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와 함께 걷느냐?’, 참 다르다
얼마전 둘째 딸과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으로 오면서 딸이 말했습니다.
“언니랑 오는거랑 엄빠랑 오는거랑 참 다르구나!”
딸에게 ‘그래서 누구와 함께 오는 것이 좋았느냐?’ 고 묻지는 않았습니다. ^^
정말 ‘누구와 함께 걷느냐?’는 것은 그 여정을 너무나 다르게 만듭니다.
인생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동행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정말 필요한 것이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훈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면 이미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행동한다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근심하게 할 뿐입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되, 사람들이 몰려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사람들이 다 떠나가도 낙망하지 않을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구를 따라 사는 것을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다리가 아프면 앉아 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예수님의 인도하심이라 깨달아지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욕구는 생각, 감정, 오감을 통해 너무나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강력합니다.
그에 비하여 예수님의 인도하심은 너무나 작고 희미하여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한다면 예수님과 눈이 마주쳐야 합니다.
그러려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항상 주님을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 주님을 바라보는 시작인 것입니다.
그것은 2,000년 전 예수님을 기억하거나 성경의 내용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신 안에 거시는 주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를 지켜보시는 주님과 눈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점점 크고 분명하게 깨달아집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생각도 감정도 말도 행동도 달라집니다.
우리가 매일 예수동행일기를 쓰고 나누며 살려는 것은 날이 갈수록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육체의 욕구 보다 더 크고 분명하고 강력하게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지 않으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