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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성경의 칭의 교리의 두 번째 근거: 하박국 2장 4절
2. 신약의 인용: 로마서 1장 17절
(4) 일취월장 청산유수 일사천리
4) 알쏭달쏭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정확한 의미!
● 하나님의 은혜로 깨달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구체적인 의미!
저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에 대한 존 스토트의 견해와 '오직 믿음'으로 오역한 번역본들을 다뤘습니다. 그것은 오류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 번역자들은 이 문구를 오직 믿음으로 번역했을까요?
그것은 이 문구가 믿음을 강조했고, 두 번이나 믿음이 나오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뜻을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에 의해'(NIV) 혹은 '철두철미하게 믿음에 의해'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이 문구의 정확한 뜻을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럼 이 문구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요? 토마스 슈라이너는 우리에게 이런 힌트를 제공했습니다.
"이 문구는 교회 역사상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어 왔다(Cranfield 1975: 99-100). 대부분의 해석들은 한 종류의 믿음에서 다른 종류의 믿음으로 진행하는 개념을 포함한다. 즉, 구약의 믿음에서 신약의 믿음으로, 율법의 믿음에서 복음의 믿음으로, 설교자들의 믿음에서 청중들의 믿음으로, 현재의 믿음에서 미래의 믿음으로, 지금 우리가 듣는 말씀의 믿음에서 말씀이 약속하는 것을 우리가 소유할 믿음으로, 하나님의 신실함에서 인간의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신실함에서 인간의 신실함으로, 보다 작은 믿음에서 보다 큰 믿음으로, 근거로서의 믿음에서 목표로서의 믿음으로다."
"한 종류의 믿음에서 다른 종류의 믿음으로 진행하는 개념!" 슈라이너의 이 지적이 옳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중에 답이 있을까요? 만약 있다면 무엇이 답일까요?
최근에 저는 이 문구의 해석이 뒤집혀 연구에 몰두하던 중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날, 저는 원고를 수정하고 다시 작성하면서 무가 소개한 이에 대한 여러 견해들을 읽고 있었습니다. 2년 전에도 읽었고 제겐 새로운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첫 견해가 마음에 깊이 공명이 되었습니다.
"여러 교부들은 이 이중의 언급이 하나님의 의가 율법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복음에 대한 믿음에 이른다는 뜻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이것이 맞는 것 같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느낌만으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무시하고 잊어버렸습니다. 그 후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했는데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밤늦게까지 연구하다가 새벽녘에 자신의 한계와 절망감을 처절하게 느꼈습니다. 저는 그동안 축적된 연구 노하우와 방법들을 나도 모르게 의지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처음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하나님께 지혜와 분별력을 구하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부디 저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후 피곤해서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 침대에 누워있는데 갑자기 이 문구가 선명하게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후, 하나님께서 또 한 번 더욱 구체적인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깨닫게 된 것을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가) 17절 전반절에는 "복음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바울은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안에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해석의 키입니다.
먼저, 이 안에 "복음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할까요?
로마서 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처럼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아들에 관해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또,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4:25-27, 44-48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성경(구약성경)의 주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서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구약성경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7:1-3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고린도전서 15:1, 3-4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 내가 받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바울뿐 아니라 베드로도 구약성경을 사용해서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3천 명과 5천 명을 회개시킨 설교에 그것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행2:22-36, 3:17-26).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도 그랬고(마1:22, 2:5, 15, 17, 18, 23, 3:3, 4:14, 8:17, 12:17, 13:35, 21:4, 26:31, 54, 56, 27:9), 유명한 설교자 아볼로도 그랬습니다.
사도행전 18:27-28 "아볼로가 ...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 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라."
이처럼 성경의 모든 사도와 설교자들이 구약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니 이렇듯 구약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믿음에서 어떤 믿음에 이르는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당연히 구약성경을 믿는 믿음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르는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뜻합니다.
한편, 바울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했으므로, 이 구절에서 이것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양쪽 다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정적인 증거는 못 됩니다. 그렇더라도 초대교회 교부들이 말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실제로 복음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바울이 이것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보여주는 1장 2절을 쓴 사람이 바울입니다. 또, 그 구절은 "하나님의 의"를 다룬 3장 21절과 서로 통하기 때문입니다.
나) 문자 그대로 17절 전반절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할까요? 이 구절의 "하나님의 의"는 믿는 자가 받는 법정적인 의("의롭다 하심")를 뜻합니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런데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그러니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한 것을 통해 복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 즉 칭의의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구약성경을 믿는 믿음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이르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가 무슨 뜻이겠습니까? 구약성경을 믿는 믿음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라는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복음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과 달리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했고, 3장 21절은 그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런데 그 구절에서 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25절에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화목제물"로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화목제의 제물이 예수님을 예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것들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교부들이 주장한 것처럼 "구약의 믿음에서 신약의 믿음으로" 혹은 "율법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복음에 대한 믿음에" 이르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는 바로 그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런 의문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구약성경을 믿는 유대인들에게는 해당되지만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을까?' 저도 이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답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삼일 전, 갑자기 이에 대해 깨달아졌습니다.
바울은 회심 후, 즉시 회당에서 예수님을 전파했습니다(행9:20). 그 후로도 주로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마다 바울은 구약성경을 사용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7:1-3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런데 회당에 유대인들만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 바로 다음 구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7:4 "그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이외에도, 사도행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4: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사도행전 18: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그러므로 복음이 "구약의 믿음에서 복음에 대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입니다.
또, 로마서의 수신자인 로마교회가 어떤 교회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처럼 유대인들의 교회입니까? 아닙니다. 회당과 마찬가지로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교회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의 날과 음식에 대한 논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그러니 회당뿐 아니라 로마교회에 복음을 설명할 때도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구약의 믿음에서 복음에 대한 믿음에" 이르는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반론에 대한 답을 미완성입니다. 17절이 단지 회당이나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어디서나 복음을 전할 때 일어나는 일을 기술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에 다니는 자들은 유대인은 물론이고 이방인들도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입니다. 둘 다 구약성경을 믿는 자들입니다. 로마교회 성도들의 경우는 믿는 자들이므로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고 우상숭배 하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때 같은 일이 일어나느냐? 는 의문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우리는 "바울이 과연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뿐 아니라 우상숭배 하는 이방인들에게도 구약성경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알고자 했지만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틀 전 침대에 누워있는데, 새벽 두시 반에 갑자기 이에 대한 착상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성경을 연구한 결과 저는 그렇다는 답을 얻었습니다.
사도행전 26:19-23, 27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바울이 불신자인 아그립바 왕에게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라고 말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이처럼 바울은 유대인뿐 아니라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이방인에게도 구약성경의 예언에 근거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에 더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 3-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이처럼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이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했습니다. 즉, 구약성경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에서 회당에서만 복음을 전했습니까? 처음에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와 같이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8:1, 4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그러나 그 후에는 회당이 아닌 이방인의 집에서 이방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 18:5-8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존 스토트는 이 중 7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누가의 다음 진술, 곧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7절)는 진술은 지리적 기록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그의 복음 전도적 노력의 장이 공적 회당에서 개인의 집으로 바뀌었다는 것과, 복음 전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유대인에서 이방인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이방인은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만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바울이 고린도에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복음을 전한 대상은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뿐 아니라 우상숭배 하는 이방인들도 포함합니다. 그런데 그들도 구약성경을 어느 정도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인된 종교인 유대교의 경전이고, 더구나 이스라엘의 생생한 역사고, 선지자들이 행한 유명한 기사와 이적들 때문입니다. 또, 복음보다 구약성경을 믿게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그래서 먼저 구약성경을 믿게 하고 그 뒤 구약성경의 예언과 예표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전형적인 복음전도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전함으로, 구약을 믿는 믿음에서 복음을 믿는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은 회당 밖의 이방인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교부들의 견해가 유대인들과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에게는 해당되지만 우상숭배 하는 이방인들에게도 해당이 되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저의 대답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에 대한 교부들의 견해가 참으로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부들의 견해를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는 교부들이 주장한 것처럼 "구약의 믿음에서 신약의 믿음으로" 혹은 "율법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복음에 대한 믿음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단지 율법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예언과 예표를 믿는 믿음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가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1장 2절에서 복음이 단지 율법이 아니라 구약성경에서 약속한 것이라고 했고, 3장 21절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도 율법과 선지자들 즉 구약성경의 증거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1장 2절에서도 그 아들에 대한 약속이라고 했고, 3장 22절과 26절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마무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정확한 의미는 "구약성경의 예언과 예표를 믿는 믿음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한편, 희한한 것은 거의 모든 학자가 교부들의 견해를 지나치듯이 소개만 하고, 이 문구의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터툴리안, 오리겐, 크리쏘스톰, 어거스틴 등 초대교회 교부들 외에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클라크(Clarke)가 유일한 정도입니다. 희한한 일이지요!
그러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가 학문적인 성경연구방법론을 너무 의지하고 철저히 문맥에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러 난해구들을 연구하면서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문맥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주석들을 모두 읽고, 하염없이 씨름해도 풀리지 않는, 해석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난해구들이 갑자기 문맥이 정확히 보이면서 기적처럼 해석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절대로 알 수 없을 것 같았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 문구도 1장 2절과 3장 21절 등 전후 문맥을 통해 풀렸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석들을 읽고 학문적인 방법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경의 문맥을 통해서만 진리를 옳게 분별할 수 있고 정확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절대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옳게 분별하기 원하면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7:10-12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그런데 성경을 연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문맥입니다. 때문에 원어, 문법, 용례 ... 등을 사용하되 그것들만 의지하고 분별하면 안 됩니다. 성경의 문맥을 끝까지 최고의 시금석으로 삼고 그 시험을 통과하는 것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리를 옳게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슬프게도 거의 모든 학자들이 자신의 지식과 신학적인 방법들을 너무 높이 평가합니다. 베뢰아 사라들처럼 철두철미하게 성경을 기준으로 삼고, 성경의 문맥을 시금석으로 삼아 해석을 걸러내는 일을 철저히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원어, 문법, 용례, 유사구절 ... 등과 같은 것들에 근거하여 문맥을 벗어난 새로운 견해들을 습관적으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새롭고 기발하고, 여러 학문적인 뒷받침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옳고 대단한 것이라는 착각이 일어납니다. 이런 착각은 상대적으로 실력 없는 교수들과 강해설교자들에게 그대로 대물림됩니다. 그래서 교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김세윤 교수님은 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 즉 칭의에 법정적인 의뿐 아니라 관계적인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칭의가 구원파로 흐르는 것을 막기 위한 좋은 의도에서 고안해낸 기발한 아이디어입니다. 그러나 관계를 왜 의롭다 함에서 끌어냅니까? 의롭다 함을 얻으려면 회개하고 믿어야 합니다. 회개는 탕자의 비유가 보여주듯이 절연하고 살다가 아버지께 돌아오는 것이고, 믿음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믿지 않던 자들이 예수님을 단지 구주가 아니라 임금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어지는 것이 칭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순종해야 할 의무는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그 전의 회개와 믿음에서 끌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에서 관계적인 의미를 끌어낼 필요가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성경적인 정확한 견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 던과 이한수, 홍인규 교수님처럼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보는 것과 무나 슈라이너처럼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행위'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정직하게 문맥을 따라가지 않거나 이해 부족 때문에 문맥을 착각한 데서 나온 견해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학자들과 강해 설교자들이 보기에는 대단해보이고, 유행을 일으켜도, 성경의 참뜻에 뭔가를 더한 성경 왜곡이고 칭의의 교리를 일부 훼손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학자들에 의해 이와 같은 그릇된 해석들이 수많은 성구를 대상으로 끝없이 생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해석에 큰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석이나 유명 학자들의 견해를 맹신하지 말고 성경의 문맥을 최종 시금석으로 삼고 분별해서 걸러낼 수 있는 분별력을 키워야 합니다.