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7
9.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라블레(1494-1553)가 풍자적인 모험을 익살스럽게 다루면서 쓴 소설이다. 소설의 아버지로 불린다. 라블레는 프랑수아 1세 때 활동했다.(레오나르드 다 빈치와 동시대)
라블레는 부유한 가정의 출신으로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었다. 그리스 책을 번역하면서 인문주의자가 되었다. 수도원에서 나와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반 카톨릭적인 글을 쓴 그의 생활은 어려웠다. 가르강튀아는 거인 아버지이고, 팡타구뤼엘은 아들이다. 거인 부자가 여행을 하면서 격는 이야기로 외설스럽고, 음란한 것도 많다. 그는 ’먹고, 마시고, 즐기라‘를 삶의 목표로 삼고, 쾌락과 행복을 중시하는 인간 중심의 도덕율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부르주아지의 천박한 물질주의를 꼬집는 것이기도 했다.
카톨릭 교회는 유머와 외설, 그리고 교회를 풍자하면서 야유하는 내용이 많아서 금서로 지정했다. 이단으로 처형하려 했으나, 프랑소아즈 1세와 가까운 귀족이 뒤를 봐주어서 모면했다.
이 작품은 일정한 형식도 없고, 내용은 복잡하다. 완벽한 소설 형식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
그는 죽을 때, ’나는 위대한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고 했다.
10. 몽테뉴(1533-1592)
몽테뉴라는 마을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법률을 공부한 후, 보르도 법원에서 법관을 지냈다. 그 후 1571년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1580년 유명한 <수상록>을 완성시켰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거짓 없는 모습을 그렸다. 인간의 삶을 회의하면서 바라본 회의론자이다.
(인생, 국가 체제, 사회 구조 등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회의하였다는 뜻이다.)
종교개혁으로 신,구교 갈들이 격화되고, 인간 이성에 회위주의가 나타나면서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며, 모든 대상에 비판적 사고를 지녀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사고는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문학의 토대를 쌓았을 뿐만 아니라 수필 문학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수상록》(Essais)은 미셸 드 몽테뉴의 유일한 저서로, 길거나 짧은 여러 장(章)으로 구성된 산문 수상집이다. 그의 사상도 초기의 극기주의적 사상, 중기의 회의주의적 사상, 후기의 쾌락주의적 사상으로의 '발전'을 볼 수 있으나 최후의 지점은 그때까지의 사상을 모두 내포한 인간의 한계를 깨달은 데서 그것을 긍정하고 존중하는 고도의 시사(示唆)이다.
집필의 역사
1570년 : 몽테뉴가 보르도 고등법원을 사퇴한 뒤 집필하기 시작
1580년 : 보르도에서 전2권으로 간행
1588년 : 파리에서 제3권을 집필하여 간행
1595년 : 사후에 신판이 출간
그의 말 하나
“인간의 보편적 가치는 사실상 인간의 습관에 의한 것이다.(인간중심의 사고)”
“나는 모른다. 가 아니고,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모른다’는 신에 의존한다는 의미이고, ‘알고 있는가’는 인간중심 사고이다.
수필 문학의 고전이자, 최초로 수필 형식을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이 책은 철학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경험이나 고전의 인용을 바탕으로 한 성찰이다. 플라톤, 세네카,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전 문헌에서 많은 인용을 하고 있지만 성서를 인용한 것은 거의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17세기에 데카르트나 파스칼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나중에는 무신론의 책이라는 이유로 금서로 여겨지기도 했다.
11. 토르콰토 타소(1544년 ~ 1595년)
이태리 시인으로 대표작은 ‘리날도’와 ‘해방된 예루살렘’이 있다.
소렌토에서 출생하였다. 궁정의 관료로서 귀족 가문이다.
17세 때부터 이탈리아 문학에 결여되어 있는 서사시를, 십자군을 소재로 하여 쓰고자 마음먹고 장시 《리날도》(1562)를 습작으로 썼으며 1575년에 《해방된 예루살렘(Gerussalemme liberata)》을 완성하여 공작에게 바쳤다. 십자군의 영웅과 요녀 사이의 여러 가지 사랑의 갈등을 엮어 넣어 그 관능적 묘사가 특히 아름답다. 이 글은 카톨릭에서 반 종교적이라 하여 종교재판의 위험에 시달렸다. 박해 공포증에 걸려 피신하였다.약 2년간의 방랑 끝에 7년 여의 감금생활을 했다.
귀비(貴妃)의 도움으로 풀려나 로마 교황의 보호를 받으며 주저 《정복된 예루살렘(Gerusalemme conquistata》을 완성하였다.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 문학에 불후의 이름을 남겼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정복된 예루살렘’이다.
‘인류는 자연에 비하여 보잘 것 없는 존재이며, 세계를 지배하는 신비한 힘 앞에 무력하다.’
*타소는 르네상스 양식의 작가라기보다는(작가이기도 하다) 매너리즘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언어 혁명
사제와 상류층은 라틴어를 사용하였으나, 일반인은 자기 지역의 언어를 사용했다.
(속어 또는 사투리라고 했다.)
사회가 기독교화 되면서 귀족과 상류층은 라전어를, 일반인은 속어(자국어)를 사용했다.
이후 유럽에서 기독교는 통치자에게 지배 이데올르기를 제공했다.
(샤를마뉴 대제, 알프레드 대제)
유럽에서 언어 사용에 변화가 온다,
유럽은 각 국가가 자국어로 공문서를 작성(프랑스는 12세기엥)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은 도시화를 불러왔고, 도시의 주인인 상인은 문자를 사용할 필요성이 나타나자, 자국어를 사용했고, 자국어를 익혔다.
라전어 — 귀족들의 전용어 --학문언어로
일반인 – 자국어(속어) 사용—생활 언어로
일반인을 독자로 하는 이야기 문학이 나타나다.
독자는 상류층이 아닌 일반인이고, 인쇄술 발달이 큰 역할
카톨릭은 라전어를 고수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성서의 자국어 번역이 일어났다.
에라스무스 등 인기 저자가 인쇄술을 이용하여
자신의 서적을 대량으로 출판하여 일반인에게 풀었다.
언어혁명 — 국민형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속어로 쓴 전문서적(과하거적)이 나타나다.
대학에서 상류층은 라전어로 공부했으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예술가, 장인들은 속어로 자기 분야 전문서적을 발간했다.
인쇄술의 발달 – 국어 형성에 불을 붙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혁명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기로는 카톨릭은 과학발달을 방해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수도원은 자급자족이 원칙이었어 필요한 물건을 만들다 보니 과학발달이
저절로 따라왔다.
예수회 선교사는 포교를 목적으로 해외에 나가서 그쪽의 발달한 과학이론이나 산물을 받아들였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카톨릭이 아닌 개신교이다
*갈릴레이는 카톨릭이 제공하는 별장 딸린 집에서(연금당할 때도 이 집에서)
천문학을 연구했다.(그래도 지구가 — 그냥 전설이라고 한다.)
그리스 철학을 수용한 스콜라 철학은 자연관의 변화를 불러왔다.
대항해시대는 관찰을 통하여(경험에 의한) 사실을 알아냈다.
문서 편중의 고대 이론이 경험(관찰)과는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문서의 이론을 버리고, 경험 이론을 수용(예전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각 분야에서 실험을 통하여 과학자가 나타나고, 이들이 옛 이론을 비판했다.
지식이 일반인에게도 퍼져나가면서 지식의 공공화가 일어나다.
대표적 철학자는 프랜시스 베이컨이다.(다음에 상세히 하겠습니다.)
현미경, 망원경, 온도계, 습도계, 기압계, 진공펌프가 만들어지면서
---> 과학혁명이 일어나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년~1626년)
영국 경험론의 시조이며,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 철학의 개척자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로 잘 알려져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으로 1617년에 대법관이 되었다. 그러나 공직에서 물러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실험을 하다가 부작용으로 65세에 사망했다. 그는 과학자는 아니다. 그러나 학문을 하는 방법론(귀납법)을 주장하여 과학자로 취급한다.
실험에 기초한 귀납법적 연구 방법을 주장했다. 경험과 관찰을 중히 여기는 경험론을 주장하였다. 귀납법이 가장 바른 학문의 방법이라고 하였다. 철학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만 이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베이컨은 과학의 모든 부분, 특히 자연 과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한 그의 유명한 말은 그의 태도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귀납법 — 개개의 것을 조사하여 공통점을 찾아내서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내는 방법이다.
** 베네치아
베네치아는 중세 때 이태리의 주요한 무역항으로 부를 축적하여 르네상스 기에는 번영을 누리면서 피렌체와는 다른 문화(특히 미술)를 형성하였다.
동 로마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무역권을 독점하면서 부를 축적하여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르네상스가 끝날 무렵에는 유럽을 대표하는 강국이 되었다.
제 4 십자군 원정을 주도했으나(이익을 위한 투자로 생각하고) 실패하자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여 약탈을 무지무지 했다.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은 비잔틴 제국은 등을 돌리면서 로마 카톨릭과 동방 정교가 분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상인들의 사회는 이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전통 사회보다는 비도덕적인 면이 많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에 정복 당하자, 동방 무역 통로가 막혔다. 오스만과 여러 차례 싸우웠으나. 결국에는 동방 무역로가 막혔다. 유럽은 다른 길을 찾아야 했다.
이후 오스만과 대립에서 힘에 밀리면서 쇠퇴기로 접어 들었다.
대서양 항로가 열리면서 폴투갈, 스페인 등이 유럽을 주도하는 국가가 된다.
베네치아는 여러 면에서 보수적인 내륙 도시 피렌체와 대비되는 해안 도시국가이다. 특히 미술에서 차이가 심하여 베네치아 화파를 형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