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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톨릭교회라는 건물의 주춧돌이 되신 두 사도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살아생전 보여준 복음 선포를 향한 놀라운 헌신과 열정, 주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을 인정받아
이제는 하늘나라의 별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이 되시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국 문의 열쇠를 지닌 관리인으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요 탁월한 말씀 선포자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베드로 바오로 사도이지만, 한때 두분 다 스승님과의 관계 안에서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 잠잘때마다 ‘내가 그때 왜 그랬지?’하면서 이불킥을 계속해야만 하는,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게파, 즉 반석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신뢰받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능동의 시기가 지나가고 수동의 때가 된 어느 날, 정말 잘 나가던 그분께서
한없이 나약한 한 인간 존재로 추락하는 그 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파악한 베드로 사도는, 여지없이 스승님을 버렸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세 번 씩이나 스승님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베드로 사도 못지않았습니다.
회심 이전 그는 예수님과 신생 그리스도교 교회를 박해하는 데 있어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결정적인 회심을 하게 된 그 날도 사실 어딘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우글우글 모여있다는 첩보를 듣고, 싸그리 체포하려고 달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사람, 자신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을
가장 가까운 제자로 부르시고, 그 배반, 그 박해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럴수록 더 큰 사랑을 베푸시며, 지속적인 스승 제자 사이를 맺으시며, 가장 큰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두 핵심 사도의 흑역사는 초세기 교회 안에서 정말이지 감추고 싶었던 큰 오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 한 가지는 이 두 사도의 흑역사에 대해 성경과 교회 전통은 전혀 감추지 않았습니다.
보통 세상의 조직이었으면, 벌써 두 분의 흑역사를 몇 번이고 세탁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싸그리 삭제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사가들을 비롯한 성경 저자들의 서술은 냉정하기만 합니다.
두 사도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흑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했습니다.
교회의 초석이 된 두 위대한 인물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우회적으로, 혹은 완곡한 표현으로 기술할 만도 한데, 성경 저자들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습니다.
일체의 옹호나 왜곡 없이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의도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두 분의 흑역사 통해서 우리는 나름대로 한 가지 진리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 인간의 언약, 인간의 역사, 인생의 모든 각본은 한순간에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는 진리 말입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던 베드로였지만, 순식간에 가장 낮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만은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단 몇 시간 만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토록 기고만장던 그가 단 몇 시간 만에 완전히 찌그러집니다.
금강석보다도 더 단단했던 그의 언약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철저한 배신에 따른 수치심과 죄책감, 부끄러움만이 그를 휘감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자세는 ‘지속적인 겸손’ 입니다.
“주님, 이 연약한 인간을 보십시오.
천국을 살다가도 일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이 가련한 인간을, 시시각각으로 배신을 거듭하는 이 불충실한 인간을….” 그래서 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이제 주님 당신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제 삶의 의미입니다.
당신만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붕괴된 한 인격을 사랑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평생 따라다니게 될 죄책감과 좌절감으로부터 한 인간을 사랑으로 다시 건져내십니다.
무너질 데로 무너진 폐허, 완전히 맛이 간 반석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그 위에 다시금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십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트리십니다.
바닥에서 겪게 될 고통이 만만치 않겠지만, 그 바닥에서 우리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정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헤매고 있는 그 바닥까지 내려오십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재창조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야말로 하느님 자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는 은총의 꼭지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톨릭교회라는 건물의 주춧돌이 되신 두 사도 베드로 바오로 사도의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두 분은 살아생전 보여준 복음 선포를 향한 놀라운 헌신과 열정, 주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을 인정받아
이제는 하늘나라의 별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별이 되시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국 문의 열쇠를 지닌 관리인으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요 탁월한 말씀 선포자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베드로 바오로 사도이지만, 한때 두분 다 스승님과의 관계 안에서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흑역사, 잠잘때마다 ‘내가 그때 왜 그랬지?’하면서 이불킥을 계속해야만 하는,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게파, 즉 반석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신뢰받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능동의 시기가 지나가고 수동의 때가 된 어느 날, 정말 잘 나가던 그분께서
한없이 나약한 한 인간 존재로 추락하는 그 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파악한 베드로 사도는, 여지없이 스승님을 버렸습니다.
결정적인 순간, 세 번 씩이나 스승님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베드로 사도 못지않았습니다.
회심 이전 그는 예수님과 신생 그리스도교 교회를 박해하는 데 있어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결정적인 회심을 하게 된 그 날도 사실 어딘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우글우글 모여있다는 첩보를 듣고, 싸그리 체포하려고 달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배반한 사람, 자신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사람을
가장 가까운 제자로 부르시고, 그 배반, 그 박해에 대해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그럴수록 더 큰 사랑을 베푸시며, 지속적인 스승 제자 사이를 맺으시며, 가장 큰 직무를 맡기셨습니다.
두 핵심 사도의 흑역사는 초세기 교회 안에서 정말이지 감추고 싶었던 큰 오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 한 가지는 이 두 사도의 흑역사에 대해 성경과 교회 전통은 전혀 감추지 않았습니다.
보통 세상의 조직이었으면, 벌써 두 분의 흑역사를 몇 번이고 세탁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싸그리 삭제해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사가들을 비롯한 성경 저자들의 서술은 냉정하기만 합니다.
두 사도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흑역사를 있는 그대로 기술했습니다.
교회의 초석이 된 두 위대한 인물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우회적으로, 혹은 완곡한 표현으로 기술할 만도 한데, 성경 저자들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습니다.
일체의 옹호나 왜곡 없이 있었던 사건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저자들의 의도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두 분의 흑역사 통해서 우리는 나름대로 한 가지 진리를 체득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 인간의 언약, 인간의 역사, 인생의 모든 각본은 한순간에 완전히 뒤바뀔 수 있다는 진리 말입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던 베드로였지만, 순식간에 가장 낮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십시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만은 결코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단 몇 시간 만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토록 기고만장던 그가 단 몇 시간 만에 완전히 찌그러집니다.
금강석보다도 더 단단했던 그의 언약은 쥐도 새도 모르게 자취를 감추고, 철저한 배신에 따른 수치심과 죄책감, 부끄러움만이 그를 휘감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자세는 ‘지속적인 겸손’ 입니다.
“주님, 이 연약한 인간을 보십시오.
천국을 살다가도 일순간에 지옥으로 떨어지는 이 가련한 인간을, 시시각각으로 배신을 거듭하는 이 불충실한 인간을….” 그래서 늘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주님, 보십시오. 당신 없이는 참으로 비참한 제 인생입니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이제 주님 당신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만이 제 삶의 의미입니다.
당신만을 신뢰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히 붕괴된 한 인격을 사랑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십니다.
평생 따라다니게 될 죄책감과 좌절감으로부터 한 인간을 사랑으로 다시 건져내십니다.
무너질 데로 무너진 폐허, 완전히 맛이 간 반석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 그 위에 다시금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십니다.
때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연의 바닥으로 떨어트리십니다.
바닥에서 겪게 될 고통이 만만치 않겠지만, 그 바닥에서 우리는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정화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헤매고 있는 그 바닥까지 내려오십니다.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재창조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인생의 가장 밑바닥이야말로 하느님 자비를 확실히 인식하게 되는 은총의 꼭지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성 베드로와 바울로 대축일
복음: 마태 16,13-19: “당신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갈릴래아 호수에 가까운 벳사이다 출신으로 시몬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동생인 안드레아와 함께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께서는 그에게 케파(반석,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시고 그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세우셨다. 그는 오늘 복음에 나오듯이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사도이다. 그는 네로 황제의 박해 때인 서기 65년경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였고 그의 무덤 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바오로 사도는 열두 사도보다 늦게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교회를 박해하며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사도가 되었다. 그는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 여행을 다니며 교회를 세웠다. 많은 편지가 성경으로 되었다. 바오로 사도 역시 네로 황제 박해 때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제자들이 예수님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을 말씀드리자, 이렇게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이 질문은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더욱 심오한 이해로 인도하시려는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군중들의 수준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그동안 줄곧 그분과 함께 지내며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으며 스승님과 함께 많은 기적을 행했던 제자들의 생각은 어떠한지를 물으신다. 이 질문은 바로 당신을 따라다니던 모든 제자에게 던지신 질문이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그분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즉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그분이 하느님이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은 제자들이 올바로 알아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분에게 열두 제자들은 아직 부족한 사람들일 뿐이다. 마르코 복음에 보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8,33)라고 무섭게 책하시는 말씀이 나올 정도이다. 이 제자들이 어찌 주님께 믿을 수 있는 제자들이었겠는가?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우리를 위한 것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바로 열두 사도의 신앙고백이며, 교회의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 고백을 통하여 교회의 기초인 반석(케파)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루카 복음에 나오듯이(9,23)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 십자가 없는 영광의 주님만 따르려고 하는 것 자체가 유혹이며, 하느님의 일과는 거리가 멀다. 십자가를 통한 죽음을 통하여서만이 부활의 신비를 우리는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길은 제자들에게는 아직도 가야 할 먼 길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복이 있다고 하셨다. 베드로의 첫 번째 이름은 시몬이었다. 시몬이란 말은 말씀에 온순하다는, 잘 따른다는 뜻이다. 하여간에 주님은 이 이름 대신에 ‘케파’라는, 반석, 믿음에 있어 확고한 이름을 주셨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반석과 같은 신앙 위에 주님은 당신 교회를 세우셨다. 본래 바위는 주님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바위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라는 바위 위에 서 있는 사도들의 신앙은 결코 정복당하지도 흔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또 나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9절) 사도가 땅에서 맨 이는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푼 이는 하늘에서도 풀리도록, 하늘나라의 열쇠가 그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제야 주님께서는 십자가에로의 행진을 계속하실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으로 내가 생각하며 따르고 있는가? 혹시 나는 주님을 기계적인 주님, 혹은 기계적인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내가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의 양대 산맥인 이 두 분의 축일을 지내면서 그분들이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죽기까지 충실했던 신앙을 우리도 이 시대에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이 진정 증거의 삶이 되어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미국 어느 인디언 보호 구역에 새로 백인 교사 부임했습니다. 이 교사는 학생들의 수준을 알기 위해 시험을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둥그렇게 둘러앉는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시험을 봐야 하니 서로 떨어져 앉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아이들은 어리둥절해했고, 제일 나이 많아 보이는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어른들에게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함께 상의하라고 배웠습니다.”
어렸을 때, 시험 본다고 하면 가방을 세워놓고 또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를 오가며 시험 감독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개인 평가만 중요했고, 공동 평가라는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앞선 아이의 말처럼, 어려울 때는 함께 상의해서 푸는 것이 진짜 교육이 아닐까요?
공동체보다 개인의 역량이 더 중요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개인보다 공동체의 힘이 훨씬 큽니다. 그런데도 개인만 강조하다 보니 개인주의가 더 활개 치는 세상이 된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공동체를 늘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당신께 필요 없음에도 굳이 제자단을 형성하셨습니다. 그냥 혼자 열심히 기도하면 될 것 같은데,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당신께서 함께하시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이웃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며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함을 명령하십니다.
이웃을 통해 큰 상처를 받았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통해 큰 힘을 받았다는 분은 더 많습니다. 무엇을 봐야 할까요? 이웃과 함께하는 사람만이 주님과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뽑아서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특히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베드로와 바오로는 그 제자단 공동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단의 으뜸이라고 말하는 베드로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할 정도로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던 제자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죄 많고 또 부족한 이들이었지만, 이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교회를 성장 발전시킵니다. 베드로를 통해 신앙 고백의 모범을 세우셨고, 바오로를 통해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종종 공동체에서 벗어나겠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봅니다. 자기의 죄 많음 때문에 차마 신앙생활을 못 하겠다고 말하고, 또 다른 죄 많은 사람을 보면서 그들과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것이 정답이라면, 베드로와 바오로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교회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공동체를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또 다른 이들이 공동체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도 안 됩니다. 그 공동체 안에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명언: 패배보다는 승리 때문에 몰락하는 사람이 더 많다(엘리너 루스벨트).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2티모 4,8)
사도들은
천국에 마련된
의로움의 화관을 위하여
홀로
묵묵히
자신의 본성을 거슬러갔다네.
빈손과 맨발로
가난한 길을 걸어가던
그들이 걸치고 있었던 것은
오직
뼈아픈 인내와
올곧은 용기와
속 깊은 사랑이었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단톡방)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헤로데의 손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2,1-11
그 무렵 1 헤로데 임금이 교회에 속한 몇몇 사람을 해치려고 손을 뻗쳤다.
2 그는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하고서,
3 유다인들이 그 일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들이게 하였다.
때는 무교절 기간이었다.
4 그는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네 명씩 짠 네 개의 경비조에 맡겨 지키게 하였다.
파스카 축제가 끝나면 그를 백성 앞으로 끌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5 그리하여 베드로는 감옥에 갇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였다.
6 헤로데가 베드로를 끌어내려고 하던 그 전날 밤,
베드로는 두 개의 쇠사슬에 묶인 채 두 군사 사이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문 앞에서는 파수병들이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7 그런데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더니 감방에 빛이 비치는 것이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두드려 깨우면서,
“빨리 일어나라.”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쇠사슬이 떨어져 나갔다.
8 천사가 베드로에게 “허리띠를 매고 신을 신어라.” 하고 이르니
베드로가 그렇게 하였다.
천사가 또 베드로에게 “겉옷을 입고 나를 따라라.” 하고 말하였다.
9 베드로는 따라 나가면서도,
천사가 일으키는 그 일이 실제인 줄 모르고 환시를 보는 것이려니 생각하였다.
10 그들이 첫째 초소와 둘째 초소를 지나 성안으로 통하는 쇠문 앞에 다다르자,
문이 앞에서 저절로 열렸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 어떤 거리를 따라 내려갔는데,
천사가 갑자기 그에게서 사라져 버렸다.
11 그제야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야 참으로 알았다.
주님께서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헤로데의 손에서,
유다 백성이 바라던 그 모든 것에서 나를 빼내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2서 말씀입니다.4,6-8.17-18
사랑하는 그대여,
6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7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8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17 주님께서는 내 곁에 계시면서 나를 굳세게 해 주셨습니다.
나를 통하여 복음 선포가 완수되고
모든 민족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습니다.
18 주님께서는 앞으로도 나를 모든 악행에서 구출하시고,
하늘에 있는 당신 나라에 들어갈 수 있게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