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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ourth discontinuity: the circle of becoming
About a century ago, the common belief that life was a mysterious liquid that infused living things was refined into a modern philosophy called vitalism. The position which vitalism held was not very far from the meaning in the everyday phrase, “She lost her life.” We all imagine some invisible substance seeping away at death. The vitalists took this vernacular meaning seriously. They held that while the essential spirit stirring in creatures was not itself alive, neither was it wholly an inanimate material or mechanism either. It was something else: a vital impulse that existed outside of the creature it animated.
백여 년 전 생명은 살아있는 사물들을 달여 넣은 신비로운 용액이라는 공통의 믿음이 근대철학에서 생기론으로 순화되었다. 생기론이 견지하고 있는 지위는 “그녀는 그녀의 삶을 잃었다.”라는 일상적인 경구와 맞아떨어진다. 우리 모두는 죽음으로 (우리 신체에서)빠져나가는 보이지 않는 어떤 물질을 상상한다. 생기론자들은 이러한 일상적인 의미를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생명체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근원적인 정신은 그 자체로 살아있지 않는 반면에 전적으로 무생물적인 물질 또는 장치는 결코 아니라고 믿고 있다. 생명은 그 어떤 것이다. 생명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생명의 충동은 활성화되었다.
My description of the aggressive character of life is not meant to be a postmodern vitalism. It is true that defining life as “an emergent property contingent upon the organization of inanimate parts but not reducible to them” (the best that science can do right now), comes very close to sounding like a metaphysical doctrine. But it is intended to be testable.
생명의 총체적인 성격에 대한 나의 묘사는 탈근대 생기론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실은 생명을 “불활성 부분들의 조직화와 연관된 한시적 특성이지만 그 부분들로는 다시 나눌 수 없는 것”(과학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정의함은 마치 형이상학적인 교의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것은 실험을 의도 할 수 있다.
I take the view that life is a nonspiritual, almost mathematical property that can emerge from networklike arrangements of matter. It is sort of like the laws of probability; if you get enough components together, the system will behave like this, because the law of averages dictates so. Life results when anything is organized according to laws only now being uncovered; it follows rules as strict as those that light obeys.
내가 갖는 생명에 대한 관점은 생명은 영적이지 아니하며, 거의 수학적인 특성을 지니는데 사물의 그물망 배열로부터 나타난다. 생명은 일종의 확률probability(가능성, 개연성)의 법칙과 같다. 충분한 구성요소를 함께 모으면, 시스템은 이와 같이 작동할 것이다. 왜냐하면 평균 법칙이 그렇게 가리킨다. 생명은 지금 드러나고 있는 한에서 법칙에 따라 어떤 것들이 조직되었을 때 그 결과로서 발생한다. 빛이 따르는 법칙들만큼이나 엄격하게 법칙을 따른다.
This lawful process coincidentally clothes life in a spiritual looking garb. One reason is that this organization must, by law, produce the unpredictable and novel. Secondly, the result of organization must replicate at every opportunity, giving it a sense of urgency and desire. And thirdly, the result can easily loop around to protect its own existence, and thus it acquires an emergent agenda. Altogether, these principals might be called the “emergent” doctrine of life. This doctrine is radical because it entails a revised notion of what laws of nature mean: irregularity, circular logic, tautology, surprise.
동시에 이렇게 법을 준수하는 과정은 생명을 영적으로 보이는 의복으로 감추고 있다.clothe 첫째 이유는 이러한 조직화는 법칙에 의하여야만 하며 반드시 예측할 수 없으며 기발한 것을 생산해야 한다. 둘째 이유는 조직화의 결과는 모든 기회마다 되풀이되어야만 하며replicate, (그렇게 해서 탄생한 생명에게) 절박한 감정과 (변화하고자 하는) 소망의 감정을 부여하여야만 한다. 세 번째 이유는 그 결과는 그 자신의 존재를 방어하기 위하여 쉽게 고리를 이루어야 하며, 따라서 긴급한 의제를 획득한다. 모두 함께 이러한 원리는 “새로 나타나는” 생명의 원칙으로 부를 수 있다. 이 원칙은 급진적이다. 왜냐하면 자연의 법칙이 의미하는 것-불규칙, 순환 논리, 동의어 반복, 예기치 않은 사건 등-을 수정하는 개념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Vitalism, like every wrong idea, contains a useful sliver of truth. Hans Driesch, the arch twentieth-century vitalist, defined vitalism in 1914 as “the theory of the autonomy of the process of life,” and in certain respects he was right. Life in our dawning new view can be divorced from both living bodies and mechanical matrix, and set apart as a real, autonomous process. Life can be copied from living bodies as a delicate structure of information (spirit or gene?) and implanted in new lifeless bodies, whether they are of organic parts or machine parts.
잘못된 모든 생각들과 마찬가지로 생기론도 유용한 진실의 은색을 포함하고 있다. 20세기 제일의 발생학자 한스 드리히(1867-1941)는 1941년 생기론을 “생명과정의 자율성 이론”으로 정의하였다. 어떤 면에서 한스 드리히는 옳았다. 우리가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생명은 살아있는 신체와 기계적인 행렬에서 파생할 수 있으며, 실제로서 자율적인 과정을 구별한다. 생명은 정보(정신 또는 유전자?)의 미묘한 구조로서 살아있는 신체로 부터 복제될 수 있으며, 유기체의 부분이거나 기계의 부품이든 생명 없는 새로운 신체에 이식될 수 있다.
In the history of ideas, we have progressively eliminated discontinuities from our perception of our role as humans. Historian of science David Channell summarizes this progression in his book The Vital Machine: A Study of Technology and Organic Life.
사상의 역사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 우리 역할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불연속성을 진보적으로 제거하였다. 과학사가 데이비드 찬넬은 그의 저서 <<생기 있는 기계:기술과 유기적 생명에 대한 연구>>에서 이러한 진보를 요약하였다.
First, Copernicus eliminated the discontinuity between the terrestrial world and the rest of the physical universe. Next, Darwin eliminated the discontinuity between human beings and the rest of the organic world. And most recently, Freud eliminated the discontinuity between the rational world of the ego and the irrational world of the unconscious. But as [historian and psychologist Bruce] Mazlish has argued, there is one discontinuity that faces us yet. This “fourth discontinuity” is between human beings and the machine.
첫째, 코페르니쿠스는 지구 중심의 세계와 물리적 우주 사이의 불연속성을 제거하였다. 다음으로 다윈은 인간과 유기적 세계의 불연속성을 제거하였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프로이드는 에고의 이성적 세계와 무의식의 비이성적 세계의 불연속성을 제거하였다. 하지만 [역사가이자 심리학자 부르스]마즐리시가 주장했듯이 여전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불연속성 하나가 존재한다. 이 “네 번째 불연속성”은 인간과 기계 사이이다.
We are now crossing the fourth discontinuity. No longer do we have to choose between the living or the mechanical because that distinction is no longer meaningful. Indeed, the most meaningful discoveries in this coming century are bound to those that celebrate, explore, and exploit the unified quality of technology and life.
우리는 지금 네 번째 불연속성의 시기를 통과하고 있다. 더 이상 우리는 살아있거나 혹은 기계적인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둘이 갖는 특징이 더 이상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정말로 가장 다가오는 세기에 가장 의미 있는 발견은 기술과 생명의 통일된 특질을 개발하고 탐구하고 칭송해야 하는 사람들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The bridge between the worlds of the born and the manufactured is the perpetual force of radical disequilibrium—a law called life. In the future, the essence that both living creatures and machines will have in common—that which will distinguish them from all other matter in the universe—is that they both will have the dynamics of self-organized change.
태어난 것과 가공한 것의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는 지속적으로 극단적인 불안정한 힘-생명이라고 부르는 법칙이다. 미래에는 살아있는 창조물과 기계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게 될-우주에서 모든 다른 물질로부터 창조물과 기계를 구별하게 될-본질은 그 둘 모두 스스로 변하는 동역학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We can now take the premise that life is a something in flux that is obeying laws which humans can uncover and recognize, even if we can’t understand them fully. As a way to discover the commonalty between machines and creatures in this book, I’ve found it useful to ask, What does life want? I also consider evolution in the same way. What does evolution want? Or to be more precise, What does the world look like from life and evolution’s point of view? If we consider life and evolution as “autonomous processes,” then what are their selfish goals? Where are they headed? What are they becoming?
생명은 인간이 밝혀내고 인식할 수 있는 법칙을 준수하는 흐름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는 전제를 지금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그것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말이다. 이 책에서 기계와 생명 사이의 공통점commonalty을 발견하는 방법으로서 유용한 질문을 발견했다. 생명은 무엇을 원하지? 마찬가지로 똑같은 방식으로 진화에도 적용한다. 진화는 무엇을 원하지? 혹은 좀 더 정밀하게 한다면 생명과 진화의 관점으로부터 세계는 무엇을 보기 좋아하는가? 만약 우리가 생명과 진화를 “자율적인 과정들”로 생각한다면, 생명과 진화는 무엇을 목표로 이기적으로 움직일까? 그들은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그들은 무엇이 되려고 하는 걸까?
Gretel Ehrlich writes in her lyrical book Montana Spaces : “Wildness has no conditions, no sure routes, no peaks or goals, no source that is not instantly becoming something more than itself, then letting go of that, always becoming. It cannot be stripped to its complexity by cat scan or telescope. Rather, it is a many-pointed truth, almost a bluntness, a sudden essence like the wild strawberries strung along the ground on scarlet runners under my feet. Wildness is source and fruition at once, as if every river circled round, the mouth eating the tail—and the tail, the source...”
그레텔 에를리히는 몬테나 스페이스라는 서정적인 책에 썼다. “야생성은 그 자체 이상의 무언가를 즉시 생성하는 조건이며, 확실한 경로이자, 목표나 다다를 곳이며, 원천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나오기만 하면 언제나 무엇을 생성한다.becoming X선 체축 단층사진이나 현미경에 의해 그 복잡성을 드러낼 수는 없다. 오히려, 내 발밑에 있는 붉은 강낭콩 영역을 따라 매달리는 야생 딸기와 같이 갑작스럽고, 무례에 가까운 특질과 다중 진실을 갖고 있다. 야생성은 원천이자 동시에 결실이다. 모든 강이 둥글게 원을 그리듯, 입이 꼬리를 물고 있듯-꼬리, 원천.......”
There is no purpose, other than itself, to wildness. It is both “source and fruition,” the mingling of cause and effect in circular logic. What Ehrlich calls wildness, I call a network of vital life, an outpouring of a nearly mechanic force that seeks only to enlarge itself, and that pushes its disequilibrium into all matter, erupting in creatures and machines alike.
야생성에는 그 자체 이외의 목적은 없다. 야생성은 “원천과 결실” 둘 다이다. 야생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순환 논리 속에서 섞이고 있다. 에를리히가 야생성이라고 부르고 내가 생생한 생명의 그물망이라고 부른 것은 거의 기계에 가까운 힘의 용출이다. 이 힘은 그 자체를 확장하려는 한 방향만을 추구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불안정성을 모든 사물에게로 밀어붙이며, 생명과 기계 안에서 똑같이 분출한다.
Wildness/life is always becoming, Ehrlich says. Becoming what? Becoming becoming. Life is on its way to further complications, further deepness and mystery, further processes of becoming and change. Life is circle of becoming, an autocatalytic set, inflaming itself with its own sparks, breeding upon itself more life and more wildness and more “becomingness.” Life has no conditions, no moments that are not instantly becoming something more than life itself.
에를리히는 말한다. 야생성/생명은 언제나 생성(becoming또는 되기)이다. 무엇을 생성한다고? 생성을 생성한다. 생명은 더욱더 복잡하고 , 더욱 깊고, 더더욱 신비한 상태로 진행 중이며, 더 나은 생성과 변화의 과정으로 나아가고 있다. 생명은 생성의 순환이며, 자가촉매작용 세트(스스로 촉매가 되어 반응을 촉진하도록 설정이 되어 있으며)이며, 자신의 불꽃으로 점화하며, 더 생명적이고, 보다 야생적이며 더욱 “되기”를 양육한다. 생명은 생명 그 자체 이상의 무언가를 즉각적으로 생성하는 조건이자, 기회이다.
As Ehrlich hints, wild life resembles that strange loop of the Uroborus biting its tail, consuming itself. But in truth, wild life is the far stranger loop of a snake releasing itself from its own grip, unmouthing an ever fattening tail tapering up to an ever increasingly larger mouth, birthing an ever larger tail, filling the universe with this strangeness.
에를리히가 시사했듯이, 야생의 생명은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으며 스스로를 먹어 치우는 우로보러스의 기괴한 고리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사실 야생의 삶은 스스로의 속박으로부터 자신을 풀어놓는 훨씬 더 괴이한 뱀의 고리이다. 이 고리는 언제나 점증적으로 더 커지는 입에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가늘어지면서 영원히 더 살찌는 꼬리를 내 뱉으면서, 영원히 더 커지는 꼬리를 탄생시키고, 이러한 이상함으로 우주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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