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 김민정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톡톡 이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깎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이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거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 <시에> 2009년 봄호 /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문학과지성사, 2009)
* 김민정 시인
1976년 인천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수료.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
시집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산문집 『각설하고,』.
문학동네 임프린트(계열사) ‘난다’ 편집자 및 대표로 재직 중.
김민정은 시의 경계를 무시하기로 유명한 시인이다. 그녀의 시를 이루는 것은 대부분 비속어였으며, 피와 살이 튀는 이미지였고, 모든 이데올로기를 거부하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녀의 시는 독자에게 어떤 교훈이나 감동도 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종의 불쾌를 겪도록 해서 마음에 위해를 가하려는 듯 보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그녀의 시를 “거칠고, 극단적이고, 즉흥적이고, 난폭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 말의 장광설이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다니, 그게 웬 말이냐는 듯 시치미를 떼며, 그녀가 달라졌다. 그녀의 시를 이루는 것은 여전히 일상의 어휘들이지만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에서 그것은 날것 그대로가 아니다. 거친 말은 말랑말랑해졌고, 이전 시의 문법이 시 속에 들어와 있기도 하다. 이 변화의 이유는 오로지,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네루다는 ‘詩’라는 시에서 시적 영감이 어떻게 오는지를, 한 편의 시를 창조하는 과정을, 시작 이후 다른 세계를 만난 감격을 직설적으로 말한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에서 그녀는 네루다를 연상시킨다. 그녀는 추운 겨울밤, 천안역에서 서울로 가는 막차를 기다리던 중에, 한 노숙자를 만났던 일을 회상한다. 무미건조한 이 기록은, 그러나 ‘처음’, ‘느끼기(feeling)’, ‘시작(始作/詩作)’에 대한 ‘그녀’의 고백이다.
그녀에게 시는 노숙자의 천진한 입맛, 인력파출소의 건조한 안내문, 주머니 속 커피 캔에서 ‘처음’처럼 온다. 춥고 어둡고 외로운, 지루하고도 초조한 ‘기다림’을 겪는 그녀에게 ‘느낌’은 불현듯 감각되는 노상의 메시지처럼, 혹은 부지불식간에 닿은 온기처럼 낯설고도 순수한 것으로서 곧 시가 된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를 무심히 떠올린 일과 여성부를 이성부라고 착각한 일의 인과관계를 따질 수는 없다. 그렇게 절묘한 한 순간에 생겨나는 것이 시라고, 그녀는 일상의 타지에서 비로소 ‘시작(詩作)을 시작(始作)’하는 것이다.
김나영 시인ㆍ문학평론가
시인은 섹시한데, 섹시하지 않으려 기를 쓰는, 그러니까 정신이 멀쩡하다 못해 말짱한 여자. 제목은 물론 마지막 행에서도 멀쩡한 ‘성적(性的)’으로 뒤통수를 치며 구닥다리 세대와 앙큼한 신세대를 가르는, 이런 식으로도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그것, 참.
김정환 시인
연착된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 젊은 여성 시인. 팬티만 입고 발톱을 깎으면서 돈을 달라고 하는 노숙자. 팬티에선 더럽게 까만 털이 보인다. 그게 슬그머니 공포를 만들어낸다. 열차가 연착된다는 전광판 문구. 점증하는 불안. '파출소'라는 글자. 여성부 대표전화. 혹시나 해서 펜을 찾는데...아까 노숙자에게 주려고 했던 커피 캔이 호주머니 속에서 만져진다. 그 따뜻함에서 시 구절을 생각해내고 이성부 시인을 생각해낸다. 아까 불안 속에서 봤던 '여성부'라는 글씨가 '이성부'와 닮아있음도 눈치 챈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한 건 무엇일까. 시에 대한 심문일까. 아니면 마음 속의 살풍경을 녹이는, 어떤 구원같은 반전일까. 짧지만 강렬한 심리 드라마같은 전개. 낯선 시의 풍경.
이상국 시인
잘못 든 길이 새로운 길을 인도하기도, 잘못 읽은 글자가 새로운 의미를 개진하기도 한다. 무언가를 새롭게, 그것의 내면을 듣는 순간이다. 그때 우리는 처음의 발굴자가 된다. 막차는 연착되고 플랫폼 위에서 노숙자는 발톱을 깎고 있다. 군용 점퍼 아래 달랑 걸친 팬티가 무방비로 헐렁하다. 그런 그가 딱 ‘삼백 원’만을 구걸하며 자신의 커피 취향을 고수한다. “더러운 팬티를 수치스러워하기보다/ 낡은 팬티를 구차해하기보다/ 고무줄의 약해진 탄성을 걱정하는 데서부터/ 시라는 것을// 나는 처음, 느끼기 시작했던 걸까?”(시집 뒤표지 글) 엽기발랄시치미가 주특기인 시인은 노숙자의 추위를, 그에 대한 연민과 연대를 이렇게 엉뚱생뚱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도 이 시를 마음이 가닿는 대로, 읽고 싶은 대로 읽어도 좋겠다. 그러니까 나는 ‘굽슬’을 ‘굽실’로, ‘안내시스템’을 ‘아내시스템’으로 읽었다. ‘이 죽이는’을 ‘이죽이는’으로, ‘점퍼’를 ‘범퍼’로, ‘연착’을 ‘연락’으로 읽을 뻔했다. 나도 처음, 느끼기 시작한 것일까? 시인이, 삼백 원을 더해 네스카페를 뽑아다 준 것처럼,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는 이성부의 시 구절을 떠올린 것처럼, 하여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는 것처럼, ‘처음, 느끼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 우린 시인이 된다.
정끝별 시인ㆍ문학평론가
김민정 시인은 싸가지가 없다. 싸가지가 없어서 밥맛이 아니고, 싸가지가 없어서 맛이다. 시도 시인도 그렇다. 시집도 안 간 처자가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이라니, 떽! 민쟁아, 그런데 넌 이럴 때 시가 땡기는 모양이다이. 그러게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었겠지. 기사회생이로구나, 한데 말이야, 너 그거 알지. 프로한테는 매 순간이 처음이거든. 너 프로지?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오기는 지랄! 아닌 척 낮밤으로 기다렸겠지. 안 기다리는 년이 호주머니에 펜을 넣고 다니냐, 이 화끈한 내숭아! 아마 그때는 남자는 못 가고 여자만 가는 ‘시집’도 ‘시집(詩集)’으로 들렸겠지. 이제 발칙한 척 그만하지? 선수끼리 왜 이러셔, 하여간, 김민정 시인은 천안역에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이성부, '봄')”이다.
* 싸가지- 싹수의 방언인데, 싹수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잘 되어갈 낌새나 느낌을 뜻함.
장철문 시인ㆍ순천대 교수
일전에 한 인터뷰를 보니까 김민정 시인은 연인에게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고 '죽지마' 이렇게 말한대요. 사랑하는 사람이여, 이 하늘 아래 함께 있어만 준다면 그대가 어떤 꼴로 있어도 좋으리… 이런 도저한 고백처럼 들렸어요.
팬티 바람의 노숙자와 둘이 있는 밤늦은 역사에서 봉변당할까 두렵기도 하련만 시인은 태평하게 캔 커피를 뽑아 듭니다. 물론 휙 지나가는 파출부 직업소개소 전화번호가 파출소 번호로 보인 걸 보면 잠깐 무섬증을 느낀 것도 같아요. 그렇지만 이어지는 '여성부'를 봄을 노래한 다른 시인의 이름으로 고쳐 읽으며 시인은 따듯한 캔을 만져봅니다. 하늘 아래 그녀와 함께 있는 모든 꼴이, 그저 살아 있어 줘서 다행인 연인이라도 되는 듯이.
진은영 시인
시의 제목에서 젊은 시인들의 시를 감상하는 열쇠를 찾았다. 그녀가 처음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알려고 하지 말고 그들의 마음이 돼 편안하게 느껴보려 한다면 시가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연착한 막차를 기다리는 썰렁한 대합실에서 주머니 속의 커피 캔이 주는 의외의 따뜻함을 느껴본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이성부 시인의 시를 떠올린다. 그녀에게 이미 찾아온 봄이 우리의 손끝에 함께 느껴진다.
김동찬 시인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 하는 식으로 밀크 커피 다음엔 또 뭘 요구할지 모른다. 기차는 연착되고 톡톡 이를 죽이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핏물을 튀길 것 같은 초조한 상황, 이성의 습관을 뒤집는 건 뜻밖에 노숙자가 돌려준 캔 커피다. 커피광고처럼 결코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오싹한 플랫폼이 따뜻해졌다.
손택수 시인
Canoe Sonata / Eric Har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