역(동로~농암)을 통과하는 백두대간의 여러 산곡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모여서 이루어진 강이다. 동로의 금천을 비롯하여, 갈평의 신북천, 새재의 조령천, 가은의 영신천, 가장 긴 농암천 등이 있다. 이중 금천은 산양을 경유하여 삼강에 유입되고, 신북천과 조령천은 문경에서 합류하고 농암천과 영신천은 가은에 합류한 뒤, 모두 마성 진남교에서 하나의 영강(穎江)이 된다.
그 중에서 문경새재 ‘초점(焦點)’에서 발원하는 조령천을 영강의 본류(本流)로 보고자 한다. 길이로 보면 농암천이 가장 장대하지만, 조선시대 초기부터 조령천 물줄기를 따라 영남과 한양을 잇는 영남대로(嶺南大路)-문경새잿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새잿길은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3개의 관문이 있다. 발원지 ‘초점(焦點)’은 백두대간의 마패봉과 조령산 사이의 안부, 제3관문 조령관이 아래의 산곡에 있다. 새재를 넘어가면 충주로 가는 괴산 땅, 그 산곡의 물은 한강으로 흘러간다. 명승 32호로 지정된 문경 ‘새재’는, 영주의 죽령(竹嶺), 영동의 추풍령(秋風嶺)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고개로 꼽히는데, 백두대간 조령산의 안부(鞍部)를 넘는 고개라고 해서 '조령(鳥嶺)'으로 불리기도 한다.
* [문경새재] — 청운의 뜻을 품은 수많은 인재들이 지나던 길
☆… 영남대로(嶺南大路)로 지칭되는 문경새재길은, 조선 초 태종(太宗) 때 개설되어, 약 600여 년 동안 영남과 충청도-경기도-한양을 잇는 요로(要路)였다. 문경시 새재 입구 주차장에서 제3관문 조령관(백두간의 안부)까지는 오르막 7.6km, 새재를 넘어 충북 괴산군 연풍면 고사리의 3번 국도까지는 11km의 거리이다. 이는 오늘날 잘 닦여진 길로 측정한 것, 옛날의 이리저리 돌아가는 험준한 산중 소로로 따지면 12km가 넘을 것이다. 고갯마루인 조령관 앞에 ‘동화원’이라는 주막이 있다.
* [하늘재] ▶ 새재가 개통하기 전에는 하늘재로 통행했다. 하늘재는 백두대간을 넘는 최초의 고갯길이다. 하늘재는 새재의 동쪽에 있다. 백두대간 포암산과 주흘산(부봉) 사이의 안부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시대 초 A.D. 156년 아달라이사금왕의 북진을 위해 하늘재를 개척했으며, 죽령 옛길보다 2년 앞서 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충청도 충주와 경상도 문경 사이의 고갯길 중 가장 낮다. 하늘재라는 명칭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은 고개라 하여 붙여진 것이지만, 실제로는 고갯마루의 높이가 해발 525m로 그다지 높지 않다. … 천년사직 신라가 멸망하고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그의 누이 덕주공주와 함께 서라벌을 떠나 북쪽으로 향했다. 하늘재를 넘고 미륵리에 당도한 마의태자는 그곳에 미륵입상을 세우고, 덕주공주는 월악산에 덕주사를 건립한 후 오랜 세월을 기도하며 신라의 부흥을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그들의 내세는 오지 않았다. 망국의 한을 품고 하늘재를 넘었던 마의태자는 결국 금강산을 향해 떠났다.
☆… 문경새재는 과거(科擧) 길이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을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과거에 등극하여 금의환향한 길목이 이곳이다. … 조선시대의 사림(士林)의 중심은 영남의 선비들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자신의 고향인 경상도 구미로 낙향하여 금오산 아래 채미정(採薇亭)을 짓고 제자를 길러낸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위시하여, 그 계보에서 용출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등이 모두 이 길을 오고가면서 벼슬에 나아가 이름을 떨치며 세상의 영욕을 다했다. 무엇보다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롯하여 그 문하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모두 이곳을 통해 관직에 나아갔다. 그래서 문경새재 ‘과거(科擧) 길’이라고도 한다.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드러나듯 ‘(과거 급제의)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도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전기 대문장가 서거정(徐居正)도 대구의 양친을 그리워하며 이 고개를 넘었고, 한때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안동 예안의 퇴계(退溪) 선생을 뵙고 지나간 길도 이 길이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암행어사의 소임을 받아 이 길을 넘어서 영남의 민정을 살피러 갔다.『구운몽』을 쓴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을 비롯하여 새재를 지나는 수많은 선비들의 사연이나 감상도 많다.
* [문경새재] —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 그러나 문경 새재는 역사적으로 비운(悲運)의 현장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주력부대 18,500명을 이끌고 밀양-대구-상주를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던 곳도 바로 이 길이었다.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고니시 부대는 부산에서 열흘 만에, 척후병들이 그렇게도 경계한 문경 새재 입구에 도착했다. 비조불입(飛鳥不入), 문경새재는 나는 새도 못 들어간다는 천혜의 요새였고, 여기만 뚫으면 한양까지는 일사천리였다. 그러나 선조 임금으로부터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申砬)은 천혜의 요새인 이곳을 버려두고 충주 탄금대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참패했다. 전투 이틀 만에 신립 장군은 자결했고, 부장 김여물은 전사했다. 그리고 열흘이 채 안 되어 한양은 왜군에 넘어갔다. 고니시가 한양에 입성하기 사흘 전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피난을 갔다. 당시 백성들은 몰래 도주한 왕과 관료들에 대한 분노로 도성을 불태웠다.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
「聞慶 縣監申吉元忠烈碑」— 왜군과 맞선 의기(義氣)와 장렬한 순국(殉國)!
☆… 문경새재는 비장(悲壯)의 충혼(忠魂)이 살아있는 곳이다.… 임진년 4월 26일, 문경현감 신길원(申吉元) 공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왜군이 접근해오자 피하지 않고 대적(對敵)했다. 몇 안 되는 군사마저도 다 달아나고, 신길원 현감은 총상을 입고 홀로 적장 앞에 섰다. 북상하는 왜군의 길을 막았다. 적장이 칼을 빼어들고 속히 항복하여 길을 비키라고 협박하자, 공(公)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리키며 “내가 너희를 동강내어 죽이지 못함을 한탄하니 빨리 죽여서 나를 더럽히지 말라” 하며 꾸짖었다. 적병이 성내어 먼저 한 팔을 자르고 계속 위협을 가해 왔으나, 공은 얼굴빛도 바꾸지 않고 꾸짖기를 계속하니, 마침내 살을 발라내는 모진 죽음을 당하였다. … 왜란 끝난 후, 숙종 32년(1706년) 조정에서는 공(公)의 장렬한 순국(殉國)을 기리어 ‘縣監申吉元忠烈碑’(현감신길원충렬비)를 세워 그 충혼(忠魂)을 기리고 있다. ‘충렬비’는 새재 초입 <옛길박물관> 입구의 오른쪽 길목에 있다.
縣監申吉元忠烈碑 (현감신길원충렬비)
♣ [문경새재] — 천혜의 요새(要塞), 청정한 조령천의 아름다운 명품길
☆… 문경새재에는 사적 1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세 개의 관문이 있다. 관문(關門)은 외적의 방비나 입국자의 조사를 위해 국경·군사요충지에 세운 성(城)의 출입문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조정은 문경새재에 3개의 관문을 축성했다. 제1관문이 주흘관(主屹關)이요, 제2관문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은 조령관(鳥嶺關)이다. 가장 높은 곳이 백두대간의 안부인 새재[鳥嶺]이다.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길은 영강의 최상류인 조령천(鳥嶺川)을 따라서 나 있다. 조령천은, 백두대간의 안부, 조령관 아래의 초점(焦點)에 발원하여 흘러내리는데, 동쪽으로 주흘산 연봉이 솟아있고, 서쪽에는 조령산 연봉이 아득하게 솟아있다. 그야말로 심산유곡의 물줄기이다. 새재의 길은 이 조령계곡(鳥嶺溪谷)을 따라 이어진다. 길 따라 흐르는 계곡물은 수정처럼 맑다. 더없이 청정하고 맑은 물이다. 특히 용추의 소(沼)에는 1급수에만 사는 ‘버들치’나 ‘꾸구리’가 서식했다. 여름이면 싱그러운 숲이 터널을 이루고 가을이면 원색의 물고운 단풍이 환상적인 풍경을 이루고 겨울이면 하얀 눈이 쌓인 설송(雪松)이 장관을 이룬다. 그래서 새재 길은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10대 명풍 길의 하나로 선정되었고, 2013년 한국관광공사가 실시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 관광 100선'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것이다. (<조선일보> 2013. 9월 5일 보도)
교귀정(交龜亭)
용추(龍湫)
제2관문 조곡관(鳥谷關)
* [과거옛길의 시비(詩碑)들] — 선인들의 문향(文香)이 그윽한 길
☆… 조령은 옛날 선인(先人)들이 다녔던 고갯길이다. 영남에서 한양을 다닐 수 있는 길은 조령[새재]과 죽령, 그리고 추풍령 등 세 개의 길이 있는데,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는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왕래하였다. 제2관문 조곡관의 '과거옛길'에는 새재를 지나는 감회를 읊은 시(詩)를 비에 새겨 곳곳에 세워 놓았다. 은은한 정취가 흐르는 옛길이다. 크고 작은 미끈한 자연석에 새재를 넘은 선인들의 작품이다. 서포 김만중의「조령」다산 정약용의「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회재 이언적의「새재에서 아우에게」소쇄양의「조령」석천 임억령의「새재에서 이별하며 주다」학봉 김성일의「문경 지나는 길에」동강 신익전의 「새재에서 시 두 편」퇴계 이황의「새재를 넘으며」등등, 옛길 주변에 송림이 이어지고 계곡에는 청랑한 물이 흐른다. 그 길목의 선인들의 숨결이 깃든 시비들이 빛을 발한다. 정약용의 시「冬日嶺內赴京 踰鳥嶺作」(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 짓다)이다
嶺路岐㠊苦不窮 새재의 험한 산길 고달프고 끝이 없는 길
危橋側棧細相通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長風馬立松聲裏 세차게 부는 바람 솔숲을 흔드는데
盡日行人石氣中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幽澗結氷厓共白 시내도 언덕도 온통 하얗게 얼었는데
老藤經雪葉猶紅 눈 덮인 칡넝쿨엔 단풍잎이 붙어있네.
到頭正出難林界 마침내 똑바로 숲길을 벗어나니
西望京華月似弓 서울 쪽 하늘엔 초승달이 걸려있네.
* [문경새재아리랑비] — 울창한 숲길, ‘새재아리랑’의 구성진 가락이 흐르는…
☆… 제2관문 조곡관을 지나 500여 미터 올라가는 길목에「문경새재아리랑비」가 있다. 버튼만 누르면 ‘문경새재아리랑’이 흘러나온다. 민초(民草)들이 오가고, 선비들이 과거 보러 오가던 문경새재는 예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였다. 민초들의 고달픔과 애환이 담겨있는 ‘문경새재아리랑’이 전해 내려온다. 오늘날 정선·진도·밀양아리랑이 전해 내려오는데, 요즘 ‘문경새재아리랑’이 ‘우리나라 아리랑의 원조(元祖)’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문경은 새재에 물박달나무
홍두께 방망이로 다 나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홍두께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 애기 손질로 녹아 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문경은 새재 고개는 왠 고갠지
구부야 구부 구부가 눈물이 나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 [한국의 ‘아리랑’ 세계인류무형유산 등재] — 아리랑에 나오는 고개는 문경새재
☆… 지난 2012년 12월 5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7차 무형유산위원회에서 우리나라의 아리랑이 ‘인류무형유산’ 대표 목록(Representative List)에 등재되었다.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한(恨)과 대동(大同)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연결고리로서 예로부터 즐겨 부른 고유 민요다.
세계인의 유산으로 등재된 우리의 아리랑은 실제로 세계에 최초로 소개된 것이 바로「문경새재아리랑」이다. 이는 미국인 호머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가 1896년「문경새재아리랑」을 역사상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기록하여 소개한 것이다. 요즘 학계에서는 “아리랑 가사에 흔히 등장하는 ‘고개’는 바로 ‘문경새재’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 [제3관문 조령관] — 백두대간 마루금이 지나는 길목,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
☆… 제3관문 조령관 백두대간(白頭大幹)이 지나가는 마루금이며, 낙동강과 한강의 분수령이며, 경상도와 충청도를 가름하는 고갯마루이다. 줄기차게 달려온 백두대간이 마패봉에서 이곳 조령관의 성문을 거쳐 조령산 연봉으로 이어져 나간다. 제3관문 조령관(鳥嶺關)은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새재의 고갯마루에 있다. 세 개의 관문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이다. 이곳은 한양의 문물을 접하는 첫 번째 성문(城門)이요, 남쪽에서 올라오는 왜적을 방어하는 최후의 보루(堡壘)였다. 도순변사(지금의 육군의 최고사령관) 신립 장군이 천혜의 요새인 각 관문을 지키며 지형을 적극 활용하여 왜군을 맞아 싸웠더라면, 야만적인 왜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을 것이요, 도성으로 가는 한양 길을 그렇게 허무하게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제3관문 조령관(鳥嶺關)
낙동강 새재 발원지 [초점(焦點)] - 3관문 조령관(鳥嶺關) 아래의 산곡
제3관문 조령관(鳥嶺關)- 한양쪽
[영강의 추억] (1) — 행복한 문중(聞中) 시절
영강(穎江)은 백두대간 대미산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支脈)의 서쪽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온 물이 하나로 합류한 물이다. 다시 말하면, 영강(穎江)은 문경의 백두대간 희양산-포암산-청화산과 상주의 속리산 문장대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 온 농암천과 백두대간 조령산-주흘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내려온 조령천에 갈평의 신복천이 합류 한 후, 문경시 마성면 진남교에서 하나의 물줄기가 된 강이다. 영강은 호계(면)-영순(면)과 문경시청이 있는 점촌 사이를 흘러내리다가, 함창읍 금곡리에서 이안천과 합류하여 영풍교 아래 상주시 사벌국면 퇴강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대미산(1,115m)에서 남으로 분기한 이 지맥은 ‘여우목고개’를 지나 운달산(1,097m)-단산(956m)을 경유하여 오정산(810m)으로 이어지고 거기에서 남쪽의 월방산(360)을 경유하여 영순면 천마산(279m)을 지나 낙동강 강안의 비봉산에서 그맥을 다한다. 백두대간 문경지맥이다. (이 지맥을「신기산우회」에서는 ‘대미지맥’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이 지맥의 동쪽[동로-산북-산양-영순]에는 금천(錦川)이 흐르고, 서쪽[문경-가은-농암]에는 영강(穎江)이 흐른다. 문경과 동로의 경계인 ‘여우목고개’가 금천과 영강의 분수령이다.
영강(穎江)은 그 명칭으로 보아, ‘기산영수(箕山穎水)의 고사(故事)’와 관련지어 볼 수 있다. 기산영수는 옛날 요(堯)임금 때 청절한 은자 소부(巢父)와 허유(許由)가 살았다는 산곡이다. 이야기인즉, ‘허유가 요임금의 부름을 받고 가서 천하(天下)를 내주겠다는 말을 듣고, 귀가 더러워졌다 하여 돌아와서 영수(穎水)에서 귀를 씻었다. 마침 이때 소부(巢父)가 영수에서 소에게 물을 먹이려하다가 허유가 귀를 씻었다는 말을 듣고, 더러운 물을 먹일 수 없다 하여 소를 끌고 상류에 가서 먹였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근거하여 본다면 영강은 청정무구(淸淨無垢) 맑은 물이다. 옛날 문경의 백두대간 산곡은 사람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심산유곡이었다. 상주 화북의 속리산-문장대에서 발원하여 내려온, 쌍용계곡-우복동천과 같은 농암천(영강의 상류)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낙동강 최상류의 영강은 하늘 아래 가장 맑은 물이다. 대미산-조령산-희양산-문장대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정기(精氣)와 영강의 맑은 기운(氣運)이 흐르는 곳이 문경-점촌이다. 영강은 문경 지역의 중심을 관류하는 강이다.
☆… 거기 나의 모교 문경중학교가 있다. 문경중학교는 이 영강(穎江)이 흐르는, 점촌의 넓은 들판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교가(校歌)가 ‘영강(穎江)’으로부터 시작된다.
영강수 맑은 물에 희망 띄우고 / 대조령 높은 등에 광명 실으니
산하에 뜻을 얻은 우리의 학당 / 남양에 이름 높다 문경중학교
믿음과 의리로써 마음 가지며 / 강건과 진리로써 몸을 지키며
화랑의 높은 뜻을 다시 이어서 / 반만년 옛 터전에 새 문화 세워
한마음 한 뜻으로 일보 또 전진 / 먼 옛날 한배님이 가르쳐 주신
인간의 홍익정신 높이 받들어 / 온 누리 오랜 날을 널리 기리세
모교 문경중학교 교가이다. 그 첫머리에서, 깨끗한 은자의 삶처럼 올바르고 참다운 심성을 지니되 세상 밖으로 나가서는 ‘큰 뜻’[희망]을 펼치겠다는 결의로 시작하고 있다. 그래서 학교도 흥덕리(興德里)에 있다. ‘덕을 쌓아 뜻을 이룬다’는 뜻이다. 지향하는 목표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다. … 문경중학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3일에 개교했다. 내가 1948년 8월 18일(음력 7월 14일)에 태어났으니 문중의 역사는 내 생애와 그 출발을 같이한다. 공교롭게도 연륜이 같다. 문경인의 기상(氣相)은 백두대간 조령산의 정기(精氣)와 청정한 영강의 물이 심성(心性)의 바탕을 이루고, 희망 찬 내일을 꿈꾸는, 자부심과 기상이 높은 학당이다.
* [문중(聞中)의 자부심] ▶ 삼일절 시가행진 ; 당시 문중은 매년 3·1절이 되면, 학교운동장장에서 기념식을 하고 시가행진을 했다. … 선두에 악장이 앞장 서고 관악대(밴드부)가 힘차고 웅장한 행진곡을 연주한다. 그 뒤를 1학년-2학년-3학년 차례로 행진을 한다. 행렬의 총지휘는 대대장(학생장), 각 학년에는 중대장(학년장)이 있고 각 반에는 소대장(학급장)이 각 선두에서 통솔한다. 밴드 악대는 장엄하고 우렁찬 행진곡을 연이어 불어댄다. 작은 교표와 학년표가 좌우에 달린 로만 칼라의 까만 교복, 정중앙의 교표가 자리한 모자에는 하나의 백선이 둘러쳐져 있다. 그리고 소매에도 백선이 한 줄 둘러져 있다. 행진을 할 때, 눈빛은 엄정하고 자세는 반듯하고 행보는 절도가 있었으며 대열은 장중했다. 행진곡 중간에 교가를 힘차게 제창하며 행진한다. 가슴 벅차고 절도 있는 행진이었다. 연도에는 부모님이나 많은 시민들이 나와 구경을 하면 박수를 치고 환호를 했다. 시가행진을 위하여 학교의 대운동장에서 연습을 많이 했다. 행사는 3·1절을 맞이하여 선열들의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6·25동란을 겪은 뒤의 구국의 의지를 고취하는, 엄숙한 행사였다. 무엇보다 문중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충만했다. 당시 밴드부를 지도하신 분이 임우상 음악선생님이셨다. 실력과 열정이 넘치는 총각 선생님이셨다. 후에 선생님은 대학의 음악 교수로, 유명한 작곡가가 되시고, 계명대학교 음악대학장을 역임하셨다. 최근에도 세종문화회관 리사이틀홀에서 작곡발표회(합동)를 하시어 우리 제자 몇이 참석하여 반가운 사제(師弟)의 만남을 갖기도 했다.
☆… 당시 문경중학교는 이 지역의 명문이었다. 그때는 농촌 형편이 다 가난한 시절이라 지역의 인재가 모두 시험으로 선발하는 문중에 모이기 때문이었다. 부자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대구나 서울의 중학교로 진학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훌륭한 졸업생이 많았다. … 제1회 김형선 유성화학 회장을 비롯하여, 천기호 경상북도경찰국장, 서울대 교수 김안제 박사,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한국선수단장 변탁(태영 사장), 윤학렬 육군중장, 서성한 경희대 경영대학원장, 현대자동차 박병재 사장, 한국화가 임무상 화백, 신상민 한국경제신문 사장, 김중겸 현대건설 사장, 서종욱 대우종합건설 사장, 정옥 필리핀항공 회장, 부산행정부시장을 지낸 고윤환 문경시장 등등 우리 국가사회를 위하여 큰일을 하신 분들이 많다. … 일일이 다 열거할 수가 없다.
특히 우리 동기(제14회)에도, 학계의 지홍기 총장(영남대학교), 채이식 박사(고려대 법대학장, 법학대학원 원장, 국제해양법학회 회장), 언론계의 남찬순(서울대, 동아일보 논설위원), 관계(官界)의 권기범(연세대 공학박사, 청와대건설특위), 김이수(국세청, 세무사), 여순상(보건복지부), 예술계의 박철(화가, 홍대 미대 교수), 김종식(사진작가), 이공계의 이귀영(서울공대, 건축사), 홍륜(서울공대, 전문CEO), 체육계의 서상철(고려대, 농구국가 대표, 산업은행 감독), 종교계의 권진희·김찬배(목사), 노승하 스님(승보사 주지) 그리고 박노대(우체국장), 박성옥(샤니케익 상무, 작고), 정동섭(SK 상무, 홍콩지사장), 기업가로 지금까지 활약하는 김대호(주. 삼영전자 사장), 변대수(주. 태영인더스트리 사장), 신관철(주. G&G 대표), 한학수(사업) 등이 있고, 교육계에는 김학노, 노응구, 서종태, 양재동, 오상수, 조시원, 채봉기, 황윤현 등 많이 있다.
☆… 나는 1961년부터 중학교 3년간, 아침저녁으로 왕복 10여 킬로를 걸어서 다녔지만, 나에게는 참으로 가장 행복한 학창시절이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신 마지막 3년이었기 때문이다. … 초등학교 어린 시절, 어머니가 밤을 새워 한과(韓菓)를 만드는 그 옆에서, 나는 숙제를 하고 책을 보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아른한 잠결에서, 어머니가 누나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상수는 지 공부, 지가 알아서 잘 해!” … 어릴 적, 나는 ‘조선에 없는’ 유아독존의 아들이고 사실 노는 것도 유별났다. 그런데 어머니의 그 말을 듣고 나서는 내심 ‘스스로 무엇인가를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착실히 공부하는 아이가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믿음과 기대가 나를 세우는 힘이 되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부터 우등상장을 받았다. … 무엇보다 문경중학교는 어린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고, 또 많은 것을 일깨워 주었다. 나도 무척 열심히 공부했다. … 중3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는 참 많이 힘들었다.
중학교 3학년 (1963)
[영강의 추억] (2) — 아프고 힘들었던 고교 시절
☆… 1964년 문경종합고등학교에 광산과 입학했다. 학교는 소나무 울창한 영신숲이 있는 영강(穎江) 가에 있었다. 그래서 교가도 ‘영~강 맑은 물결 굽이치는 곳~’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가끔 영강으로 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3년 동안(1964~1966) 나는 더욱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참으로 가난한 시절이었다. 장학금이 아니었다면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반 친구 대부분이 농촌 출신으로, 거의 모두 가난했다. 그때 서로 의지하고 마음의 정을 나눈 친구들을 잊을 수 없다. 특히 토요일에 철길 따라 함창에 있는 용철이네 집에 가서 그 어머님이 지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고 오기도 했다. 친구의 어머님은, 연전 어머니를 여읜 나의 외로운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셨다.
* [문고의 자부심]▶「청랑회(靑浪會)」: 고교 재학시절 그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든든한 자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다. 선·후배로 결성된「청랑(靑浪)」의 멤버가 된 것이다. 청랑회(靑浪會)는 고교 재학시절 선배가 바로 아래 후배 중,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뽑아서, 선·후배가 형제적인 유대를 맺고 이어져 온 ‘클럽’이다. 선배는 후배를 이끌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후배는 선배를 존경하며 따르는 일종의 친목모임이면서 미래의 공동선(公同善)의 목표를 추구하는 결사였다. 그리하여 지역과 국가 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되기를 다짐하고 노력했다. 일종의 비밀결사였기 때문에 외부에 드러내지 않았다. 초대회장 유해성(문고 9회, 건국대 총학생회장) 선배로부터 시작하여 25회까지 이어졌다.(나는 15회이다) 당시 우리 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영어를 가르쳤던 K 선생님께서 지역과 우리나라의 먼 앞날을 생각하여 후배 인재를 키운다는 복안으로 모임을 밀어주셨다고 했다. 당시 서울·대구의 대학에 진학하여 후배의 선망과 모범이 되는 선배들이 찾아와, 재학 중인 후배들을 모아 밥을 사주면서, 따뜻한 격려와 '청랑(靑浪)의 정신'을 다져주었다.
… 그런데 개인적으로 나는 참 어려웠다. 문제는 진로,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나의 처지로 보면,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늘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웠다. 뭘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가난한 형편이었다. 중학교 때 김재룡 영어선생님이 자주 말씀하시던 “Boys, Be ambitious!” 그 가슴 벅찬 그 말씀이 내 마음 속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고 헛돌고 있었다. … 당시 내가 주문(呪文)처럼 암송하던 시(詩)는 ‘푸쉬킨’이었다.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한 시인의 목소리가 마음에 와 닿았다. 많은 위안이 되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 즐거운 날이 오리니 // 마음은 미래에 있는 것 /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 모든 것은 하염없이 사라지나니 /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되리니
… 고등학교 광산과에 다니면서 앞날을 생각하니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 취직 잘 된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하다 궁여지책으로 광산과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실습하러 현장에 나가보니 광산은 도저히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대학 진학’은 집안 형편으로 보면 언감생심(焉敢生心),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가난과 인습, 어떻게 하든지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이 푸쉬킨을 읊조리며 자기최면을 걸 듯, 마음을 달래고 나의 길을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혼자서 전전긍긍하며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스스로 생각한 것이 ‘육군사관학교’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탈출구는 거기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국비로 지원되고 장래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 ‘육사(陸士)에 합격만 하면 일단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 나는 1학년 2학기부터 조용히 육사(陸士) 시험을 준비했다. 당시 광산과 담임이었던 강재성 선생님께 나의 처지와 생각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이 묵묵히 들으시고 격려해 주셨다. 그래서 전공과목 시간에도 뒷자리에 앉아 영어와 수학 공부를 했다. 실업계 학교에서 입시과목인 영어·수학·국어는 시간수도 적고 그나마 교과서 진도도 다 나가지 않았다. 기초를 다지기 위해 혼자서 공부를 했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여름철 엉덩이에 땀띠가 나서 아프도록 공부를 했다. 편물을 하는 누나가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 2학년 땐 이웃마을 용궁의 정미소(김동준 사장) 집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교에 다녀와서 2km 떨어진 그 집에서 가서 2시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고, 식사 후, 밤을 새워 공부를 했다. 그리고 새벽에 집에 와서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챙겨 학교에 갔다. 그렇게 1년 동안을 계속했다. 그렇게 받은 돈으로 입시(入試) 교재를 사고, 당시 백수사(白水社)에서 간행한「한국단편문학전집」(5권)을 비롯한 문학서적을 월부로 사서 읽기도 했다.
당시 같은 반 이종호, 이보우와 어울려 학급신문「燈」(등)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종호는 대구에서 명문 경북중학교를 나왔는데, 아버지가 은성광업소 광부였다. 이보우는 아버지가 용궁면장을 지낸 분으로 덕망이 높으신 분인데 당시에는 집안이 엄청 가난했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지독하게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여 책도 읽고 글도 써서 신문을 발간했다. 내가 글씨를 잘 썼으므로 ‘가리방’은 내가 긁었다. 그리고 셋이서 사관학교를 가기로 하고 서로 격려하며 공부했다. 졸업 후, 이종호는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졸업 후 해군대령까지 진급했다. 이보우는 ‘삼사’(三士)에 가서 육군 소령으로 예편했다. 나는 육사에 원서도 내지 못했다.
고등학교 3학년(1966)
시골의 실업계 학교에서 입시 공부하는 데는 애로가 많았다. 당시 점촌에는 학원도 없었다. 혼자서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오직 ‘공부’만이 이 답답한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이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그 희망이 있었다. … 1966년 7월, 3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대구 침산동에 사는 외사촌 형님(申光浩) 댁에 의탁하여 대구 ‘동광학원’에 다녔다. 육사 입시 마무리 학습으로 국어·영어·수학Ⅱ 세 과목을 집중적으로 들었다. 혼자서 끙끙거리다가 경북대 이기백 교수(국어)를 비롯하여, 입시 명강사의 강의는 답답한 가슴을 확 뚫어주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정말 공부가 잘 되었다. 그리고 9월 초, 대구의 지방병무청에서 ‘육사(陸士)’ 입학원서를 사가지고 집으로 왔다.
1966년 9월 중으로 제출하는 육사(陸士) 입학원서를 아버지와 누나 앞에 내놓고 나의 진로를 이야기했다. … 그런데 아버지와 누나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일단 내가 육사에 들어간다면 나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 되겠지만, 두 분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내가 육사에 합격을 하면 육사 4년 그리고 이후의 군대생활이 이어지게 되면, 나이 드신 아버지는 그것이 당신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없는, 부자지간의 생이별로 생각하고, 누나는, 의가 좋지 않은 완고한 아버지를 나 없이 혼자서 감당(부양)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당시 누나는 편물을 해서 집안을 꾸려가고 있었다. 어느 정도 반대를 예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간절히 원하면 허락해 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두 분 다 철벽이었다. 아버지는 보호자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 그래도 내 맘대로 간다면 ‘부자의 연(緣)을 끊자’고 했다. 누나는 내가 시험 보러 가면 나보다 먼저 집을 나간다고 했다. 시험을 봐서 될 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나는 원서조차 내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다.
나는 좌절했다. 내가 붙잡고 있던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아야 할까, 나는 고도(孤島)에서 혼자 신음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편물을 해서 가계를 꾸리던 누나가 가까운 안동교대를 가라고 권했다. 그 동안은 자기가 아버지를 모시고 내 뒤를 봐 주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졸업 후, 고향에서 자리를 잡아 내가 아버지 모시고 살았으면 했다. 사실 아버지나 누나의 생각과 처지가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모두 어려운 상황에서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하든지 이 가난과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당시 ‘지금 결행하지 않으면 다시 세상에 나아갈 기회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산유곡(深山幽谷)에 갇혀, 아무 것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앞뒤 생각할 겨를이 없는, 연로하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어머니 돌아가시고 혼자서 가정 살림을 해온 누나의 처지를 생각하면 또한 마음이 아팠다. 나는 혼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마음은 먹물 같은 아픔으로 가득 찼다.
…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절망감에 휩싸인 나는 금천교 다리 건너, 금천(錦川)의 제방을 따라 비를 맞고 걸었다. 내성천을 만나는 곳까지 이어지는, 그전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긴 둑방이었다. 나의 인생은 그 긴 둑방처럼 아득하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늘을 쳐다보니 차가운 빗줄기가 얼굴을 때린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무심하고 허허로운 풍경뿐이었다. 아아, 어떻게 해야 하나?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 나의 마음은 무너지고 있었다. 무작정 걷고 또 걸으면서 ‘이제 살 건덕지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순간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 얼마를 걸었을까. 등 뒤에서 “상수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아! 어머니가 계셨다. ‘엄마!’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엄마를 불렀다. … 빗속에서, 나는 그냥 주저앉을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누나 앞에서 육사 원서를 찢었다! 그리고 허탈한 나날이 계속 되었다. 책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 그런데 한참 뒤에 서울의 큰누님이 내려왔다. 앞서, 내가 나의 답답한 마음을 담아서 서울 누님께 편지를 했었다. 당시 큰누님은 서울 동대문 근처에서 어렵게 살았다. 나보다 22살이나 많은 제일 큰 누님(1926)이었다. 내 어린 시절, 누님이 김천에 살 때에는 아주 잘 살았다. 자형(장원진)이 증산 수도산에서 산판[벌목사업]을 하면서 돈을 잘 벌었다. 그때는 친정에도 자주 오고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주었다. 아버지·어머니 관(棺)으로 쓸 좋은 재목도 갖다 놓았고, 나에게는 가방과 학용품도 사다주고 그림물감과 화구 일체를 사다주기도 했다. 그런데 자형의 그 사업이 여의치 않아 그만 두고, 서울에 올라가서 힘들게 살고 있는 상황이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누님은 맏이답게 친정에 대한 애착이 유별났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난 뒤에 더욱 그러했다.
그 누님이 나와 아버지와 누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결연히 말했다. “가자! 서울 가자!” “일단 서울 가서 시험을 보자!” 그래서 나는 그해 11월 말, 7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충주 장호원을 거쳐 서울 을지로 6가 시외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리하여 12월에 서울교육대학에 시험을 보고, 다행히 합격을 했다. 1967학번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가정교사를 하면서 대학을 다녔다.
이안천
이안천의 발원지 형제봉은 속리산 정상 천왕봉의 남쪽에 위치한 백두대간의 줄기에 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속리산(俗離山)은 방대한 영역을 포함하고 있다. 북쪽으로 관음봉, 묘봉, 칠보산, 대야산, 군자산 같은 많은 산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상주구간의 백두대간은 문장대-문수봉-경업대-입석대-비로봉-천왕봉(정상)-형제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중추를 이룬다. 등산로는 주로 보은의 법주사에서 올라가는 등산로와 상주시 화북면에서 올라가는 등산로로 나뉜다. 주봉인 천왕봉보다 문장대의 경치가 더 좋아서 문장대의 인기가 더 많다.
백두대간 속리산 연봉 (상주 구간)
이안천은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상주시의 서쪽과 북쪽의 전 영역의 내륙을 경유하여 함창으로 흘러드는 장대한 하천이다. … 백두대간 속리산 상주구간의 남단에 위치한 형제봉(상주시 화북면)과 청계산 두루봉(874m, 상주시 화남면) 사이의 산곡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내서면을 경유하여, 동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굽이굽이 흘러 외서면을 지나 은척의 시암천을 받아들인 후, 공검면 지평리를 경유하여 함창읍 금곡리에서 영강과 합류하여 낙동강에 흘러든다.
속리산(俗離山)은 워낙 산세가 장엄하고 곳곳에 기암과 준봉을 품고 있어 예부터 선인(先人)들이 찾아와 뜻 깊은 글을 남겼다. 일찍이 신라 헌강왕 때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남긴 시가 유명하다.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 하고 (道不遠人 人遠道)
산(山)은 속세를 떠나지 않으나 속인은 산을 떠나는구나. (山非離俗 俗離山)
도(道)는 인간이 살아가는 ‘참다운 도리’를 말한다. 천지의 진리[道]는 자연과 사람을 포함한 천하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자연은 생명 그 자체이고, 그 생명이 지향하는 길[道]이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면 인간의 도리도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를『중용』에서는 ‘하늘이 내려준 본성(天命之謂性)’이라 했고,『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본디 착하다(人性本善)’고 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 아니 그 본래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산다. 신라시대 당대 최고의 지성,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도 사람의 마음[慾心]이 자연[道]에서 벗어나서 사는 것을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이 시(詩)로 하여 ‘俗離山’(속리산)이라는 산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상주 화남면 청계(산)에서 발원한 이안천의 원류
그리고 조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속리산 은폭동’에서 다음과 같은 시(詩)를 남기기도 했다
양양하게 흐르는 것이 물인데
어찌하여 돌 속에서 울기만 하나
세상 사람들이 때 묻은 발 씻을까 두려워
자취 감추고 소리만 내네.
속리산(俗離山)은, 그 이름이 생긴 연원에서부터 인간 세상의 얼룩진 삶이 아닌. 청정한 생명의 경지와 참다운 삶의 도리를 말하고 있다. 계곡의 돌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 그것은 우리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참다운 본성(本性)일 것이다. 상주 청계(산)에서 발원한 이안천의 원류는, 우리들 마음속에 흐르는 선(善)한 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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