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먼길 - 서울 서촌마을(3)
(2023년 10월 21일)
瓦也 정유순
이광수 살던 집 뒤에는 혜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의 집이 있다. 이 가옥은 독립운동가인 혜공 선생 깨서 국회의장직에서 물러난 1954년 8월부터 1956년 5월 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호남지역 유세를 위해 전주로 내려가던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까지 약 1년 9개월 여 동안 거주한 곳이다. ‘ㄱ’자형 안채와 사랑채 2동으로 구성된 이 집은 집장수들이 조선시대 양반가의 집을 모방하여 1930년대에 지은 도시형 한옥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대들보가 두 개 들어가는 오량가(五樑架)집이다.
<해공 신익희 가옥 입구>
<춘원 이광수 집터>
겹처마이면서도 처마를 짧게 내어 채광을 고려하고, 굴도리를 사용하였으며, 건물 규모에 비해 단면이 과대한 대들보를 사용하여 오량가로 가구(架構)한 점 등에서 이 시대 도시형 한옥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집의 외벽과 내벽, 창호 등은 해공 신익희 거주 이후로 입주자의 편의에 따라 일부 변형되었으나 건물의 구조는 건립 당시의 원형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 건물의 변형된 부분들 그 자체도 도시형 한옥의 변천사를 알 수 있게 한다.
<해공 신익희 가옥>
해공 신익희는 경기도 광주 초월면 서하리에서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申立)의 후손으로, 인조반정의 공신 신경희의 동생 신경연(申景禋)의 9대손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또한 좌의정(정1품) 문희공 신개(申槩)의 후손으로 자헌대부(정2품) 장례원경(정2품)을 지낸 신단(申檀)과 그의 넷째 부인 동래정씨 정경랑(鄭敬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고향에서는 신판서로 불렸다.
<해공 신익희>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政經學部)에 들어가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평의회장·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기관지인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고향에 동명강습소(東明講習所)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교수가 되었다.
<해공 신익희 가옥 내부>
1918년 최남선(崔南善)·윤홍섭(尹弘燮)·최린(崔麟)·송진우(宋鎭禹)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하였으며,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해외연락 등 중요한 임무를 위해 전면에서 빠지기도 하였다. 해외에 있는 문창범(文昌範)과 홍범도(洪範圖)와 연락을 위해 중국에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는 도중 평양에서 3·1운동을 맞이한다. 그 해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수립과 동시에 내무차장·외무차장·국무원 비서장(國務院秘書長)·외무총장 대리·문교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임시정부국무원, 앞줄 왼쪽부터 신익희, 안창호, 현순, 뒷줄 김철, 윤현진, 최창식, 이춘숙>
광복과 더불어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내무부장 자격으로 환국한 후에는 김구(金九)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이승만(李承晩)과 접근하였고,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부위원장, 자유신문사(自由新聞社) 사장, 국민대학교(國民大學校) 초대학장 등을 겸하다가 그 해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 대의원에 피선, 1947년 의장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정요인 환국>
지청천(池靑天)의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과 합작해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부의장이 되었다가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의장에 피선, 정부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민당(韓民黨)의 김성수(金性洙)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9년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 벽보>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 다시 국회의장에 피선되고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民主黨)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후보가 되어 당시 사사오입 개헌 등을 통해 장기 집권을 시도하던 자유당의 이승만 독재정권과 맞서 1956년 5월 3일 당시 한강백사장(현 한강대교 노들섬)이 흑사장이 될 정도로 30만여 군중이 운집하여 “못살겠다. 갈아보자”고 포효하며 정권교체를 이루고자 했다.
<한강백사장 유세>
그러나 광주지방으로 유세 가던 중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때마침 1956년 초 박춘석 작곡 손인호 노래 <비내리는 호남선>을 발표했는데, 이 노래가 신익희의 추모가요가 되어 공전의 인기곡이 되었다.
1.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 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나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2. 다시 못 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인가
비 나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해공 신익희 국민장 장례행렬>
당시 이 노래가 민주당 당가로도 활용되었고 노랫말을 신익희의 부인이 썼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가수 손인호와 박춘석, 작사가 손로원이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이 곡이 신익희 사망 3개월 전에 제작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들이 혐의를 벗고 풀려났다. 당시 수사를 받을 때 “이 노래를 취입할 때 어떤 감정으로 불렀느냐”고 묻는 수사관의 질문에 손인호는 “가수는 감정을 가지고 노래를 해야지, 감정 없이 노래 부르면 그건 가수가 아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해공 신익희 국민장에 모인 인파>
해공 신익희는 1945년 해방 이후 중국에서의 오랜 독립항쟁을 마무리하고 서울로 돌아와 한미호텔→창신동 조씨가→종로 6가 낙산장→묘동 장씨가→삼청동 106번지(현재 국무총리 공관)→효자동 164-2 등에서 거주했다. 이 중 지번이 확실하게 밝혀진 곳은 국회의장 재직시절 거주하던 삼청동 106번지와 문화재로 지정된 효자동 164-2번지 등 2곳뿐이다.
<효자동 164-2 가옥>
효자동 164-2는 해공이 국회의장직에서 물러나 민주당을 창당하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당시 사사오입 개헌 등을 통해 장기집권과 독재체제 강화를 시도하던 이승만 자유당정권에 대항하는 등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으로 요약되는 정치인생이 정점에 이른 시기에 거주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이다. 이와 같이 해공의 효자동 옛집은 건축적· 역사적 측면 모두에서 보존가치가 인정되므로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1945년12월19일 임정요인 환국기념회>
당시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이 당선되지만 국민들은 그에게 애도의 185만 표를 던졌고, 1956년 5월23일 치러진 국민장에는 수많은 추모인파가 운집하였다. 정부는 해공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참고로 해공선생이 급서(急逝)하자 야당후보로 유일한 무소속 조봉암(曺奉岩, 초대 농림부장관) 후보가 전체 유효투표의 30%인 216만 표를 얻어 2위를 했다. 조봉암은 1957년 진보당을 창당한 후에 소위 ‘진보당사건’으로 대법원에서 1959년 7월 사형이 확정·집행되었다.
<국회의장 신익희(중앙) 국회부의장 윤치영(좌) 조봉암(우)>
그러나 조봉암은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등 주요 혐의에 대해 무죄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그 당시 왜 조봉암이 사형집행이 되었고, 해공 신익희는 왜 급서했을까?
<수감 중인 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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