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살이 / 이영숙
눈 뜨고도 코 베어 간다는 서울살이를 시작한 지 꼭 두 해가 되는 달이다.
이 년 전, 아들과 딸이 있는 서울로 이사하기로 결정했다. 서울로 간다는 설렘과 마흔두 해를 살았던 곳을 떠난다는 서운함이 반반이었다. 친구들은 서울에 가면 적응하지 못해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더 많은데 왜 갈려고 하느냐면서 걱정을 늘어놓고, 형제들은 아들딸이 있는 곳에 가 봐야 즐거움보다 고생이 많을 테니 가지 말라고 했다. 두 언니는 산골에서 태어나 작은 도시에서 살아 온 어리바리한 네가 서울에서 어떻게 살 거냐며 엄포까지 놓았다. 그렇지만 마음을 먹고 나니 그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딸과 함께 명동에 갔다. 눈이 뱅글뱅글 돌았다. 웬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지 한눈을 팔면 부딪칠 지경이었다. 엄마 따라 시장에 갔다가 시장구경 하지도 못하고, 행여 엄마를 잃어버릴까 봐 치맛자락만 잡고 종종걸음 걷던 어린 시절처럼 딸아이를 놓칠까 봐 마음 놓고 구경도 하지 못했다.
명동은 이름값 하느라 복잡할 줄 알았는데 가락시장에서 또 한 번 놀랐다. 대형 트럭이 들락거리고 수레 같은 자동차가 잠자리처럼 빙빙 돌았다. 몇 바퀴 돌고 나니 어디가 어딘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딸아이가 물건을 사면 바구니에 담기만 했다. 시장에 혼자 버려지면 집을 찾지 못할 것 같다고 했더니 조금 있으면 눈에 익을 거란다. 서울은 사람이 많긴 많은가 보다. 서울이 조금 무서워지고 한적한 작은 도시가 그리워졌다.
말을 하는데도 주눅이 들었다. 시련은 목요반 수업에서 생겼다. 서울사람 말씨는 무척 맑았다. 나긋나긋하게 합평하는 목소리는 부럽기도 했다. 자갈밭에 빈 소달구지 굴러가는 목소리가 자신감이 없어 내 순서가 되면 배에 힘을 꽉 넣어 말하지만 내 말은 그리 크지 못했다. 더구나 ‘ㅓ’와 ‘ㅡ’ 발음이 명확하지 않은 경상도 발음은 내 목을 자라목만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수없이 연습을 했건만 발음에 신경을 쏟다보니 글자를 틀리게 읽었다. 마른 입술을 축여가며 용기를 냈지만 문장을 빼먹기도 했다. 우리말인데도 듣기와 말하기가 모두 서툴렀다. 한 자 한 자 발음을 하면 되는데 문장으로 읽으면 도루묵이 되고 만다.
“김포공항 부탁해요” 포항에서 하듯이 손 번쩍 들고 택시를 탔다. 포항에서 좀 멀다 싶어도 만 원이 나오지 않으니 이곳도 그러려니 했는데, 무심코 본 요금기가 얼마 가지 않은 것 같은데 만 이천 원이다. 차마 내릴 수도 없고 요금기는 째깍째깍 숫자를 올리고 가슴은 철렁철렁 했다. 이만 칠천 원을 달란다. 이래서 서울 생활이 힘들다고 하는 모양이다. 이제 웬만하면 택시는 안녕이다.
버스는 멀미를 하니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지하로 내려가고 어두컴컴하고, 차창 밖을 볼 수 없어 내가 좀비가 되어 어둠을 헤매는 느낌이 들어 영 적응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택시는 목적지만 이야기 하면 안심하고 바깥 구경도 하고 하늘도 보는데 지하철을 타려면 딸에게 가는 길을 몇 번이고 물어서 확인해야 했다. 지하철을 타고도 행여 내려야 할 역을 놓칠까 봐 안내판만 뚫어져라 보았다. 외출이 무서웠다.
그해 겨울,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고 바람도 제법 세차게 불었다. 보일러를 좀 더 세게 하고 문단속도 야무지게 하고 잤다. 아침, 베란다고 나가니 화분의 꽃나무들 색깔이 이상해졌다. 스무 해를 동거한 군자란, 가장 친한 친구가 외국으로 떠나면서 준 문주란, 주먹만 한 꽃을 피우는 공작선인장은 아예 잎이 축 처져 있다. 포항에서는 베란다에서 잘도 자라던 화초들이 서울의 겨울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서울 날씨가 이렇게 매서우리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서울 동장군 힘이 세긴 센 모양이다.
이사 온 지 두 해가 지났다. 이젠 씩씩해졌다. 버릴 수 없는 것이 있어 습관이니 하고 싶은 이야기 사투리로 마음 편히 할 수 있고, 친구에게 명동과 인사동을 구경시키면서 어깨를 으쓱하기도 한다. 누구의 도움 없이 노선도를 보면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구경하기도 하고 일도 본다. 꽃시장에서 문주란, 군자란도 예쁘게 모셔오고 덤으로 아주 붉은 철쭉도 사 왔다. 서울 생활이 즐거워진다.
아직까지도 내 코가 안전하게 붙어 있는 걸 보면 서울살이가 내 체질인가 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