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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PEOPLE] 그라운드 중심에서 승리를 외치다 - 부산아이파크 서동원
알 수 없는 무게감이 존재한다. 그 무게감은 팬들에게 걱정 말라는 든든함의 믿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노란 완장을 차고 그라운드라는 긴 시소가 어디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 바로 부산아이파크의 서동원이다.
그는 경기적인 부분에서도 중심이었지만 내적으로도 중심이었고 선수들은 그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다. 부산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는 이유 중 하나, 바로 그의 존재도 한 몫을 했다. 부산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그는 그라운드의 강인한 서동원이 아닌 서글서글한 미소의 정 많은 사람 서동원이였다.
(C) 정선녀
축구의 길을 들어서다
선수들에게 "어떻게 축구를 시작했냐?"는 질문을 하면 "축구를 좋아해서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축구를 시작했다"는 답이 대부분 돌아오게 마련이다. 그런데 부모님과 감독님의 강제로 축구를 시작했다는 선수는 그가 처음이다.
“ 특별활동 시간 때, 반에서 축구 잘하는 애들 모아서 다른 초등학교로 경기를 갔어요. 거의 저희 학교가 진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5학년 때, 신명초등학교와 경기에서 대패를 했어요. 그 학교 6학년 형들이 저한테 ‘야 일로 와봐!’ 하더라구요. 어린 마음에 무서워서 그냥 도망을 왔죠. 다음날, 그 형들이 우리 학교로 왔어요. 끌려가다 시피해서 형들 따라 신명초등학교로 가서 감독님을 만나게 되었어요.”
“감독님이 ‘축구 한번 해볼래?’ 하셨는데 저는 안 한다고 했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안하겠다고 버텼죠. 그러다가 감독님이 부모님과 통화하시고는 부모님께서 저에게 ‘일주일만 해봐라’ 하셨죠. 반강제였어요.(웃음) 제가 부모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반항을 안 했거든요. 그래서 부모님 말씀대로 일주일만 하려고 했던 축구를 평생 하게 되었어요.”
아무리 축구를 시작하게 된 것이 반강제였다고는 한들, 스스로에게 의지가 없었다면 쉽게 보낼 수는 없는 것이 축구선수로서의 청소년기이다. 대한민국 건장한 남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승부욕.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운동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수업 끝나고 훈련 하고 집에 오면, 가방을 멘 채로 밥 상 앞에서 졸았을 정도에요. 그런데, 운동을 하다보니깐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친구들은 초등학교 2~3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지만, 저는 동네 축구 식으로 하다가 뒤늦게 시작하다보니 당연히 친구들에 비해 뒤처지기 시작했죠. 친구들한테 뒤쳐진다고 생각하니깐 화가 났어요. 그러면서 선생님께 혼도 많이 나고 그만큼 노력도 하면서 실력을 쌓아갔죠.”
그는 어린 시절 많이 놀았을 것 같다는 오해를 많이 받았지만 실제로는 운동만 하는 참 재미없는 중,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청소년 시절, 친구 집에 모여서 밤새 노는 것마저 못해봤다는 것. 거기다 캠퍼스 낭만의 대학교에 진학했지만, 그 곳에서도 입에 단내 날 정도로 훈련만 했다고 하니 운동을 할 복(福) 하나는 타고난 듯싶다.
“영도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수도전기공고로 진학하게 되었어요. 영도중학교에서는 대부분 자매학교인 영등포공고로 가거든요. 그런데 고등학교로 진학한 선배들한테 이야기를 많이 듣잖아요. 그런 영등포공고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들이 어린 마음에 무서웠어요. 그래서 다른 학교를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수도전기공고에 일반 학생 신분으로 시험을 쳐서 가게 된 거죠.”
“수도전기공고는 일반 학생도 기숙사 생활을 해요. 전교생이 다 계속 학교에서 지내고 일주일에 한 번만 집에 갔어요. 거기다 학교 근처는 다 밭이거든요. 그런 곳에서 지내다보면 할 게 없으니깐 정말 운동만 했죠. 운동선수한테는 그렇게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반 강압적인 생활도 필요한 것 같아요. 청소년시절 때 나약해지는 부분을 강하게 바로 잡아줄 수 있었거든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프로에서 제의가 오기도 했어요. 그런데 전 고등학교 시절을 너무 재미없게 보내서 대학교 생활은 정말 해보고 싶었어요. 제가 꿈꿔오던 그 캠퍼스 낭만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연세대로 진학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꿈꾸던 대학 생활은 해보지도 못 했어요. 운동과 무슨 인연이 그렇게 깊은 지, 2년 동안은 학과 친구들 얼굴도 못 볼 정도로 훈련만 했죠.”
프로에 첫 발을 내밀다
그는 축구를 시작한 이후로 청소년대표팀, 올림픽 대표팀, 국가대표팀에 뽑히며 한국 축구를 이끌어 갈 유망주로 각광받아왔다. 그러던 그가 1999년, 드디어 프로에 발을 내밀게 되었다.
“드래프트 발표 전날, 대학 동기들하고 앉아서 서로 대전에는 안 뽑혔으면 좋겠다고 그랬어요. 사실 대전이 신생팀이고 시민구단이라 저희에게는 조금 부담스러웠거든요. 그런데, 다음날 ‘대전 드래프트 1순위 서동원’ 딱 적혀 있더라구요.(웃음) 그 당시에는 당황한 것 보다 애들한테 전화가 오면 어떻게 반응해야할까 그런 생각 밖에 안 들었어요.(웃음)”
“그런데 막상 대전으로 가서 훈련을 하다보니깐 너무 좋더라구요. 각 팀마다 장단점이 있는데, 대전은 참 가족적이었어요. 당시에 제가 형들이랑 나이차가 많이 났어요. 거의 12살 정도 차이가 나는 형들도 계셨으니깐. 그 형들이 정말 인간적으로 좋았어요. 그래서 형들을 잘 따랐고, 형들도 어린 저를 잘 챙겨주시고 격려도 많이 해주셨어요. 참 고마웠어요.”
그가 3년 동안 대전에서 뛴 경기 수는 총 85경기. 1년에 거의 28경기를 소화하며 당시 김은중과 함께 대전의 간판스타로 매김하며 주목을 받았다. 선수 개인적으로 상승세였으나 팀은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는 멋모르고 열심히 뛰었던 그때가 좋았단다.
“2000년도쯤에 형들이랑 ‘우리도 한번 해보자.’ 하면서 의기투합했었어요. 8경기를 했는데, 그 단시간에 4승3무1패로 대전이 1위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가 정말 좋았어요. 축구가 선수의 이름을 내세워서 하는 경기도 아니고, 이름 있는 선수들을 다 데려놓아도 원하는 경기를 다 할 수는 없거든요. 대전에서는 그 가족 같은 분위기가 선수들을 하나로 묶게 만들었고 축구가 다 같이 힘을 합쳐야 하는 운동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 준 것 같아요.”
잠시 나를 돌아보다
꾸준하게 상승세를 타며 자신의 진가를 알려오던 그에게 2001년은 시련의 해였다. 대전에서 수원으로 이적을 하였지만 시즌 중간에 또 다시 전북으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프로에서 경기를 뛰지 못하는 국가 대표는 필요 없다.’는 말과 함께 그는 월드컵 대표 최종명단에서 탈락하는 고베를 마셔야 했다. 각 급 대표팀에 항상 이름을 올려왔던 그였기에 충격은 더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저는 항상 대표팀 선수가 당연히 되는 줄 알았고, 대표라는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고 나서 더 이상의 노력은 안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도태되었죠. 당연한 결과였어요. 오르막만 오르던 선수가 갑자기 한 걸음 내려오면 다시 올라갈 생각을 잘 안 해요. ‘내가 이만큼 올라왔는데, 왜 한 발 물러야 돼’ 하면서 계속 과거에 묻히게 되요. 1부터 시작했는데, 뉘우칠 때 되면 -5까지 내려와 있죠. 그때 되면 다들 자포자기해요. 그런데 저는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상무에서 많은 생각을 하면서 제 자신을 변하게 만들었거든요. 힘들었지만 제 축구 인생에 있어서 반환점이 된 귀중한 시간이었어요.”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길은 광주상무행. 그 당시 그의 나이 28살이었고, 사랑하는 아내와 연년생인 두 아이를 두고 군대로 가게 되니 그 막막함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힘든 상황 속에서 내린 결정만큼 그는 다시 일어나고자 했던 의욕도 컸다. 넘어졌다고 툭툭 털고 일어나지 않았다. 앞만 보던 자신에게 잠시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면서 서서히 다시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내는 울고 있고, 장모님 얼굴을 뵐 면목도 없었어요.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르는데, 제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다 사무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이발소 아저씨는 아무것도 모르시고 ‘에이, 젊은 사람이! 군대 갔다 오면 다 남자 돼!' 하시는데, 그 때 제 나이 29살이었거든요.(웃음)
그런데 정말 감사하게 부대장님이 절 알아보시고는 선처를 많이 베풀어 주셨어요. 전화도 하루에 2번씩 시켜주시기도 하셨구요. 그 때, 현명하게 잘 넘기지 못 했으면 지금 이렇게 축구를 하지 못 했을 것 같아요.”
“아이가 둘이나 있는 상황에 군대에 가다보니 저에게는 책임감이 컸어요. 그 책임감이 저를 슬럼프에서 탈피하게 만든 것 같아요. 군대에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는데, 그 중 하나가 과거는 필요 없다는 거였어요. 어제도 과거잖아요. 큰 경기에서 골을 넣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도 그건 어디까지나 오늘에 비해 과거일 뿐이에요.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제일 아둔하다고 하는데 저는 피부에 와 닿을 만큼 직접 느낀 것 같아요.”
공통적으로 상무에 있던 선수들이 하는 말은 그 시절이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즐거운 추억으로 남게 된다고 한다. 그도 훈련하는 기간 동안에는 힘들었지만 끝나니 왠지 모르게 시원섭섭했다고. 그리고 이어서 그가 말하는 재미있는 군대 이야기. 늦은 나이에 입대 하다 보니 후배가 선임이 되어 있어 군대 생활 한번 제대로 했단다.
“대학교 4학년 때, 서기복(인천 유나이티드U12 지도자)이가 1학년으로 제 룸메이트였어요. 당시에 제가 정말 잘해줬거든요. 맛있는 것도 사주고, 집에 간다고 하면 버스비도 줬어요. 그런데, 군대를 딱 갔더니 (서)기복이가 병장이고 전 이병인거에요. 제가 대학시절에 그렇게 잘해줬는데 은혜도 모르고 엄청나게 장난을 치는거에요.
‘서동원 이병님, 잠깐 계세요.’ 이러고 저를 커피숍 앞에 세워요. 그러면 기복이는 위에 올라가서 ‘폭탄 투하합니다.’ 하면서 슬리퍼를 던지죠. 저는 선임의 안전을 위해서 ‘서기복 병장님, 피하십시오.’ 하면서 슬리퍼에 몸을 던져야 했어요.(웃음) 커피숍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웃는데 저는 정말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정말 군대 끝나기만을 기다렸어요.(웃음)”
인천에서 비상하다
군대에서 2년을 보낸 후, 그는 축농증 수술로 운동을 한 달 정도 쉬었고, 거기다 나이는 서른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가 제대한 후 여기저기서 과연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섞인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그가 택한 곳은 신생팀이자 시민구단 인천이었다. 장외룡 감독은 미드필드에 빈 한자리의 적임자를 서동원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결국 인천의 마지막 퍼즐 조각은 서동원으로 완성되었다. 그렇게 마치 예전에 그가 대전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던 것처럼 다시 인천에서 제2의 시작을 알렸다.
“당시에는 서울에서도 이야기가 있었죠. 그런데 나로 인해서 조금이라도 팀이 좋아지길 원했어요. 서울은 이미 좋아져 있는 팀이기 때문에 제가 가서 잘해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대신에 정말 잘해서 팀이 좋아지고 그만큼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이 났죠, 그렇게 해서 인천으로 가게 되었어요. 신생팀이 저와 인연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당시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돈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대우는 다음으로 미뤘다. 우선 자신에 대한 가능성을 실험해보고 싶었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도전하고 싶었다. 그의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2005년 한 해 동안 30경기에 출전하면서 5골, 3어시스트를 기록. 그는 중원의 살림꾼 노릇을 톡톡히 해내며 인천을 준우승에 올려놓는 것에 큰 몫을 했다. 그 결과 2005 K-리그 BEST 11 MF 부분에 선정되며 성공적인 재기를 했다.
“당시 인천이 전, 후반기 통합 1순위를 기록하면서 창단 2년 만에 준우승을 하게 되었어요. 대단한 성과죠. 장외룡 감독님의 말씀처럼 사람들이 하는 일의 과정에서는 불가능이 없다고 생각해요. 가능성을 가지고 도전하다보면 그 불가능이 가능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죠. 저나 선수들이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서로 팀플레이를 하려고 노력을 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던 것 같아요. 팀이 힘을 받고, 팀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지 개인이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덕분에 저도 좋은 평을 받게 된 거였구요.”
도란도란, 시끌벅적한 가족 이야기
그에게는 든든한 팬들이 존재한다. 바로 경기 내내 아빠를 응원하는 리틀 서동원 3명이다. 하루에 차를 4시간 타도 울지 않을 정도로 별명이 평화인 듬직하고 착한 첫째 아들, 그와 성격이 너무나 똑같은 둘째 아들 그리고 딸 노릇을 하는 이유 없이 무조건 예쁜 막내아들까지. 아들만 셋인 아버지 서동원은 아이들에게 무척이나 엄한 아버지란다.
“남자아이들이다 보니깐 엄하게 가르쳐야한다는 생각이에요. 저는 항상 ‘아빠 입에서 3번 나오면 혼난다.’ 라고 말해요. 거짓말하고, 형제들끼리 싸우고, 밥상 앞에서 싸우는 것은 절대 용서하지 않아요. 엄하게 혼도 내기 전에는 항상 ‘이러한 이유로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된다.’라고 아이들에게 이해를 시키죠. 그런데 아이들 각자 성격이 다르다보니 받아들이는 것에 차이가 있긴 해요.”
누가 리틀 서동원이 아니랄까봐 세 아이 모두 축구의 관심이 남다르단다. 요즘은 막내까지 축구를 하겠다고 하니, 힘들게 축구를 해온 그로서는 긴장되는 일이기도.
“저는 결혼하기 전에, 자식들은 축구 안 시키려고 했어요. 솔직히 지금도 안 시키고 싶어요. 제가 운동할 때 보다는 환경이나 대우가 훨씬 더 좋아졌다고 하지만, 축구를 즐기려는 부분은 아직 부족한 것 같아요. 저는 아이들이 축구를 즐기게는 하고 싶지만 성적에 구애받으며 강압적으로 시키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런 그의 생각에 아무래도 차질이 생길 듯싶다. 그와 성격이 판박이 인 둘째아들 때문이다. 피는 못 속인다고 그의 둘째아들은 이미 ‘날아라! 슛돌이’ 프로그램에서 축구선수주니어팀으로 출전해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다.
“지금까지 종민이(둘째아들)를 딱 3번 가르쳤어요. 그 중에서 2번은 화가 나서 못 가르치겠더라구요. 자식이라서 그런지 눈에 안 차요. 5~6살 때였는데, 애가 말귀를 알아들어야 하는데 이해를 못하니깐 욕심 상으로 화가 나는 거죠. 부인은 애가 애를 가르친다하고(웃음) ”
“유치원에서 공 찬다고 다른 활동에 참여를 안 한데요. 혼내고 벌을 세워도 소용이 없데요. 한번은 장난으로 축구를 잘하려면 지렁이를 먹어야 된다고 했어요. 이런 힘줄 생긴 게 지렁이 먹어서 생긴 거라고 했더니 애가 진짜 먹으려는거에요. 그리고 ‘박지성처럼 되려면, 한글, 영어도 알아야 되는 거야 ’그랬더니 어깨너머 형을 따라 영어, 한글 다 공부하더라구요. 축구를 이용해서 뭐든지 시키면 이 녀석은 잘할 거 같아요.”
(C) 정선녀
이 각기 다른 세 명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혼자서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연세대 시절부터 교제한 끝에 결혼한 그의 부인. 그가 군대에 있는 동안 아이 둘을 키웠고, 그의 굴곡 있는 축구 인생에 든든한 버팀목으로 지켜준 그녀이다. 거기다 아이 셋을 낳는 동안 단 한 번도 옆에 있어준 적이 없다고 하니, 그는 정말 그녀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아내는 저와 성격이 정말 달라요. 저랑 이렇게 살아오면서 신세한탄을 한 적이 없어요. 싸움조차도 안 되죠. 싸우면, 저만 화내고 아내는 말을 안 해요. 서로 밀고 당기고 해야 한다고 하는데, 부부로 살면서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이해심도 많고 아이 셋을 혼자 융통성 있게 잘 키우고 무엇보다 참 건강해요.”
아이들 이야기할 때에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다 꺼내놓던 그였지만, 정작 아내 이야기가 나오자 말수가 줄어든다. 팔불출이란 이야기를 들을까봐 이었을까. 미안함과 고마움이 말 속에는 뚝뚝 묻어나오는데, 정작 따뜻한 표현 한마디를 내뱉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미안하고 고맙다.’ 는 그 말 외에는 어떤 다른 표현이 없는 것이 맞는 것 같다.
행운의 숫자 7번째의 만남 부산
인천에서 성남을 거쳐 그의 표현대로 낙동대교 따라 부산까지 오게 되었다. 성남에서 단 7경기에 출전하며 또다시 그의 모습이 그라운드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기회를 얻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고, 그런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바로 황선홍 감독이었다.
시즌 중반,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고 있던 부산에 팀 내 선임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의 ‘과연 서동원이’라는 우려는 점점 ‘역시 서동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의 전매특허인 날카로운 프리킥은 위협적이었고, 점차 부산은 중심을 잡아가며 안정감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칭찬에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손 사레를 친다.
“축구가 1명 때문에 달라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부산에서 한 것도 없는데, 좋은 말씀을 해주시니깐 감사하죠. 팀에 도움이 못되더라도 팀에 마이너스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죠. 예전의 유망주로서 서동원이 아니라 대한민국 축구선수로서 축구를 즐기는 프로선수 서동원이라는 생각으로 묵묵히 노력하다보니깐 예쁘게 봐주시는 것 같네요.”
“나이도 있는 상황에, 감독님이 저를 믿고 데려오셨는데 제가 여기서 제 욕심 챙기려고 하면 안 되는 거죠. 감독님과 코치님들이 배려도 해주시고 인정도 해주시는데 그렇게 해주시는 만큼 무엇을 원하시고 계시는지 알고 있어요. 솔직히 운동장에서 팀 동생들보다 체력적으로 더 잘 뒬 자신은 없어요. 대신 경험상으로 애들에게 조언 같은 말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어린 동생들을 일깨우는 데에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세대 차이를 생각 안 해봤거든요. 그런데 요즘 조금씩 느끼게 되요. 저도 어렸을 당시에는 몰랐는데, 애들이 어떻게 알겠어요.(웃음)”
한 살 차이에도 세대 차이를 말한다는 요즘 세상에 아래로 12살 차이까지 나는 동생들을 하나의 팀으로 이끌고 있으니, 당연한 이야기 일 것이다. 인터뷰 내내 후배가 아닌 동생이란 단어를 쓰던 그는 이제는 팀 동생들이 정말 친동생 같다고. 강인한 인상에 최고참 선배님께 어디 감히 장난을 칠 수 있겠냐고 했더니 그는 스스로 개그맨이 되었단다.
“주장 완장으로 권위의식을 가지는 선수 보다는 주장 완장을 참으로 해서 위기감을 느끼고 그 위기감 속에서 팀을 하나로 묶는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외적으로 보여주는 플레이도 당연히 중요하죠. 하지만 내적으로 믿음이라는 것이 구성이 되면 경기장에서 모습이 달라져요. 서로가 옆에 있음으로써 마음이 편해진다고 해야 하나. 축구는 다 같이 하는 경기다보니깐 어느 순간 고비가 분명 찾아오거든요. 믿음은 그것을 잘 넘기게 해주는 거 같아요. 그걸 넘기면 강팀이 되는 거죠. 제가 기 쓰고 믿음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애들을 가르치고 하지는 않아요. 대신 그런 노력을 하기 위한 동기부여까지는 제가 할 몫인 것 같아요. 그런데 아직 미흡하죠.”
최근 부산은 좋은 경기력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좋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본인도 힘들지만 같이 지쳐가는 선수들을 독려하며 이끄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강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러한 강함 속에 외로움은 2배로 느껴지는 법. 그가 혼자서 감당하기엔 완장의 무게가 점차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처음에 왔을 때는 설레고 좋았어요. 그런데 갈수록 사실 벅차고 부담이 되기도 했죠. 답답해지고…. 저도 사람이니깐, 감정에 휩쓸리게 되더라구요. 그렇게 제 손에 있는 짐을 내려놓고 싶은 나약함이 생기기도 했어요. 그런데 좋아지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위안을 했어요. 제가 짊어지고 갈 짐인 거죠.”
“지금 정말 편해요. 선수로서 참 굴곡이 많았는데, 아쉽고 미련이 남는 것 하나 없어요. 이제는 이 모든 것이 팔자려니 생각이 들어요. 모든 부분이 다 제가 미흡했기 때문이니깐요. 어른들의 말씀처럼 업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축구 이야기를 듣는 동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그래프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만큼 선수로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참 많은 우여곡절을 보냈다. 이제 그의 나이 34살. 지금 쭉 이어진 그의 축구 인생에 쉽사리 마침표를 찍지 못하겠다. 쉼표를 찍고 또 무언가를 보여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직 열정이 존재하고 내년에는 더욱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욱 강해진 부산 속에서 그가 빛나고 있지 않을까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지금 부산은 강한 팀이 되기 위한 과정을 겪고 있다고 생각해요. 팀이 한순간에 좋아질 수는 없어요. 여러 경험과 과정들을 겪어야 강한 팀이 되는데, 그 과정을 부산이 지금 겪고 있는 것 같아요. 올해가 끝난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코칭스텝과 선수들 모두 포기하지 않고 남은 경기들을 최선을 다해 마무리 할 테니 끝까지 응원해주시고 지켜봐주셨으면 합니다.”
K-리그 명예기자 한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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