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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문어의 복수
사랑마루에 제일 늦게 나타난 판술아재가 이쑤시개를 꽂은 채 물었다.
“많이 기다렸재?”
“아재가 맨날 늦었지, 일찍 온 날이 한 번이라도 있었대유?”
찔레네의 야유같은 불만을 무시하고 판술아재가 말했다.
“너그들 요 읍내 새로 생긴 풍천장어 묵어 봤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들이 없자 이쑤시개를 ‘퉤’ 뱉었다.
“나는 오늘 묵어 봤다. 읍내 박사장이 사주더라.”
사랑마루에 걸터앉은 돌출이가 아는 체 했다.
“시계방하는 박성기사장 말이지예?”
“하모. 그 양반 참 양반이대. 지난번에 내 야기 듣고 고맙다고 나를 대접한기라. 사람이 그래야 오래 산다.”
뾰루퉁한 표정으로 씨락아지매가 톡 쏘았다.
“아재 이야기 들을라고, 언제 한번이라도 우리가 대접 안한기 있심니꺼? 우리가 몬 산께 큰 거는 대접 몬할 뿐이재.”
“그 말도 맞다. 큰 정도 좋지마는, 작은 정이 백년 간다. 그럿지만, 요새 사람들 안그럿다. 내가 백날 야기 해봐야 들을 때 뿐이더라. 듣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닐지 몰라도 야기 하는 나는 보이지 않게 힘들다. 무신 대접해 달라는 기 아이고, 그냥 지나가는 말로 잘 들었심니더, 고맙십니더. 이, 인사 한마디가 소중한기라. 그라몬 나도 야기 하는데 신이나고.”
판술아재의 침통한 표정을 위로하듯 무안댁이 한마디 했다.
“세상 인심이 그런데 워쩌겄어라? 허지만 우리는 아재를 항시 이무롭게 대항께 마음 푸시시오. 나가 가슴이 아푸요.”
무안댁의 말에 판술아재는 순식간에 기분을 바꿨다.
“맞소. 아지매 말이 맞소. 지난봄에 아지매가 보내 준 마늘을 내가 깜빡 잊었소. 그런기 보답인데. 내가 졸렬했소.”
무안댁을 향해 한 번, 씨익 웃고 판술아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적산옥에서 귀신과 3개월 여드레나 함께 살았던 판술아재는 한동안 가위병에 걸려 고생했지만 술도가사장의 도움으로 말끔히 치유되었다.
적산옥에서 가져온 빨간 천 조각을 술도가사장이 잘 아는 감정소에서 역사적 자료로 인정받고, 그 매매대금으로 9톤급의 오징어잡이 어선을 구매한 것도 거의 비슷한 시기의 일이었다.
워낙 기술이 좋고 손재주가 좋았지만, 배를 만지고 관리하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었다.
20여 일 동안 모든 것을 익힌, 판술아재는 배를 몰고 동해 유전과 가까운 왕돌괴로 나갔다.
수심 300m가 기본인 이 바다는 때로는 수심 10m 내외로 치솟기도 해서 아주 위험한 바다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 첫 조업출항이 마지막 항해가 될 무서운 사건이 벌어지리라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현지에 도착한 판술아재는 문어통발을 내리도록 신호를 울리고 선장실에서 나갔다.
“선장님, 선장님은 키나 잡고 계세요.”
같이 동승한 갑판장 겸 기관장이 만류했지만 판술아재는 기어이 한몫 거들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판술아재에게 통발 내리는 것쯤은 가시게 다리 뜯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세 시간 후 쳐 놓았던 300개의 통발을 양망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대왕문어는 들지 않고 겨우 강아지 머리만 한 돌문어만 바글바글 올라왔다.
기관장이 푸념했다.
“와, 사람 잡네. 오늘이 황금 물 때인데 어찌 이런 것만 올라오나?”
옆에 있던 선원이 말했다.
“이런 것도 많이만 나오면 돈 됩니다.”
“니가 뭘 안다고 잔소리냐? 우리 선장님과 한탕 한다고 큰 소리팡팡 쳤는데 이런 거 올라오면 내 체면이 말이 되겠나?”
선장실에서 보고 있던 판술아재가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한마디 던졌다.
“괜찮다. 오늘 첫조업인데 너무 많이 잡으면 가아가기도 힘들다.”
그러나 기관장은 저녁 물때를 기다려 한 번 더 통발을 내리자고 고집했다.
“오늘 밤이 왕대왕문어 잡는 날입니다. 일년 중 이런 날씨 만나기도 힘들고 이런 물 때 만나기도 힘듭니다. 오늘 밤엔 분명히 나올 테니까 저녁 먹고 한 번 더 내립시다.”
선원이 차린 저녁을 일찌감치 먹은 후, 다시 통발을 내렸다.
왕돌괴는 워낙 변덕이 심한 날씨라 함부로 예측할 수 없는 곳이지만, 바람 한 점 없이 수면은 고요했다.
양망 시간까지 선실에서 선원들이 잠을 자는 동안 판술아재는 정조 시간에 맞춰 배를 정지시켜 놓고 선장실 옆의 뱃전에 주저앉아 고교한 달빛을 즐기고 있었다.
“그 달 참 곱기도 하다. 이제야 겨우 내 인생이 편해질라카는 징조인가베?”
판술아재는 지난 자신의 여정을 돌아보며 회상에 잠겼다.
학교급사로 시작해, 택시도 해보고 적산옥에서 귀신과 석 달 여드레나 같이 살았지만, 별탈 없이 오늘에 이른 것을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때였다.
작은 문어 한 마리가 뱃전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바다로 떨어지기 직전 냅다 뛰어가서 문어를 잡았다.
물 칸에 넣으려던 판술아재는 손바닥에서 꿈틀대는 문어를 유심히 쳐다봤다.
손바닥 안의 생명감을 느끼자 판술아재는 지난날 살려고 바둥댔던 자신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문어의 눈과 마주치자 판술아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문어를 바다로 돌려보냈다.
“그래, 다시는 잡히지 말고 잘 살아라. 니 한 마리 없다고 내가 밥이야 굶겄나?”
다시 뱃전으로 돌아와 담배를 꺼내 무는데 양망 시간에 맞춰 기관장과 선원이 선실에서 나왔다.
즉시 양망이 시작됐다.
“와! 올라온다!”
양망으로 올라오는 통발을 보고 기관장이 소리쳤다.
판술아재도 선장실에서 목을 빼고 내다봤다.
통발마다 검붉은 대왕문어가 들어 있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선원도 난리났다.
“와구매! 이거 무슨 사건이야?”
나갔다 하면 만선으로 돌아오던, 예전에도 없었던 기록적인 조황이었다.
배 안은 금세 대왕문어들로 넘쳐 났다.
두 사람이, 올라 온 대왕문어들을 그물망에 일일이 담는 것은 벅찼다.
키를 고정해 놓고 판술아재가 가세했다.
그래도 양망 속도는 따라갈 수 없었다.
몸에 붙은 대왕문어를 떼어 그물망에 넣던 선원이 기관장에게 물었다.
“그물망이 다 떨어졌는데 어쩌지요?”
기관장이 흥분을 억누르며 말했다.
“나머지는 그냥 물 칸에 넣어버려!”
“그러면 대왕문어들 끼리 싸울 텐데요? 죽으면 똥값이잖아요?”
“어쩔 수 없지. 산 놈은 경매 넘기고 죽은 놈은 우리가 먹지 뭐.”
기관장의 말에 신이 난 선원은 침부터 꼴깍 삼켰다.
“한 마리에 돈이 얼만데 우리가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판술아재는 선원의 입놀림을 보고 말뜻을 알아차렸다.
목을 빼고 말했다.
“걱정 마라! 살았을 때 묵어보지, 죽고 나면 대왕문어 할배라도 몬 묵는다.”
선원이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선장님!”
네 시간 넘게 걸려 양망은 끝났다.
통발 300개 중 한두 개만 빼고 거의 다 들었으니 모두 280마리는 됨직해 보였다.
선박부력표시계의 바늘이 두 눈금 올라가 있었다.
손가락을 꼽아보던 판술아재가 기관장에게 물었다.
“아따, 어지러버 계산을 몬하겠다. 오늘 잡은기 얼매나 되는기요?”
기관장이 전자계산기를 두드린 후 말했다.
“어림잡아도 이런 배 세 척은 사겠습니다.”
“머씨라꼬?”
판술아재의 고함소리에 기관장이 멀찌감치 물러나며 투덜댔다.
“아휴! 내 고막 터지겠어요!”
판술아재는 기분 좋게 항구를 향해 배를 돌리려고 클러치를 넣었다.
그 순간 갑자기 바람이 일어났다.
순식간에 배가 심하게 출렁댔다.
선원이 소리쳤다.
“선장님! 파도 와요!”
기관장과 판술아재가 동시에 바라본 곳에 산더미만 한 파도가 어둠 속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판술아재의 배는 하늘 높이 떠올랐다.
파도에 묻혀 곤두박질치는 배 위에 굵은 비까지 쏟아졌다.
판술아재가 두 사람에게 명령했다.
“위험하다! 배는 내가 맡을 테니 얼릉 선실로 들어가소!”
잠깐 사이에 바람과 비는 폭풍우로 바뀌었다.
노련한 뱃사람도 갑판에 서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이 선실로 들어간 직후, 거대한 파도 속에서 붉은 불빛이 어른거렸다.
그 불빛은 차츰 선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간담만큼은 당할 사람 없는 판술아재도 당황했다.
바다에서 처음 겪어보는 야릇한 불빛을 향해 판술아재가 서치라이트를 켰다.
바닷속에서 일렁거리던 붉은 불빛이 거의 선수에 닿자, 불빛 속에서 빨판 달린 이무기 같은 긴 다리가 올라왔다.
선실에 들어가긴 했지만 걱정되어 다시 나온 기관장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저건! 저건 왕왕왕 왕문어다!”
문어잡이 40년의 기관장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기관장의 외침에 선원도 기어 나왔지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놀라 입도 열지 못했다.
선수를 기어 오른 커다란 다리는 두 개, 세 개로 늘어났다.
후미에 서 있던 선원이 소리쳤다.
“뒤에도 있습니다!”
기관장이 뒤돌아봤을 때 후미의 갑판에도 네 개의 커다란 다리가 꿈틀대고 있었다.
배가 중력을 잃고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판술아재가 소리쳤다.
“도끼로 잘라! 어서!”
판술아재의 고함소리에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이, 선장실 입구에 비치해 둔 비상 도끼를 뽑아 들었다.
갑판 위에서 꿈틀대는 다리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도끼로 괴물문어의 다리를 내려치기 전에 커다란 문어대가리가 갑판으로 불 쑥 올라왔다.
아무리 작게 잡아도 애드벌룬 크기의 대가리였다.
그 광경을 목격한 판술아재도 너무 놀라, 잡고 있던 키를 놓쳐 버렸다.
괴물문어의 다리를 자르려고 비칠비칠 걸어가던 두 사람도 뒤로 넘어지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두 눈에 붉은 불을 켠 괴물문어가 입을 벌리고 흉측한 이빨을 드러냈다.
입속에서 드러난 여덟 개의 이빨은 마치 삼지창이나 벌목 톱 같아서 물리면 사지가 절단될 것 같았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을 송충이처럼 기어 되돌아온 기관장과 선원이 선장실의 문을 잠갔다.
세 사람은 완전히 넋이 나가 갑판을 휘젓고 다니는 문어의 다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뜯어 재끼는 여덟 개의 다리에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선체로 오줌을 싸며 선원이 울부짖었다.
“아이고, 용왕님 제발 목숨만 살려 주세요. 다시는 문어 안 잡겠습니다.”
파도가 선장실 윈도를 덮쳤다.
문어의 빨판이 파도와 함께 윈도브러쉬를 쓸어 가버렸다.
비바람 속에서 문어 대가리가 선장실 윈도 앞에 불쑥 나타났다.
더 강렬한 붉은빛을 발산하며 선장실을 노려보던 문어가 크게 입을 벌렸다.
기관장은 본능적으로 두 팔로 얼굴을 가렸지만 판술아재는 침착하게 괴물문어를 마주 노려봤다.
문어가 날카롭고 무시무시한 여덟 개의 이빨로 선장실의 윈도를 내리찍었다.
“퍽!”
광물성 음도 내지 않고 윈도 유리는 박살 나버렸다.
비바람과 파도가 거칠게 들이쳤다.
문어의 거대한 빨판이 선장실 안으로 꿈틀대며 들어왔다.
그 순간, 이미 죽음을 직감한 판술아재는 문어를 향해 소리쳤다.
“네 이놈! 감히 내가 누군지 모르나? 적산옥기신도 때려잡은 내가, 판술아재다!”
판술아재의 호통에 요동치던 문어가 멈칫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기관장과 선원이 동시에 판술아재와 문어를 번갈아 쳐다봤다.
믿을 수 없는 일은 또 일어났다.
괴물문어가 주춤한 사이 또 한 마리의 아주 작은 문어가 부서진 윈도를 통해 선장실을 들여다봤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문어였다.
작은 문어가 눈을 빤짝거렸다.
마치 판술아재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았다.
판술아재가 다시 한번 호통쳤다.
“네 이놈! 배은망덕한 놈아! 죽을 놈을 살려 줬더니 앙물하러 왔나? 나쁜 놈!”
판술아재의 호통에 작은 문어 머리가 윈도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괴물문어도 서서히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괴물문어가 사라진 후, 판술아재와 기관장 그리고 선원은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평선에서 서서히 여명이 시작됐다.
바람도 멎고 비도 그쳤다.
다시 바다는 고요해지고 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른 후, 세 사람은 선장실에서 나와 배의 이곳저곳을 훑어봤다.
선수를 둘러보던 선원이 소리쳤다.
“우리 문어가 다 사라졌습니다!”
판술아재와 기관장이 달려갔다.
선수의 대형물칸을 가득 채웠던 왕대왕문어는 한 마리도 없고, 왕대왕문어를 담았던 비닐망만 너들너들 어지럽게 늘려있었다.
선원이 후미에서 또 소리쳤다.
“여기 몇 마리 있습니다!”
판술아재와 기관장이 달려갔을 때 죽은 대왕문어를 들고 선원이 씨익 웃었다.
“이것만 해도 기름값은 나올 겁니다.”
기관장이 핀잔했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판술아재는 아무 말 없이 선장실로 돌아와 담배 꺼냈다.
그러나 담배는 흠씬 물에 젖어 있었다.
담배 갑을 주먹으로 움켜 비틀며, 괴물문어와 새끼 문어가 사라진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니가, 그래도 못된 인간보다 열 배는 낫다.”
무안댁이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폈다.
“그런 미물도 은혜를 아는디, 어찌 사람은 모질기만 할까잉?”
쓴 입맛을 다시며 씨락아지매가 사랑마당을 둘러봤다.
“내가 오늘은 밭에서 바로 온다고 빈손으로 왔는데 누가 아재 입다실 거 가온 거 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판술아재가 말했다.
“괘 안타. 대신에 누가 찬물이나 한 사발 떠 온나.”
“지가 갔다 오겄심니더.”
사랑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돌출이가 벌떡 일어섰다.
“으아악!”
우물 있는 사랑마당 계단 아래에서 비명이 들렸다.
이어서 돌출이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무신 일이고?”
“지가 우물 뜰라고 두루박을 내리는데 누가 두레박을 확 잡아 당깄 심니더.”
판술아재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걸 말 안해줬구나. 두레박 줄 고친다면서 깜빡했다.”
곱상한 투로 찔레네가 물었다.
“내일은 지가유, 장에 가서 파전하고 막걸리 사오겄시유. 근디유.”
“또, 머꼬?”
“내일은 무슨 이야기여유?”
판술아재가 수염도 없는 턱을 쓰다듬으며 돌출이를 빗대 대답했다.
“요새 계속 귀신 야기만 하다봉께 자도 심약해졌능갑다. 그렁께 내일은 효부 야기 해볼까 하는데, 우떻소?”
“효부라고예?”
남해댁의 물음에 판술아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된 산삼 야기재. ‘동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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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왕 문어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판술아제의 첫출항의 험난 한 이야기 제미있게 보았슴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