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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개석생가(蔣氏故居)관광안내도 - 무산묘(武山廟)에서 계구박물관(溪口博物館)까지 이어진다
▲ 입구 무령문(武岭门), 무산묘(武山廟), 문창각(文昌閣), 소양방(小洋房) 지역 확대안내도
▲ 무령학교(武岭学校), 소양방(小洋房) 가는 안내 표시판
장개석생가거리(蔣氏故居)를 관람하러 버스에서 내린 곳은 도로가 넓고 붐비는 지역
이었는데, 버스종점을 지나 걸어가니 오른쪽에는 중국여행사가 있고, 왼쪽(건너편)에
는 농업은행(农业银行) 간판이 보인다. 과거에 왔을 때는 그냥 문이 닫혀있고, 조용하
던 곳인 무산묘(武山廟 / 註 : 庙=廟<사당-묘>)의 문이 열려있고, 그 앞에는 중화민국
장개석(蔣介石)시대의 여러 복장을 한 모델들이 서있다. 그리고 대장금 연속극의 주
제가가 우리말로 흘러 나오더니, 지난 4월 14일 신문에 따르면, 홍콩증시의 급등으로
이틀 사이에 4000억원이 넘는 돈을 증권시장에서 벌어서 돈방석에 앉은 것으로 보도
된 중국의 미녀배우 겸 탤런트이면서 가수인 조미(赵薇/ Zhàowēi : 자오웨이)의 노래
가 나온다. 우리나라사람들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안개비연가(情深深雨濛濛)》의
드라마 주제가이다.
▲ 무산묘(武山廟)정문 앞에서 중화민국시대의 분장 모델
▲ 무산묘(武山廟)정문 앞에서 중화민국시대의 분장 모델
▲ 무산묘(武山廟)정문 앞에서 분장 모델을 보고 있는 관광객들
▲ 무산묘(武山廟) 앞에서 모델과 함께 늙은 두류봉도 사진을 촬영했다.
▲ 무산묘(武山廟)로 들어가는 계단 중앙이 보이도록 사진을 한번 찍어보란다.
무산묘(武山廟)는 원래 계구진(溪口镇)의 장(蔣)、장(張)、단(單)、송(宋)、임(任) - 이
렇게 다섯 성씨(五大姓氏族)가 같이 누리는 공동의 사당이었지만, 결혼이나 장례 등 경
조사를 진행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무산묘(武山廟)는 무산(武山)의 남쪽기슭에 위치
하고 있어 "무산묘(武山廟)"라는 이름을 얻었다. 사당의 건물은 그 구조가 완벽하여, 앞
뒤 양쪽으로 분리되어 있으면서, 동서양쪽에는 복도가 있다. 중간에는 채광이 들어오는
연극무대가 있고, 뒤에는 용(龍)을 받침대로 한 돌기둥이 있는 포치(Porch)가 증설되어
있는데, 청나라(淸代)중기이전 강남 묘우(廟宇)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이고 있다.
▲ 장개석생가(蔣氏故居)를 다 돌아보고 나오면서 바라본 무산묘(武山廟)
▲ 과거에 장개석생가(蔣氏故居)를 보러와서 문이 닫혀있는 무산묘(武山廟)
▲ 이번에 남녀모델이 무산묘(武山廟) 정문 앞 계단에 서 있다.
▲ 무산묘(武山廟) 앞에서 분장하고 부동자세로 서 있는 모델들
장개석생가(蒋氏故居)거리를 들어가려면, 무령문(武岭门←武嶺門)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문은 무산(武山)의 산등성이마루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 1929년 이
전에는 작은 암자(庵子)의 전각이었는데, 장개석(蒋介石)의 어머니께서 불교를 신실하
게 믿어 항상 이곳에 와서 부처님께 절하고 불경을 읊었다. 장개석(蒋介石)이 1930년에
이 문을 개축하면서 3간 2층의 무관식(武關式) 성문으로 지었다. 문의 편액양면에는 국
민당 원로인 저명한 서예가 우우임(于右任/ Yú Yòurèn : 위여우런/ 1878~1964)의 글
씨로 “武嶺” 이라는 제자(題字)를 앞면에 새기고, 뒷면글씨는 장개석(蒋介石)이 직접 쓴
글이라고 한다. 무령문(武嶺門) 안에서는 서로 나란히 길게 뻗어있는 3리의 길거리와 구
불구불 이어져있는 섬계(剡溪/ Yǎnxī : 옌시)를 바라보는 것이 마치 별천지인 무릉도원을
보는 것 같다. 이것을 바라보는 마음은 도연명(陶渊明)이 지은《도화원기(桃花源記)》에
묘사된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하게 한다.
▲ 무령문(武嶺門)을 바깥쪽에서 쳐다보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于右任揮毫
▲ 무령문(武嶺門)을 바깥쪽에서 쳐다보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于右任揮毫
▲ 무령문(武嶺門)을 안쪽에서 바깥으로 내다보고 촬영한 사진
무령로(武岭路) 3리의 길거리는 바로 장씨부자(蔣氏父子)가 어린 시절부터 생활하던
장개석(蔣介石)의 고향이다. 이 무령(武岭←武嶺)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2가지의 상
세한 해석이 있다. 일설에는 계구(溪口)무령(武嶺/ 중음 : 우링 Wǔlǐng)주변의 산천경
개가 도연명(陶淵明)의 문장력으로 잘 알려진 무릉도원의 별천지와 겨룰만하게 비슷
하며, 그 두 곳의 독음(讀音)이 거의 비슷하여서 마을사람들이 무릉(武陵/ 중음 : 우링
Wǔlíng)에 산다고 뽐내며 자랑한 것이 별천지 무릉도원의 뜻으로 해석되었다. 또다른
주장은, 이 이름은 “무덕(武德)” 이란 뜻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장개석(蔣介石)이《무
령락정기(武嶺樂亭記)》의 중간에 “그 독특한 무령(武嶺)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대개 무덕(武德)의 의(義)를 갖고 있다. 즉 그 땅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비유하여 말
하게 된다.”라고 해석한 것이 있다.
▲ 바깥에서 무령문(武嶺門)을 통하여 장개석생가거리로 들어간다
▲ 무령문(武嶺門)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는 관광객들
▲ 무령문(武嶺門)을 안쪽에서 바깥으로 나오면서 촬영
▲ 관광객은 반드시 이 무령문(武嶺門)을 통하여야만 장씨고거(蔣氏故居)를 출입할 수 있다
장개석생가(蒋氏故居)는 장개석(蔣介石)이 태어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그 점
유면적은 4,800㎡이고, 건축면적은 1,850㎡인데, 1996년11월에 근현대의 중요사적
(史迹)으로 대표성건축물로 지정하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중국정부에서 비준 공
포하였다. 그 건축구도는 전통적인 본건물 뒤쪽에 바깥 대청이 있고, 4개의 몸채에 따
른 양쪽 행랑이 있는 구조이다. 누각의 추녀는 서로 맞닿아 있고, 복도회랑은 빙빙 둘
러쳐져 있다. 시커먼 기둥과 갈색벽면으로 장엄하고 화려하게 만들어 두었다. 전청(前
厅)의 좌우와 앞에는 3개의 화원이 꾸며져 있다. 대청 큰방의 복도회랑에는 수많은 조
각작품과 채색화가 가득 널려 있다. 본채에는 장개석(蒋介石)이 직접 쓴 글씨인 “報本
尊親是謂道德要道”、“光前裕後所望孝子順孫”라고 쓴 친필 대구(對句)와 “寓理帥氣”
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 장씨고거(蔣氏故居) 거리입구에서 중화민국시대에 어울리는 휘호를 써준다.
▶江南雅韻民國風情(강남아운민국풍정) : 강남의 우아한 운치 속 민국풍정◀
▲ 장씨고거(蔣氏故居)거리에서 중화민국시대 부인의 행차를 재연하고 있다
장개석생가거리(蔣氏故居)를 구경하러 와서 무령문(武嶺門)으로 들어서서,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왼편 산비탈 수림 우거진 곳으로 계단을 올라가 문창각(文昌閣)으로 가게
된다. 문창각(文昌閣)은 장씨고거(蔣氏故居)에서 바깥을 내다보아 가장 아름다운 경치
를 지닌 곳으로, 처음 건립한 것은 청대(淸代) 옹정(擁正) 9년(1731)이었다. 본래 누각
안에서 우두머리 큰 별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별이름-규>자를
써서 “규각(奎閣)”이라고 하여 “규각능소(奎閣凌霄)” 라고 불렀고, 청대(淸代)에는 계
구(溪口)의 십경(十景) 중 하나였다.
▲ 문창각(文昌閣)을 다시 짓고 그 이름을 낙정(樂亭)이라하여, 봄날새벽에 그곳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뜻하는 "낙정춘효(樂亭春曉)" 라는 글귀를 쓴 돌비석을 입구에 세워두었다.
▲ 두류봉도 문창각(文昌閣)을 향하는 낙정춘효(樂亭春曉)라는 돌비석 옆에서 인증샷
▲ 장개석(蔣介石)이 낙정기를 문창각(文昌閣)에서 썼기때문에 낙정기(樂亭記) 비석을 세웠다
▲ 문창각(文昌閣)으로 들어가는 수림이 우거져 그늘을 만들어주는 멋진 길
▲ 문창각(文昌閣)으로 들어가는 이 길은 모든 관광객들이 너무 좋아하는 길이다.
1924년 청명에 장개석(蔣介石)은 고향으로 돌아와 성묘하고, 문창각(文昌閣)을 돌아
보니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그는 돈을 들여 그의 형인 장개경(蔣介卿)에게 부탁하여
노동자를 불러모아 그것을 철거하고, 다시 짓기 시작하였다. 이듬해 완공후에는 비첨
(飛檐 : 처마 서까래 끝에 부연을 달아 기와집의 네 귀가 높이 들린 처마)형식으로 각
이 치켜드는 2층 누각식(楼閣式) 건축양식이었는데, 그 면적은 500㎡이다. 장개석(蔣
介石)은 그것을 “락정(樂亭)” 이라고 이름을 짓고, 아울러 그 아름다운 경치를 묘사하
여《무령락정기(武嶺樂亭記)》를 썼다. 1927년 12월 장개석(蔣介石)과 송미령(宋美
齡)은 결혼하여 계구(溪口)에서는 보통 여기서 머물러, 그들의 개인소유의 별장이 되
었다. 문창각(文昌閣)은 1층은 응접실이고, 2층은 장개석(蔣介石)과 송미령(宋美齡)
의 침실과 거실이다.
▲ 장씨고거(蒋氏故居)안내표시판에 문창각(文昌阁)과 풍호방(丰镐房)이 보인다
▲ 장개석(蔣介石)이 살던 문창각(文昌閣) - 산좋고 물맑으며 경치가 마음에 든다.
▲ 문창각(文昌閣)의 뒤쪽에 있는 낙정(樂亭) - 소박하고 우아하면서도 조금 예스럽다.
▲ 문창각(文昌閣)은 1994년에 국무원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로 지정하였다
▲ 문창각(文昌閣)은 무령성(武岭城)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경치좋기로 최고이다.
서안사변(西安事變) 이후에 장학량(张学良/ 1898~2001)은 장개석(蔣介石)을 따라
남경(南京)으로 갔지만, 1937년1월13일 장학량(张学良)은 체포되어, 계구(溪口)로
보내져서 연금된다. 맨 처음 그의 첫 근거지 역시 문창각(文昌閣)으로 10일간 머무
르다가 설두산(雪窦山)의 연금지(张学良将军幽禁处)로 이송된다. 1949년 장개석정
부가 대만(臺灣)으로 옮아갈 때, 장학량(张学良) 역시 대만으로 옮겨져 계속 연금상
태에 놓이게 되었다. 대만의 국민당정부는 장개석이 죽은 후 그를 연금상태에서 풀
어줬다. 1993년 국민당정부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허락받자, 1995년에 가족이 있는
하와이로 가서 정착하였고, 2001년 104살에 죽었다.
▲ 문창각(文昌閣)의 1층 응접실
▲ 문창각(文昌閣)의 2층 거실
▲ 문창각(文昌閣)의 2층 침실
▲ 문창각(文昌閣)의 2층 침실
▲ 문창각(文昌閣)의 2층 장개석과 송미령 침실
1939년 12월 12일에 일본침략군의 전투기가 계구(溪口)를 폭격하여 문창각(文昌閣)
도 부서지고, 많은 건물들의 잔재 속에 지역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 이후에 문창
각(文昌閣)은 전체가 폐허가 되어 있었고, 장개석(蔣介石)은 그때 계구(溪口)를 떠났
다가 마침내 대륙(大陸)을 떠나 대만(臺灣)으로 옮겨갔다. 중국대륙에 사회주의정권
이 들어서고 나서 장개석(蔣介石) 고향의 문창각(文昌閣)에는 미술품이 많은 점을 반
영하여, 중국박물관협회회원이나 국가최고급 미술계전문가 혹은 중요미술품 보유자
나 유명화가들이 가장 귀중한 곳으로《장개석고향-문창각(蔣氏故里-文昌阁)》을 꼽게
되었다.
▲ 장개석의 고향 풍광은 무한히 아름답다. 특히 문창각(文昌閣)에서 보는 경치는 그지없다.
▲ 문창각(文昌閣)에서 누리는 아름다움은 세상어디에도 비길 바 없다.
▲ 문창각(文昌閣)이 있는 무산(武山)도 완전한 하나의 동산이다
▲ 문창각(文昌閣)을 다보고 나올 때는 이리로 내려온다
▲ 문창각(文昌閣) 어디에서도 아름다운 전원풍경을 볼 수 있다.
문창각(文昌阁)은 무령성(武岭城)내에서는 가장 높고 빼어난 곳으로, 이렇게 경치좋
은 곳은 아마도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이곳에서 중화민국 건국 후 통일되고 강력한
국가수립을 꿈꾸던 장씨부자(蔣氏父子)는, 이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갈가리 찢겨져서
일본군과 공산당의 위협 속에 놓인 정부를 이끄는 고심에서 울적하면서도 의기소침
했을 것이다. 고향을 떠날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강력해진 공산당
에게 무릎을 꿇고 대만(臺灣)으로 철수한 그들 부자가 영영 고향땅에 돌아오지도 못
하게 될 줄이야?
▲ 거의 수직으로 만든 계단을 내려와 그 험준한 지세를 바라볼 수 있다.
▲ 문창각(文昌阁)과 소양방(小洋房)은 섬계(剡溪)의 낭떠러지에 겨우 통로로 붙어있다.
▲ 이곳은 앞쪽에는 섬계(剡溪)를 바라보는 낭떠러지이고, 뒤쪽은 무산(武山)에 기대어 있다.
▲ 문창각(文昌阁)과 소양방(小洋房)을 섬계(剡溪) 강물을 건너 포커스로 잡은 사진
▲ 섬계(剡溪) 강물에 배를 타고 나가 문창각(文昌阁) 쪽을 향하여 찰칵
문창각(文昌阁)의 바로 서측에 소양방(小洋房)이 있는데, 섬계(剡溪)강가에 단단히
기대어 지어진 3간 2층의 작고 정교한 구조의 서양식 건물이다. 1930년에 건축하였
는데, 원래의 정식이름은 “함재(涵斋←涵齋)”였지만, 보통은 ‘서양식 작은 집’이라는
뜻으로 “소양방(小洋房)”이라고 부른다. 건물의 크기는 약 300㎡ 쯤 되는데, 배산임
수(背山臨水)의 위치이면서 지붕에는 발코니를 달고, 사방에 시멘트 난간이 있어 바
람을 쐬며 달구경을 하면서 섬계(剡溪)의 강물을 바라볼 수 있다. 처음 장개석이 이
집을 지을 때, 자기가 사는 문창각(文昌閣)에서 부르면, 바로 달려올 수 있는 측근이
살게하려고 서쪽 문밖에는 문창각(文昌閣)으로 곧바로 도달하는 통로길이 있다.
▲ 문창각(文昌阁)에서 소양방(小洋房)으로 바로 갈 수 있는 통로길이 있다
▲ 선명한 소양방(小洋房) 팻말
▲ 소양방(小洋房)은 외형에서 보면 작고 견고해 보인다.
▲ 장씨고거(蒋氏故居) [소양방(小洋房)]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1996.11.20. 중국국무원 공포
▲ 소양방(小洋房)건물을 들어가는 골목형 복도모습
▲ 소양방(小洋房)건물에 오르려면 급경사의 계단으로 올라야 한다
▲ 소양방(小洋房)건물 앞 입구길
1937년 4월 27일 장경국(蔣經國)이 소련유학을 마치고 벨라루시부인(白俄羅斯=蔣
方良)과 아들(蔣孝文)을 데리고 귀국하게 되자, 장개석(蔣介石)은 아들 가족을 이곳
에 머무르게 하여 중국어(漢語)와 한문(漢文)을 익히고 공부하면서 독서와 연구생활
을 하도록 하였다. 장경국 (蔣經國)의 어머니 모복매(毛福梅)가 며느리의 중국 이름
을 묻자 장경국(蔣經國)은 부친이 중국 이름을 “방랑(方娘)”으로 지어주었다고 말했
다. 모복매(毛福梅)는 “랑(娘)”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하였다. 높은 수준의 사람들마저
그녀를 모두 “랑(娘)”이라 부르면 복이 달아날 것이니 “방량(方良)”으로 고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 "량(良)"은 '어질고 현명하다'는 뜻이니 좋다고 하여 그 후에는 장
방량(蔣方良)이란 이름을 계속 쓰게 되었다.
▲ 장경국(蒋经国)이 소련유학후 봉화(奉化)로 돌아와 이곳 소양방(小洋房)에 머물렀다.
귀국하면서 부인 장방량(蒋方良)과 아들 장효문(蒋孝文)이 함께와서 여기서 기거했다.
▲ 소양방(小洋房)건물에서 섬계(剡溪)쪽으로도 가파른 계단이다.
▲ 소양방(小洋房)건물 내부
▲ 소양방(小洋房)건물 내부에 걸려있는 장경국+장방랑 부부의 자녀들
▲ 소양방(小洋房)건물 내부의 전시 사진
▲ 소양방(小洋房)건물 내부 모습
소양방(小洋房) 1층에는 “이혈세혈(以血洗血)”이라고 새겨진 작은 석비(石碑)가 하나
세워져 있는데, 장경국(蒋经国)이 모친인 모복매(毛福梅)가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돌
아가신 것을 적어두어, 역사와 국민들에게 알려서 꼭 원수를 갚는다는 의지를 보인 것
이다. 1939년 일본침략자들이 계구(溪口)를 폭격하여, 모복매(毛福梅)는 풍호방(豊鎬
房) 뒤쪽입구에서 담장이 무너져 압사하였다. 장경국(蒋经国)은 어머니의 불행스런 죽
음소식을 듣고 강서성(江西省)에서 황급히 달려와 분상(奔喪)하여, 비분(悲憤)의 눈물
을 훔치면서 “以血洗血”이라는 4글자를 써서, 어머니를 죽인 원수를 기어이 갚고야 말
겠다는 확고부동한 결심의 맹세를 표시한 것이다.
▲ 소양방(小洋房)건물 1층에 모셔둔 "以血洗血" 의 돌비석(石碑)
피로써 피를 씻으면 더욱 더러워진다는 뜻으로, 나쁜 일을 다스리려니, 더욱 나쁜 짓을 할 수밖에 없다.
▲ 소양방(小洋房)건물 1층에 적혀있는 "以血洗血" 의 돌비석(石碑)의 해설
▲ 소양방(小洋房)건물에 걸려있는 젊은 시절의 장경국(蒋经国)
▲ 소양방(小洋房)건물에 걸려있는 노년시절의 장경국(蒋经国)
▲ 소양방(小洋房)건물의 실내에서 나오는 복도
▲ 소양방(小洋房)건물에서 문 밖으로 나가는 길
장개석생가(蒋氏故居)마을은 4계절의 구분이 분명하며, 날씨는 따뜻하지만 조금 습윤하
다. 연평균기온은 16.3℃이며, 강우량은 1350~1600mm로 일조시간이 1850시간으로, 무
상일수가 232일이나 되니까 혹독한 겨울은 없는 기후이다. 그래서 4계절 언제라도 여행
하기 좋은 아주 우월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다. 장씨고거(蒋氏故居)의 아름다움에 조화
를 이루는 두 개의 요소는, 아무래도 자연환경은 굽이진 여울을 보여주는 섬계(剡溪 / 옌
시 : Yǎnxī)의 흐름이고, 인문환경은 번화한 계구진(溪口镇)의 “삼리장가(三里长街)”라고
말할 수 있다.
▲ 소양방(小洋房) 건물의 2층 실내
▲ 소양방(小洋房) 건물의 2층 실내
▲ 소양방(小洋房) 건물을 모두 관람한 후에는 이런 길로 내려간다
▲ 소양방(小洋房) 건물을 모두 관람한 후 내려오는 길이 멋있어 한번 더 촬영
문창각(文昌阁)과 소양방(小洋房)의 기막힌 위치를 확고히 하면서, 그 풍광의 미려
(美麗)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섬계(剡溪/ Yǎnxī : 옌시)의 멋있는 흐름과 주
변의 경치때문이기도 하다. 섬계(剡溪)는 봉화시(奉化市) 서부의 천태산(天台山)과
사명산(四明山)이 맞물리는 지대에서 발원한 강물이 봉화(奉化)북부의 녕소평원(宁
绍平原)인 강남수향(江南水乡)에 이르기까지 섬원(剡源) - 섬계(剡溪) - 섬강(剡江)
- 봉화강(奉化江) 등 여러 이름으로 일컬어지면서 흐른다. 섬계(剡溪)는 최종적으로
여요강(余姚江)과 합해지고, 상우(上虞/ Shàngyú)<행정상绍兴市上虞区>에 이르러
서 조아강(曹娥江/ Cáo'éjiāng : 차오으어쟝)에 합해져서 동중국해의 항주만(杭州湾)
으로 흘러들어간다.
▲ 섬계(剡溪)의 발원지 깊은 골짜기에서의 흐름
▲ 문창각(文昌閣)에서 섬계(剡溪) 강물을 흐르는 방향으로 보고 촬영
▲ 문창각(文昌閣)에서 섬계(剡溪) 강물 건너편 마을을 향하여 촬영한 사진
▲ 삼리장가(三里长街)길에서 섬계(剡溪)강물 한가운데서 빨래하는 여인들을 향하여 촬영한 사진
▲ 섬계(剡溪)흐름의 하일라이트는 아무래도 문창각과 소양방 아래에 이르러서다.
섬계(剡溪)의 냇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의 정취도 아름답고, 중하류의 수심 깊은 곳
에서 뱃놀이하는 젊은이들의 발랄함도 볼만한 구경꺼리이다. 굽이굽이 이어진 계곡
물은 역사상 일찍이 “섬계구곡(剡溪九曲)”의 아름다운 경치를 담아가면서 옛날의 자
취가 번갈아 가면서 연속하여 나타난다. 역대 수많은 시인이나 학자들이 살아가면서
노닐던 섬계(剡溪)를 노래하고, 섬계(剡溪)를 대상으로 무수한 글을 써서 남기기도 하
였다. 물론 글을 쓰지 않은 민중과 즐거움을 잘 모르고 느끼지 못하면서 살다간 사람
도 많고, 역사기록에 빠진 일들이 더 많을 것이다.
▲ 삼리장가(三里长街)길에서 섬계(剡溪)강가에서 빨래하는 아낙들을 향하여 촬영한 사진
▲ 섬계(剡溪) 강바닥으로 내려가서 빨래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촬영한 사진
▲ 섬계(剡溪)를 좌우로 한 아름다움과 고즈넉한 강물의 흐름 모습
▲ 섬계(剡溪)는 상류의 아름다움도 높이 평가하지만, 중하류의 소흥(绍兴)지역도 아름답다
▲ 섬계구곡(剡溪九曲)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중하류지역의 경치
섬계(剡溪)는 천년이상 푸른 꿈을 펼치며 자라난 걸출한 인물들이 태어나고 활동하던
역사의 현장이다. 서성(書聖)의 일필휘지로 난정기(蘭亭記)를 쓴 동진(東晉)시대 왕희
지(王羲之 : 307~365)의 먹물이 서려있는 곳도 섬계(剡溪)이며、회향우서(回鄕偶書)
를 읊으면서 낚시 드리우던 당대(唐代)의 시인 하지장(贺知章 : 659~744)의 낚시터、
국난의 어려움에 가정사의 고통까지 함께한 송(宋)나라 시대의 여류작가인 이청조(李
清照 : 1084~1155)의 눈물、권력이 탐이 나서 권력을 가진 정치인과 결혼하여 일시
적으로 중국대륙을 호령하던 송미령(宋美龄 : 1897~2003)의 작은 다리(小桥)、2013년
전중국체육대회 5관왕수영선수가 되어 일시에 손양(孫杨)선수를 앞지르는 기록을 세운
왕순(汪顺 : 1994.2.11~)의 어린 꿈이 서리던 곳……등 많은 인물들이 섬계(剡溪)의 흐
르는 물과 함께 하였다.
▲ 해질 무렵의 섬계(剡溪) 강물을 바라보노라면 누구에게도 시심이 떠오르는 분위기다.
▲ 섬계(剡溪)는 하류쪽에는 큰 강이 되어 물깊이도 깊고 수량도 많다
▲ 섬계(剡溪)에서 아무래도 가장 사랑받는 곳은 文昌閣과 小洋房 아래 이다
▲ 섬계(剡溪) 물을 마시면서 자란 최근의 중국수영선수 汪順이다
▲ 중국의 세계기록보유자인 손양(孫揚)을 제끼고 금메달을 목에 건 왕순(汪順)
▲ 섬계(剡溪)의 물놀이는 문창각과 소양방 아래로 내려가면 보트가 있다.
▲ 섬계(剡溪)에서 물놀이를 해보려고 문창각과 소양방 아래로 내려가는 관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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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 深 深, 雨 濛 濛
(안개비연가주제가)
作詞:瓊瑤 / 作曲:徐嘉良 / 演唱: 趙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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情 深 深. 雨 濛 濛 多 少 樓 台 煙 雨 中
qíngshēnshen, yǔmēngmeng duō shao lóu tái yān yǔ zhōng
칭 선 선, 위 멍 멍 뚸 사오 러우 타이 옌 위 종
記 得 當 初, 你 儂 我 儂 車 如 流 水 馬 如 龍
jì de dāng chū, nǐ nóng wǒ nóng chē rú liú shuǐ mǎ rú lóng
지 더 당 추 니 농 워 농 처 루 리우 수이 마 루 롱
儘 管 狂 風 平 地 起 美 人 如 玉 劒 如 虹
jìn guǎn kuáng fēng píng dì qǐ měi rén rú yù jiàn rú hóng
진 꾸안 쾅 펑 핑 디 치 메이 런 루 위 지엔 루 홍
情 深 深, 雨 濛 濛 世 界 只 在 你 眼 中
qíngshēnshen, yǔmēngmeng shì jiè zhǐ zài nǐ yǎn zhōng
칭 선 선, 위 멍 멍 스 지에 즈 짜이 니 옌 종
相 逢 不 晩, 爲 何 匆 匆 山 山 水 水 幾 萬 重
xiāngféng bu wǎn, wéi hé cōngcōng shānshan shuǐ shui jǐ wàn zhòng
샹 펑 부 완 웨이 흐어 총 총 산 산 수이 수이 지 완 종
一 曲 高 歌 千 行 淚 情 在 廻 腸 盪 氣 中
yi qū gāo gē qiān háng lèi qíng zài huíchángdàng qì zhōng
이 취 가오 거 치엔 항 레이 칭 짜이 훼이 창 당 치 종
情 深 深, 雨 蒙 蒙 天 也 無 盡 地 無 窮
qíngshēnshen, yǔmengmeng tiān yě wú jìn di wúqióng
칭 선 선, 위 멍 멍 티엔 예 우 진 디 우 치웅
高 樓 望 斷, 情 有 獨 鍾 盼 過 春 夏 和 秋 冬
gāo lóu wàng duàn qíng yǒu dú zhōng pàn guò chūn xià he qiū dōng
까오로우 왕 두안 칭 여우 두 종 판 궈 춘 샤 흐어 치우 동
盼 來 盼 去 盼 不 盡 天 涯 何 處 是 歸 鴻
pàn lái pàn qù pàn bu jìn tiān yá hé chù shì guī hóng
판 라이 판 취 판 부 진 티엔 야 허 추 스 꿰이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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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비연가> 우리말 번역 (두류봉번역)
▲ <안개비연가>주인공 - 왼쪽부터 蘇有朋、林心如、趙薇(노란티)、맨오른쪽古巨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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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비연가>에서 주제가도 부른 최고의 히로인 趙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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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장개석생가 를 아무 정보없이 슬렁슬렁 봐서 암것도 남는것도 없는데
이렇게 자세한설명을 보니 훨씬 새롭게 다가옵니다.
장개석이,나중, 중국공산당과 적이되어 소중한 보물들을 몽땅 가지고
도망? 가서 대만의 국부가 되었음에도
. 중국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장개석생가를
문화재로 보존하는 점은 대단합니다.
자상하신 선생님 덕분에 안개비연가.
처음으로 들어봤습니다. 감사합니다~(퐈여스톤)
Jess님의 댓글에 답글을 쓰는 이 시점에 이 글의 클릭수는 200회가 거의 다 되었는데도
님께서 쓰신 댓글이 유일한 댓글입니다. 아마도 두류봉의 글이 너무 읽을 가치가 없고,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내용인가 봅니다. 그래도 전공과목 이외도 몇번이나 책을 내고
어떤 출판물에서는 독자가 많은 인기있는 사람인데, 우리 카페에는 맞지 않은 한물간
구세대 사람인가 봅니다. 이렇게 오셔서 졸필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마지막 부분 옌시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여지껏 봉화쪽 행사를 하면서 옌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분들이 없었는데..
말씀처럼 옌시가 있기에 아름답고 서정적인 시코우 마을이 존재할 수 있었겠지요.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두류봉이 보기로는 장씨고거(蔣氏故居) 중 최고로 아름다운 곳은 문창각과 소양방이고, 이
문창각과 소양방의 아름다움에 빛을 더해주는 것은 섬계(剡溪)의 흐름이고, 인문환경으론
“삼리장가(三里长街)"라고 부르는 무령로(武岭路)에서 펼쳐지는 거리풍광입니다. 읽어주
시고, 댓글까지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선생님의 자상한 설명으로 여행도 하기전에 여행이 끝난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글을 계속 쓰다가 그만 병이 나서 완성하지 못하여 천천히 다음 편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