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내의 이력서
一松 韓 吉 洙
“결혼은 해도 후회가 되고 안 해도 후회가 되는데 기왕이면 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있다.
1960년 10월 30일 중추가절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살랑거려 얼굴을 간질이고 호남평야의 들머리에 있는 우리 고장의 벼는 누렇게 익어 콩멍석을 깔아 놓은 듯 한 풍성한 계절이었다. 이날 필자는 방년 25세인 이혜숙을 신부로 맞이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 당시 필자는 서울시청에 근무 중이었고 신붓감은 전형적인 농촌의 전주 이 씨 종가의 맏딸로서 침선針線과 내정범절內庭凡節 등을 엄격하신 부모로부터 전수 받는 신부수업 중이었다.
그런데 이날 대학동문 중 錦湖會라는 친목도모와 학술연마를 목적으로 하는 모임의 멤버들이 대거참여해서 함진 애비도 하고 짓궂은 장난도 하여 엄숙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순화시키는 연출을 멋지게 하여 여려 사람들에게서 칭송을 들었다.
그 뒤 필자는 솔가率家하여 시골냄새를 물씬 풍기는 성북구 수유리 입구에 있는 은행주택이라는 곳에 방 1칸을 얻어 신접살림이라고 차렸으나 어설프고 서툴러서 아이들 소꿉작란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더 신경이 쓰이고 힘이 드는 것은 음식을 장만하여 밥상을 차리려고 하면 송아지만한 주인집의 세퍼트가 와서 제가 무슨 궁중의 상선尙膳이나 되는 양 음식 감정을 하겠다고 덤비는 것이었다. 어느 때는 갈치를 구어서 밥상에 올려놓고 밥을 푸는 사이에 이놈이 갈치토막을 살짝 실례한 일도 있었다. 그러니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식사 때 마다 신경을 써야 할 처지이기에 주인에게 개 단속을 부탁하면 그날 하루만 개를 매어 놓을 뿐이어서 일종의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짓인지 아니면 파리 쫓기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이런 개수작이 매일 지속되었다.
필자는 그래도 직장에 출근을 하고 어느 때는 밤늦게 퇴근 하는 등 아무래도 밖으로 나도니 그런 애로사항이 피부에 와 닿지 아니하여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으나 직접 당하는 안식구야 말로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를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더구나 이 집은 그 당시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대한극장 대표로 있는 국鞠 모씨의 노모와 정신이상인 듯 한 동생이 살고 있는데 담장으로 외부와 단절된 주택인지라 안식구는 낯선 곳에서 종일 누구와 말 한마디 나눌 상대가 없는 일종의 창살 없는 감옥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을 해도 친구와 가까이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6개월 만에 그 알량한 살림살이를 끌고 성동구 구의동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다.
말하자면 서울의 북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자리 이동을 한 것이었다. 이곳은 고등학교 때 친목모임인 [十字星]의 멤버로 자별하게 지낸 고이헌이라는 친구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안식구는 이제야 친구의 부인을 만나 말벗이 생겨 서로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고 서울이라는 타관에서의 생활도 정착되어 살림 맛을 제대로 느낄 시점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하더니 하루는 자고 나니 세상이 뒤바뀌었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서 공무원 중 병역기피자나 미필자를 색출한다고 난리를 치더니 결국에는 필자도 병역미필자라고 직장에서 면직이 되어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하는 실직자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안식구는 첫아이를 가져서 민감한 시기이었는데도 안정은커녕 매일을 고뇌와 걱정으로 지새우다가 할 수 없이 시골 고향으로 낙향을 하고 말았다.
시골에 내려가서 보니 농촌의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아이를 가져 입덧을 심하게 하여 물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는 형편인데도 시골 살림이란 발에 걸리는 것이 사람의 노동을 필요로 하는 일인지라 꼼작거리지 않을 수가 없어 누가 시키지 아니했는데도 이를 거들어야 했다.
하루는 필자가 구직을 위하여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다가 집에 와서 보니 안식구가 마당에다 멍석을 깔아놓고 그 위에서 추수용 벼를 담는 가마니를 짠다고 잣대질을 하고 있었는데 짚을 만지는 작업이란 먼지제조 작업이라 해도 좋을 만큼 먼지가 많이 나는 일이었는데도 그 무거운 배를 안고 다니며 집안일을 거들고 있었으니 그 마음고생이야 필설로는 표현을 못한다.
더구나 안식구의 어설픈 일처리가 깔끔하고 완벽주의자이신 어머니의 마음에 흡족할 리가 없다.
“이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만드는 것이다. 가서 낮잠이나 자거라. 그것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른의 말씀을 듣는 당사자의 마음이 어떨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생각을 듣고 싶다. 아마도 안식구는 이런 저런 설음이 겹쳐서 집안 한적한곳에 가서 소리 없는 울음보를 수 도 없이 터뜨렸을 것이다.
시골 농촌의 일이란 끝이 없는 연속극이다. 누구 말대로 “덮으면 끝이요, 펴놓으면 시작이라”더니 사실이 그렇다. 가을에 밭에서 고구마 넝쿨을 뽑으면 고구마가 달려 나오듯 계속해서 이어져 나오는 것이 그 당시 농촌의 일이요 노동이요 작업이었다.
그러다가 산달이 가까워오자 안식구는 근처에 조산원이 살고 있는 친정으로 가서 이틀간의 진통 끝에 큰 아이를 낳았으니 1961년 12월 1일이었다. 이때 필자는 구직에 무슨 좋은 소식이 없나 해서 서울에 머물며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다녔다.
안식구는 이틀이나 진통을 겪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탈진이 된 상태에서도 마을에서 같이 자란 친구들 중 결혼을 안 한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다고 한다.
“지금 나는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데 너희들은 결혼도 안 해서 이런 고통을 모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냐.” 하면서 마을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보았다고 한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산파도 너무나 지쳐서 이런 난산은 처음 보았다 면서 도리어 장인 장모님에게 하소연을 했다고 하니 필자는 그 정경을 보지 아니했어도 당시 처가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 하고도 남았다.
그래도 안식구는 의지할 남편도 없는 외로운 방에서 홀로 자기를 이기는 진통 끝에 첫 아들을 분만했으니 얼마나 성스럽고 대견한지 업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는 필자의 구직보다도 더 소중하고 값진 쾌거라고 치켜세우고 싶었다.
서울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필자는 아이를 낳은 지 3일 날 선영의 게시가 있었던지 괜히 처가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발길이 먼저 그곳으로 돌려졌다. 그런데 처가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난데없는 쌈 줄이 이마에 걸렸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당에 들어서 보니 장모님이 “왜 인제 오는가.” 하고 맞이하는데 영감이라는 것이 있는지라 갑자기 머리에 느낌이 와서 “아이를 낳았어요?” 하고 부지불식간에 묻고 큰 방으로 들어가니 안식구가 누워 있다가 필자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서 필자를 붙들고 엉겁결에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아마도 아픈 배를 안고 홀로 몸부림치다가 애는 낳았으나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던 지난 악몽들이 생각나서 참았던 서러움이 남편을 만나자 북 바쳐 올라왔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아랫목에서는 어미 애비의 이런 정경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갓난아기는 쌕쌕 자고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안식구 등을 두드리며 “수고 많이 했어. 이제 애 엄마가 되었으니 애 앞에서 울지 마. 애가 흉본다고” 하면서 위로 해 주었다. 필자와 장남과의 첫 대면을 하고 나서 즉석에서 애 이름을 우선 부르기 쉬운 [개똥이]라고 지었다.
3, 7일이 자니서 안식구와 개똥이가 친가로 왔는데 친 할머니가 왜 귀한 손자 이름이 개똥이냐고 타박을 하시기에 우선 애 이름 짓는 것이 급선무가 되었다. 金生水요 水生木이라 선친은 錫자 항렬이요, 필자는 洙자 항렬이니 개똥이는 相자 항렬이다. 그래서 보통 龍자를 쓰기 쉬우나 필자가 생각하기를 용龍자 보다 차라리 떳떳할 庸자로 지어 어디에 내놓아도 떳떳한 사람, 당당한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相庸이라고 짓고 보니 지금 생각해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상용이가 복덩이이다. 그렇게 헤매고 다녀도 실업자 신세를 못 면했는데 상용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아니하여 서울시청에 다시 발을 드려놓는 행운이 뒤따랐다. 소정의 절차를 거쳐서 구의수원지에 발령을 받아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나 심신을 안정시키는 삶의 보금자리는 마련치 못하고 구의동을 전전하다가 천우신조로 구의수원지 관사에 입주하게 되었다. 이제 비로소 안정된 생활의 기틀을 다지고 보니 안식구는 10평 남짓한 텃밭에다 요모조모로 채소를 가꾸어서 밥반찬이 풍성 해 졌다. 그뿐 아니라 병아리를 사다가 넓은 공터에다 기르는데 매일 개구리를 잡아서 깡통에다 삶아서 먹이니 다른 집의 닭보다 배는 크고 튼실하여 건강한 알도 잘 나았다.
그래서 매일 신선한 채소에다가 달걀로 반찬을 만들어 먹으니 식구 모두가 건강하여 감기 한번 걸리는 일이 없었다. 이는 오로지 안식구가 천성이 부지런하고 가대家垈교육을 잘 받은 덕택이었다.
우리는 수원지 관사에 살면서 첫딸 상희를 낳고 막내아들 상복을 나아 2남 1녀를 무탈하게 잘 길렀으니 이것도 큰 복이었다. 그러나 평생을 외풍이 없고 포근한 유토피아요 낙원인 수원지 관사에서 거주 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에 마침내 내 집을 장만하였으니 구의동에 있는 68평 대지에 단독주택을 지어 이사를 하였다. 안식구는 가꾸어야 할 텃밭이 없으니 오로지 집안 치장이나 청소에 주력하여 매일 오전 오후로 집안청소를 하면서 쓸고 닦고 하는 깔끔이 노릇을 하더니 병이 낫다. 사람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인데도 원래가 먼지하나를 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인지라 병이 안 나을 수도 없었다.
안식구는 갑자기 맹장염에 걸렸는데 이를 참고 견디다가 맹장이 터져서 복막염이 되었다고 한다. 왕십리에 있는 김 외과에 입원을 하여 수술했는데 그 당시에는 간병인 제도도 없어서 환자 간호가 문제이었다. 더구나 자녀들 3남매가 줄줄이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애들의 숙식문제와 뒷바라지도 큰 일 이어서 필자 혼자 큰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천우신조인지 시골에 사시는 재종 누님이 생각지도 않게 찾아 왔기에 2주간의 간병을 맡겼다. 사람은 큰일을 당해도 其竹其竹 松松開(어려운 일도 그대로 그대로 지나노라면 솔솔 풀린다. 라는 김 삿갓의 시)라더니 솟아날 구멍이 있었다.
이번에는 잔디가 깔린 100평이나 되는 넓은 집을 사서 이사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아니해서 한해 겨울을 넘기려면 연탄 1차를 차떼기로 사다가 지하실에 쌓아놓고 한밤중은 물론 새벽에도 나와서 연탄보일러에 연탄을 갈아주어야 했다. 그뿐 아니라 넓은 땅 너른 건물 청소와 잔디 가꾸기 등 일이 엄청나게 뒤 따랐다. 이런 많은 일들이 주로 안식구의 전담사항이었다.
그러더니 안식구는 또 다른 병이 수반되어 생활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번에는 척추협착증이 와서 허리 아픈 것은 물론 걷기도 어렵다하기에 허리 수술 전문병원이라는 동서병원에 3주간 입원하여 수술을 한 결과 상태가 양호했다. 그 얼마 뒤에는 무릎에 퇴행성관절염이 와서 보행이 어려워지자 류마티스 전문병원에도 가 보았고 용하다는 전문병원에도 가 보았는데 모두가 수술을 권유하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일원동에 있는 삼성병원에서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을 끼웠다.
이런 시련을 겪은 뒤로는 안식구의 건강상태가 양호하여 각종 모임에서 시행하는 국내외 여행에도 동참을 하였고 시골 중학교 때 학우인 최동석 내외, 어느 때는 이채율 내외와 같이 그의 승용차를 이용하여 국내 유명 관광지나 명승고적을 거의 섭렵하면서 생활했다.
2010년 10월 30일은 우리 결혼 50주년인 금혼 일이었다. 그렁저렁 하는 사이에 우리가 결혼 한지 반백년이 되었다.
아이들 3남매가 금혼기념으로 가까운 이웃인 일본여행을 준비했으나 우리가 완강하게 거절해서 이를 접은 일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모처럼의 호의를 안 받아 준다고 서운해 했다.
그러자 2011년 10월 30일이 돌아 왔다.
우리 내외는 국내외로 많은 여행을 하였기에 이 날도 조용히 지내려고 하였으나 이번에는 자녀들이 우리 내외도 모르게 제주도 일주하는 2박 3일의 여행계획을 마련하여 비행기 표도 구해 놓고 제주공항에 내리면 종일 전용으로 타고 다닐 택시도 예약을 해 놓았을 뿐 아니라 국내 제1고급 호텔인 서귀포 신라호텔과 제주 칼 호텔도 예약을 다 해 놓았다. 거기에다가 금 1봉까지 마련해 주면서 우리들의 등을 떠다밀기에 완전히 타의에 의한 제주도 오지 구석구석을 찾아보는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우리들은 제주도를 여러 번 다녀왔으나 주로 발길 닿는 곳은 천편일률적으로 똑 같았다. 제주에서는 삼성혈 용두암 관덕정을, 서귀포에서는 외돌기 산방산 입구에 있는 석굴 정방폭포 천지연 폭포 안덕 계곡 중문지구나 민속촌 아니면 동쪽에 있는 성산 일출봉 만장굴 금녕 사굴 등을 보고 만다. 그리고서는 제주도를 다 둘러보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가지 아니한 오지를 찾아가려고 계획을 세우고 떠났다. 공항에 내리자 예약한 택시 기사를 만나 대략적인 계획을 설명하고 실천에 들어갔다.
우선 차귀도에 가서 잠수함을 타고 바다 밑의 어류와 해초류를 보았고 삼별초의 항몽 유적지와 더馬파크 전쟁역사박물관 추사 김정희 선생 유배지 알뜨르 비행장 지삿개의 주상절리 서불 기념관과 이중섭 미술관 쇠소깍이라고 하는 태평양 바닷물이 만나 같이 춤추는 곳을 보았고 정의 현정과 삼성 고부량의 혼인지와 섭지코지 조천 만세동산 5현단 김만덕 기념관 그리고 제주목 관아지 등을 견학하여 2박 3일의 제주여행을 마쳤다. 그날 공항에서 기념으로 사온 펜다 나무 1뿌리가 지금도 실내에서 활기차게 잘 자라고 있어 대견하다.
제주 여행을 다녀온 그 다음날부터 안식구에게 문제가 생겼다.
안식구가 제주에서 여행을 하고 돌아온 다음날 필자에게 묻는 말 “우리가 어디에 갔다 왔지요?” 하고 물었다.
그래서 필자가 “제주도에 가서 구경 잘 하고 3일 만에 왔잖아.” 했더니
“아닌데. . . . ” 하며 평상시와 다른 언행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날 무조건 건국대학 병원에 가서 신경정신과 김한영 교수를 만나 갖가지 검사와 테스트를 거쳐 약을 복용하는 등 장장 7년 동안 치료받고 있으나 큰 차도가 안 보이고 기우는 듯한 생각이 든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인지라 마찬가지로 옆에서 시중을 들고 지켜보는 필자의 가슴도 타들어 가고 고뇌도 또한 깊어지고 있었다.
때 마침 2017년부터 장애 4급인 안식구에게 정부에서 도우미를 보내주어서 그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 경남 거창이 고향이라고 하는 이자0라고 하는 아주머니는 참으로 부지런하시고 친절하시고 양심적이고 정이 많은 분이어서 안식구뿐 아니라 필자도 많은 은혜와 도움을 받고 의지하며 생활하고 있다.
그전에도 사비로 여러분의 도우미의 신세를 진 일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고방식이 아주 잘못되어 있었다. 젊은이들이 일자리가 없다고 놀면서 정부의 공짜 보상금이나 바라면서 3디 업종은 외면하기에 이곳에서는 사람을 못 구해 외국인으로 충당한다더니 그 말이 맞다. 필자의 집에 온 도우미들 중 거의 전부가 집이 너무 커서 할 일이 많다. 쉬는 시간이 없다. 등의 이유를 내세워 중간에 말도 없이 그만 두는 자가 많았었다.
그런데도 이 도우미 아주머니는 천성이 착하고 가정에서 바르게 배워서 그러는지 전연 그런 내색이 없이 항상 한결같은 마음으로 거의 20개월을 봉사하는 중이다.
이 도우미 아주머니는 안식구를 휠체어에 태워서 밖에 나가 운동도 시키고 안식구의 목욕에서부터 빨래와 방안 청소 그리고 음식 범절에 이르기 까지 일체를 돌보아 주고 있으니 이것도 늦게 얻은 큰 복이요, 행운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필자와 함께 한 아내의 이력서인데 앞으로 더 즐겁고 보람차고 뜻 있는 이력서로 수정되기를 고대하면서 우선 필을 놓는다.
한맥문학 2019년 3월호에 게재
|
첫댓글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