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14일(주)
* 시작 기도
주님...
세례 요한이 헤로디아의 일로 인하여 목베임을 당하였습니다(마 14장).
말씀 앞에서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심판밖에 받을 것이 없는 자임을 처절히 깨닫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그런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 심판이 내게 즉시 임하지 않음으로 내가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나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 곧 존재의 심연까지 찔러 쪼갭니다.
나는 죽어야 할 자입니다.
주의 공의로 나를 심판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죽기에만 합당한 자임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받아들입니다.
나는 죽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나도 함께 못 박혀 죽었으니 주님이 살려주시면 살되 주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되게 하소서.
오늘 주의 날 공동체로 모여 함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전심으로 주를 찬양하며 예배하게 하시고 나는 감추어주시되 오직 예수로 부요한 백성들 되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밟아도 뿌리를 뻗는 잔디와 같이 죽이고 또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나의 옛 사람을 오늘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6:1-13
제목 :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1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5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6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7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 나의 묵상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혈루증 여인과 죽은 12살 소녀를 살리신 후에 당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제자들과 함께 들르셨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시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듣고 놀랐다.
그 이유는 고향 사람들은 이 예수가 어디 출신이며 전혀 배우지 않은 무학자임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말과 지혜 그리고 손으로 행하는 권능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 예수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그의 형제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고 그의 누이들은 지금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가, 하면서 그 예수를 배척하였다.
이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친척 그리고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셨다.
거기서는 아무런 권능을 행하실 수 없어서 소수의 병자를 안수하여 고치셨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인하여 이상히 여기셨다.
이들은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었다.
그것도 한 동네에 사는 나사렛 사람들 아닌가?
이들은 어쩌면 예수님의 집에 있는 수저가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속속들이 아는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장본인들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선입견 때문이다.
자기들이 아는 예수가 비록 큰 권능을 행하고 병자도 고치기는 하지만 자기들보다 더 높은 권세를 가지는 것에 배가 아픈 것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서는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아도 고향인 나사렛에서는 높임을 받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무엇보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육으로만 알뿐, 영으로는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이런 이들이 또 있었다.
예수가 어디서 왔는지 잘 안다고 자처하는 자들이었다.
(요 7: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예수 그리스도)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안다고 하지만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안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을 한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8: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을 받아 나셨다(요 5:26).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이 언약을 맺으셨다.
그 언약은 아들 안에 있는 그 생명을 사람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딛 1:2).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말씀으로 계시는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으로 오시기로 작정이 되었다(벧전 1:20).
이 세 가지가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세전에 하신 일이다.
이처럼 창세전 언약에 근거하여 아들이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것이 육신으로 오신 초림이다.
그 초림이 바로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고난 가운데 애굽에서 나사렛으로 돌아오셔서 어린 시절을 나사렛에서 사셨다.
그래서 그의 고향이 나사렛이라 한다.
바로 나사렛 사람들은 이렇게 초림하신 예수를 알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알아야 하는 것은 육신의 예수를 알기보다 창세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복음이며 그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영생을 얻고 누릴 수 있다.
창세전부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존재하셨다.
그가 하나님의 작정대로 때가 되어 육신을 입고 여인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다.
(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 아담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 불의한 자가 되었다.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져 분리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언약에 영원히 신실하시다.
따라서 불법을 행한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징계를 행하신 후에 그에게 영생을 약속하신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구원자를 정하시고 그 구원자인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이다.
그 죽음은 아담을 비롯한 오고 오는 모든 시대의 아담들의 죄를 대속하시는 죽음이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무덤에 장사되신다.
그 장사는 또한 모든 아담들의 죄를 최종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이다.
이뿐 아니라 죄로 인하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아들을 살려내신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이제 이러한 예수님의 구속 사건에 나도 함께 연합하여 십자가에 함께 죽고 무덤에 함께 장사될 때 새 생명으로 행할 수 있다.
이런 복음을 알지 못하고 단지 육신적으로 그가 어디서 태어났고 무엇을 하며 자랐는지를 깨알 같이 안다고 해도 이는 진짜 아는 것이라 할 수 없다.
육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알아야 한다.
영으로 알되 무엇보다 삼위 하나님의 관계성 속에서 서로 아시는 것처럼 우리도 삼위 하나님 안에서 서로 알아가야 한다.
이 앎이 바로 영생의 단초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아는 것이란, 지식적 관념적 앎이 아니다.
삼위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서로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이다.
이런 사귐을 통하여 아는 것이 영생의 의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바로 이 영원한 생명이다(요일 2:25).
사귐을 통한 영생이란, 당시 최고의 선이라 주장하는 지식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이 아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주 안에 거하는 것은 곧 성령 안에서 말씀에 거하는 것이다.
그 말씀을 날마다 먹고 마실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뜻이다.
그렇게 우리가 날마다 말씀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교제와 사귐을 갖는 것이 하나님과의 사귐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창세전 약속하신 그 영생을 우리에게 주신다.
나는 이 영생을 미처 알지 못하는 자였다.
영생을 모르니 복음은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다.
이런 나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나사렛 사람들과 같이 예수를 육으로만 알 뿐이었다.
그 예수에게 온갖 욕심과 탐욕으로 구하는 것들이 나의 소원의 목록들이었다.
그런 소원으로 기도를 해서 기도가 이루어지면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치부되었지만, 응답이 되지 않으면 그저 그런 사람이 되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응답이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식으로 넘기기도 하였다.
이것은 나의 부족한 믿음에 대한 변명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나는 그럭저럭 종교생활을 하다가 내가 원하는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큰 환난과 시험을 당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복음을 알고 보니 이 환난과 시험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요 간섭하심임을 알게 되었다.
바로 무덤에 주님과 함께 장사되는 장사복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목회를 하면서 항상 가로막히는 것이 성도들의 고난의 문제였다.
이 고난은 열심히 기도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장사복음이 바로 목회의 출구였던 것이다.
예수를 잘 안다고 자부했던 자들이 오히려 예수를 배척하는데 앞장선 자들이 된 것처럼 나 역시 내가 주님을 잘 안다고 자부하였지만 정작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로 판명이 나고 말았다.
그렇게 내가 쌓았던 육의 지식들이 하루아침에 와르르 무너지고 공허한 자가 되었다.
아무 것도 붙잡을 수 없을 때, 주님이 먼저 무덤에 계셨다.
그 무덤이 새 생명으로 살아나신 우리 주님의 성전이었다.
나는 그 성전에서 함께 주님과 교제하며 오늘도 영생으로 살아간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육으로 아무리 잘 알고 지식적으로 뛰어날지라도 그것들은 다 무너지고 깨지며 없어질 것들임을 믿습니다.
그렇다고 육신적인 것이나 지식적인 것들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기초가 되어 영적인 것으로 승화될 수 있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하여 오늘도 주님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하여 예수를 공부합니다.
나의 두뇌를 명석하게 하시되 영으로 주님을 알 수 있도록 성령께서 나를 장악하여 주옵소서.
만물 안에서만 주를 아는 것이 아니라 만물 위에 계신 주님을 온전히 알 수 있도록 나의 영안을 열어주소서.
육신의 정욕으로 인하여 넘어지지만 아들을 힘입어 담대히 아버지 품으로 나아가오니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