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어 고성>
선조실록 30년 3월 18일 경상감사 이용순 서장
선조실록 30년 3월 24일 도원수 서장
선조실록 30년 3월 25일 전교
<검색어 조응도>
선조실록 30년 6월 26일
선조 실록 30년 3월 18일
경상 감사 이용순(李用淳)의 서장에,
“금년 3월 10일 성첩(成帖)하여 당일 도착한 고성(固城)에 유진(留陣)하고 있는 장수의 치보(馳報)에 ‘본현(本縣)의 판옥선(板屋船)에 사수(射手)·격군(格軍) 등 하솔(下率) 1백 40여 명을 싣고 현령이 직접 거느리고서 바다로 나아가 3월 9일 조라포(助羅浦) 경계 고다포(古多浦)에서 왜적과 접전할 때 전선(全船)이 패전하고 현령도 전사하였으므로 시체를 싣고 당일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패전한 절차는 자세히 조사하여 아뢸 계획입니다마는, 근간(勤幹)하고 용감한 사람을 각별히 이 고을 현령으로 택차(擇差)하여 수삼일 안으로 서둘러 내려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선조실록 30년 3월 24일
3월 19일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 율의 서장에,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의 치보(馳報)에 ‘3월 8일 왜선(倭船) 대·중·소 3척이 거제(巨濟) 기문포(器問浦)에 와서 정박(定泊) 상륙(上陸)하였다 하기에 통제사(統制使)가 즉시 주사(舟師)를 거느리고서 일시에 발선(發船)하여 밤새도록 노를 저어 9일 이른 아침에 기문포에 당도하여 보니, 왜선 3척이 해안(海岸)에 매여 있는데 왜적은 모두 상륙하였고, 산기슭 사이에서 밥짓는 연기가 잠시 일어 나는 중에 왜적 3∼4명이 칼을 번뜩이며 언덕 위에 서 있었다. 통제사가 항왜(降倭) 남여문(南汝文) 등을 보내어 이해(利害)로 회유(誨誘)하게 하였더니, 숨어 있던 왜적 20여 명이 나왔고, 남여문이 왜추(倭酋)와 조용히 담설(談說)하자 숨어 있던 왜적이 다 나왔는데 대개 80여 명이었으며 우리 주사(舟師)의 성대한 위용(威容)을 보고는 엄습을 받을까 의심하여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였다. 안골포 만호(安骨浦萬戶) 우수(禹壽), 고성 현령(固城縣令) 조응도(趙凝道), 거제 현령 안위(安衛) 등이 탄 배가 다투어 올라가서 항복을 받으니, 장왜(將倭)가 그 무리 7명을 거느리고 와서 통제사의 배로 올라갔다. 통제사가 그에게 술을 주고 배를 타고서 떠날 것을 허락하니 왜적들은 생환(生還)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여 죽 늘어서서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무수히 치사(致辭)하고는 저희 배 있는 데로 내려가서 두 배에 나누어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 돛을 달려는 즈음에 통제사가 먼저 지자총통(地字銃筒)을 쏘고 지휘기(持揮旗)를 흔들며 적각(笛角)을 급히 부니, 제선(諸船)이 앞을 다투어 공격하였다. 조응도(趙凝道)가 탄 배는 다른 배보다 상당히 빨라 먼저 적에게로 달려 들어가서 적선을 공격하니 왜적 20여 명이 조응도의 배로 올라와 싸웠는데 조응도와 사부(射夫)·격군(格軍) 등 적의 칼날에 많은 사람이 부상당하였으나 혹은 물로 뛰어들어 헤엄을 쳐서 나오기도 하고 혹은 다른 배에 구제되기도 하여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 적의 칼을 맞고 물로 뛰어든 조응도를 우수(禹壽)의 배에 건졌으나 잠시 뒤에 죽었다. 적들이 그대로 조응도의 배인 고성(固城)의 배를 타고서 노를 저어 북쪽으로 달아날 때 제선이 포위하여 지자 총통과 현자 총통(玄字銃筒)을 계속 쏘아대니 좌우의 방패(防牌)가 총에 맞아 다 떨어졌고, 화살이 비 오듯 하니 왜적은 허둥대며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임치 첨사(臨淄僉使) 홍견(洪堅), 흥덕 현감(興德縣監) 이용제(李容濟)로 하여금 당화전(唐火箭)과 송거(松炬) 등으로 적선에 불을 지르도록 하여 왜적들이 모두 배에서 뛰어내려 육지를 향해 헤엄칠 때 사살하고서 그 시체를 건져 목을 벤 것이 도합 18급(級)이었다. 변험(辨驗)하여 통제사에게 보내어 수송하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적의 수급을 벤 사람들은 통제사가 군공(軍功)을 마련하여 장계하기를 기다린 뒤에 논상(論賞)하고, 조응도와 전사(戰死)한 사람들도 자세한 치계가 있은 뒤에 휼전(恤典)을 거행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으로 통제사에게 행이(行移)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선조실록 30년 3월 25일
비망기로 우승지 정광적(鄭光績)에게 전교하였다.
“통제사 원균(元均)이 임명을 받자마자 곧 무용(武勇)을 떨쳐 적선 3척을 포획(捕獲)하고 수급(首級) 47급을 바쳤으니 매우 가상하다. 원균과 공이 있는 사람을 즉시 논상(論賞)하고, 혹 관원을 보내 호군(犒軍)하여 장사(將士)들을 격려할 일을 의계(議啓)하라. 그리고 적의 수급과 계본(啓本)을 가지고 온 사람도 아울러 참작하여 논상할 것으로 비변사에 말하라.”
선조실록 30년 3월 25일
3월 22일 성첩(成貼)한 경상 우병사 김응서(金應瑞)의 서장(書狀)에,
“금월 19일 김해(金海)의 섬에 주둔하고 있는 왜장(倭將) 풍무수(豊茂守)가 수하(手下)의 왜인 3명을 보내어 신에게 통문(通問)하기를 ‘우리 군대의 왜(倭) 32명이 중선(中船)한 척을 타고서 나무를 벨 일로 거제(巨濟) 옥포(玉浦)지경에 가서 정박하고 있었는데, 조선 주사(舟師)가 유인하여 은밀히 다 죽였으므로 한 사람도 생환자(生還者)가 없었다. 사람을 시켜 그 연유를 탐문하였더니, 주사의 제장(諸將)들이 모두 우병사가 지휘를 하여 잡아 죽였다고 하였다. 나도 즉시 연해(沿海) 방면으로 군대를 보내어 인민(人民)들을 표략(剽掠)하여 분한 마음을 설욕하고자 하였으나 병사께 고하지 않고 먼저 경솔히 군대를 출동시킨다면 나 역시 실신(失信)의 무리가 되는 것을 면할 수 없으므로 사람을 시켜 먼저 고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자로 온 왜인이 강력하게 말하기에, 신이 개유(開諭)하기를 ‘그대들이 우리 나라의 강토에 웅거해 있는 지가 지금까지 6년이 되었는데도 아직 철수(撤收)하지 않고 통사(通使)의 왕복(往復)도 서로 믿을 수 있는 의리가 없으므로 우리 나라는 분연히 한번 전투하고자 하나 중국의 처지를 몰라 우선 참고 발병(發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대들이 싸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수군과 육군이 함께 호응할 것이니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싸우고 싸우지 않는 것은 그대들 생각대로 하라.’고 하였더니, 왜가 답하기를 ‘조선의 장수들은 기량(器量)이 넓지 못하여 작은 이익만 힘쓰고 큰 일은 생각하지 않아 사단을 만들어 내고 있어서 끝내 일(事)이 완결되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어찌 감히 전투를 하고자 하겠는가마는, 조선의 제장들이 사단을 도발하니 어쩌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다시 답하기를 ‘주사(舟師)의 복병(伏兵)이 거제도에 장기간 체재(滯在)하면서 내외를 순찰하고 있으니, 이때 서로 만나게 되면 소장(小將)들이 우리를 해치는 왜인지의 여부를 분변하지 못하고서 격살(擊殺)하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작은 일을 가지고 혐의를 삼아 함부로 사사로운 싸움을 해서야 되겠는가. 이 일은 중국이 처분할 것이니, 우리 두 나라 병장(兵將)들은 군사를 거느리고서 중국의 명령만을 기다리면 된다.’고 하였더니, 왜도 그렇다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에 술을 대접하여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연변(沿邊)에 군대를 보내어 노략질하겠다는 말은 전혀 근거없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23일 요시라(要時羅)가 또 행장(行長)과 조신(調臣)의 서신을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전일 일본 제진(諸陣)의 사람들이 마구 내지(內地)로 들어가서 기탄없이 횡행(橫行)하기 때문에 행장이 제장(諸將)에게 통유(通諭)하여 약속(約束)을 정할 때 나에게 말하기를 거제현(巨濟縣) 외곽(外郭)의 출입은 일본인들의 시목(柴木)3736) 이 긴요하므로 출입하지 않을 수 없으니 금하지 말라고 소인(小人)으로 하여금 와서 고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때 잘 분별을 하지 못하고서 거제도 일경(一境)으로 한정하였으므로 이번에 주사(舟師)가 일본인을 죽이자 여러 왜장들이 모여 논의하기를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요시라가 한 짓이다.」고 하면서 소인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행장이 제장에게 유고(諭告)하기를 「요시라가 죽는 것은 애석할 것 없지만 우선 풀어주어 병사도에게 가서 사실을 알아보게 한 뒤에 죽여도 늦지 않다.」고 하니, 제장들이 모두 그렇다고 하면서 풀어주고 나로 하여금 병사도께 와서 여쭙게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평행장(平行長)의 관하(管下) 15명이 한 척의 배에 타고, 풍무수(豊茂守)의 관하 32명이 한 척의 배에 타고서 재목(材木)을 베어 올 일로 거제도로 갔을 때 마침 조선 주사(舟師)와 만났는데, 조선 주사가 동선(同船)의 왜인 15명을 유인하여 총검(銃劍)을 다 빼앗고서 결박을 지워놓고 베려 할 즈음에 한 왜가 「우리는 도적질하는 왜가 아니고 평행장 관하의 요시라와 같은 왜인으로 공문(公文)을 가지고 왔다.」 하자, 한 장군이 말하기를 「이것이 사실이라면 심사(沈使)3737) 가 바야흐로 남중(南中)에서 수호(修好)하고 있는 이때 경솔히 죽이는 것이 부당하다. 행장의 관하라면 역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고서 결박을 풀어 돌려 보냈다. 동왜(同倭)가 부산으로 돌아와서 사정을 자세히 전하니, 행장이 나로 하여금 즉시 조선 주사가 복병하고 있는 곳으로 가서 사실을 탐문(探問)한 뒤에 빼앗긴 총검을 찾아오라 하였다. 그때 행장의 솔왜(率倭)3738) 15명이 또 배를 타고서 옥포(玉浦)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해중(海中)에서 나를 만나 말하기를 「공문이 없으면 조선 주사가 만나는 대로 쏘아 죽인다 하니 표문(標文)을 만들어 주면 위급할 때 빙거(憑據)로 삼겠다.」고 하기에 조선국 첨지중추부사(朝鮮國僉知中樞府事) 요시라(要時羅)의 하인이 재목(材木)을 베어 올 일로 옥포(玉浦) 경내(境內)로 가니 금하지 말라는 것으로 서명(署名)하여 보냈는데, 조선 병선(兵船)은 통문(通文)을 무시하고서 이들을 유인해다가 모두 죽였으며, 또 죽도(竹島)의 왜 32명을 조선 주사가 선상(船上)으로 초치(招致)하여 술을 접대하며 거짓 후대(厚待)하였으므로 왜인들은 전혀 낌새를 느끼지 못하고 안심하고 배를 타고 돌아올 때 조선의 제선(諸船)들이 불시에 포를 쏘아 죽도의 왜를 다 죽였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나무를 베러 다니는 영쇄(零碎)한 한두 척의 왜선(倭船)을 잡는 것이 승패(勝敗)의 수에 관계 되는 것이 아닌데도 조선의 제장들은 공(功)을 탐하여 매양 이런 일을 일으키니 매우 괴이하다. 정성(正成)과 조신(調信)이 현재 바다를 건너가서 두 나라 사이의 강화(講和)를 추진중인데 이런 소식을 듣는다면 아마도 강화에 지장이 있을 것이고, 조선에서도 반드시 화를 자초했다는 탄식이 있게 될 것이다. 우리의 장군 행장과 의지(義智) 등도 바로 이 때문에 상심하고 있다. 지난해 거제에서 철병(撤兵)할 때 다른 왜장(倭將)들은, 군대를 다 철수시키는 것은 불가하니 일진(一陣)을 남겨 두어 조선 주사의 소식을 듣고자 하였으나, 행장 홀로 군대를 남겨 두거나 두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고서 그곳의 군대를 다 철수시켰던 것인데, 오늘날 일이 생기자 제장들이 모두 행장에게 허물을 돌리니, 행장도 매우 불안하여 전일의 일을 매우 옳지 못하였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니 조신이 왕복하는 사이에는 주사를 출동시켜 흔단을 일으키지 말고 두 나라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죽도·안골포(安骨浦)·가덕도(加德島)의 왜장들이 이번 일로 하여 군대를 일으켜 연해 지방을 들이쳐서 인민을 살략(殺掠)하려는 것을 행장이 간신히 말리고서 나를 보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을 알 수 없으니 군사를 정돈하여 변란을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처럼 진고(進告)하는 나의 말을 거짓이라 하지 말고 미리 백성들을 피난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도적이 온다 해서 무엇 때문에 백성이 피하겠는가. 내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인데 그날 무슨 위험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요시라가 말하기를 ‘중대하지 않은 일로 하여 무고한 생령(生靈)을 도탄 속에 빠지게 한다면 어찌 측은하지 않겠는가. 내가 풍무수에게 가서 그 계획을 저지하고자 한다. 그러나 만약 내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미리 통지(通知)할 생각이다. 그리고 행장과 조신의 서장 두 통은 도체찰사도(都體察使道)에게 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선조실록 30년 6월 26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체찰사는 대신(大臣)이고 도원수는 주장(主將)인데도, 절제(節制)의 권한이 주사(舟師)에게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거기에 상응하여 행해야 할 법규대로 적용해야 할 것이요, 그저 고지식하여 어리둥절하게 몇 마디만 조정에 치보(馳報)하고 그만둘 일이 아닙니다.
남쪽의 일은 이 한 가지 단서만 가지고 보아도 매우 염려가 되는데, 근일에 이르러서는 남풍(南風)이 연달아 불어 전선이 연속적으로 와서 정박하게끔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 나라 수군이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낱낱이 소탕해 막지는 못하더라도 현재의 선박을 합쳐 몇 개 부대로 나누되 배설(裵楔)은 경상우도의 배로 일개 부대를 만들고, 이억기(李億祺)는 전라우도의 배로 일개 부대를 만들며, 최호(崔湖)는 충청도의 배로 일개 부대를 만들고, 원균(元均)은 그가 거느린 선박으로 일개 부대를 만듦으로써 한산도를 굳게 지켜 근본을 삼고 부대별로 교대로 해상에 나가 서로 관측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혹은 서로 가고 오기도 하고 먼 거리까지 혹은 가까운 거리를 다녀 정처(定處)가 없이 하면서 금고(金鼓) 소리로 서로 통하고 깃발이 연락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별도로 옥포(玉浦)와 조라포(助羅浦)에서 바라다 보이는 곳에 의병(疑兵)을 설치해 형세를 벌이면, 적선에서는 반드시 우리 나라 수군이 크게 모였다고 여길 것이고, 또 중국군이 함께 세력을 돕고 있는가 의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육지에 있는 적은 뒤를 돌아보는 걱정이 있게 되고 뒤이어 오는 자는 요격당할까 염려할 것이니, 군기(軍機)에 관계된 바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체탐인(體探人)의 말에 의하면, 왜선이 대마도에 부지기수로 도착했는데 우리 나라 병선이 많은가 의심하여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그 말을 반드시 믿을 것은 못되지만 사세로 헤아려 보면 또한 그럴 듯합니다. 어찌 한결같이 조응도(趙凝道)가 잘못해서 실패한 것에만 징계된 나머지 지나치게 외축되어 깊이 한산도 해상의 거제(巨濟) 등처에 숨어 있으면서 감히 선박 하나도 내보내 엿보지 못하게 함으로써 먼저 약함을 보이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적의 선박으로 하여금 기세를 타고 크게 이르러 거제를 다시 굴혈(窟穴)로 삼게 한다면, 비록 중국군이 뒤에 나오더라도 형편상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다시 하유하여 군법(軍法)을 신명하게 하고 고식적으로 하지 말아서 대사를 이루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첫댓글 원균이 아니면 해내기 힘든 놀라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술까지 주면서 안심시킨 다음에 뒤치기로 때렸는데도 저 지경이 되었으니.
원균 답더군요 이 기록을 보면 사실 조응도라는 사람 자체는 그렇게 떨어지는 인물은 아닌데 원균의 삽질때문에...참
전상용씨는 사학이 전공이신듯?
아니요 아직 인문계열 언어학반으로 임시배정되있습니다 다음 학년(군대갈수 있으므로)에 국사학과나 사학과로 갈려고 합니다
흠... 저는 내년에 군대갈때 재수할까 아니면 복수전공을 할까 고민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