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桓檀古記』
환단고기는 신라의 대표적 십성(十聖) 가운데 한 분인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 안함로(安含老,579~640)의 “삼성기三聖紀 상(上)”
조선 시대 세조가 팔도 관찰사에게 수거하도록 유시한 도서 목록(세조실록)에 고려 때의 인물, 원동중(元董仲)의 “삼성기三聖紀 하(下)” 고려 공민왕 때 문하시중(지금의 국무총리)이었던 행촌杏忖 이암(李喦,1297~1364)선생의 “단군세기檀君世紀” 고려 말, 정몽주의 제자로 고려의 충신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분이었던 복애거사伏崖居士 범장(范樟)의 “북부여기北夫餘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사헌부 장령을 지냈던 일십당(一十堂) 이맥(李陌,1455∼1528)선생의 ”태백일사太白逸史”
이 다섯 권의 책은 거의 천 년 세월에 걸쳐 다섯 사람이 저술한 사서가하나의 책으로 묶여진 것이 “환단고기桓檀古記”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1864년 평안도 선천에서 태어난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1864~1920)선생이 지인들로부터 구한
한민족의 정통 사서들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안함로의 삼성기 상(上)은 그의 집안에 전해 내려오던 것이고
원동중의 삼성기 하(下)는 인근의 태천에 살던 백관묵에게서 구하였다.
단군세기 또한 백관묵의 소장본이고, 북부여기는 삭주 사람 이형식의
소장본(이형식의 소장본 단군세기와 백관묵이 소장한 단군세기는 그 내용이 동일하였다고 한다)이었다
태백일사는 그의 스승이자 항일운동 동지인 조선 말 실학자
해학海鶴 이기(李沂,1848~1909)의 집안에서 전해 오던 것이었다
계연수선생은 1897년 해학 이기선생의 문하에 들어간 그 다음 두 해 동안(1898~1899)
이암의 태백진훈과 단군세기, 참전계경, 태백일사, 천부경요해 등을 간행하였다
1911년 계연수선생은 그의 벗이자 독립운동 동지인 홍범도장군과 오동진 장군 두 사람의 자금 지원으로
만주 관전현에서 환단고기 30부를 간행했다
스승 이기(李沂)가 일본에 나라가 병탄된 것에 비분강개하여
1909년 절식(絶食) 자진한 후 계연수는 만주로 건너갔다.
만주 관전현은 독립운동가와 열사들이 수시로 모여
강론과 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운초 계연수는 항일독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천마산대와
서로군정서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57세 때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목과 팔,다리가 다섯 토막으로 잘려 무참히 살해되었다
당시 압록강에 처참하게 버려진 그의 시신이 수습되는 광경을
지켜본 14세 소년이 훗날 환단고기를 널리 대중화 시킨 이유립(1907~1986)선생이다
이유립선생은 행촌 이암(李喦,1297~1364)과 일십당 이맥(李陌,1455∼1528)의 후손으로
그는 평안도 삭주의 유지이자 독립운동가이던
이관집(李觀楫)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유립은 계연수와 친했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역사에 눈 뜨게 되었다.
이유립의 부친과 계연수선생이 친했던 것은 두 사람이 함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두 사람은 함께 광개토대왕 비문도 조사, 탁본하였다
1919년 13세 때 단학회가 주관하는 교육기관인 배달의숙(倍達義塾)에 들어가
계연수, 이덕수 두 스승의 강의를 들으며 환단고기를 공부하였다.그 후 독립군의 통신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신간회의 삭주 지부를 결성하는(21세)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45년 광복 직후에는 단학회 기관지 ‘태극‘을 발행 그 주간(主幹)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에 계연수 사후 그에게 전수된 환단고기를 가지고 월남하였다. 이후 단학회(檀學會)를 단단학회(檀檀學會)로 개칭하였고, 1963년 대전에 정착한 이후에는 후학을 기르며 역사 연구와 강연에 전념하였다.현재 단단학회 회장인 양종현은 1967년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유립을 약 20년간 모시면서 역사를 배웠다환단고기가 이유립의 창작이란 비난에 대해서 그는 환단고기 초간본을 좁은 방에서 스승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글자 하나하나 짚어가며 배운 기억을 생생하게 전하며 결코 위작이 아님을 증언하고 있다 전현무,강남이 궁금해한 환단고기 https://www.youtube.com/watch?v=T4bGHejGqnM
첫댓글 귀중한 자료 잘 읽었습니다.
운초 계연수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붙잡혀 팔다리를 절단당하여 강물에 버려졌다는 대목에서 분노가 치밀었습니다.ㅠㅠㅠㅠ
왈본놈들에게 잔인하고 치욕스런 방법으로 죽어간 많은 순국열사들을 생각하면 절대로 친일매국노 후손들이 바글거리는 새누리당을 분쇄시켜버려야 합니다.
그런곳에 반기문총장이 기웃거리고 있고 이미 대선후보로 추대되어 창당준비가 물밑으로 되고 있지 않나 싶네요.
주체성이란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 싶습니다
아직 계연수 선생이 누구인지 모르고
저런 인물이 있었니 없었니
하면서 재고 있는 무지사관도 있습니다
@한류포스 오늘 기사에서 반기문 총장이 친일벌언을 했군요.
뭔가 느낌이 자신의 친일사상을 검증받듯이 아부하는 듯하며 흘린 묘한 멘트에 기분이 언짢아지네요.ㅠ
이쯤되면 이미 비박과 연대 정리가 다 된듯합니다
본문의 '안함로' 의 생몰기록에 대해 좀 의구심이 생기네요.
'안함로원동중삼성기' 라는 구절을 2가지로 해석하곤 하는데,
1) <안함, 노원(로원), 동중 삼성기> : 이 때에는 삼성(세 명의 성인)이 안함, 노원, 동중의 3명을 가리키게 됨
2) <안함로, 원동중 삼성기> :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에는 안함로와 원동중이 지은 삼성기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
통상적으로는 1)과 같이 이해하나, 본문은 2)와 같이 이해하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1)과 같이 이해할 경우에는 안함, 노원, 동중 중 일부 인물의 경우 다른 사료에서 교차검증이 가능하다는 매우 큰 장점이 있습니다. 안함이 대표적인데, 이 인물은 <해동고승전>에도 나오고, 황룡사와도 관련이 있으며 <동도성립기>라는 책을 썼다는 이야기도 나오죠. 달리 '안홍'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제일 위에 쓴 안함로의 생몰연대인 578년 ~ 640년은 사실 '안함' 의 생몰연대입니다.
하지만 안함로와 원동중은 다른 사료에서 전혀 검증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2)의 견해를 취하고자 했다면, 1)의 견해에 입각한 '안함' 의 생몰연대를 억지로 안함로에게 붙여줄 게 아니라 안함로의 생몰연대가 미상
이라고 말하는 게 공정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