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트리
유 미 애
가끔 꺼내 먹는 우리의 날들이 쓰고 달지만 않았으면 해
저녁이, 붉어진 몸을 작은 나무 쪽으로 기울여주듯
레몬의 여름이 깊어진 건 기린을 알아서일 거야
그가 펼쳐준 사다리를 오르며 꿈이란 걸 갖게 됐으니까
평생 음지만 갉아먹으며 살 수는 없잖아
내 슬픔을 건너간 너는 이해할 거야
천막에 갇힌 레몬이 왜 노란 발가락을 양지쪽으로 꺼내놓는지
이곳은 서커스의 제국
매일 한 뼘씩 목이 길어지는 기린과 구경꾼들
스쿨버스에서 내린 아이들은 그물 속 물고기처럼 끌려다니고
발목이 약한 레몬은 늦도록 줄을 타야 했지만
몇 번이나 목이 꺾인 기린은 가장 긴 그림자를 끌며 떠났단다
천막에 머무는 동안만 레몬을 사랑하기로 했으니까
멀리,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일이 여기선 죄가 되니까
무릎으로 올라오는 상큼한 냄새, 이제 곧
아이들의 아이들이 열매를 던지며 놀게 될 거라고
가면을 벗어던진 레몬은 홀로 여름을 지키기로 했다는데
더 이상 붉어질 것도 푸른 상처도 없는 저녁 같은 그때쯤
꽃무늬 지는 목이 가려운 기린은 무슨 말인가를 흘렸을 텐데
국경 근처의 너는 어느 가지에 찍힌 눈물자국을 읽고 있는지
레몬 조각 없이도 내 기억에선 싱싱한 비린내가 돌아
제 그림자를 뛰어넘은 기린이 천막으로 자러 오는 그런 저녁엔
차마 이 구석방의 등불을 끌 수가 없단다
유미애
경북 문경 출생. 2004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손톱』 『분홍 당나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